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에 들렀다가 시댁으로 온 날, 큰 아주버님은 출장 중이어서 우리를 맞이할 수 없었다. 정이 넘쳐 파도처럼 넘실대는 마음을 가지신 아주버님은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 미안함과 우리의 결혼을 또 한 번 축하하는 마음을 보태 시댁 가족 모두를 불러 밥을 사 주셨다.

 

식사를 하면서 아주버님께서 주시는 술을 한 잔 받고, 시동생들이 ! 형수님, 한 잔 하시지요.”하며 건네는 술을 또 넙죽 받고 하며,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정 분위기와 달리 시끌시끌하며 허물없는 시댁의 분위기가 편하고 좋았다.

 

가족 회식을 한 며칠 후,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어머니는 뜬금없이 나에게 셋째야, 너 술 잘 마시더라(아들 형제 중에 남편이 셋째여서)!”고 하셨다. 난 아무생각 없이 , , 근데 그렇게 잘 마시지는 못하는데요, 호홋!”하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에 뼈가 들어있다고 했다. 술로 인한 간경화로 일찍 남편을 잃은(남편 10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되도록 어머니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아니 삼중, 사중적으로 상처, 고통, 지난(至難)함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사람을 기쁘게, 행복하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로인해 또 누군가에겐 평생 가슴에 한을 새겨놓는다.

 

 

언제나 음식과 술에 진심이 느껴지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 술꾼들의 모국어는 술과 음식(안주)에 대한 이야기로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책이다. 보통 음식과 안주는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만 작가 권여선에게 둘은 분리될 수 없다. 맛있는 음식에 당연 술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음식에 약간의 술이 곁들여지기보다 맛있는 술을 마시기 위해 좋은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p.8)’라고 하니 내가 생각한 게 맞다.

 

(안주)을 떠나 이 책에 나오는 4계절과 관련된 음식에 대한 작가의 비유는 계속 나의 입 꼬리를 올라가게 해주었다. 그녀가 사용한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단어로, 음식은 곧 시각화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고 거기에 온갖 추억과 오래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 피 투성이만두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경상도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턱 물회에 한참 웃었다. 마트에서는 청량고추라고 표기되는 고추를 작가는 시종일관 땡초라고 표현했는데, 나의 친정 식구들도 이 고추를 땡초라고 말한다. 반가웠다.

 

음식에 진심이 아닌 나에게는, 평생 음식에 진심인 엄마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엄마 생각이 나 슬펐다. 작가가 언급한 음식 모두에 엄마가 존재했다. 음식 하나마다 엄마의 손맛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도 제사상에 작은 가자미전을 올렸고, 겨울을 나기 위해 말린 시래기를 들통 가득 삶아 하나하나 껍질을 벗겼다. 껍질 벗긴 부드러운 시래기는 들깨를 넣어 나물을 무쳤고, 진하게 된장을 풀어 시래기 국도 끓였다. 엄마는 나물을 좋아하셔서 항상 제철 나물을 상에 올렸다. 가죽 나물 요리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는 그 맛을 몰라 잘 먹지 않았다. 지금 누워 액체 유동식으로만 연명하는 엄마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된장, 고추장, 집 간장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다. !, 엄마, 어떡해? 된장, 간장 만들어줘요.

 

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이 넘치면 견디기 힘들어, 조금만 먹으려고 한다. tv의 먹방을 보면 내 배가 차오르는 것 같아 괴롭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며 술을 같이 잘 못 마신다. 술로 금방 배가 차버려 음식 맛을 느끼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한다. 권여선 작가는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고 했지만, , 특히 소주를 마시지 않으니 아직도 나는 잘 안 먹는 음식이 많다. 아무리 노력해도 삭힌 홍어와 곱창, 돼지비계, 순대국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추운 러시아에는 초콜릿 안에 돼지비계를 넣어 도수 높은 보드카와 먹는다고 하지만, 어쨌든 내 비위에는 맞지 않다.


