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로 간 따로별 부족 일공일삼 21
오채 지음, 이덕화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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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이는 의논할 일이 있거나 상황을 알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알린다. 한번은 그 일로 남편이 마음이 많이 상했다며 나에게 화를 냈다. 자세한 일은 기억이 안 나지만 중요한 일을 남편한데 알리지 않고 우리 둘이 의논했다는 요지였다. 남편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 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남편은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아이들이 요청한 일을 처리하는데 왜 아이들은 아빠보다 엄마를 더 찾느냐는 불만이었던 셈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조차 지금도 아빠한테 전화하는 것은 용건이 있을 때뿐이고 엄마한테는 그냥 소소한 일상 이야기도 많이 하는 걸 보면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남편 입장에서는 배신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듯 아빠와 사이가 좋은 집보다 엄마와 사이가 좋은 집이 훨씬 많아 보인다. 준이네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보통('평균적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아빠와 사이가 좋은 가정에서 불편해할까봐 조심스럽다.) 가정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빠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한다는 무게감에 쉬는 날도 없이 회사를 나가지만 과연 그것은 누구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었을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다지만 중년 이상의 남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 나중에 부인과 자식들이 아빠와 서먹해하고 함께 한 시간이 적다고 불평하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겠지. 준이네 아빠가 딱 그런 식이다.

 

  그러나 준이 엄마가 마련한 캠프에 간 후로 많이 변했다. 하긴 변하지 않았다면 이런 동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겠지만. 솔직히 준이 아빠는 보통의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준이 아빠 입장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면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준이가 서술자니까 우리는 준이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인도에 가서 감자 세 개를 식량으로 받은 것조차 아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혼자 두 개를 홀딱 먹어버리는 아빠를 보고 누가 아빠에게 면죄부를 주겠냐 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아빠는 당신 먹고 싶어도 안 먹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남편은 안 그렇다. 말로는 애들 먹으라고 잘 못 먹었다는데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양보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준이 아빠는 보통의 아빠 모습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어쨌든 무인도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동안 둘은 서로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동안 서먹했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런 책은 아이가 읽는 것보다 아빠들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동화를 읽으며 아이들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듯이 다른 어른들도 그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가족이 같은 책을 읽고 직접 이야기 나누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가족끼리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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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그놈 마음이 자라는 나무 34
세실리아 에우다베 지음, 성초림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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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우면서 매 시기마다 고비를 맞는 듯하다. 유아기 때는 그에 걸맞는 고민이 있고 초등학생 때는 또 그 때에 어울리는 고민이 있다. 그런데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가 중학생 자녀를 둔 엄마 앞에서 하소연을 하면 반응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말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 경험으로도 지나고 나서 보니 당시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한 가지만 빼고. 그것은 바로 큰아이가 사춘기를 격하게 보낸 초등 6학년 때다. 지인 중 한 분이 그랬다고 한다. 아이의 사춘기를 지내보지 않고는 아이를 키웠다고 말하지 말라고. 나는 심하게 보내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유독 내 아이는 유별난 사춘기를 보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면 우리 엄마가 절대 동의 못하시려나.

 

