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여동생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1
펑슈에쥔 지음, 펑팅 그림, 유소영 옮김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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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아동문학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듯이 중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중일 3국 중 그나마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사실 우리의 아동문학을 이야기할 때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 안 그렇겠나. 1930년대의 작품속 아이들이 지금의 아이들 모습과 다른 것은 자명한 것을. 특히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굴곡이 질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작품을 평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했듯이 중국도 문화혁명을 겪으며 많이 변한 것으로 안다.

 

  여하튼 중국의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에 따라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동화를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당시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도 일정 부분 노동에 동원되고 '간부 댁 따님'이라도 그런 노동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해 어린이들도 돌 깨는 일을 하는 것과 묘족의 장례풍습을 볼 수 있는 것 등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네 일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위 공무원인 엄마와 아빠가 묘족마을로 잠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랴오벤의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묘족이라면 흔히 몽족이라고 하는 그 민족이다. 우리 학교 원어민 선생님도 몽족이던데. <총, 균, 쇠>에 의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상당히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라지.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읽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묘족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일 뿐 특별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아타오네보다 훨씬 여유있고 지식인층인 주인공의 서술 방식은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동화다. 그러나 자전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읽는 동안 주인공 자매의 생활에 동화되기 보다는 아타오네와 동네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더 눈이 갔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아슈 할머니나 동생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싼타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랴오벤을 귀찮은 동생쯤으로 생각하다 아타오의 막내 동생을 보며 자신의 동생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변화 과정을 보며 가슴 뭉클해진다. 그럴 때는 대개 우리 아이들도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겠지만. 여하튼 이런 책은 문학작품을 통해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마치 <압록강은 흐른다>나 <지로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문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그저 느낌만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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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냐오의 백합계곡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2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이철민 그림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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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책을 무수히 만나면서 영미권이나 유럽의 작가들은 이름만 대면 작품 이름이 술술 나올 정도가 되었지만 중국의 작가는 오직 한 명만 기억난다. 바로 차오원쉬엔. 그렇다고 특별히 감동을 받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배경이 우리랑 비슷한 듯하면서도 이질적인 듯해서 상상하기 쉽기도 했지만 유럽의 동화책을 읽을 때만큼의 동경은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중국인들의 생활모습이나 정치 사회적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덩달아 아동문학 수준도 낮게 여겼던 게 사실이다. 특히 그동안 만났던 중국 작가-특히 이 작가-의 작품이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하거나 낙후된 의식수준을 드러내는 책들이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현실과의 치열한 고민 끝에 성장한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고 그저 생활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발전된 중국의 아동문학을 만난 듯했다.

 

  우리와 연관되지 않은 중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언제로 상정해야 할지 몰라 헷갈렸지만 읽으면서 그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판타지와 현실의 절묘한 조화,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면서 차츰 성장하는 모습 등이 그동안 만났던 이 작가의 작품들은 물론 다른 중국 작가의 동화와는 달랐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처음에는 현재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옛날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몰라 상상하는데 약간 헤매기는 했다. 말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생활모습이 근대적이라 그때그때 연상되는 모습을 따라야했다. 하긴 그런 것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런 판타지 요소가 들어간 책에서는 더욱 더.

 

