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

   八公(팔공)

 

사기』 「회남형산열전의 주석서 가운데 하나인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인용된 회남요략(淮南要略)에 보이는 단어이다. 회남왕 유안(劉安)은 은밀히 빈객을 모아 자신이 세력을 키웠는데 수천에 이르는 빈객 중 여덟 명, 팔공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힘을 모아 편찬한 책이 회남자(淮南子)이다. 갈홍(葛洪)신선전(神仙傳)에는 이들 팔공이 신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서(晉書)에는 일찍이 유안이 팔공과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그 산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이후 팔공하면 문객 또는 뛰어난 문객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고, 간혹 신선이란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 또 한나라 초기 네 사람의 은자인 상산사호(商山四皓)와 함께 ‘84로 불린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구 팔공산은 한자는 같지만 유래가 다르다. 신라 말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신숭겸 등 여덟 장수가 전사했는데, 이들이 전사한 곳을 팔공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여덟 명의 인재와 관련된 단어이자 산 이름이다.

 

사기(史記)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중국사의 오늘:

2731113(서진 무제 태시 910월 신사)

여자가 17세가 되도록 출가시키지 않는 집은 지방관이 배필을 구해 주라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인구 증가를 위한 조혼 조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따로따로 단편적으로 들으면 어리석어진다.

   別而聽之則愚(별이청지칙우)

 

이어지는 구절은 전면적으로 두루 청취하면 밝아진다.”(合而聽之則聖)이다. 당 태종의 멘토 위징(魏徵)두루 들으면 현명해지고, 치우쳐 들으면 어두워진다.’라고 했는데 완전히 같은 뜻이다.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은나라 탕() 임금이나 주나라 무왕 같은 명명한 군주조차 저잣거리 사람들의 의견까지 두루 들었다고 한다. 전설 속 군주들인 오제(五帝)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리더십 항목 가운데는 경청, 사리분별, 백성의 절박한 요구를 헤아림, 사방의 민의 파악 등과 같은 겸청’(兼聽)’ 내지 합청’(合聽)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겸청이나 합청에는 진실한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사회적 공론을 모아야 정치가 제 길을 찾는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아랫사람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하게 된다. 그러면 아랫사람은 간신이 되고, 리더는 작게는 어리석은 리더, 크게는 나라를 망치는 망국의 리더가 된다. 리더 주위에 예스맨을 포진시킬 것이냐, ‘.’라고 할 수 있는 충직한 사람을 둘 것이냐는 오로지 리더의 귀와 마음에 달려 있다.

 

관자管子 군신 상君臣上

 

 

 

 

 

중국사의 오늘:

7251112(당 현종 개원 1310월 계축)

당나라 때의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승려였던 일행(一行)이 양영찬(梁令瓚)과 함께 혼천의(渾天儀) 제조에 성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집 안의 닭, 들판의 꿩

   家鷄野雉(가계야치)

 

이 성어는 남조 시대 송나라 사람 하법성(何法盛)이 동진(東晉) 시기의 사적을 기록한 78권의 기전체 진중흥서에 나온 일화에서 비롯된다.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한 시대를 살았던 유익(庾)이란 장수는 한때 왕희지와 나란히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서예가였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 활동에 쫓겨 서예를 멀리하다 보니 실력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왕희지는 벼슬에 욕심을 두지 않고 산천을 떠돌며 비석에 새겨진 역대 서법과 서체를 연구하는 등 늘 서예와 함께 하는 삶을 꾸렸다. 이런 왕희지의 글씨는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했고, 부잣집 자제는 물론 일반 백성까지 그의 서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급기야 유익의 아들과 조카조차 가문의 서법을 버리고 왕희지를 흉내 냈다. 심기가 불편해진 유익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 내 자식과 조카 놈까지 집 안의 닭은 외면하고 들판의 꿩을 좋아한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후 가계야치는 서예에서 서로 다른 그 나름의 풍격, 즉 스타일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진중흥서(晉中興書) 영천유록(潁川庾錄)

 

* 왕희지

 

 

 

 

 

 

중국사의 오늘:

7001111(당 무측천 구시 원년 신축)

재상 적인걸이 죽었다(607년생, 향년 94). 691년 재상에 임명된 이래 세 차례 재상을 맡아 무측천의 정치를 보좌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하다.

   驥服鹽車(기복염차)

 

천리마가 소금을 실은 수레를 끌고 태항산(太行山)을 넘어가고 있었다. 산세가 가파른 데다가 수레에는 소금을 가득 실은 탓에 천리마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간신히 산을 넘어 평지로 나왔지만 천리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천리마가 고통을 참으며 다시 산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돌덩이가 하나가 굴러와 발을 때렸다. 천리마는 맥없이 땅에 주저앉았다. 마침 말을 잘 고르는 백락(伯樂)이 그곳을 지나다가 주저앉은 천리마를 보고는 애통한 표정으로 천리마를 쓰다듬으며 천리마를 이렇게 혹사시켜서야 되겠냐고 주인을 나무랐다. 천리마는 마치 백락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런데 주인은 채찍을 들어 말의 등짝을 갈기며 내 말을 내 맘대로 하는데 당신이 무슨 참견이냐.”고 성을 버럭 냈다. 우리 주위에 채찍질을 당하며 울부짖고 있는 천리마가 너무 많다. 게다가 백락조차 없는 것 같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

 

 

 

 

중국사의 오늘:

19731110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미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자는 뜻을 나타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개혁은 철저할수록 백성에게 이롭다.

   變古愈盡, 便民愈利(변고유진, 편민유리)

 

청나라 말기의 개혁 사상가 위원(魏源)이 남긴 명구이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낡고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개혁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백성들에게는 그만큼 더 이롭다.” 정도가 될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한 개혁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는 자조 섞인 푸념까지 나왔다. 위원도 이런 사실을 통감하여 이런 명구를 남긴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보여 준다. 철저히 개혁한 자만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고, 어설프게 개혁한 자는 결국은 쇠퇴했으며, 개혁을 거부한 자는 예외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는 것을. 개혁은 어떤 개혁이 되었건 큰 뜻은 백성의 이익에 있어야 한다는 점도 역사는 생생하게 비춰 준다. 그리고 개혁의 출발점은 우리의 치부를 솔직히 인정하고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전면 개혁이냐, 어설픈 개혁이냐, 개혁 거부냐가 우리의 선택으로 놓여 있다. 개혁(改革)’이란 글자의 뜻이 짐승 가죽을 홀랑 벗긴다는 점에 방점이 찍힌다.

 

묵고默觚 치편治編

 

* 위원

 

 

 

 

 

 

중국사의 오늘:

258119(삼국 오 태평 39월 무오)

오나라의 권신 손림이 쿠데타를 일으켜 손권의 작은아들로 252년 즉위한 당시 10세의 손량을 폐위시켰다. 손량은 18세 때 자살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