  사춘기는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나 다른 곳이나, 한 마디로 말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견디기 힘들지만 어쨌든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가 보다. 이렇게 남미에 있는 작가도 사춘기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사춘기를 겪는 아이는 그 안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도무지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한다. 여기서는 파블로에게만 보이는 괴물이 나타나서 파블로를 괴롭힌다. 그것은 아마도, 파블로 내면에 있던,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싶다. 괴물이 나타난 시점만 봐도 그렇다. 파블로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괴물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거울에서 괴물이 나온 순간도 실은 파블로가 거울을 주먹으로 깬 순간이 아니던가. 마찬가지로 매 순간 괴물이 나타날 때는 파블로가 아빠와 갈등을 겪거나 친구, 혹은 선생님과 소통하지 못할 때다. 괴물 때문에 이상한 것들을 먹었다고 하지만 그 역시도 파블로 자신이 행동한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사춘기를 겪든 안 겪든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블로도 아빠와 마주하면 읽는 우리가 긴장될 정도로 편치 못한 관계다. 서로 조금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준다면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빠지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솔직히 파블로가 계속 이야기하는 괴물의 존재에 대해 파블로의 아빠뿐만 아니라 나 또한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도 괴물을 보았고 그 괴물로부터 파블로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쯤에서는 작가에게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들었다. 괴물은 그저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파블로와 아빠가 다른 방식으로 화해할 것이라 믿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물론 그것이 진짜 괴물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상징이겠지만, 여하튼 내가 생각한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고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 거쳐야 더 단단해지는 법인가 보다. 파블로와 아빠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그동안 자신만 바라보던 눈길을 상대에게 돌림으로써 상대의 아픈 부분이 보이고 연민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정이 싹트고 사랑으로 단단해지는 것이겠지. 사춘기를 겪는 모든 가족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만 눈길을 주지 않고 상대에게도 눈길을 준다면, 그들의 아픔이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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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클래식 보물창고 18
알베르 카뮈 지음, 이효숙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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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문학고전에 맛을 들였던 지난 겨울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 중에 마침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있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문학에 흥미를 잃은 후로 그냥 작가 이름과 제목만 들어봤을 뿐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책을 고른 기준이 '유명한 작가의 책'이었더랬다. 누가 보면 참 무식해 보일지 모르는 방식이지만 그렇게라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게 어디냐고 위안을 해본다. 그래서 까뮈의 <페스트>를 읽으면서도 그를 유명하게 해준 <이방인>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지금까지도 그 많은 사람들이 까뮈하면 이방인을 자동으로 떠올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참 이상하다고,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낯설기도 하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가 이방인이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된다고나 할까. 흔히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 중 하나에게 나를 대입해서 나도 모르게 일희일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특히 주인공은 그 어떤 독자도 자신에게 동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일을,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말하는 방식이 정말 낯설다고나 할까.

 

  1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만 하고 있는데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주인공의 삶을 나열하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가서도 의례적인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돌아온 주인공을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비인간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언론을 장식하는 사이코패스랑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거나 마치 남의 재판 구경하듯 하는 행동은 상식적으로 낯선 사람의 모습이다. 즉, 이방인의 모습인 셈이다.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속하지 않는, 속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주인공 뫼르소가 결국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법을 무시한 다른 죄목으로 사형당하는 모습 또한 이방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뫼르소의 친구들이 모두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걸 보니 뫼르소가 잘못 살지는 않은 듯하다. 곳곳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품고 있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분석된다는 까뮈의 <이방인>. 사르트르는 뫼르소에게서 까뮈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뫼르소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거창하게 해석했던데,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참 낯설고 독특한 주인공을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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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 세계적 교육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
요시다 타로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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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원어민 교사가 캐나다인이었다. 학교측의 배려로 학부모들도 원어민과 영어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원어민이 한국의 어린이들이 각자의 교실을 스스로 청소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단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활했던 것을 그들이 보기에는 독특한 교육으로 보였나 보다. 그 이야기를 큰아이에게 했더니 대뜸 이런다. "직접 해보라고 그래!" 내 딴에는 우리 교육 방식이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것보다 훨씬 낫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건데 완전 빗나갔다. 남이 보기에 교육적이고 획기적인 일도 당사자가 느끼기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다. 오죽하면 5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날까.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성취수준도 높지만 만족감은 낮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교육은 백년을 바라보고 계획해야 하는데 책임자(장관이 됐든 교육감이 됐든)가 임기 안에 성과를 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졸속으로 진행해서 그렇다는 비판 말이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왜곡하는 열혈 학부모가 있는 한 변하기는 힘들다는 소리도 들린다.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쿠바의 교육을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이 무척 궁금했다.

