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우드 클리닉 아이들 마음이 자라는 나무 30
테레사 토튼 지음, 김충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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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중고등학생 학부모, 심지어 대학생을 둔 학부모를 보며 부럽다고 하자 차라리 어렸을 때가 훨씬 마음 편한 것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당시는 설마했는데, 이제 우리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보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간다. 그러면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사람들이 나보고 다 키워서 부럽다는 이야기를 하면 나도 모르게 예전에 내가 들었던 그 말을 하면서 거기다 한마디 덧붙인다. 고민의 깊이와 무게가 다르다고.

 

  이런저런 일도 많았고 중요한 결정을 할 일이 많아서 유난히 정신없었던 방학을 보내고 나자 남편이 그런다. 만약 우리가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까라고. 글쎄, 아이가 없다면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거나 양이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남편이나 나나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도 성장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이 키우면서 사람 됐다고.

 

  흔히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이야기하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마음이야 안 그렇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이 책의 대니의 아빠도 그런 사람이 아닐런지. 아니 어쩌면 대니의 아빠는 적어도 자식이 잘 하길 바라는 욕심이라도 있지, 스크래치의 엄마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자신의 딸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을 남편으로 계속 인정하며 살 수 있을까. 게다가 스크래치가 정신병원에서 없어지자 소송을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새아빠의 행동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의 행동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동생인 켈리에게 집착하는 대니나, 켈리 이야기만 나오면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케빈과 스크래치를 보며 켈리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생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아니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자신이 받았던 관심을 동생이 받을까봐 동생을 시기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대니는 점점 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이처럼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청소년 소설에는 꽤 있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다가 결국 엄마의 무덤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두 개의 달 위를 걷다>와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내 이름은 망고>가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소설들은 주인공이 방황하는 이유가 죽음인데 반해 <리버우드 클리닉 아이들>에서 죽음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켈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혹시 아빠가 학대했던 것도 대니의 상상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했으나(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더 착잡했다. 간혹 밖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사람이지만 가족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치유 능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대니는 엄마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스크래치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이름을 되찾는 게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니까. 케빈은, 남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부모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성 정체성을 병인 것처럼 취급하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이 서로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다른 고민이지만 힘들어 하는 현실의 청소년들도 이처럼 자신의 길을 찾게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수상이력을 줄줄이 달고 있는 책 뒤표지를 보며 처음에는 의미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했다. 원래 현실고발적인 작품이나 시대의 문제를 드러내는 작품이 호응을 얻곤 하니까. 그러나 문학에 대해 잘 모르므로 작품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을 잡고 한번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재미 또한 갖추고 있지 않았나 싶다. 재미와 의미를 갖춘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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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밤 (4쇄) The Collection 3
바주 샴 외 지음 / 보림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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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다 컸는데도 여전히 그림책을 자주 보고 여전히 그림책을 모으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림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라고. 모든 그림책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책이라면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가치 있어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래서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비록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긴 하지만-그림책을 추천하곤 한다.

 

  좋은 그림책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글과 그림이 독립적이지만 서로 이질적이지 않아야 된다느니, 그림만으로도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등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술성-너무 모호한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예술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뭔가 예술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성이 아닐까-을 가미하고 독특한 방식에, 그들만의 문화가 드러나는 책이라면 좋은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책처럼.

 

  평가단에게조차 전부 주지 못할 정도로 귀한 책이라기에 도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택배 포장지를 풀고 책을 보는 순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뒷면의 가격을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팝업북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고가의 그림책을 본 적이 있던가? 없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진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이렇게 비싸고 고급스러운 책을, 게다가 일련번호가 씌어 있는(이 얘기는 똑같은 번호가 없는, 고유한 번호라는 얘기다.) 책을 받았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판화는 원본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일련번호를 매김으로써 진본과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고 예전에 앤디 워홀 전 설명 때 들은 기억이 난다. 대신 일련번호의 숫자가 작을수록 가치가 높다고 했던가. 뭐, 내게 이 책은 그림책매니아로서 소장하는 책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니 숫자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보다는 이 책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하나하나 인쇄하고 손으로 제본했다고 하니 그 자체로 의미있어 보인다. 요즘같은 시대에 직접 인쇄하고 제본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들이 유독 인도 여행을 다녀오면 잊지 못하는 경향이 있던데 아직 인도를 가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인지 잘 모르겠으나 뭔가 인간내면의 어떤 것을 울리는 묘한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이 책이 그러한 인도의 작가들이 그렸기 때문에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무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곤드족의 미술과 민담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의 민담을 잘 모르더라도 괜찮다. 그냥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다 생각나면 민담을 알아보거나 나무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 여하튼 이 책은 그림책은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을 굳히는 작품이자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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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외계인 미래의 고전 28
임근희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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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이들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드러나는 양상이 달라져서 그렇지 내면을 들여다보면 똑같다는 얘기다. 우선 가장 급한 건 친구 문제, 그리고 그 다음은 가족과 성적이다.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크게 이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성적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라도 친구 관계가 원만할 때 성적이 걱정되는 것이지 친구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그게 우선시 된다. 이 얘기는 즉 또래 아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친구 관계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동화의 소재 중에는 친구와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가족이나 성적 때문에 고민인 경우라도 친구가 있어서 힘이 되는 걸 보면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맞긴 맞나 보다.

