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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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을 재독하지 않았다면 시대에 매몰되기를 원치 않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奮鬪)하는 이경(李炅)만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롯이 한 여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그가 느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노오람과 부연 회색에 담긴, 남아 있는 자의 살아냄이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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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오랑주리 미술관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날에 지베르니를 갔었지만, 비가 내려 빛이 있는 모네의 정원과 연못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쉬움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수련 연작 8작품은 이상했다. 그림이 너무 어두워 세부적인 형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색깔들도 거의 비슷하게 보여 모네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나 생각될 정도였다. 화가가 말년에 백내장을 앓아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영향 탓인가도 생각되었다. 미술관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몸을 돌려가며 그림들을 감상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미술관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수련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천장에 있는 채광창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모네의 수련은 그 빛을 받아 깨어나고 있었다.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갈 때의 흐린 날씨 때문에 수련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고 날씨가 개기 시작하자 햇빛이 채광창으로 들어와 밝은 색깔이 채색된 모네의 수련이 그제야 제대로 보인 것이었다. 나와 딸아이는 다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련을 감상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전체의 모습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만약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면 빛에 따라 민감하게 변하는 수련의 색채를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 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중에서]

 

미술관에서 나와 튈르리 정원의 조그만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 든 생각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었다. 스쳐가듯 잠깐인 찰나적 순간에 느낀 것들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이지만 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살아가는 허세와 자기만족이 우습기도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실이 모네의 요청으로 자연광에 의해 수련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을 더 믿기에 그 날 만약 날씨가 계속 흐렸다면 나에게 어두운 색채의 수련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발자크는 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노인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자신의 예술론을 펼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 말들이 감동적이고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작가의 그러한 표현과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세세하게 느끼기보다 그저 말문이 닫힌 채로 한순간에 정복당하고 만다. 예술 작품이 주는 압도적 아우라는 말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서의 페트릭 브링리의 말처럼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말보다는 내 속에 있는 감정에 그냥 저장되어 버린다.

 

철저하고 자신만만한 예술적 신념으로 프렌호프는 완벽한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프렌호프의 그림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완벽했지만 그것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관람자가 없었거나, 예술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너무 앞서가 시대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예술가는 좌절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가의 숙명이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개성, 열정, 자아의 도취로 완성되어진 예술은 자신에게만 머물 수 없고 누군가가 봐주어야 한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돈을 원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실패했고, 빚을 갚고자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써댔다. 사업과 문학이 통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진한 커피를 마시며 집중적으로 글을 쓴 그의 뚝심만은 인정하고 싶다. 인상파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인상파로 끝낸 모네의 뚝심 역시 대단하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완성한 작품을 남에게 평가받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고 그것으로 좌절하고 고통 받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열정으로 계속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술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오만함과 수줍음, 모호한 믿음과 확실한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열정.-p.71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미지의 걸작’,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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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4-06-19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름다워요..!😍 잘 읽고 갑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4-06-19 16:25   좋아요 1 | URL
등대지기 님,
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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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영생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인상파의 화풍같은 문장으로 서술했으며, 이 두 주제는 연결된다. 인간(예술가)은 묘약과 절대적 걸작으로 완벽을 꿈꾸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각각의 세부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 상태에서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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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6-18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페님의 100자평도 한 편의 걸작입니다.(ㅡ>새파랑님이 딱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야 하는데 요즘 안보이셔서 제가 대신^^) 녹색광선의 요 시리즈 책 만듦새도 예뻐서 하나씩 사두었는데 이 책은 있는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악마와 싸우며 꿈꾼채로 산다‘는 말이 섬뜩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페넬로페 2024-06-18 12:53   좋아요 1 | URL
아니, 새파랑님은 요즘 뭐하시길래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건지~~
열정적으로 연애 하시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다 좋은데,
발자크가 ‘미지의 걸작‘에서 갑자기 끝을 내버린 느낌이 들어 고민하다 별 넷을 줬어요.
괴테의 파우스트 생각도 나고
프루스트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미미님 책장 어딘가에 이 책이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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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처음 부분의 작가노트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었다. ‘날 때부터 책을 읽어온 느낌이란 문장이 반가웠고, 주변의 배경보다 책에 더 많이 빠져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그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라는 단어만으로 고닉과 내가 서로 공감하며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내가 읽어 온 책에서 얻은 교훈이 바로 내 인격이 되지 않는 모순이 고닉에게도 있어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작은 아씨들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본문에서 고닉이 언급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에게 고닉의 말들은 어려웠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긴 줄거리의 나열은 지루하기도 했다. 설사 내가 그 책들을 읽었다 해도 고닉이 들여다보는 책 속의 삶과 내가 보는 것들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고닉이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하며 치열하게 책이 말하려는 것을 찾는 열정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세월이 흘렀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생략되고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가 그냥 여기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내 정체성이나 성향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바쁘고 , 어수선하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언제쯤 고닉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도 80세쯤 되면 그처럼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출발하거나 거쳐 간 작은 아씨들로부터 나름의,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펼쳐 지금까지 자신의 의미를 첨삭해 오고 있다는 것.고닉이 말한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고 체감하며 사는 내가 어느 자리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책은 다 그렇다. 그 무엇도 책에는 비길 수 없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위대한 안톤 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을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뉘앙스를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음미하고 재고를 환영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비교적 상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뉘앙스 없는 자유는 절대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문명인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뉘앙스다. 뉘앙스를 없애버리면 동물의 삶만 남는다. 바꿔 말해, 전쟁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훌륭한 문학의 풍요함은, 우리 삶의 풍요함으로 다시 긍정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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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6-13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은 어릴 때부터 책을 보셨군요 저는 어릴 때는 책을 안 봐서 늘 왜 안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자신을 돌아보기 쉽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잘 못 읽지만, 예전엔 책을 더 못 읽기도 했네요 잘 읽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한번 하는군요 책을 만난 게 일찍은 아니었다 해도 앞으로도 볼 테니, 그건 괜찮겠지요


희선

페넬로페 2024-06-13 07:33   좋아요 2 | URL
책을 읽기는 읽는데 다시 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새로운 책이 보고 싶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만 하는것 같아요. 희선님께서는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시는군요.
그러한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청아 2024-06-1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작은 아씨들>도 읽지 않았어요ㅜ.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책 목록이 나오면 강박적으로 ‘꼭 읽어내야지‘ 하는 편인데 고닉의 목록, 걱정됩니다.ㅎㅎㅎ

사람이 죽을 때 지난 세월들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스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아득하면서도 찰나같은 삶을 살면서도 ‘소설‘로 타자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을 다른 시각에서 볼 기회인 것 같아요. 오늘도 한 토막, 생각꺼리를 던져주신 페페님!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6-18 12:48   좋아요 1 | URL
고닉의 목록은 한국에 번역 안된 것도 있어 다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고요.
고닉의 의도가 분명 전부가 아닐텐데 저한테는 서양 작가들의 정념이 조금 버거워 더 접근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ㅎㅎ
요즘 ‘찰나‘라는 단어가 많이 와 닿아요. 지금 쓰고 있는 페이퍼에서도 그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지금 현재에 몰입하며 잘 살아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들 중에 책이 성찰할 기회를 주어 너무 좋아요.
날씨가 더워요
직장인, 미미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늘 오후도 화이팅 하시길요^^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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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날이 있을까? 지적인 작가, 보통은 ‘불안‘에 대해 다양하고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조금 고전적이다. 그렇다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상큼하고도 현대적인 방법 또한 딱히 없다. 다시 보통의 책을 들여다보며 그가 제시한 방법을 인정하며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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