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갱 아저씨의 염소 파랑새 그림책 95
알퐁스 도데 글, 에릭 바튀 그림, 강희진 옮김 / 파랑새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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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본 게 어림잡아 10년 전쯤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때문에 열심히 도서관에 들락거리다 만난 책이다. 알퐁스 도데의 글이라는 건 알았지만 유명한 작가의 글이어서가 아니라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이 어땠었는지 잘 기억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후로 이 책이 가끔 생각나길래 소장하고 싶어 사려고 했더니 절판되었단다. 그래서 그냥 가끔 생각나는 책이 될 뻔했다. 그런데, 올 봄에 수서작업을 하던 중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년엔가 몇몇 사람들과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읽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물론 그때도 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내 마음이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스갱 아저씨의 염소가 측은하면서도 이끌리는 뭔가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번에 이 그림책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평소에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자신을 블랑께뜨와 시인인 피에르에게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선택한 어떤 것들이 비록 현재의 풍요를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끝내 그것을 접지 못하는,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현실을 직시하라는 핀잔을 듣는 내 모습이 시인 피에르 같아서였다. 적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신념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고 싶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아니,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다!) 커다란 명예가 따르는 것이 아니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다.

 

  블랑께뜨가 처음 산으로 갔을 때 마냥 즐겁고 신비롭지만 밤이 되자 안락한 스갱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잠시 느낀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산 속에 있으면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이 뻔하니까. 나였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생각하면 블랑께뜨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블랑께뜨처럼 목숨을 내놓는 것까지는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손해나 불이익 때문에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문득,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내가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또 안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도 '죽지 않고 싶다'가 아니라 최대한 오래 버티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블랑께뜨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그러면서 <오늘은 5월 18일>이라는 그림책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서 안락한 집을 빠져나갔던 누나와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을 이끌던 남자(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부유하고 권력도 있지만 그런 것을 버리면서까지 혁명에 동참했던 남자 주인공의 친구)가 오버랩된다. 물론 블랑께뜨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선택이고 나머지 두 인물은 대의를 위해서라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신념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런지.

 

  블랑께뜨가 산을 동경하며 무작정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니 딸이 떠오른다. 처음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여기서 점수도 그럭저럭 나오는데 왜 굳이 연고도 없고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혼자 지내려고 하는지 걱정은 둘째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워낙 뜻이 강경해서 결국 우리가 졌다. 한편으로는 큰 세상으로 나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게 좋을 것도 같지만 스갱 아저씨처럼 걱정되는 건 여전하다. 비록 나는 블랑께뜨가 되고 싶어하면서 딸이 블랑께뜨가 되려고 하는 건 우려하는 이 모순된 감정이란.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그림으로 인해 글만 있는 책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간혹 그림책으로 만들면서 차라리 글책으로 남는 게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그림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림 덕분에 더 기억에 남고 블랑께뜨의 상황과 마음이 쉽게 전달된다. 특히 시인 피에르에게 쓴 글이 다른 글씨체로 다른 면에 배치되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실히 드러난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경우였다면 너무 뻔한 주제를 드러낸다고 싫어했을 테지만 이 경우는 그것조차 좋아보이니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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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뚱보 클럽 - 2013년 제19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83
전현정 지음, 박정섭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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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 언제나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꽤나 있다. 물론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보기에 별로 뚱뚱하지 않은 사람조차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 강박이 들 정도로 다이어트 열풍이 거세다. 지금은 뚱뚱한 것이 보기 안 좋아서가  아니라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보기 안 좋아서라는 이유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은찬이 엄마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들이 친구들에게 놀림받을까봐 다이어트를 종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은 초등학생들 중에도 비만이라고 여겨지는 아이들이 꽤 많다. 그런데 비만인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먹는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거나 먹을 걸 달고 산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편도 그런 편인데, 먹는 것에 대해 초연해지면 안 되겠느냐고 이야기하면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절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뚱뚱한 사람들은 그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은찬이가 먹을 것만 생각하고 먹을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찬이는 그나마 좋은 기회를 만나서 다행이다. 대개의 뚱뚱한 아이들은 그저 놀림의 대상이 될 뿐인데. 실제로 은찬이처럼 그렇게 운이 좋은 아이가 현실에서 얼마나 될까. 역도부가 있는 학교도 드물 뿐더러 뚱뚱하다고 역도를 잘 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나마 은찬이는 아빠의 피를 물려 받아 선천적으로 튼튼한 몸을 타고 났기 때문에 역도를 할 수 있던 것이지 그냥 뚱뚱하기만 하다고 역도를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은찬이가 얼마나 운이 좋은가 말이다.