  이 책은 한 마디로 흰독수리 발에 묶여 있던, 즈옌이라는 소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즈옌을 구하러 가는 건냐오의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꿈속에서 즈옌이 살고 있는 곳을 본 건냐오는 그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더구나 천에 쓴 편지까지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건냐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편지일 뿐 흰독수리도, 꿈도 건냐오의 환상이 만들어낸 일종의 몽상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건냐오의 아버지도 처음에는 믿지 않지만 결국 아들이 떠나도록 허락한다. 백합이 많이 피어있던 꿈의 모습에 의지해 백합이 핀 협곡을 찾아 무작정 떠나는 건냐오를 두고, 사실 독자도 제정신이라고 믿어주기는 힘들다. 서쪽으로 떠나면서 겪는 모험은 또 어떻고.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도 혼란스럽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건냐오의 모험은 더욱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가는 곳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여지없이 나쁜 사람도 만나 곤경에 처하지만 마찬가지로 신비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여기에는 약간의 옛이야기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특히 하얀 말의 경우가 그렇다. 처음에  하얀 말을 얻게 된 경위도 그렇지만 그 후로 끝까지 건냐오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하긴 옛이야기는 모두 환상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건냐오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력자가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실패를 거칠 때마다 건냐오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반성한다. 그래서 끝내 건냐오가 백합계곡을 찾아가고 그런 성취 못지않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안락한 집과 가족을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비록 나중에 다시 안락한 곳으로 돌아올지라도 일단은 떠나야 하는 것이다. 건냐오는 어린이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동안 계속 모험을 했다는 점이 보통의 동화와 다르지만 그의 여정만큼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완전한 판타지를 상상하지 못하고 현실과 비슷한 배경을 설정하거나 약간의 억지(힘들게 사막을 건넜다가 돌아와서 다시 떠날 때는 분명 같은 방향으로 갔음에도 사막이 나타나지 않아 의아했다.)로 의문이 남긴 했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중국의 동화책 중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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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돌이 우리 형
존 D. 피츠제럴드 지음, 하정희 옮김, 정다희 그림 / 아롬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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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부모 세대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어렵고 힘들었어도 옛날이 좋았고 그립다고. 모내기 철이 되면 품앗이를 하기 때문에 동네 모내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근 한 달간 힘들게 일을 하고, 저녁에 늦게 돌아와서 빨래며 집안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원래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짜 힘들었던 일을 제외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기억된다지만 그립다면 몰라도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힘들게 일 하는 것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과 사람 사는 것처럼 지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기억에도 당시는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느껴졌으니까. 우리 옆은 아이가 많았는데 우리 엄마가 먹을 걸 만들면 그 집 아이들이 우르르 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엄마는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었었지. 마치 존의 엄마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잃어버린 추억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씌어진 연도를 보니 1967년이란다. 장소만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정서는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풍부하진 않더라도 서로 돕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며 아이들도 집안일을 나름대로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 상당히 너그럽고 공정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존의 엄마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식을 보고 내심 놀랐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시는 모두 그랬겠지만.

 

  존이 바로 위의 형인 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이지 톰은 못말리는 개구쟁이다. 그러나 무조건 말썽만 부리는 게 아니라 아주 의로운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견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지나치게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얘끼다. 이민자인 바실리우스를 위하여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주고 싸움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사실은 바실리우스 아빠가 제안한 '돈'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그런 식의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좌절한 앤디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도 역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뭔가 댓가를 요구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진짜로 톰이 변해서 속에서 뭔가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며 개과천선하게 된다.

 

