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에 불이 붙으면 재앙이 연못의 물고기까지 미친다.

   城門失火, 殃及池魚(성문실화, 앙급지어)

 

남북조 시대 동위(東魏)의 무장 후경(侯景)은 대승상 고환(高歡)의 아들 고징(高澄)과 사이가 나빠 서위(西魏)로 투항했고, 이에 고징은 한궤(韓軌)를 보내 후경을 토벌했다. 후경은 다시 남방 양나라에 투항했다. 양나라 무제는 소연명(蕭淵明)에게 동위를 정벌하게 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패했다. 동위의 장군 두필(杜弼)은 양나라에 격문을 보내 후경이란 소인배는 기회만 있으면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초나라 원숭이가 도망치자 재앙이 숲속 나무에 미쳤고 송나라 성문에 불이 나자 연못의 물고기까지 재앙을 만났듯, 장차 장강과 회하 유역, 형주와 양주 일대의 관리와 백성이 무고하게 전쟁의 고통에 빠질 것이 두렵다.라고 경고했다. 과연 후경은 반란을 일으켰고, 양나라는 몇 년에 걸친 전란에 엄청난 고통을 겪다 결국은 나라까지 망했다. 이 말은 지어지앙’(池魚之殃)이라고 줄여 말하기도 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재앙이나 큰 손실을 입는 것을 비유한다.

 

전북제문全北齊文 위동위격량문爲東魏檄梁文

 

 

 

 

 

중국사의 오늘 :

1064127(북송 영종 치평 원년 10월 무오)

요나라가 민간에서 사사로이 책을 인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인쇄술이 이미 요나라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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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지에서 한 발짝도 넘어오지 마라.

   不敢越雷池一步(불감월뇌지일보)

 

진(晉) 명제 때 사람인 유량(庾亮)이 온교(溫嶠)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유량은 명제 황후의 오라비로 조정의 실세였다. 당시 서부 변방이 편치 않았는데 유량은 대신 온교를 강주자사로 추천했다. 얼마 뒤 유량은 역양태수 소준(蘇峻)이 모반을 꾀한다는 밀보를 접했다. 유량은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소준을 조정으로 불러 대사마에 임명함으로써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그를 잡으려 했다. 대신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유량은 자신의 권세로 밀어붙였다. 그의 고집은 결국 이를 눈치 챈 소준의 선제공격을 초래했다. 이에 온교는 적극적으로 소준을 대적하자고 유량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유량은 서부 변방이나 잘 지키라면서 뇌지에서 한 발짝도 넘어오지 마라.”라고 경고했다. 수도 건강이 소준에게 함락당했고 유량은 하는 수 없이 온교에게 몸을 맡겼다. 온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받아들인 뒤 차분히 대비하여 소준의 공격을 물리치는 한편 몇 차례 전투 끝에 소준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 이후 불감월뇌지일보’(不敢越雷池一步)는 일을 처리함에 너무 소심해서 일정한 범위를 넘지 못하는 행동이나 사람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보온교서」(報溫嶠書)

 

 

 

 

 

중국사의 오늘 :

1711126(청 성조 강희 5010월 임오)

대명세(戴名世)남산집(南山集) 사건이 터졌다. 강희제에 대한 불경스러운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대명세가 처형되었고, 그가 인용한 글의 저자인 방효표(方孝標)는 부관참시되었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문자옥(文字獄) 사건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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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싸우지 않으면 서로 친해지지 않는다.

   不打不成相識(불타불성상식)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강주로 쫓겨난 송강(宋江)은 대종(戴宗)과 이규(李逵)를 만나 강변 비파정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안주로 올라온 어탕이 시원찮자 송강은 술집 주인에게 신선한 탕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하지만 술집에 신선한 물고기가 없었다. 성질 급한 이규가 내가 배로 가서 두 마리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종이 술집 주인에게 맡겨 두라고 했지만 이규는 막무가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규는 강변에 있는 고깃배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잡아 놓은 고기마저 다 도망가게 만들고 물고기를 담는 광주리마저 박살을 냈다. 물고기 주인인 장순(張順)이 와서는 이규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이규는 물에 익숙한 장순을 당해 낼 수 없어 잔뜩 물을 먹고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대종과 송강이 달려왔고, 대종은 장순에게 송강 형님께 인사를 드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송강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장순은 황급히 인사를 드렸고 이규도 소개를 받았다. 대종이 싸우지 않으면 친해지지 않는다더니 오늘 두 사람은 형제가 되었다.”라고 하자 모두 호쾌하게 웃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이 이 말이다.

 

수호전전』(水滸全傳)

 

* 송강과 이규

 

 

 

 

 

 

중국사의 오늘 :

1893125

중국과 영국이 회의장인조관’(會議藏印條款)을 체결했다. 영국은 18883월 티베트 지역을 침략하여 이 불평등 조약을 맺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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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생각이 겹친다.

   百感交集(백감교집)

 

위개(衛玠)는 진(晉) 회제 때 태자의 시종관인 태자세마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309년 급기야 북방 흉노 세력의 하나인 유유(劉裕)가 침공하여 시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난을 피해 위개는 벼슬을 버리고 식구들과 남방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하지만 원체 병약했던 위개로서는 피난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장강을 건너는데 지칠 대로 지친 위개는 식솔들에게 이 망망한 장강의 물을 보니 마음속에 온갖 생각이 겹치는구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뉘라서 이런 심사와 느낌을 떨칠 수 있으리오.”라며 탄식했다.

간신히 강남으로 피신했지만 위개는 편한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다시 건강으로 돌아왔지만 312년에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재주 많고 잘생겼던 위개는 때를 못 만난 데다가 병약하여 제명에 살지 못했다. 눈을 감는 순간에도 많은 생각이 세심한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만감(萬感)이 교차(交叉)한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같은 뜻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중국사의 오늘 :

1209124(남송 영종 가정 211월 병신)

평양에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대지진이 발생했다. 6일에 또 지진이 발생했다. 열에 일고여덟 채의 집이 무너질 정도의 강한 지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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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자가 부모를 기쁘게 하다.

   老萊娛親(노래오친)

 

노래자(老萊子)는 춘추 시대 초나라의 명사로 도가(道家)에서는 그를 시조로 받든다. 노래자는 벼슬이 싫어 산속에서 밭 갈고 농사지으며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래자는 귀여운 새를 기르며 새의 노래 소리를 들려 드리는 등 갖은 정성을 다했다. 어느 덧 노래자의 나이 칠십이 넘었다. 하루는 부모님이 백발의 아들을 보고는 아들이 이렇게 늙은 걸 보니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며 탄식했다. 노래자는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내색 않고 오색 옷을 지어 입고는 작은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었다. 칠십 먹은 아들이 재롱을 떠는 모습에 부모님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루는 노래자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노래자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땅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어린애가 우는 시늉을 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부모님은 아들이 일부러 넘어져 구르는 줄 알고는 정말 잘 노는구나. 어서 일어나렴.”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노래오친’(老萊娛親)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자식의 효성을 나타내는 성어이다.

 

열녀전』(列女傳)

 

 

* 노래자

 

 

 

 

 

 

중국사의 오늘 :

845123(당 무종 회창 511월 갑진)

무종이 불교 탄압의 일환으로 사찰에서 장애인을 돌보던 승려의 환속을 명령했다. 이로써 사찰이 부분적으로 담당하던 장애인에 대한 보살핌이 사라져 사회 문제가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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