요즘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대신 언니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나간다. 사진은 추어탕, 삼계탕, 짬뽕, 생선회, 장어구이다.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약간 맵고 뻑뻑한 전라도식 추어탕도 맛있지만, 맑고 시원한 맛의 경상도식 추어탕도 좋다. 여기엔 꼭 산초가루와 방아 잎, 생마늘 다진 것을 넣어야 한다. 친정이 있는 도시의 유명한 삼계탕집의 삼계탕은 여전히 맛있다. 서울에서 먹어 본 삼계탕은 이 맛이 안 나, 서울에서는 삼계탕을 잘 사먹지 않는다. 남편도 인정하는 맛이라 처갓집에 가면 꼭 그 식당에 간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싱싱한 생선회와 장어구이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최근에 발견한 친정 동네 중국집의 해물 짬뽕도 정말 맛있다. 해물도 많이 들어있고, 면발이 얇아 좋다. 국물도 적당히 얼큰하고 맵다. 주인 부부가 요리를 하고 아들이 서빙을 하는 전형적 가족 식당인데, 일단 배달을 하지 않아 맛이 더 깊다.


속초에 가면 무조건 먹는 음식이 물회다. 한 번씩 물회가 먹고 싶으면, 서울에 있는 이 식당의 분점에 가서 물회를 먹는다. ‘턱 물회는 아니고 그냥 보통으로 시킨다. 차가운 물회와 국수를 먹고 입가심으로 따뜻한 섭국과 밥을 조금 먹으면 속이 더 든든하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따끈한 칼국수를 자주 먹으러 간다. 주인장이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쫄깃한 면발에, 해물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면으로만 만든 걸쭉한 칼국수를 좋아한다. 여기에 무조건 다대기와 맛있는 생김치가 있어야 한다. 먹고 나서 1시간쯤 지나면 그때부터 나타나는 짠맛의 여운에 물을 계속 들이켜야 하지만, 먹을 땐 다대기를 넣고 싱싱하고 시원한 생김치와 같이 칼국수 면을 흡입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해도 먹을 땐 그렇게.


이 책의 앞표지 뒷장엔 작가의 사진과 약력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 권여선 작가의 친필 편지가 있다. 작가의 깔끔한 글씨체와 반대로 내용은 뭉클하다. 음식, , 안주라는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밤새 온갖 사연들을 쏟아낼 수 있다. 거기엔 기쁨과 행복보다는 상처와 고통이 더 많은 삶의 이면이 있을 것이다. 술꾼들의 모국어에도 작가의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 아파서, 힘들어서, 힘내려고 한 잔 마시는 것, 그래도 이 땅의 술꾼들이여! 작작 마셔 알코올 중독자는 되지 말며, 술로 인해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다 맥주 한 캔을 사왔다. 요즘 나의 주량의 최대치다. 안주로 부추 부침개를 부쳤다. 마트에서 파는 길고 잎이 넓고 뻣뻣한 부추가 아니라 재래시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키가 작은 부추를 사용해야 한다. 오징어를 듬뿍 넣고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해 땡초는 조금만 넣어 완전 바삭하게 구운 부침개다. 작가님은 부추 부침개의 비주얼을 보고 혀를 끌끌 찰지 모르지만, 맛은 최고다.

 

[변화나 발전도 좋지만 영영 그대로여서 좋은 것도 있는데 저에게는 이 그렇습니다. 저에게 행복을 주는 맛은 언제나 한결같은 의리에서 옵니다. 친구처럼, 오래된 독자처럼.

이 책은 제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뉴판입니다.

천천히 메뉴를 고르시고, 저와 한잔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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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10-22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추 부침개와 맥주가 유혹하는 저녁입니다 🍺 🍻

페넬로페 2024-10-22 20:07   좋아요 0 | URL
오늘 서울은 하루 종일 비가 와요.
비 오는 날은 부침개죠 ㅎㅎ
시원한 맥주도 좋고요^^

마힐 2024-10-22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래시장에서 파는 할머니들이 파는 키가 작은 부추를 사용해야 한다˝ 역시.... ! 음식 사진만 봐도 최고의 맛이 느껴지네요. 나중에 페넬로페님이 뽑은 맛집 리뷰도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ㅎㅎ _()_

페넬로페 2024-10-22 20:09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정적이라 다양한 맛집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미각이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기회된다면 음식 얘기 올리겠습니다^^

Falstaff 2024-10-22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 바그너의 발퀴레 라스트 씬 듣고 있는데요, 제가 음악 무지 좋아합니다.
음악 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게 있는데요, 그게 책이고요, 더 좋아하는 게 밥입니다.
지금부터는 비밀인뎁쇼, 더 좋은 게 마누라고, 그 다음이 술입니다.
ㅋㅋ 다 글케 사는 것이지요 뭐.

