나이를 먹었다는 걸 실감한 일요일을 보냈다. 사건(?)의 발단은 질낮은 와인을 많이 마신 것. 별대른 생각 없이 table wine을 한 병 사서 고기와 흡입했는데, 이 와인이 일단 너무 질이 낮았고, 어쩌면 살짝 상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맛이 별로였던 것이다. 덕분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먹고 마신 것들을 모두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그대로 나자빠져 버린채 남은 하루를 보내버렸다.
골골대면서 월요일 하루를 간신히 살아냈고, 하던 가락으로 운동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약 4개월 동안 10kg 정도를 감량했는데, 남은 10kg까지 감량해서 유지하고, 수영과 달리기 그리고 근육운동으로 몸을 다질 수 있다면 대학생 시절보다도 더 좋은 상태의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도 곧, 점심시간을 이용하고 앞뒤로 30분 정도씩을 더 사용해서 근육운동과 달리기를 할 것이다. 내가 확실히 남보다 잘 하는 건 이렇게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는 거다. 번득이는 재치나 순발력은 딸리지만, 하던 걸 계속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조금씩 살을 붙여 개선하는 건 남들보다 잘 한다.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나은 점이 아닌가 싶다.
DJ/평론가/작가/기자, 그러나 DJ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이동진 DJ의 빨간 책방에서 미야모토 테루를 소개를 받고나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다 가져다 읽었다. 한국에 번역된 작품들 중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몇 권 없고, 이 책도 이미 절판되어 있다. LA 마당몰에 있는 알라딘 중고점엔 은근히 좋은 물건이 많고, 상대적으로 나 같은 shark들이 적어서 보물을 건질 찬스가 꽤 있다. 다음 번 출장을 기대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네 명의 남녀가 한 아파트에서 동거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남기에 손색이 없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 당시엔 그냥 그렇게 관성으로, 이상한 고집으로 남을 돕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또다시 우연한 일을 계기로 동거가 하루 아침에 끝난다. 시간이란 것이 참 이상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조금 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작품들 몇 권보다는 더 밝고, 쉬운 이야기.
아쉽게도 정신이 없이 읽어버린 책들 두 권. '체체파리의 비법'은 하나도 재미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몰입이 어려웠는데, 뛰면서, 자전거를 타면서 읽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수정'도 꽤 기대를 하고 봤고, 중반까지는 뭔가 이야기가 터질 것을 기대하고 봤는데, 그대로 힘이 빠져버렸다. 이 역시 기대에 못 미친 책이긴 하다만, 다음에 다시 만나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을 믿기에 아쉬움을 참고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있다.
다시 체력을 회복하고 있다. 그래도 방금 점심시간의 운동을 통해서 느꼈지만 어느 정도 몸을 만들어 놓은 후에는 중간에 몸이 조금 상하더라도 약간의 노력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육운동 후 65분간 5마일을 뛰고 걸은 후 다시 12분동안 자전거를 타고 온 다음에 하는 말이니까 조금은 믿어도 된다.
'다아시 경의 모험'은 번역이 조금 아쉬운대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딱히 알아본 바는 아니지만 내용과 구성을 보면 고전 SF에 가까운 책일 것 같다. 흔히 말하는 alternative세계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마치 중세가 미래가 된 것처럼 science와 마법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것이 국왕직속기관의 전문가인 다아시 경의 직업이다. 충실한 조력자이자 뛰어난 마법사인 숀의 도움으로 하나씩 해결하는 사건은 classic한 추리소설과는 다른 재미를 주었다. 덕분에 좀더 책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절판된 상태. 이런 세계에 잠시라도 다녀올 수 있는 날에는 현실의 모든 시련과 사련을 아주 잠깐이지만 뒤로 하고 절로 지어지는 미소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fiction보다 현실의 일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다치바나 다카시 선생 같은 분도 있지만, 난 어쩐지 그 경계에 머무는 것이 더 좋다.


워낙 쉽게 넘어가는 책이라서 그런지 술술 읽어버리게 된다. 4권까지 나온 소설인데 벌써 3권을 끝냈다. 커피점 탈레랑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소소한 연애와 추리, 그리고 커피가 섞인 지극히 라이트노벨스러운 (이라고 쉽게 쓰지만 사실 라이트노벨의 정확한 의미를 내가 파악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야기. 그래도 이런 책도 하나씩 모아두다보면 또 이런 것도 읽었구나 하며서 지금을 돌아보는 미래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희미하지만 벌써 그런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빛이 들어오는 멋진 서재에서 아침 일찍, 아무 생각없이 사랑스러운 책들을 둘러보다가 푸근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cliche같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의 책을 이어서 계속 읽어나간다. 언제나 경계인으로서, 그리고 재일조선인으로서 한국정부가 입힌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자유와 사상의 추구를 본다. 늘 아픈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의 진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fact'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애국이니, 국가니 하는 개념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을 수 있는 건지. 기억의 왜곡은 왜 그리도 심한 것인지. 왜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라는 것은, 내세우는 숭고함과는 동떨어진 타자에 대한 박해와 오류로 가득한 국가관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것인지. 잘 정리되지는 않지만,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지식'에 대한, 그러니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불변의 진리라고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 그것이 서경식 교수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얻게 되는 어떤 성과가 아닌가 싶다.
여전히 책이 읽힌다는 것, 읽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다. 재미를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책을 사들여 쟁여놓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까. 하지만 깊은 독서, 울림이 있고 무엇인가를 배우는 독서는 아직도 멀어 보인다. 일단 고전읽기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독서는 심한 편식증에 걸려있는 것 같다. 금년에는 모아놓은 고전을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데, 아직은 요원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