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속의 문맹자들 - 한국 공교육의 불편한 진실
엄훈 지음 / 우리교육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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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매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빠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걱정되는 게 '먹는' 문제일텐데 다행히 학교에서 아침을 주고 저녁까지 준다. 물론 큰 아이는 고학년이라 종일돌봄에서 제외되지만 학교측의 배려로 돌봄교실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째가 이제 일학년인데 처음에 봤을 때 다들 놀란다.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래도 먹는 게 부실하다 보니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아빠 혼자 키우는 집 아이를 보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부분이 먹는 것일 테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어른과의 상호작용이 부족해서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를 뿐더러 어렸을 때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연계학습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숫자를 세는 모습, 솔직히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다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게 아주 중요한 '공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이와의 상화작용들이 실은 굉장히 의미있는 행동이었으며 차후에 영향을 많이 주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정작 내 아이들은 다 컸을 때 알았다. 물론 나는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루는 1학년이 셋째 아이가 책을 빌리려고 하는데 이미 상당 기간 연체가 되어 빌릴 수가 없다. 글도 많지 않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그 아이에게 딱 맞는 그림책이건만 정작 그 아이는 필요할 때 빌릴 수가 없다. 그동안 틈만 나면 책 갖고 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책을 어디에 뒀는지 모른단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책을 빌릴 방법은 없어 보인다. 원래 처음에 글을 배울 때 흥미있어 하는 그림책을 자꾸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거기에 있는 글자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내가 괜히 안타까웠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며칠 후에 그 아이에게 빌리고 싶어했던-사토 와키코의 <집보기>였다.-책을 선물했다. 집에서 하루에 한 번씩 꼭 읽으라는 이야기와 함께. 다음날 도서관에 오더니 다짜고짜 어제 책 읽었단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준 책을 읽었다는 얘기였다. 일단 칭찬해 주고 매일 읽으라고 다시 한번 얘기한 다음 첫째에게도 동생 책 읽는 것 좀 도와주라고 일렀다.(하지만 큰아이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방학 하기 얼마 전에 위의 그 아이가 오더니 책을 읽겠단다. 그러마고 말하고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내게 오더니 언제 읽을 거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그림책을 읽자는 얘기였다. 책을 대충 정리하고 함께 앉아서 읽는데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책에 어려운 글자들이 조금 나오니까 금방 싫증을 내는 눈치였다. 그래서 서가를 돌아다니며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들어간 책 제목을 읽었다. 조금 있으니 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공부하러 가기에 여쭤봤더니 부쩍 글자에 관심이 많아졌으며 꽤 늘었다고 한다. 그럴 때 집에서 조금만 신경 써 주면 한글 익히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참 안타까웠다. 게다가 방학이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 아닌가.

 

  세 아이는 모두 방과 후에 공부 지도를 받는다. 둘째 아이도 2학년까지 한글이 안 돼서 담당 선생님을 참 애먹였었다. 그런데 셋째 마저 한글이 안 되고 첫째는 한글은 되지만 학습 의욕이 없어서 소수 정예로 지도하는 공부방에 참여하는 실정이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양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솔직히 학교에서 지도하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정과 연계가 되지 않으니까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1학년 아이의 경우 조금만 집에서 봐주면, 하루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주면 또래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시작이니 격차를 줄이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 아닌가. 현재 1학년 아이를 그냥 방치할 경우 첫째의 전철을 밟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행히 여기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든 구제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이든 따로 선생님을 붙여서든, 노력을 하고 있다.

 

  다른 모든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먼저 읽은 이유는 이처럼 많은 부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6학년이 되어도 학습의욕이 없어서 문제를 읽지도 않고 답을 체크해서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는 아이, 학습 수준이 3학년에 머물러 있어서 넓이의 단위를 처음 보았다는 아이, 그러나 정작 부모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환경에 처한 아이를 보며 안타까웠다. 그 아이는 책은 곧잘 읽는단다. 그런데 국어 문제를 풀지 못한다. 그야말로 해독은 되지만 독해가 되지 않는 전형적인 경우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중학교 가서 어떨까 걱정이다. 교실에 앉아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혼자 있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런지. 저자가 만난 창우 같은 아이가 되지는 않을런지.