페넬로페 2024-10-22 20:13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술 좋아하시는 거 다 아는데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시는지요?
에그, 그냥 포기할란다~~
이신가요? ㅎㅎ
건강 생각하며 적당히 음주 하시길요.
우리는 끝까지 책 읽어야 합니다^^

cyrus 2024-10-22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칼국수와 부침개로 정했어요. ^^

페넬로페 2024-10-22 20:13   좋아요 0 | URL
칼국수와 부침개!
술은 막걸리 입니까?

서곡 2024-10-22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무늬 맥주잔이 빈티지하게 예뻐서 눈길을 주게 됩니다 ㅎ 남은 시월 잘 보내시기 바래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4-10-22 20:16   좋아요 1 | URL
꽃무늬 잔은 제가 결혼할 때, 엄마가 부엌장에 있던 거를 꺼내 싸 주더라고요.
그걸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돈 좀 주고 산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촌스럽고도 빈티지합니다 ㅎㅎ
서곡님께서도 남은 시월,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요^^

망고 2024-10-22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마가 늘 정구지라고 하셔서 정구지가 사투리인지 몰랐어요ㅋㅋㅋ좀 커서야 그게 부추라는걸 알고 약간 배신감이ㅋㅋㅋㅋ
칼국수 사진 보니까 라면이 먹고 싶어요ㅋㅋㅋㅋ내일은 꼭 라면먹어야지😂

페넬로페 2024-10-22 20:19   좋아요 1 | URL
저도 당연 정구지라고 말했죠.
지금은 표준어로 부추라고 하지만요~~
부추 부침개보다는 정구지 찌짐이란 말이 훨씬 정겨워요.
망고님이 끓이시는 라면도 맛있을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4-10-2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방금 밥 먹었는데 사진에 나오는 음식은 다 먹고싶네요. ㅎㅎ
예전에 서울 식당가서 땡초좀 달랬다가 못 알아먹어서 땡초가 사투리라는걸 처음 알았어요. 그래도 청량고추보다는 땡초라는 말이 딱 직관적이고 선명하지 않나요? 저는 청랼고추보가는 땡츄를 좋아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4-10-23 15:44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죠?
재료를 나타내는 단어로도 그 맛의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부추나 청량고추는 영 느낑이 안 살아요 ㅋㅋ
사진으로 보이는 음식은 다 맛있어 보여요.
바람돌이님께서 올리시는 음식 사진도요^^

감은빛 2024-10-23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저녁 늦게까지 같이 회의를 했던 일행들을 꼬드겨 녹두부침개에 막걸리를 마셨어요. 부추전에는 맥주는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이지만, 맛있으면 상관없죠. ㅎㅎ

권여선 작가의 친필 편지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페넬로페 2024-10-23 20:11   좋아요 0 | URL
녹두부침개와 막걸리의 조합도 너무 좋습니다.
맥주 한캔은 그냥 가볍게 마실 수 있어 선택했습니다.
작가님 편지의 글씨도, 내용도 모두 좋았습니다.

젤소민아 2024-10-26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밤에 괜히 봐갖고...ㅠㅠ 죽갔네요