  뚱뚱한 아이도 나름대로 비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고 뚱뚱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예쁜 옷을 입고 싶어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은찬이와 은찬이 엄마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큰사이즈 옷을 판매하는 홈쇼핑에서 보통의 모델에게 옷을 입혀서 광고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은찬이 엄마의 일이 갑자기 잘 풀리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다. 동네 짜장면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마침 그 자리에 홈쇼핑에 나오는 회사 사장이 있었다는 설정이 뜬금없어 보인다. 그 사장이 나오는 순간 앞으로 은찬이 엄마의 일이 잘 풀리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몇 장 남지 않게 되자 예슬이와의 일도 자연스럽게 잘 풀리고 역도부 주장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아니 오히려 든든한 멘토가 되기까지 한다. 얄미운 행동을 하는 준영이의 행동도 고쳐지는 등 모든 것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뀐다. 항상 지적하듯, 결말에서 모든 것을 급하게 마무리지으려는 조급성이 엿보인다. 그렇다고 관계가 안 좋은 상태로 끝마치면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끝마치는 책도 꽤 있으니 독자도 어느 정도 그런 식의 결말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뚱뚱한 사람들의 마음과 애환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동화책이라는 점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뚱뚱한 어린이나 뚱뚱한 엄마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를 다룬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뚱뚱한 것을 창피해하고 어떻게든 살을 빼려고 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뚱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이야기는 처음이지 싶다. 그것만으로도 읽은 보람이 있다고 하면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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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빛나는 순간 푸른도서관 60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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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아이를 기숙사에 들여 보내고 나올 때는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일주일을 조마조마하며 보냈었다. 툭 하면 뭐가 없다는 전화에 여차하면 저녁식사 시간에라도 물건을 건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석주 엄마의 심정이 고스란히 이해된다고나 할까. 물론 나는 석주엄마처럼 아이에 올인하는 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를 기숙사에 보내고 오히려 무척 편했다. 아침마다 일찍 밥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부딪칠 일도 그만큼 줄어드니 서로 사이도 좋아졌다. 게다가 학교에서 모든 동선을 파악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을 수 있어 마음도 편했다. 다만 처음 데려다 주고 나올 때 무척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지오가 뜬금없이 석주로부터 추풍령역으로 나오라는 메일을 받고 그곳으로 가는 동안 둘의 회상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처음에는 석주와 지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관계도를 파악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석주랑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메일을 받은 지오가 오히려 황당해하는 처음과 달리 읽어나갈수록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이기 전에 경쟁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재의 고등학교 상황에서 석주와 지오 정도라면 충분히 친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학교 생활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보통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이야기할 때는 친구관계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서는 그보다는 내면의 성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물론 모범생인 석주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나 자신이 저지를 일이니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힘들게 합격한 대학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갈 때 갈등을 겪긴 하지만 그 정도 갈등은 새 발의 피다. 그러니까 여기서 부모와의 갈등은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 석주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신 지오는 부모와의 갈등이 조금 더 깊긴 하다. 그렇더라도 다른 책들에서는 어떻게 이런 부모가 있을 수 있을까 내지는 나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그 보다 인물들의 내면에 좀 더 치중할 수 있다. 이런 게 진짜 청소년소설이 아닐까 싶다. 극적인 대립을 유지해서 긴장을 유도하는 것보다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 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것들이 나와 연결고리가 있어서 더욱 남의 일 같지 않게 읽었던 책이다. 기숙사에 들여 보낼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마침 자퇴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지오의 자퇴가 남의 일 같지 않았으며, 일 년에 한 번씩 내려가는 영동이 배경이라 더욱 그랬다. 가끔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내가 가 본 영동역과 그 주변은 책 속에 나오는 것보다 더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역 주변에 괜찮은 식당이 있었던가. 역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식당만 기억날 뿐이다.

 

  이금이 작가는 그 많은 책을 쓰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매번 새로운 소재를 찾아내는지 또 다시 감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책 내용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내공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솔직히 사람 사는 일은 다 비슷비슷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의 청소년들을 모델로 이야기를 쓴다는 얘기는 곧 소재가 중첩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금이 작가는 틈새 소재를 어찌 그토록 잘 잡아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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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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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길거리에서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자로 재는 사람, 지나가는 남자들의 머리를 길다며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그 누가 믿기나 할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실제 있었던 일이고 불과 30여 년 전이라고 한다면. 물론 나도 직접적인 세대는 아니다.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몰랐고, 시골이라 그런 걸 볼 일이 없었다. 다만 같은 동네에 사는 사촌 오빠가 대학생이었는데 한동안 집에 내려와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아마도 계엄령이 내려졌던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의 배경이 된 5.18민주화운동 전후였겠지.