 

  쿠바하면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핵 위기도 떠오르고, 관타나모 기지며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구책으로 실시한 정책들이 오히려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것도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저자도 지적했듯이 혁명으로 지금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는 해도 어쨌든 독재를 했고 지금은 정권을 동생에게 물려주는, 상식적으로 보기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나라라는 점에서 과연 벤치마킹할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안에 있는 '교육'을 따로 떼어내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가 가장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지나친 경쟁과 모든 것을 돈으로 가치를 매기려고 하는 모습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연대니 조합이니 하며 서로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던데 쿠바의 경우는 그것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사실 정리해고를 하더라도 쿠바처럼 급여가 그대로 나오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시켜준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얼마나 환상적인 정책인가 말이다. 그러나 어떤 논문에서 지적했다고 하듯이 아주 일부만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밖에서 보기엔 이상적인 정책으로 보여도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헛점이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큰아이가 화내며 이야기했듯이.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정책을 여러 번 언급하했던 사실도 그렇고. 원래 사람이란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육정책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정책에 대해 환상을 갖진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큰아이가 이 책을 보더니-비록 책을 읽진 않았지만-쿠바로 유학가고 싶단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쿠바는 못 사는 나라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갖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더니 한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의료나 문화, 복지와 같은 수준을 외부에 보여지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또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아닐런지. 실은 나도 쿠바가 의료천국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교육수준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생경한 지명과 연결되지 않는 이름들, 그리고 예를 든 것들이 일목요연하지 않은데다 숫자가 너무 많이 나열되어 집중하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정리해서 시스템을 설명하는데 이용했더라면 이해가 쉬웠을 텐데 그냥 장황한 설명이 계속되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야심차게 읽기 시작했다가 끝까지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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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해리는 아무도 못 말려 동화는 내 친구 5
수지 클라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프랭크 렘키에비치 그림 / 논장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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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적 차분한 아들을 키워서인지 유난히 극성맞고 분주한 아이들을 보면 적응이 안 된다. 그나마 이제는 그런 아이들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극성맞고 말도 안 듣고 천방지축인 아이가 예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선생님들이 공부 잘하고 모범생인 아이보다 말썽부리고 힘들게 했던 아이들이 기억에 더 남는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실 해리 같은 아이가 반에 있다면 그 반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툭하면 여자 아이들을 놀리고 남자 아이들과 싸우니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해리가 못된 마음을 갖고 먼저 시비를 거는 일은 거의 없다. 시드니와 싸우거나 복수하는 경우도 시드니가 먼저 놀렸기 때문일 뿐이다. 사실 공개적으로 놀리는데 그냥 넘어갈 아이가 얼마나 될까.

 

   먼저 해리의 장난을 나열하자면, 얼룩뱀으로 여자 아이들 놀래키기, 놀이할 때 진짜로 알밤 먹이기, 간지럽혀서 복수하기, 선생님께 드릴 컵케이크 몰래 먹기, 몽당 괴물 만들어 놀래키기(그런데 이건 전혀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모두들 해리의 몽당괴물을 귀여워했으니까) 등등. 그런데 해리의 장난을 보면 모두 귀여운 것들이다. 몽당 괴물을 만들기 위해 교실 바닥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하니까. 핼러윈 축제 때 변신한 모습은 또 어떻고. 추수감사절 연극에서 자기가 하기로 한 역할이 마음에 안들자 그걸 해결하는 방법도 기발하다. 정말 못된 아이라면 다른 역을 하겠다고 우기거나 아니면 아예 소극적으로 임해서 연극을 엉망으로 만들텐데 해리는 슬기롭게 해결한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 때문에 친한 친구를 배신했다가 다시 화해하는 모습은 참 귀엽다. 이런 해리를 가끔 장난친다고 해서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도 해리를 좋아하는 것일 게다.

 

  이 책은 논장의 '동화는 내 친구'시리즈 5권이다. 그 시리즈를 예전부터 봐왔기 때문에 이제 나온 시리즈 번호일 리가 없을 듯하여 찾아보니 표지를 새로 바꾸고 다시 낸 것이다. 사실 재미있고 좋은 책인데 표지가 오래 되었거나 낡아서 아이들이 찾지 않는 책들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그런 책은 추천하면서도 자신이 없다. 분명 아이들이 옛날 책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처럼 새로 탄생하는 책을 환영한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기회비용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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