페넬로페 2024-10-26 13:03   좋아요 0 | URL
ㅎㅎ
오늘 밤, 그냥 참으시고
낼 맛있는 음식, 드시지요^^
 
인도 리버데일 SL-9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8월
평점 :
품절


원두 색깔이 진한 것 같아(느낌인지 몰라도) 평소보다 연하게 드립을 했다. 처음엔 가벼운, 뒤에는 보리차 맛이 아닌 진하고 쓴 맛이 남아있어 좋았다. 약간 산미 있는 커피와 블렌딩해도 괜찮을 듯 하다. 한강 작가님은 커피를 끊었다고 했는데, 나는 계속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작품을 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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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계약 을유세계문학전집 136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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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는 사랑이, 법엔 공정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법칙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 속에 온갖 메커니즘이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세기 프랑스 복고왕정시대를 배경으로, 실제로는 7월 혁명이후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 발자크의 인간극엔 이러한 결혼과 법의 기본 정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른의 나이에 첫 책을 출간한 발자크는 그때 이미 6만 프랑의 빚을 지고 있었다. 발자크는 돈을 좋아했고 돈을 좇았지만, 빚을 갚고 글 쓰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은 이유로도 돈을 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쇄업, 출판업 등 손 댄 사업마다 실패해 평생 빚을 안고 살아야 했다. 채무자로 산 그에게 돈은 비열함과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발자크 소설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돈이 언급되는 이유는 발자크가 그런 현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재산의 축적과 파산 과정, 돈과 법을 이용한 인간의 파렴치한 음모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책의 번역자인 송기정 선생의 저서 오노레 드 발자크에는 그 당시 금융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발자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와 인간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발자크의 인간극총서를 읽으려면 일단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법대를 다녔고, 소송대리인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던 발자크는 법에 대한 지식도 상당해서, 그의 소설의 소재가 되는 법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정치적으로 격변하는 19세기 프랑스는 여러 차례 경제 위기를 겪어 사람들은 지폐를 불신했다. 금화나 은화 등의 금속 화폐를 선호했고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어음이나 채권을 통한 신용 거래로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음 유통은 그것을 잘 이용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쌓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거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파산하거나 엄청난 빚을 져야만 했다. 자본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만이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발자크 소설에 이런 내용이 수시로 나온다.

 

1835년에 출간된 결혼 계약은 그 시대의 결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설(사실 발자크의 글은 소설인지, 다큐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이다. 다소 비인간적인 요소가 강한 그 당시의 결혼은 나폴레옹 시대에 제정된 민법을 바탕으로 철저히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참금 제도가 있어 여성이 결혼하려면 지참금이 있어야 했다. 돈이 우선인 시대에 남자들은 여자가 가져오는 지참금으로 한 밑천 잡으려 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돈 많은 과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순진한 폴 드 마네르빌 백작은 외아들로 아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폴은 파리에서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고향인 보르도로 귀향한다. 그는 결혼해 한 여인과 행복하고 다정하게 살기를 원한다. 폴은 그곳에서 스페인 사업가의 상속녀인 아름다운 나탈리 에방젤리스타양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나탈리의 어머니인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부자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과 딸의 미모를 유지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소비했기에 남아 있는 재산이 별로 없다. 남편이 남겨준 딸의 지참금도 거의 탕진했다. 그녀는 딸의 지참금인 100만 프랑에 대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자기 딸에게 빠져있는 어수룩한 폴의 돈을 희생양으로 삼아 파리 사교계로 진출할 꿈을 꾼다.

 

당시의 관습인 여성의 지참금 제도는 여성이 가져오는 돈이라 당연히 여성에게 유리한 것임에도 여성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신부의 지참금을 관리하는 사람은 남편이었고, 지참금의 많은 부분은 마조라(한국의 종중 소유의 땅과 비슷한 개념-p.383) 설립에 기여했다. 그 돈의 일부분은 나중에 자식에게 상속되어야 했다.

 

에방젤리스타 부인은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 폴과의 결혼을 성립시키려고 한다. 부인은 시대와 함께 전진하는젊은 공증인 솔로네가 자신의 창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폴에게는 오랫동안 자신의 집안의 재산을 지킨 위엄 있고 존경받는 찾기 쉽지 않은 구시대공증인 마티아스가 버티고 있다. 솔로네의 창과 마티아스의 방패는 팽팽했지만 일단은 마티아스의 승리로 폴과 나탈리의 결혼은 성립된다. 이 과정에서 언급된 법률적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5년 후, 두 여자에 의해 폴은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 돈을 벌기위해 인도로 떠나야만 했다. 자본주의 원리인 돈의 속성과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한 폴 드 마네르빌에겐 당연한 결과였다. 발자크는 귀족의 몰락과 마르크스보다 먼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정확하게 예상한 사람이었다. 21세기에도 통하는 돈의 속성을 발자크는 그때 이미 발견한 것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앙리 드 마르세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르세는 발자크의 인물 재등장 기법에서 라스티냐크와 함께 굉장히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폴의 아내가 된 나탈리 역시 골짜기의 백합에서 펠릭스 드 방드네스의 연인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폴과 결혼한 상태에서 펠릭스를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펠릭스를 떠나게 된다. 발자크의 인물 재등장 기법은 그의 소설을 읽는데 쏠쏠한 재미를 준다.

