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가 무겁고 백금은 가볍다.

   一言爲重百金輕(일언위중백금경)

 

개혁가 왕안석(王安石0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왕안석은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지만 특권 수구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물러난 왕안석은 글을 지어 시류의 폐단을 폭로하고 자신의 포부를 거듭 밝혔다. 그는 상앙이라는 칠언시를 통해 상앙(商鞅)이 개혁에 앞서 백성의 신뢰를 얻은 점을 강조했다.

상앙은 성 남문에다 석 장 높이의 나무 기둥을 세워 놓고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금 200냥을 주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믿지 않자 상앙은 상금을 1천 냥으로 올렸고, 기둥을 옮긴 한 젊은이에게 그 자리에서 상금을 주었다. 이 일로 백성이 상앙의 개혁법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왕안석은 이 사례를 빌려 자신의 개혁 의지를 나타냈다.

개혁이든 정책이든 인간관계이든 모든 일의 시작은 상호 신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백성을 믿지 못하는 위정자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내고, 심지어 가상의 적까지 만들어 백성을 공격한다. 실패한 위정자의 일관된 공통점이다.

 

임천집』(臨川集) 상앙」(商鞅)

 

 

* 왕안석

 

 

 

 

 

 

중국사의 오늘 :

18881217

청 정부의 북양해군(北洋海軍)이 정식으로 창군되어 정여창(丁汝昌)이 제독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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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검술을 연마하다.

   聞鷄起舞(문계기무)

 

진나라 사람 조적(祖逖)은 어렸을 때는 공부를 게을리했지만 청년이 되면서 지식의 빈곤을 절감하고 분발하여 공부했다. 그 뒤 유곤(劉琨)과 함께 벼슬을 하면서 침식을 같이할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한 기둥이 되어 큰 공을 세우겠다는 원대한 이상도 함께 품었다. 어느 날 밤, 조적이 꿈에서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잠에서 깼다. 조적은 곤히 자고 있는 유곤을 깨워 남들은 한밤중에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검술을 연마하는 게 어떨까?”라고 말했다. 유곤은 흔쾌히 동의했고, 두 사람은 매일 닭이 울면 일어나 검술을 닦았다. 두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문무를 갈고닦아 서로 약속하고 꿈꾼 대로 나라의 동량이 되었다. ‘문계기무’(聞鷄起舞)는 뜻을 가진 인재가 때맞추어 분발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묘사한 성어이다.

 

진서』(晉書) 조적전」(祖逖傳)

 

 

 

 

 

중국사의 오늘 :

7051216(당 중종 신룡 원년 11월 임인)

무측천이 낙양 지양궁(止陽宮) 선거전(仙居展)에서 향년 82세로 죽었다(62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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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나무 가지를 꺾다.

   折桂(절계)

 

극선(郤詵)은 진나라 무제 때 사람이다. 무제가 천하에 유능한 인재를 추천받아 선발하라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다. 극선은 시국에 대한 대책을 논한 글을 제출했고, 이것이 주목을 받아 의랑이란 벼슬을 받았다. 극선은 능력을 발휘하여 승진을 거듭했고 마침내 옹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자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무제는 어전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극선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경은 자신을 어떻다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극선은 신이 대책으로 선발된 것은 계수나무 숲에서 계수나무 가지 하나를 꺾은 것에 지나지 않고, 곤륜산 아래에서 옥석 하나를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臣舉賢良對策, 爲天下第一, 猶桂林之一枝, 昆山之片玉)라고 응수했다. 무제는 웃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시중 하나가 극선이 조정이 베푼 은혜를 경멸한다며 당장 관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자 무제는 내가 극선과 농담을 주고받은 것뿐인데 왜 그렇게 호들갑인가.”라고 나무랐다. 자사로 부임한 극선은 엄격한 법집행과 과감한 정책으로 크게 위신을 세우고 백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극선이 말한 계수나라 가지 하나를 꺾다.’에서 절계’(折桂)라는 단어가 나왔고, 이는 훗날 고시 급제를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극선의 호기가 묻어나는 재미난 성어이다.

 

진서』(晉書) 극선전」(郤詵傳)

 

 

 

 

 

중국사의 오늘 :

12801215(원 세조 지원 1711월 경신)

파스파 문자를 창안하는 등 티베트 지역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을 미쳤던 파스파(八思巴)가 죽었다. 향년 45(1235년생).

 

 

* 파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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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만 듣고, 코를 꿰다.

   聽人穿鼻(청인천비)

 

493년 남조 제나라 무제가 죽자 그 손자 소소업(蕭昭業)이 뒤를 이었고, 무제의 유언에 따라 이부상서 서효사(徐孝嗣)가 새 군주를 보좌하며 조정을 이끌었다. 일 년 뒤 소란(蕭鸞)은 황제 찬탈의 음모를 꾸미면서 서효사의 지지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움을 청했다. 서효사는 반대하지 않았다. 서효사의 친구 악예(樂豫)가 이를 알고는 서효사를 책망했다. 하지만 서효사는 소란이 무서워 악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소란이 서효사를 방문했다. 서효사는 소란의 압박에 굴복하여 끝내 소란의 반란에 편을 들었다. 거사하는 날 대장군 소심(蕭諶)이 궁중에 진입했고, 이어 소란이 서효사 등의 수행을 받으며 입궁했다. 소소업은 놀라서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은 소심 등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장홍책은 이 사건을 논평하면서 서효사는 대들보나 주춧돌 같은 인재가 되지 못하고, 코를 꿴 채 끌려가는 소처럼 남의 말만 듣는 자일 뿐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모든 권력에는 견제가 필요하다. 특히 권력층 내부에서 건전한 상호 견제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권신이 설치게 되고, 권력은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남사』(南史) 장홍책전」(張弘策傳)

 

 

 

 

 

중국사의 오늘 :

19801214

국무원이 중화인민공화국 개인소득세법 시행세칙중화인민공화국 중외 합자경영기업 소득세법 시행세칙을 발표했다. 개혁개방에 발맞추어 이루어진 법률 정비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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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가 죽지 않으면 노나라의 난리는 끝나지 않는다.

   慶父不死, 魯難未已(경보불사, 노난미이)

 

기원전 662년 노나라 장공이 죽고 공자 반(般)이 국군이 되었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잔인한 권력욕의 화신 경보(慶父) 때문에 두 달이 채 못 되어 피살되었다. 경보는 민공을 즉위시켰지만 내란의 주범인 경보에 대한 백성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시 제나라 환공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어 중원의 패주가 되었다. 환공은 노나라 내란에 관심을 갖고 대부 중손추(仲孫湫)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귀국한 중손추는 경보를 제거하지 않는 한 노나라의 재난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했다. 과연 경보는 민공마저 살해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경보는 거나라로 도망쳤다. 희공이 즉위한 뒤 노나라에서는 거나라에 경보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했고, 경보는 귀국하던 중 자살했다. 화근이 될 것 같으면 그 불씨까지 완전히 확실하게 제거해야지 눈에 보이는 급한 불만 꺼서는 안 된다.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리더는 경보의 사례를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측근이 권세를 믿고 설치면 나라 전체가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민공」(閔公)

 

 

 

 

 

중국사의 오늘 :

16271213(명 천계 711월 기사)

환관으로 명나라 조야를 뒤흔들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간신 위충현(魏忠賢)이 목이 졸려 죽었다. 향년 60(156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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