 

  그림책에 빠져 살면서 그림책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그림책을 활용해서 읽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교정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여건만 된다면 처음에 이야기한 1학년짜리 아이에게 저자가 한 것처럼 적용해 보고 싶었던 차였다. 물론 마음만 그렇지 현실은 아니지만. 아니, 언젠가는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림책 작가 중에 페트리샤 폴라코라는 작가가 있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보면서 내용 자체에도 감동을 받았지만(그래서 읽을 때마다, 읽어 줄 때마다 울컥한다.) 그 나라의 시스템에 감탄을 한다. 주인공 트리샤가 5학년이 되어도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안 선생님이 방과 후에 따로 글을 가르치고(물론 학습의 형태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의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선생님을 따로 붙여서 읽기 지도를 하는 걸 보며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가동되는구나 생각했었다. 우리도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보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직접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들을 보고 때론 겪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같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학교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니 선생님들이 공문 처리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많다. 나도 어떤 때는 똑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두세 군데에서 보내라고 해서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 자체도 문제다. 그러나 시스템이 변하기 위해서는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이 시작점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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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이의 왕따 탈출기 미래의 고전 29
문선이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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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이 중소도시, 아니 오히려 시골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정도로 주변 환경과 여건이 도회지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다고는 하지만 그 주변으로는 오랜 시간 동안 마을을 이루며 산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흔히 왕따를 당하는 아이도 생각만큼 많지 않고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웬만하면 용서되곤 했다. 일례로 둘째네 반 어떤 아이는 시험지를 고친 것이 들통나서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어도 왕따를 시키지 않았다.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모르게 야단쳤다지만 웬만큼 눈치가 있는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고 부모들도 알고 있었지만 흔히 이야기하듯이 부모들이 쉬쉬하며 그 아이와 놀지 못하게 하진 않았다. 만약 대도시의 규모가 크고 학부모 치맛바람이 센 학교였다면 달랐을까. 모든 상황을 다 경험할 수 없기에 뭐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동화에서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흔히 왕따를 당해서 전학을 가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소문이 나게 된다. 게다가 왕따를 당한 아이의 경우 그 상처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민이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다만 수민이는 공감 능력이 있어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보며 자기의 경험을 떠올리고, 결국 그 친구를 돕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사실 말이 쉽지, 자기가 난처한 상황에 빠질 게 뻔한데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용기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3자의 입장이니까 객관적으로 옳은 말을 할 뿐 내가 당사자이거나 내 아이가 그런 상황이라면 그처럼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다. 아이 키우면서 장담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처럼 정확한 표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수민이의 용기가 대견하게 느껴지고 이런 아이가 있다는 데서 희망을 품게 된다. 비록 동화라서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내는 현실의 아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수민이가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이구동성파에 들어가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갈등하는 과정은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이 겪는 과정일 것이다. 분명 수민이도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종의 자기최면을 건다. 안 그러면 자신만 더 비참해질 테니까. 대개는 그런 방식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법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구동성파는 수민이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졸개 정도로 취급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정작 수민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계속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민이가 나쁜 행동을 했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을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것이 수민이와 다른 친구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경제적 상황과 상관없이 화목한 것,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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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클래식 보물창고 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민예령 옮김, 노먼 프라이스 그림 / 보물창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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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를 쓰기 위해 이 책을 검색해 보니 동일한 제목의 책이 엄청 많아서 내가 원하는 출판사의 책을 찾기도 힘들다. 이처럼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책이 나왔는데도 지금까지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대개의 고전이 그렇듯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모를 뿐더러 책의 제대로 된 '맛'을 알지 못한다. 특히 <보물섬>처럼 만화로 나온 이야기라면 더더욱 책을 안 잡게 된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화를 가끔 보긴 봤는데 마지막까지 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실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이 만화에서 진짜 나오는 장면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장면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당이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인물이었고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유럽 내에서 더 이상 땅을 차지하기 힘들어지자 바다로 눈을 돌리던 당시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보물섬>과 같은 모험, 특히 바다에서의 모험에 대한 소설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당시는 바다로 나가서 미지의 땅을 개척하고 돌아오는 일이 그들에게 로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보물이 있는 섬이라니, 지금이라도 혹할만한 이야기다. 그 보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해적질을 해서 빼앗은 남의 물건이지만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이 또한 당시 상황이 그러한 것을 무조건 나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가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단순히 물건만 빼앗은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까지 빼앗으며 감춘 보물을, 숨긴 당사자는 죽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차지하는 모습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될 듯 싶다.

 

  어린 소년에 불과한 짐이 우연히 배를 타고 보물을 찾으러 떠나면서 겪는 모험 이야기가 그야말로 잠시도 눈을 못 돌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처음 배 타고 나갈 때의 짐과 모험을 하고 돌아올 때의 짐은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짐의 행동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독자는 적어도 한 가지는 안심할 수 있다. 적어도 짐은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돌아왔다는 사실. 짐이 없는 상태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소설을 보면 이런 형태가 꽤 있다. 지금부터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말이다. 아마 그것이 당시의 유행하던 방식이었나 보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보물이긴 해도 짐과 그 일행이 보물을 찾아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독자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보물섬은 가짜였다느니 알고 보니 누군가가 가져갔다느니 하면 허탈할 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에 그런 식으로 쓴다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다고 비난을 받겠지만(그래서 대개는 판타지로 접근하던가 꿈이었다는 식으로 맺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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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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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만한가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분명 교직을 이수했건만 무슨 과목을, 어떻게,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니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분야에서 일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현장에서 싸우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을 했고 한동안 그 사실은 잊혀졌다. 그런데 희안하게 딱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푸투닉호'라는 단어다. 아니, 스푸투닉호의 의미도 아니고 그 뒤에 숨겨진 냉전 시대의 상황도 아닌, 단지 그 단어에 대한 기억 뿐이라니, 나도 내가 한심하다. 어느 과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이가 연로하신(분명 정년퇴임한 교사가 아닐까 싶다.)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강의를 하시는데 이 말만 꽤 여러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는 도대체 저게 뭐길래 저렇게 자꾸 강조를 하나 싶었다. 당시만 해도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아이 키우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뒤에 숨겨진 여러 정황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스푸투닉호의 거창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으며 왜 그렇게 교수님이 그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참 일찍도 이해했고 지금은 쓸모도 없지만.