 

마르세는 결혼하겠다는 폴에게 결혼의 무용성을 아주 상세히 설명한다. 나는 그의 말에 완전 공감했다.

 

[결혼이란 가장 어리석은 사회적 자기희생이라네. 자식들만 그 혜택을 받지. 그 자식들은 자기가 부리는 말들이 우리 무덤 위에 핀 꽃을 뜯어먹을 때가 되어서야 그 희생의 가치를 깨닫게 되거든.자식이란 관리하기 어려운 상품과도 같다네.

 

, 결혼, 그건 말이야.. 그건 사회적으로 거기까지임을 의미한다네. 일단 결혼하고 나면 자네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 자네 아내가 자네를 잘 돌봐 준다면 몰라도 말일세. -p.17. 20]

 

앙리 드 마르세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도 폴에게 현실을 보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발자크는 마르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발자크는 법에 관련된 소설도 많이 썼다. 그는 법을 소재로 인간의 더러운 술수와 욕심, 속임수를 서술했다. 법은 따로 떨어져 독립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돈을 비롯한 인간의 탐욕이 바탕이 되어 성립되는 것이 법이다. 발자크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해박한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이에 관련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발자크는 민법(1804)과 민사소송법(1806), 형사소송법(1810), 상법(1807)을 이용했다.

 

금치산은 데스파르 후작 부인이 남편인 데스파르 후작을 금치산자로 선고할 것을 청구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남편이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 후, 신교도에게 가해진 토지 몰수에 대한 양심선언으로 그 후손에게 재산을 돌려주는 것에 분노해 남편을 금치산자로 몬다. 금치산자는 성년임에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어 법과 가족의 보호가 필요한 자. 후작 부인은 파리 사교계를 대표하는 여자다. 서른이 넘어도 22세처럼 보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해야 할 돈은 엄청나다. 그런 그녀에게 따라오는 것은 당연히 빚이다. 후작 부인은 돈이 필요해 별거 중인 남편을 금치산자로 몬다.

 

이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게 양심적이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명은 데스파르 후작이고 다른 한 명은 데스파르 후작 부인의 소송을 맡은 예심 판사(지금의 검사의 역할) ‘장 쥘 포피노이다. 발자크는 장장 17페이지에 걸쳐 포피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만큼 이 인물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피노는 한마디로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다.

 

재판은 술수를 사용한 데스파르 후작 부인이 승리한다. 이 소설은 싱겁고도 급하게 끝마무리가 되어 아쉽다. 다만 역자의 설명을 들으면 발자크의 다른 소설, 매음 세계의 영욕에서 데스파르 후작 부인은 몇 년 후 잃어버린 환상의 주인공인 뤼시앵 드 뤼방프레에 의해 패소한다. 데스파르 후작 부인은 파리에 입성한 뤼시앵을 불행에 빠뜨린 인물이고 이에 뤼시앵은 후작 부인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포피노의 조카인 의사 오라스 비앙숑라스티냐크고리오 영감의 보케르 하숙집의 하숙인으로 등장한다.

 

발자크는 결혼 계약금치산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장황함과 언어유희로 진지하고도 재밌게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얘기해주고 있다. 심심찮게 발견되는 작가의 개입으로 행간에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 독자의 고통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장황하거나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해 어느 부분을 건너뛰어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건너 뛴 순간 앞 뒤 연결이 전혀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만큼 발자크의 글엔 작가가 쓰고자 하는 것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말해주는 그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해되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거기에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 엄청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발자크의 시대보다 더 교묘하고도 은밀한 세계가 작동되고 있다.

