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하려면 철저히 하라.

   一不做, 二不休(일부주, 이불휴)

 

당나라 때 사람 조원일(趙元一)이 편찬한 봉천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755년 안녹산의 난 때의 일이다.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반란 진압군을 급파했다. 첫 전투에서 대장 왕사례(王思禮)는 하마터면 화살에 맞아 죽을 뻔했다. 이 위기상황에서 왕사례를 구한 사람은 장광성(張光晟)이었다. 왕사례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장광성을 군정에 추천했고, 장광성은 승진을 거듭했다. 그 뒤 장광성은 반란군의 우두머리 주차(朱泚)의 부장이 되었고, 주차가 황제로 자청하면서 재상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반군은 이성(李晟)이 이끄는 정부군의 압박을 받아 와해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장광성은 몰래 이성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 의사를 밝혔다. 이성은 사면을 조건으로 장광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황제 덕종은 장광성을 반역을 용서하지 않고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처형에 앞서 장광성은 후세에 한마디 하노라. 첫째, 하지 마라! 둘째, 그래도 하겠다면 멈추지 마라.라며 원통해했다. 반역자 장광성의 분한 마음이 담긴 말이지만, 무슨 일이든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뜻의 성어로 압축되었다.

 

봉천록(奉天錄)

 

 

 

 

 

중국사의 오늘:

11551118(남송 고종 소흥 2510월 병신)

간신 진회가 66세로 죽었다(1090년생). 훗날 사람들은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상을 만들어 그 간행을 단죄했다.

 

 

* 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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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가 이 게와 같지 않다.

   一蟹不如一蟹(일해불여일해)

 

소식(蘇軾)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원에 애자(艾子)라는 사람이 살았다. 바다를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애자가 바다 구경을 했다. 모든 게 다 신기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그물에는 이런저런 물고기 외에 한 근이나 나감직한 큰 게가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애자가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어부는 웃으며 게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뒤 애자는 처음 본 게와 비슷한 게를 또 보게 되었다. 애자는 이것도 게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그곳 사람은 그건 민물게라고 일러 주었다. 처음 본 것은 바닷게였던 것이다. 그 뒤 애자는 또 민물게와 비슷하게 생긴 게를 보게 되었다. 애자는 또 이것도 게냐고 물었고, 그 지역 사람은 게는 게인데 애자가 지금까지 본 게들과는 다른 게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자 애자는 아이고! 어찌 이렇게 같으면서 다른 물건들이 있을꼬! 어째 이 게가 저 게가 다르단 말인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해불여일해’(一蟹不如一蟹)는 게가 다 다르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고,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는 뜻도 된다. 그리하여 같아 보이지만 다르고 차이가 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애자잡설(艾子雜說)

 

* 소식

 

 

 

 

 

 

중국사의 오늘:

18431117

남경조약오구통상장정의 규정에 따라 상해가 이날 개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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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 태수

   一錢太守(일전태수)

 

유총(劉寵)은 한나라 때의 청백리로 유명했다. 그가 회계 지역 태수로 부임할 무렵 백성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총은 번거로운 법령과 절차를 없애거나 간소화하여 백성을 이롭게 했다. 그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던 날 산음현의 백발노인 대여섯 명이 산속을 나와 유총을 찾아왔다. 그런데 이 노인들이 모두 각자 100전이란 적지 않은 돈을 유총에게 전별금으로 내놓았다. 유총이 이들을 위로하며 돈 받기를 사양하자 노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산골에 사는지라 관청 구경을 못해 보았습니다. 다른 태수는 백성에게 이런저런 세금을 뜯어내는 통에 밤낮없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훌륭한 분이 떠나신다기에 싸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유총은 이 몸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음의 징표로 한 사람당 1전씩만 받았다. 이로부터 일전태수는 청렴결백한 관리를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유총 같은 청백리는 고사하고 1전의 의미도 모르는 자들이 1전을 받았다고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세상이다.

 

후한서(後漢書) 유총전(劉寵傳)

 

 

 

 

 

중국사의 오늘:

6551116(당 고종 영휘 610월 기유)

고종이 왕 황후를 폐하고 소 숙비는 서인으로 내쳤다. 이어 22일에 무씨를 소의에 책봉하고, 124일에는 황후에 책봉했다. 이가 무측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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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명의를 빌려 사리사욕을 취하다.

   假公濟私(가공제사)

 

한나라 성제 때 외척 왕망(王莽)은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숨긴 채 성인군자처럼 위장하여 조야의 인심을 농락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방진(翟方進)이었다. 재상 적방진은 공명정대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있는 한 왕망의 야욕은 쉽게 달성될 수 없었다. 왕망의 유혹에 넘어간 적방진의 절친한 친구 이심(李尋)은 별자리의 이상 현상을 불길한 징조로 왜곡하면서 그 책임을 재상에게 씌우려 했다. 어리석은 성제는 적방진을 추궁했고, 견디다 못한 적방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성제는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며 적방진을 사면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 했다. 그러자 두업(杜業)을 비롯한 왕망의 졸개들이 들고 일어나 적방진을 공적인 명의를 빌려 사리사욕을 취했다.’고 헐뜯으며 성제의 명을 취소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공공이란 이름을 내걸고 사적인 이익과 욕심을 갈취하는 자가 가장 입에 많이 올리는 단어가 ’()이다. 공사 구분이 분명한 사람은 굳이 이란 단어를 거론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공제사탁공보사’(托公報私)로 쓰기도 한다.

 

한서(漢書) 두업전(杜業傳)

 

 

 

 

중국사의 오늘:

19081115

자희태후(일명 서태후)74세를 일기로 죽었다(1835년생).

 

*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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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낡은 빗자루

   家有弊帚(가유폐추)

 

25년 유수(劉秀)가 황제로 칭하면서 동한 왕조가 건립되었다. 역사에서는 그를 광무제(光武帝)라 한다. 정권 초기, 지방에는 여전히 할거 세력이 난립하며 통일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중에서 파촉(巴蜀) 지역의 공손술(公孫述)이 가장 강력했다.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손술을 토벌하게 했다. 승승장구하던 잠팽은 뜻하지 않게 공손술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오한은 유우(劉禹)를 보내 다른 방향에서 공손술을 공격하게 했지만 참패했다. 오한은 유우와 합류하여 전력을 정비한 다음 다시 공격을 가했다. 격전 끝에 공손술은 죽었고 파촉 지역은 평정되었다. 혼이 난 오한은 분풀이로 공손술과 그 장수들 가족까지 모두 죽이고 성도에 병사를 풀어 노략질을 시작했다. 광무제는 이 사실을 알고 즉각 사람을 성도로 보내 노략과 살육을 중지시키는 한편 백성에게는 집에 남은 다 떨어진 빗자루라도 천금만큼 귀한 법인데 책임이 막중한 장수들이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라며 나무랐다. ‘가유폐추’(家有弊帚)는 자신이 가진 물건이 좋지는 않지만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동관한기(東觀漢記) 광무제기(光武帝紀)

 

 

* 광무제

 

 

 

 

 

 

중국사의 오늘:

8371114(당 문종 개성 210월 계묘)

국자감에서 12종의 유가 경전을 돌에 새겨 지식인에게 제공하는 석경(石經)을 만들었다. 이 석경은 현재 서안 비림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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