 

  이제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고 책이나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다루고 있지만 그림책으로는 못 봤다. 사실 유아나 초등 저학년에게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나. 전국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있었던 한국전쟁조차도 먼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가 아니고서는 광주라는 곳이 어디인지 감조차 없기 때문에 더더욱 공감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말도 안 되는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느냐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해 못할 것이라고 해서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역사적 사건이란 게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림책답게 접근을 하고 있다. 사실이나 아픈 부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주변에 다양한 메타포를 배치함으로써 뭔지 모르지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말로 설명해서 이해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머리속에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어린 남자아이들 대개가 그렇듯이 주인공은 총을 무척 갖고 싶어하지만 부모님은 절대 사주지 않는다. 대신 누나가 나무젓가락으로 총을 만들어주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가 갖고 있는 총을 더 부러워한다. 당연한 결과다. 진짜처럼 생긴 총과 나무젓가락 총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군인들이 진짜 총을 들고 다니고, 총을 쏘고,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총이 어떤 것인지, 왜 부모님이 사주지 않았는지. 만약 군인들이 진짜 총을 들고 다니는 것만 보았다면 더 갖고 싶어했겠지만 사용하는 방식을 보고, 더구나 누나도 거기에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으며 총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무젓가락 총마저 버리게 된다.

 

  표지를 펼치자마자 다양한 총 그림이 잔뜩 나오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이라면 거기서 한참을 머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인공 아이가 그랬듯이 총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되면 적어도 동경할 장난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주인공의 누나가 무사히 돌아오면 좋겠다. 그런데, 나라면 이 책 속의 부모처럼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부모도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이야기했지만 딸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짜 못 나가게 할 작정이었다면 밤새 지키고 있던가 했겠지. 세상에는 용기있고 괜찮은 사람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자유도 그 사람들 덕분이다. 곧 있으면 다가오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희생자들에게 감사와 함께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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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나라 높새바람 30
김혜진 글.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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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거나 가능성 있는 것만 믿는 성격 때문인지 판타지 소설이나 동화는 읽기가 어렵다. 작품배경을 스스로 상상해 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탄력이 붙으면 손을 떼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책도 전편을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때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술술 읽혔고, 심지어 뒷부분이 궁금해서 밤 늦게까지 읽었다. 읽는 동안 각 나라를 상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는데 그런 내 자신이 어찌나 기특하게 느껴지던지. 전 같으면 그거 상상하느라 읽는 속도가 느려서 덩달아 책 읽기도 힘들었는데 장족의 발전이다.

 

  판타지 소설의 배경은 현실에서 접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나라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금씩 바꿨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빈땅 왕(솔직히 말하자면 허수아비 왕을 세운 현자가 맞지만)이 불의나라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그들은 생각도 감정도 없는 돌덩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부분을 보면 그 옛날(뭐, 그리 오래된 옛날도 아니지만)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면서 감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오버랩된다. 모르긴해도 당시 사람들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감정도 있고 인격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단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르는 척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빈땅의 현자처럼.

 

  공중도시의 아이라서 날개가 있지만 꿈의 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날지 못하는 참이 자신의 본연의 이름인 차미시나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까지의 모험이 길게 이어지는 이 책은 완전한 세계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잠자는 동안 꾸는 꿈이 사실은 꿈의 사막이라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소망상자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상큼한 설정은 잠시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꿈이라는 단어를 소망과 동일하게 쓰는 것만 봐도 일이 있어 보인다. 남의 꿈에 간여할 수 없고 꿈 꾼 이의 의지를 존중해야 하지만 명은 소망상자에 있는 이의 소망을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자신만의 소망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봐야겠다. 참이 공중도시로 가게 된 이유보다 그 이유가 이야기의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또한 공중도시의 페카와 투랏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인간을 빗댄 듯하다. 자연은 그대로 있을 때 가장 가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은 종종 잊고 산다. 최초존재에게 자연의 이치를 묻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자신들이 발견한 뜬돌을 이용하여 공중도시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페카는 결국 호된 대가를 치르고 만다. 독자는 참의 모험을 통해 페카의 계획이 무모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으니 참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페카처럼 행동하거나 그런 행동을 지지하는 경우가 꽤 있다. 과학의 힘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만 봐도 알 수 있다.

 

  파라도가 참을 영웅이라고 추켜세우자 참은 단지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처음 꿈이 사막에서 나올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깨닫게 된다. 본문 중간에도 뮬의 시선을 통해 모험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단단해지고 성숙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정작 참의 내면의 성숙은 많이 느끼지 못하겠다. 처음으로 푹 빠져 읽었고 읽고 나서도 길게 여운을 느꼈던 <끝없는 이야기>의 감흥을 기대했었나 보다. 그 책도 읽는 동안은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읽고 나자 주인공이 진짜 성장한다는 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저절로 느껴진 것에 비하면 이 책은 주인공의 모험을 정신없이 따라다니느라 내면의 모습에는 귀를 기울일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게 아닐런지. 그래도 이만한 판타지 동화가 있다는 게 어딘가. 4편 모두 상당한 두께에, 많은 나라가 나오지만 구성이 탄탄해서 서로 잘 맞아 돌아가는 이런  판타지 동화를 김혜진 작가의 책 외에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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