 

번역자는 발자크의 글을 번역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발자크의 작품보다 인간 발자크에 대한 이야기만 회자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의 소설을 번역한다고 한다. 번역자의 고뇌와 우려를 잘 알겠지만,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발자크라는 인물 자체를 알지 않고서는 힘들다. 천재인 발자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폴 드 마네르빌이 이 편지를 읽었을 때, 그는 아르소스제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편지에 쓰인 한 문장 한 문장은 그가 희망과 환상과 사랑을 가지고 공들여 쌓은 탑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마치 망치가 탑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부서진 탑의 파편들 한가운데서, 그는 차가운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분노가 끓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질문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p.231~232]

 

*이 글의 배경 설명은 오노레 드 발자크(송기정, 페이퍼로드)결혼 계약의 역자 해설에서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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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0 04: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이렇게 훌륭하면 흑흑.... 조만간에 읽을 예정인데 우짜라고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0-10 07:17   좋아요 2 | URL
내용이 장황하고 많아 배경에 대해서만 잔뜩 썼어요.
별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발자크와 정이 들어 오별 줬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4-10-1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발자크 소설 안 읽은지 오래되서 읽고 싶은데 발자크 책은 왠지 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읽고 싶어서 겨울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네요.
정성스런 리뷰 넘 훌륭하세요!

페넬로페 2024-10-10 10:10   좋아요 0 | URL
발자크 소설을 읽는 딜레마가 계속 읽을지, 던져 버릴지 고민을 하는 것인데,
저는 일단 고고씽 하기로 했어요.
넘 장황하지만, 그래도 소소한 재미도 있어서요^^

잠자냥 2024-10-10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너무 장황하거나 나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해 어느 부분을 건너뛰어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진짜 처음에 발자크 읽을 때 너무 지루해서 건너뛰었다가 ㅋㅋㅋㅋ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가고 하는 짓 몇 번 하고는 다시 안 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0-10 10:12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죠?
그래서 발자크를 다시 봤어요.
프루스트는 좀 뛰어 넘어도 괜칞거든요 ㅋㅋ

젤소민아 2024-10-10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는 좀 천재꽈같어요...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페넬로페 2024-10-10 22:15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푸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혀요.
저는 발자크가 천재라고 생각해요^^

독서괭 2024-10-10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인가 다큐인가 ㅋㅋㅋㅋㅋ 아휴, 발자크 언젠가 읽어야겠죠.. 페넬로페님 리뷰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지루한 부분 뛰어넘으면 안 된다고 하니.. ㅋㅋ 맘 먹고 읽어야겠네요.

페넬로페 2024-10-10 22:16   좋아요 1 | URL
장황하기도, 재밌기도, 지루하기도 한 것이 발자크 소설인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 읽게 되는 마법이 분명 있어 매력적이예요^^

희선 2024-10-11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업 같은 건 못할 사람인 듯합니다 글을 쓰고 다른 데서 책을 내는 게 훨씬 잘 되는 사람인 듯합니다 천재여도 못하는 게 있네요 사업... 본래 그렇기는 하죠 천재라고 해서 모든 걸 잘 하지는 못하는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4-10-11 08:06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발자크는 사업쪽으로는 아니었나봐요 ㅎㅎ
그래도 위대한 인간극을 만들어 냈으니 대단하죠^^

레삭매냐 2024-10-1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놓은 발자쿠 선생 책들
마저 읽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책들이 나오는
구만요. 선빵, 아니 선독 고저
부럽삽니다.

페넬로페 2024-10-19 16:14   좋아요 1 | URL
올해 그냥 발자크 마무리 하려고 부지런히 읽고 있어요.

제가 2019년 가을에 서재에 들어왔는데, 그때 선빵, 선독의 쌍두마차는 레삭매냐님과 잠자냥님 이었습니다.
열심히 따라 읽은 기억이 납니다 ㅎㅎ
요즘 발자크 읽기 하는 중에 발자크 신간이 나와 잽싸게 읽었습니다^^