 

  책을 읽자마자 아주 오래전의 그 스푸투닉이 떠올랐다. 바로 오몬 라가 그러한 우주비행사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치르는 일련의 고생과 희생이 대개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뉴요커가 극찬한 이유가 순전히 '작품성'에만 기인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즉 오론 라 개인의 역사이기 이전에 소련이라는 나라의 비열함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그야말로 시대정신을 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 의미있는 갈채를 받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보여지는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그닥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끄집어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구가 들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권력의 집요함과 허무함, 그리고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짜로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나갔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설마 그건 사실이겠지). 마찬가지로 달이라는 곳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진짜 달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설마 이것도 사실이겠지). 이쪽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또 그 말도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빅또르 뻴레빈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체제의 모순과 허구성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달 착륙 사실에 쏟아지는 그 숱한 의혹을 가지고 새로운 소설을 쓰는 누군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소설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탄사가 나오기에 충분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조직이든 집행부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나와서 어떤 발표를 할 때도 과연 저들이 말 하는 것 중 얼마만큼이 진실일까 궁금한 경우가 있다.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일'이 있을까. 예를 들면 천안함 사건 같은 경우,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있을 텐데 진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일까, 아니면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일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여타의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추측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우주 비행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 사람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대개는 그처럼 알면 안되는 사람들은 '사고'가 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려고 그토록 노력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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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트라우마 - 어느 외교 전문기자가 탐색한 한미관계 뒤편의 진실
최형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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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왕이나 세자책봉을 인정받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스스로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다고 위로하지만 그걸 보며 의미상으로는 속국이었음을 느끼곤 했다. 실질적으로 정국을 따로 운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의 신임을 받기를 원하는 상황을 보며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 당시 국제정세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라는 상반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현대사를 돌이켜보니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이라고 말하면 좋겠지만)이 든다. 박정희가 5.16쿠데타(이 용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기우일까.)를 일으키고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점이나 전두환이 12.12로 정권을 잡은 후 마찬가지로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국민들이 과연 그들은 미국의 인정을 받았는지를 끊임없이 캐물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이 둘을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인정해줬더라면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일까. 거기에 더해 5.18 민주화 항쟁 당시에도 미국의 승인이 있었는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을 보며, 만약 미국의 승인이 있었다면 그 후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런 의심의 기저에는 당시 군을 움직이는 주체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인정받는 문제는 그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상황을 보며 한심하게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지금도 형태만 약간 달리할 뿐 비슷한 양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하긴 어디 그 문제만 그런가만은, 이럴 때마다 역사는 결국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불과 60년 전의 문제가 아직까지,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판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서 해방이 되었다면, 당시 분단되지 않았다면, 아니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이 방조 내지는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었었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금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을 자극한 것이 아니냐 내지는 북의 조짐을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이 있는데, 저자는 여러 근거를 들며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쪽의 말만 듣고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저자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에게 그다지 중요한 나라도 아니었고 많이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는 말은, 상당부분 이해가 간다. 당시의 국제상황을 보건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에 치우쳐 있기 전이었을 테니까.

 

  미국을 비난하고 미워하면서도 미국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도 그것을 알기에 이 기회에 미국을 제대로 알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정확히 하자는 의도에서 해방을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의 미국을 파헤쳤을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약간 불편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한국의 입장은 간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휴전협정을 맺은 당사국이라고는 하지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제3자 아닐까. 즉 우리가 북한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미국이 취하는 입장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헌데 저자는 우리가 취한 행동, 특히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마음이 아무렴 우리만 할까. 물론 그렇다고 북한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북한이 우리의 보수 정권을 엄청 규탄하면서도 돕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북한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이 미국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시절 북한을 두고 미국과 마찰을 빚을 때 미국의 유해발굴을 위해 돈을 주듯 우리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고 접근했어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하튼 앞부분은 미국의 의도에 집중하며 읽었다면 뒷부분은 거기에 덧붙여 말이 통하지 않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찌하면 좋을지(그래서 갑갑하긴 했지만)에 집중하며 읽었다. 적어도 북한과의 문제에 있어서 통미보다는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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