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준마가 마구간에 엎드려 있다.

   老驥伏欐(노기복려)

 

2075월 조조(曹操)는 관도(官渡) 전투에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원소(袁紹)를 대파했고, 7월에는 대군을 이끌고 노룡채(盧龍寨)를 나와 오환烏桓을 정벌했다. 이 무렵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과 원희(袁熙)는 평주의 공손강(公孫康)에게 도망쳐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조조의 측근들은 내친김에 평주를 공략하여 원씨 형제를 뿌리 뽑자고 했다. 조조는 이들이 서로 반목하다가 죽일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물렸다. 조조의 예상대로 공손강은 원씨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군을 전부 수습하여 회군했다.

하북 창려에 이르러 조조는 동쪽 갈석산에 올라 동해를 굽어보며 관창해」(觀滄海)라는 천고의 명시를 남겼고, 군영으로 되돌아와 지친 몸과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늙은 준마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은 천 리를 달린다. 피 끓는 용사 나이 들었지만 굳센 마음 여전하구나.”(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 당시 조조의 나이 쉰셋이었다. ‘노기복려’(老驥伏欐)는 바로 이어지는 지재천리’(志在千里)와 함께 많이 인용된다. 전장을 누볐던 조조의 회한과 의지가 묻어는 명시다.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 '조조의 동작대 연회'

 

 

 

 

 

 

중국사의 오늘 :

1929122

중국 고생물 학자 배문중(裴文中)이 북경 주구점(周口店) 용골산(龍骨山) 동굴에서 북경인으로 불리는 원시인 두개골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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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空洞無物(공동무물)

 

동진(東晉) 시기의 명사 주개(周顗)는 재능과 활달한 유머로 명성을 떨쳐 동생의 질투를 살 정도였다. 주개는 늘 상대를 웃게 만들어 그와 관련한 일화가 많다. 한번은 최고 가문 출신의 왕도(王導)가 황제 명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제가 진장(眞長)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주개는 서슴없이 그 사람은 등에다 천 근을 짊어질 수 있는 황소이지요.”라고 답했다. 왕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주개는 굽은 뿔을 가진 늙은 어미 소만은 못하지요.”라고 했다. 왕도를 비유한 우스갯소리였다. 왕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 왕도가 주개와 술을 마시다 취중에 주개의 불룩한 배를 가리키며 대체 그 안에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나왔소?”라고 놀렸다. 주개는 사실 이 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오. 하지만 그대 같은 사람 수백 명은 충분히 담을 수 있지.”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은 박장대소했다. ‘공동무물’(空洞無物)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만 문장이나 말에 내용이 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調)

 

 

 

 

 

중국사의 오늘 :

702121(무주 장안 211월 신미)

무측천이 혹리 내준신(來俊臣) 등이 처리한 사건을 다시 심사하게 하여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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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행

이백(李白)*

 

촉룡이 차가운 문에 깃들어

빛이 여전히 아침에 열린다.

해와 달의 빛이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으리.

오직 북풍이 노호하여 천상에서 내려오는구나.

연산에 내리는 눈꽃의 크기는 연꽃 같아서

편편히 불리어 헌훤대에 떨어지는구나.

유주에는 십이월에 임 생각하는 아낙들

노래 그치고 웃음 그치고 두 눈썹도 꺾였구나.

힘없이 문에 기대어 길 떠난 임을 바라보며

만리장성에 계신 임의 고통과 추위를 생각하니 애련하기만 하여라.

떠나던 날 칼을 가지고 변방을 구하러 가더니

이 호랑이 무늬 박힌 화살 통만 남기셨도다.

통 속에는 한 쌍의 흰 깃털 화살만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만 이는구나.

화살 통만 남아

사람은 전쟁에 죽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차마 이 물건을 보지 못하여

태워서 이미 재가 다 되었도다.

황하의 물은 오히려 흙으로 막을 수 있건만

북풍과 눈비는 없애 버리기 어려움을 한하노라.