 

  첫 번째 이야기인 <자전거 뺑소니>에서는 친하고 싶지도 않은 같은 반 친구에게 우연히 누명을 씌우게 되면서 갈등하다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다. 수호는 지후의 자전거를 빼앗다시피 타고 가다 개를 만나 도망치고 만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전거를 내팽개칠 때 주인 할아버지 차를 긁고 만다. 지후의 자전거가 맞긴 하지만 엄연히 잘못은 수호 자신이 했건만 혼나는 게 두렵고 돈을 물어줄 엄마한테 미안해서 거짓말을 하고 만다. 처음에는 지후가 약자였지만 이제부터는 수호가 약자가 된다. 그래도 양심은 있으니 지후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둘이 앞으로 친구로 잘 지낼 것임을 암시하며 끝나는 훈훈한 이야기다.

 

  위의 이야기가 남학생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쌩쌩이 대회>는 여학생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확실히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되기까지나 소통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딸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끊임없이 수다 떨고 집에 와서도 문자를 하고 그랬는데 아들은 덤덤해 보인다. 오죽하면 친구가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냥 있으면 같이 놀고 없으면 마는 것이 남자들의 방식 같아 보인다. <자전거 뺑소니>에서 둘이 별 얘기도 나누지 않다가 친구가 되었지만, <쌩쌩이 대회>에서는 서로 잘 챙겨주고 양보하는 단짝 친구지만 속으로는 이기고 싶어 안달하는 본 모습을 그린다. 결국 잘못했다가 그걸 만회할 기회를 얻었지만 알고 보니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다소 반전에 반전이 있지만 그래도 훈훈한 이야기다. 어쨌든 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애'가 있기 때문에 희주의 그런 마음을 못됐다고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희주의 그런 솔직한 마음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데 모두 착하게만 나오면 어린 독자들은 갈등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그런 마음을 갖는 게 나쁜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괜찮았다.

 

  친구나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골치 아픈 아이의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보호자인 할머니의 입장에서 애잔하게 손녀를 바라보는 마음이 전해져서 짠하게 만든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동화에서 보기 드물게 화자가 할머니다. 만약 거짓말을 일삼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공부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를 묘사한다면 그 아이는 보나마나 문제아다. 그래서 대개 그 아이 주변 인물과의 갈등을 그리면서 해결해 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문제아라도 할머니가 보기엔 더없이 예쁘고 착한 손녀라는 당연한 얘기를 기존의 이야기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들려준다. 아이의 생활을 제대로 모르면서 안이하게 대처하는,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보호자가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마음 아픈 이야기지만 마음 놓이는 이유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잔잔하면서도 책장을 덮을 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비록 현실은 그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이야기는 안심하게 만든다. 냉소적이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나길 기대하면서도 이처럼 마음 따스한 이야기를 읽으면 일단은 마음이 편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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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민 이야기 - 이주와 다문화의 지구촌 상수리 호기심 도서관 20
소피 라무뢰 지음, 기욤 롱 그림, 박광신 옮김 / 상수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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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만은 막상 다른 나라로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의외로 쉽게 생각하고 별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을 보면 용기가 부러울 정도다. 게다가 요즘은 여행이든 이민이든 외국 나가는 일이 예전보다 쉽고 간편해졌기 때문에 훨씬 용이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이유는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같은 나라 안에서 하는 이사든 다른 나라로 가는 이민이든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사와 달리 이민은 전혀 다른 환경과 다른 풍습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 또한 현재 사는 곳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궂은 일을 하게 될 게 뻔한데도 가는 이유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 간 1세대들은 고생을 많이 한다.

 

  인류는 원래부터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다. 정식으로 이민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다만 지금은 나라의 구속력이 강해서 다른 나라로 가려면 제약이 많고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민자의 낙원이라고 여겨졌던 미국의 이민사에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는데 어찌보면 다양한 민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된 것이 지금의 강한 미국을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시대에 더욱 필요한 합의와 조화를 진작부터 이루었기 때문에.

 

  이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 권의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이야기가 많다. 뒷부분에는 우리나라의 이민사를 덧붙여서 따로 정리해 놓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도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이민의 역사를 안다면 다른 나라로 나가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맞이하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데 초첨을 두고 상대방을 대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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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42
위더 지음, 원유미 그림, 최지현 옮김 / 네버엔딩스토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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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직하게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커다란 개가 우유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책으로 접하기 전에 만화로 접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얼핏 봤던 기억은 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본 기억은 없다. 게다가 EBS에서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들이 대개-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어느날 갑자기 중단되었다가 또 어느날 갑자기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곤 해서 동일한 부분을 몇 번씩 반복해서 보는가 하면 때로는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내 기억으로는 <플랜더스의 개>도 동일한 부분을 몇 번 보았고 마지막은 넬로와 파트라슈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딱 한 번 보았나 보다.

 

  웬만한 아이들은 한때 개를 기르고 싶어한다. 파트라슈처럼 말도 잘 듣고 멋지다면 당연히 키우고 싶어할 것이다. 하긴 그런 개라면 어른인 나도 키우고 싶을 정도니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러나 파트라슈가 처한 상황이나 넬로네 환경을 보면 그처럼 낭만적인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일을 죽어라 하지만 제대로 된 밥 한끼 얻어먹지 못하고 매맞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일상처럼 여겨지는 플랜더스 지방의 개라면 마냥 즐겁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넬로네 형편은 또 어떤가. 간신히 하루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할아버지와 손자, 그마저도 할아버지는 노쇠해서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동네 사람들의 동정과 친절 덕분에 그나마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게 넬로의 상황이다. 그나마 파트라슈가 있어서 할아버지와 넬로를 도와준다.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넬로는 비참한 죽음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로아의 아버지가 못된 소문만 퍼트리지 않았다면 근근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넬로가 원하는 그림을 배울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넬로에게는 그 두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났다. 한편으로 넬로에게 가혹하기만 한 작가가 야속할 정도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아주 가끔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 게다가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보통 사람은 더 힘겹다는 사실. 시대가 변했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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