전야제 2024-11-07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소설을 추천하신 분이 계셔서 조만간 꼭 읽어야지 했는데 마침 페넬로페님께서 쓰신 결혼계약 리뷰를 읽고 완전 궁금해졌어요! 너무 좋은 해설이라서 읽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도 꼭 읽겠습니다. 당선 축하드리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11-07 21:20   좋아요 1 | URL
발자크의 인간극에 그 시대의 풍속이나 법이 정확하게 들어 있어 저도 다른 책을 많이 참고했어요.
제 느낌이 별로 들어 있지 않는 리뷰라 민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라딘 서재의 다락방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수학의 정석성문 영어책을 언급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 두 책은 수학과 영어의 필독서였다. 필독서여서 누구나 다 그 책을 샀지만 끝가지 다 본 친구는 드물었다. 책 밑을 보면 항상 앞부분만 검게 변색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하얀 종이 색깔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거의 이 두 책을 보지 않는다. ’수학의 정석성문 영어라는 단어로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여고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선행 공부도 하지 않고 그 긴 시간을 마냥 놀았었다. 학원이나 과외도 다니지 않았다여고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친구들은 선행을 많이 하고 왔고, 내가 간 학교엔 공부 잘하는 학생을 모두 한 반에 몰아넣는 특별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합고사 성적으로 배정된 그 반에 일단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전교 등수와 반의 등수가 같이 나오는 그 반의 친구들은 모두가 지독하고 극성스럽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담임선생(‘선생님으로 불러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난 그 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은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자리배정을 달마다 학교 오는 선착순으로 정한다고 했다. 일찍 오는 순서대로 좋은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3월의 학교 입학 다음 날, 난 엄마가 일찍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들고 어두컴컴한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 갔더니 벌써 우리 반의 자리는 거의 차 있었고 모퉁이 구석의 몇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때 받은 충격적인 느낌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할 수 없이 안 좋은 자리에 앉았다. 담임선생은 나와 내 주변에 앉은 친구들에게 게으른 놈들이라고 말했다.

 

담임선생에 의해 게으른 놈들이라고 낙인찍힌 우리들은 그때부터 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 다음 달부터 우리는 느지막이 와서 항상 그 자리에 앉았다. 같이 수다 떨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엄청 재미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닌, 단지 자리 하나 때문에 우리들은 열등생이 되었지만, 나름 우정으로 뭉쳐져 인간적인 어른이 되는 밑바탕을 그 시기에 만들었던 것 같다.

 

당연히 우리 반에 전교 1등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성문 기본 영어를 볼 때, 종합 영어를 봤으며, '수학의 정석 기본'을 볼 때 '수학의 정석 실력'을 보고 있었다. 말수가 별로 없고 수더분한 그 친구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타입이었다. 서울대를 나와 지금은 특목고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때 서울로 유학 와 지금까지 몇 군데의 동네를 거쳐 살고 있다. 대학로에 있는 가톨릭 기숙사에서 산적도 있다(지금 계속 운영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곳에는 여러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서울대 병원이 가까워 서울 의대생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정말 지독하게 공부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 기숙사에 사는 서울대 의대 커플도 탄생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날 때, 이 사람들이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싸가지가 없는 의사를 만나도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했다는 것은 안다.

 

요즘은 수학과 영어 참고서의 종류가 정말 많다. 가짓수는 많지만 들여다보면 사실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보는 책과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어떤 책으로 공부하든 기본은 하나다. 알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

 

무슨 운명인지 별로 원하지 않았던 수학과 관련된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요즘은 수학의 정석을 잘 보지 않지만, 나에게 이 책은 수학의 실력을 올려주기보다 정석(定石)’이란 말을 새겨주었다. 여기서 정석은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정도를 지키며 꾸준히 자신의 것을 쌓아가는 길이 아닐까.

 

알라딘 서재에서 글의 정석으로, 성실하게 뚜벅뚜벅 가고 있는 멋진 친구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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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0-08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뚜벅뚜벅 페넬로페님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오늘 저녁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페넬로페 2024-10-08 17:30   좋아요 1 | URL
알라딘의 진정한 뚜벅뚜벅은 서곡님 이십니다.
오늘 날씨가 넘 좋아요.
남은 하루도 행복하시길요^^

서곡 2024-10-08 17:37   좋아요 1 | URL
엌 넘나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암튼 감사합니다 내일 한글날 휴일 잘 보내시길요~~