  톰이 꾀가 많고 영리하긴 하지만 그건 모두 뭔가 대가가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경우에는 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밉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미워할 수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도 속은 것 같아서 항의하다가 결국 형의 설득에 넘어가서 오히려 사과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게 어디 존 뿐인가. 독자도 존과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중간중간 위트가 넘친다. 처음에 바실리우스에게 삼형제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장면과 영어를 잘 하는 바실리우스 아버지에게 가서 이름을 제대로 말해 달라고 하는 장면, 앤디가 자살하겠다고 하자 존이 진지하게 도와주지만 결국 실패해서 오히려 존이 미안해하는 장면, 톰한테 불합리한 점을 따져보지만 형의 설득에 넘어가 사과하는 장면 등 읽으면서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어렵고 사는 게 힘든 시절이지만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놀며 지내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지는데, 문득 우리 아동문학에서 70년대를 그리는 어린이는 어떤가 생각해 본다. 대개 일하는 아이들, 힘겹게 문제를 헤쳐가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현덕의 글에 생각이 미친다. 맞다, 현덕의 글에 나오는 노마와 기동이, 영이(이름이 맞는지 모르겠다.)가 노는 모습이 마치 톰과 존이 노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작품이, 그런 작가가 있었지. 순수하게 어린이다운 이야기, 현덕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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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5
헤르만 헤세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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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어떤 사이트에 가입할 때 가장 감동적인 책을 쓰라는 질문을 받을 때 적는 게 바로 <데이안>이다. 그러나 무안하게도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읽은 책인데 당시 어려웠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에 나도 많이 끌렸다는 점이다. 그때만 해도 다른 매체에서 인용된다던가 사람들이 추앙하는 글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그냥 끌렸던 듯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면서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더랬다. 모르긴 해도 그 후부터 이 책이 더욱 가슴속에 남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에 대해 그런 경험이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의 환희란 경험해보지 않고는 표현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하튼 그러한 경험을 했던 책이 바로 <데미안>이라서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지라 읽어보고 싶은 것과 읽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딸에게 읽어봤으면 하는 책 중 하나라서 민음사의 책을 사줬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푸른숲주니어에서 보내준 이 책을 받고 그 날 당장 읽기 시작했고 금방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 그 여운을 더 느끼고 싶어서 다른 책을 안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지라 며칠을 미루고 말았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했던 시절,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는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읽은 지금도 그 당시와 다르지 않은 감흥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둘이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단순히 내용만 새록새록 상기되는 게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와 느낌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테스>에서 건초 냄새가 나는 길을 마차를 타고 가는 부분이 있다면 가을의 어떤 부분과 연결지어서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중에 <테스>를 떠올리면 내용보다 시골의 그런 정취가 기억에 더 남는 것이다. 분명 이 책을 읽을 당시도 주변의 것보다 내 안의 감정에 더 천착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그때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피상적인 일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싱클레어의 자기내면으로 향한 고뇌와 데미안의 충고가 그토록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와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아 버렸던 게 아닐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당시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읽었을지 의문이 든다. 서양의 종교가 발전하고 변천하는 과정도 몰랐을 테고 독일이 어떤 나라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텐데 여기서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으니 그런 부분은 그냥 넘겼을 것이다. 그래도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를 읽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 제대로 된 대화와 생각이 무엇인지 느끼지 않았을런지. 솔직히 요즘 아이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도대체 그 중에서 대화라고 할 만한 게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 하긴 어른들의 대화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언제나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언제나 하나마나 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서양의 문학고전을 읽다 보면 종교에 천착(솔직히 내가 보기엔 집착같지만)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종교를 갖지 않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여기서도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그다지 거슬리거나 이해가 안 가거나 하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 문학도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런 부분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의아했던 것은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전쟁에 어떠한 거부감이나 의심 없이,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원한다는 부분이다. 데미안이 전쟁에 나갔다면 그것은 독일군으로 참전한 것일 텐데 말이다. 헤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던가? 소설은 당시 사회를 비춘다는데, 요즘 우리 사회를 비추는 소설은 뭐가 있을까. 내가 워낙 그런 소설을 즐기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제대로 사회를 풍자하고 꼬집는 책은 없어 보인다. 자극적이고 판타지적인 것 뒤로 숨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해 본다. 물론 우리 소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여전히 감흥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아주 오랜만에 옛날을 떠올리며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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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션맨이 왔어요! 그림책은 내 친구 33
미니 그레이 글.그림, 황윤영 옮김 / 논장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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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운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서 한동안 장난감과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 게다가 온갖 상상력을 덧붙여 장난감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생물로 취급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미 트랙션맨 인형을 갖고 있었지만 험하게 갖고 놀았는지(이후에 새 트랙션맨을 갖고 노는 걸 보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고장나서 산타할아버지한테 새 트랙션맨을 사 달라는 편지를 쓰는 주인공. 그리고 잠을 자는 방에 선물을 두고 가는 어른의 뒷모습이 나오는 첫 장면으로부터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말이나 글로 하지 않지만 속표지의 편지와 그림 한 장면에서 그간의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선물을 받은 주인공은 신나서 트랙션맨을 갖고 논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줄곧 트랙션맨을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을 주인공 아이가 조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이 노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여러가지 사건은 모두 트랙션맨이 해결한다. 트랙션맨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것 같지만 모두 주인공 꼬마가 트랙션맨을 갖고 노는 모습이라는 얘기다. 얼마나 좋으면 설거지도 나서서 하고 거기서 쓱쓱 솔이라는 애완동물까지 얻는다. 물론 아이들에게, 특히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까지 선물로 받은 아이에겐 설거지도 일종의 놀이일 뿐이지만.

 

  설거지 도중 트랙션맨을 도와준 솔을 애완동물로 명명하고 난 후 둘은 어디든 함께 다닌다. 솔을 애완동물로 생각하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할머니 집까지 갖고 가는 것으로 봐서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일회성 장난은 아닌 듯하다. 그야말로 진짜 놀이가 된 것이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도중 '둘은 긴 여행 동안 꼼짝도 않고 죽은 듯이 자기도' 한다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면 주인공 아이가 트랙션맨과 솔을 끌어안고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 의자에는 트랙션맨을 그린 그림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정말 요 또래 아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트랙션맨의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준비하는 자상한 할머니 모습은 읽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그동안 주인공의 다양한 행동과 놀이를 보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 전에는 이런 걸 봐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결코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여하튼 할머니가 준 선물을 정작 트랙션맨은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 선물로 일을 멋지게 해결하고 영웅이 되기까지 한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펼쳐 놓고 있는데 한 아이가 오더니 읽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물론 된다고 했더니 다 읽고 나중에 책 읽어 주기 할 때 읽어 달란다. 그러면서 마지막 초록색 옷으로 숟가락을 구해 준 일이 재미있었는지 그 부분을 이야기한다. 읽어주고 싶긴 한데 글이 생각보다 많아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읽어주면 몰입도는 좋을 것 같으니 수요일엔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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