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하늘조차 무섭지 않다.

   不愧于人, 不畏于天(불괴우인, 불외우천)

 

이 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을 원망한 내용이라 하는데, 이 구절이 나오는 관련 대목은 이렇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내 뜰 안을 지나면서, 그 목소리만 들릴 뿐 그 모습 보지 못하게 하나?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나, 하늘이 두렵지 않나?” 여기의 마지막 대목이 사람으로서 언행이 정정당당하고 떳떳하면 그 무엇도 무서운 것이 없다는 뜻으로 변했다. 그래서 현자들은 자신이 정당하면 설사 일이 잘못 되거나 뜻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 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이 예로부터 중국인은 ’()라는 글자를 척도로 삼아 자신의 언행을 점검하곤 했다. 지식인이나 리더는 특히 그랬다. 심지어 를 문명의 척도로까지 생각하여 이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계와 차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참으로 소중한 동양적 가치이자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

 

 

 

 

중국사의 오늘 :

6081015(수 양제 대업 49월 신미)

수 양제 양광이 사냥용 매를 훈련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매 조련사를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를 알고 몰려든 자들만 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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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失其民者, 失其心也(실기민자, 실기심야)

 

맹자(孟子)는 자신의 어록이자 대화록이라 할 수 있는 맹자(孟子)에서 () 임금과 주() 임금이 천하를 읽은 것은 그들의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백성을 잃었다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천하를 얻는 길이 있으니,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백성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는다. 마음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하고자 하는 것을 모아서 주고 싫어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요컨대 백성의 마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하기 싫어하거나 원치 않는 것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고대 동서양에서 맹자만큼 백성의 위치와 중요성을 이렇게까지 높이 끌어올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백성의 존재 가치를 개떡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맹자는 백성을 아끼지 않는 이런 통치자를 가장 하잘 것 없는 존재라면서 아예 없애야 한다고 일갈했다. 맹자의 호통이 새삼스럽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

 

* 맹자

 

 

 

 

 

 

중국사의 오늘 :

8241014(당 장경 49월 갑자)

토번(吐藩)에서 사신을 보내 오대산도’(五臺山圖)를 요청했다.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토번의 지도자에게 시집을 가면서 불교를 전파한 이래 토번은 불교의 나라가 되었다. 오대산은 역대로 문수보살의 성지로 가장 중시되었고 이에 토번이 오대산 그림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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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로 서로의 마음을 도발하다

   琴心相挑(금심상도)

 

사마천(司馬遷)과 더불어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젊은 날 아주 특별한 로맨스 경력을 가진 풍류아였다. 한번은 사천성 지역의 부호 탁씨(卓氏) 집안의 초청을 받아 잔치에 거의 반강제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사마상여는 거문고 실력을 선 보였고, 이를 훔쳐보던 탁씨의 딸 문군(文君)은 그만 사마상여의 자태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탁문군은 시종을 넣어 만남을 청했고, 사마상여도 탁문군에게 마음이 끌려 당장 그날 밤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기가 막힌 러브스토리였다. 탁씨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는 딸을 보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살길이 막막해진 두 사람은 탁문군이 챙겨온 패물 따위를 처분하여 우물을 파고 술집을 차렸다. 사마상여는 직접 술을 나르고 술상을 치웠다. 얼마 뒤 사마상여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올라가 벼슬을 받았고, 그사이 탁씨 마음도 풀려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금심상도는 거문고 연주 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도발하겠다는 발칙한 애정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낭만과 격조가 있는 애정 표현이라고도 하겠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 탁문군과 사마상여

 

 

 

 

 

 

중국사의 오늘 :

19681013

전인대회가 개막되어 31일 끝났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 열린 이 대회에서는 섭검영(葉劍英), 진의(陳毅), 이선념(李先念), 주덕(朱德) 등을 우파로 몰아 공격하는가 하면, 유소기(劉少奇)를 역적으로 몰아 당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중국 공산당 역사상 가장 수치스럽고 억울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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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구하고 집을 묻다.

   求田問舍(구전문사)

 

동한 말기 진등(陳登)은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일하면서 엄격한 법집행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루는 허사(許汜)라는 친구가 찾아와 땅과 집을 사는 일 따위를 물어왔다. 진등은 변변찮은 허사의 사람됨을 아는지라 대꾸하지 않았다. 이어 밤이 되어 잠자리를 봐 주었는데, 진등은 허사를 침상 아래에서 자게 했다. 허사는 진등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었다. 훗날 허사는 유표(劉表) 밑으로 들어갔고, 한번은 유비 등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진등 이야기가 나오자 과거의 일을 불만스럽게 털어놓았다. 이에 유비는 황제조차 거처할 집이 없을 정도로 세상이 어지럽거늘 땅과 집에만 관심을 보이는 너 같은 자를 침상 아래에 재우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며 허사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유비는 자기 같았으면 백 척 누각 위에서 자고 허사는 지하에다 재웠을 것이라 했다. 고려 말기의 충신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이런 진등의 지조를 생각하면서 밤비라는 시에서 지금 이 마음 누가 알아주랴? 진등의 백 자 높은 다락에 높직이 누웠노라라는 대목으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등전(陳登傳)

 

 

 

 

 

중국사의 오늘 :

10721012(북송 신종 희령 58월 갑진)

송 조정에서 방전균세법을 제정하여 토지의 실소유에 따라 정확하게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신종의 개혁정치의 중대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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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대나무를 모조리 죽간으로 만들어도 다 기록할 수 없다.

   罄竹難書(경죽난서)

 

수 왕조 말기,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폭정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 열차처럼 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그중에서 적양(翟讓)이 이끄는 와강군(瓦崗軍)이 가장 빠르게 세를 키워 가고 있었다. 이때 장수 이밀(李密)이 와강군에 합류하면서 그 기세는 더욱 커졌다. 이밀은 적양의 신임을 얻어 금세 전군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각지의 봉기군과 수 왕조 내의 문무 관리에게 합류를 권했다. 이어 이밀은 수 왕조의 수도 낙양(洛陽)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 앞서 수 양제를 토벌하는 명분을 쌓기 위해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 이밀은 수 양제의 10대 죄상을 열거한 다음 남산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죽간으로 만들어도 양광의 죄상은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동해의 물을 다 끌어와도 그 죄악을 씻어 낼 수 없다고 했다. 618년 수 양제는 강도(江都)에서 피살되었고, 이밀은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이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되었다. ‘경죽난서는 기록할 일이 너무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때 쓰는 성어이다. 권력 기관의 권력 남용이 도를 넘고 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기억이며, 그 기억을 토대로 공소시효 없는 심판을 단행한다. 기억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구당서(舊唐書) 이밀전(李密傳)

 

* 수 양제가 강남에 행차하다

 

 

 

 

 

 

중국사의 오늘 :

6401011(당 태종 정관 149월 을묘)

당 왕조에서 서주(西州, 신강성 투루판)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 왕조에서 서역 지역에 설치한 군정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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