 

 

 

北風行

 

燭龍棲寒門, 光曜猶旦開

日月照之何不及此, 惟有北風號怒天上來

燕山雪花大如席, 片片吹落軒轅臺

幽州思婦十二月, 停歌罷笑雙蛾摧

倚門望行人, 念君長城苦寒良可哀

別時提劍救邊去, 遺此虎紋金鞞靫

中有一雙白羽箭, 蜘蛛結網生塵埃

箭空在, 人今戰死不復回

不忍見此物, 焚之已成灰

黃河捧土尚可塞, 北風雨雪恨難裁

 

 

* 이백. ‘5월의 시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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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돌(장기 알)을 든 채 놓지 못하다.

   擧棋不定(거기부정)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헌공은 폭군이었다. 대부 손문자(孫文子)와 영혜자(寧惠子)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헌공을 내쫓고 공손표(公孫剽)를 국군으로 맞아들였다. 그 뒤 영혜자는 후회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죽음을 앞두고는 아들 영도자(寧悼子)에게 제나라에 있는 헌공을 다시 맞아들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런 정황을 포착한 헌공은 자신이 귀국하면 정치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노라는 언질을 주었다. 대부 숙의(叔儀)는 무슨 일이든 앞뒤가 맞아야 하는데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맞아들이겠다는 것은 무엇이냐며 바둑돌을 들고 놓지 않고 머뭇거리다가는 기회를 놓치고 실패할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영도자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버지 영혜자의 유언대로 헌공을 맞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공손표, 손문자까지 죽이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렇게 하면 헌공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 헌공은 암암리에 보복을 준비했고, 대부 공손면(公孫免)을 이용하여 결국 영도자는 물론 영씨 세력 전체를 철저하게 제거했다. ‘거기부정’(擧棋不定)은 그 뒤 어떤 일을 맞이하여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중국사의 오늘:

16571130(청 세조 순치 1410월 갑오)

순천향시의 시험과 이진업(李振鄴) 등이 과거 시험과 관련한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두 명의 거인(擧人)도 연루되어 죽었다. 비슷한 부정 사례가 계속 발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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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금옥이나 속은 말라비틀어진 솜덩이

   金玉其外, 敗絮其中(금옥기외, 패서기중)

 

명나라 때 개국공신인 유기(劉基)의 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항주에 홍귤을 파는 상인이 있었다. 여름에는 귤을 저장하기가 아주 어려운데도 이 상인은 귤을 아주 잘 저장했는지 늘 황금빛이 도는 것이 막 딴 것처럼 아주 신선해 보였다. 어느 날 유기가 길을 가다가 이 홍귤을 보고는 하도 신기해서 몇 알을 샀다. 집에 가지고 와서 껍질을 벗겨 보니 속은 다 말라비틀어진 것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유기는 귤을 들고 그 상인을 찾아가 따졌다.

그런데 상인의 반응이 아주 뜻밖이었다. “내가 이 귤을 판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지금까지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소이다. 내가 사람들을 속였다 해도 그건 생계를 위한 것일 뿐이오.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살고 있는 문무 대관이 어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이치를 알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오? 그자들은 여기 내가 팔고 있는 귤처럼 겉은 금옥처럼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말라비틀어진 솜덩이와 하나 다를 바 없지 않소이까?” 유기는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냥 풀이 죽은 채 발길을 되돌리는 수밖에. 이 성어는 겉만 화려하고 속은 보잘것없는 물건이나 사람을 비유한다.

 

고문관지』(古文觀止) 명문」(明文)

 

* 유기

 

 

 

 

 

 

중국사의 오늘:

19741129

중국 공산당 혁명가이자 군사가로서 중국 인민해방군을 창설한 팽덕회(彭德懷)가 강청 등 4인방의 박해를 받아 북경에서 향년 76세로 죽었다.(189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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