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먹어도 배부르고 적게 마셔도 취한다. 나이가 드는 고비마다 점점 더 그렇게 느낀다. 이상한 건 더도 덜도 아닌 생일을 기점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곳의 기준으로 나이를 먹는 시점이 생일이라서 그런건지. 그럼 한국에 있었다면 같은 느낌을 매해 1월이나 음력 설날에 받았을 것인지. 순전히 심리적인 이유인지 생물학적인 이유와 심리적인 것이 섞인 건지. 어쨌든 간만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일찍 자고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 일요일이라서 늦잠을 잘 생각도 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 주말의 미사는 오전 7시를 나가고 있어서 겸사겸사해서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머리가 맑을 때 차분하게 주말에 받은 몇 개의 업무용 메일을 처리하고 요즘 재미가 들린 이탈리안 주전자로 에스프로를 뽑아 마시려고 보니 커피콩을 갈아놓은 것이 없다. 아무리 내 멋대로라고 해도 이 새벽에는 수동이든 전자식이든 그라인더를 돌리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제 마시고 남은 식은 커피로 대신했다.
내일부터 12/24까지 9일 간 새벽 5시 반에 미사가 있다고 한다. 지금 나가고 있는 근처의 미국성당에서 오래 지켜온 전통이라고 하는데 만약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면 참석해보고 싶다. 운동일정이 좀 틀어지겠지만 옷을 좀 허름하게 입고 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서 운동할 준비를 하고 미사 후 gym으로 가도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를 이용할 수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직은 사무실과 사는 곳의 거리가 대충 2-3마일 정도라서 십 분이면 출근이 가능하니 그리 하고 들어와 씻고 나가면 될 것이다.
아주 가끔 도서관에 가서 한국어 section을 둘러본다. 4년 전에 한 동안 그렇게 세 군데의 도서관에서 내가 갖고 있지 않거나 모르는 책들 중 흥미가 있는 것들을 찾아서 실컷 읽다가 더 새로운 것이 없어서 한 동안 가지 않았었다. 우연히 어제 장을 보고 들어오다가 들려서 보니 그새 한국어 section은 조금 더 작아졌으나 새로운 책이 조금 들어왔길래 열두 권을 빌려서 왔다. 사들인 책도 못 보고 쌓아둔 것이 잔뜩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이런 짓을 한다. 내가 모르는 책,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남의 관심이나 남의 눈을 통해 소개를 받는 책도 볼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잡다한 소설을 많이 집어왔고 덕분에 하나씩 읽는 재미를 즐기고 있다.
오늘은 대충 그렇게 일찍 아침을 맞이하고 오전에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운동을 하고 요즘 hot한 지역의 NFL 팀인 49ers의 경기중계를 볼 것이다.
연말의 느긋함과 성탄이 다가옴에 따라 느끼는 가벼운 설레임도 딱 2주면 끝이다. 12/31 밤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시작되는 한 해. 시시프스처럼 다시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라가야 하는 시작을 맞게 될 것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이걸 표현한 것이 시시프스의 전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으로 느껴지던 2020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