망고 2024-10-08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수학을 다시 공부해 보고 싶단 생각을 해요. 고등학교때 수포자였는데ㅠㅠ 그때는 못 했던 수학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나봐요. 왠지 지금 해보면 이해를 더 잘 할 수 있을거 같은 이유없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고...그런데 너무 게을러서 실행을 못 하고 있어요ㅋㅋㅋㅋ
하지만 책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에 수학의정석은 안 보고 싶은데ㅋㅋㅋㅋㅋ오늘 오전에 정석을 사신다는 다락방님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페넬로페 2024-10-08 17:34   좋아요 1 | URL
고등수학 하기 전에 중학수학으로 개념 한 번 훑어보시고 시작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수학 공부 하시면 더 잘 하실 것 같아요. 공부에 대한 강박이 없어서요.
요즘은 학생들이 수학의 정석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아요.
개념 원리 시리즈가 설명이 잘 되어 있더라고요^^

망고 2024-10-08 17:40   좋아요 1 | URL
저도 고등학교때 개념원리 봤어요. 요즘도 개념원리 보는구나. 집 창고에 어딘가 있긴 있을텐데ㅋㅋㅋㅋㅋ
하지만 아무래도 중학수학부터 해야겠죠ㅎㅎㅎ

페넬로페 2024-10-08 17:44   좋아요 1 | URL
요즘은 수학의 정석보다 이 책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24-10-08 17:57   좋아요 3 | URL
정석 안살겁니다. 대단하다는 말씀 취소 부탁드립니다. 고등수학인 걸 잊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4-10-08 18:17   좋아요 1 | URL
안대단 보단 대단이 좋은 거 아닙니까?ㅋㅋㅋ정석을 안 샀지만 사려고 했던 그 마음이 대단한걸요😄

마힐 2024-10-08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석이란 빨리가는게 정도를 지키며 꾸준히 쌓아가는 자신의 길을 간다는 페넬로페님의 정의(定義)에 공감합니다. 저도 존경합니다. ^^

페넬로페 2024-10-08 17:38   좋아요 2 | URL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아직 定石이라는 것이 어렵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도요.
마힐님, 존경합니다^^

건수하 2024-10-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수학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군요.
요즘 아이 때문에 중학 수학을 보고 있는데 벌써 어렵더라고요. 잘 기억도 안 나고...

페넬로페 2024-10-08 17:50   좋아요 1 | URL
중학 수학부터 어려워요.
그래서 애들이 수학을 자꾸 멀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음, 나이는 선배가 맞는데
그 다음은 ㅎㅎ~~

2024-10-08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08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08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10-08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학관련 일을 하신다니! 와!! 엄청 멋져요, 페넬로페 님!!

페넬로페 2024-10-08 19:11   좋아요 0 | URL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요
ㅎㅎ

독서괭 2024-10-08 18: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페넬로페님 학교 학생들 엄청났네요. 그 새벽부터 가서 ㅜㅜ 아이고야..
저 때는 이미 성문은 한물 가고 다른 거 봤던 것같아요. 정석은 여전히 봤지만 ㅎㅎ

건수하 2024-10-08 18:07   좋아요 2 | URL
역시 독서괭님은 요즘(?) 사람!

다락방 2024-10-08 18:22   좋아요 2 | URL
독서괭 님 얼마나 젊으신건지..

페넬로페 2024-10-08 19:12   좋아요 1 | URL
네, 극성 맞았어요.
그래서 제가 못 따라가고 잘 어울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4-10-10 09:44   좋아요 2 | URL
갑자기 리더스뱅크 생각나는 1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10-10 10:13   좋아요 1 | URL
아!
수학의 정석 다음 세대는 리더스 뱅크 보셨군요~^

독서괭 2024-10-10 10:18   좋아요 2 | URL
리더스뱅크는 영어인 것 같고 저는 영어 맨투맨 본 듯요 ㅋㅋ 수학은 디딤돌이랑 해법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당

새파랑 2024-10-08 18: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고등학교때부터 천재셨군요. 선행없이도 특별반에 가시다니~!!

알라딘 서재의 정석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4-10-08 19:14   좋아요 1 | URL
제가 천재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매번 힘들게 힘들게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새파랑님, 계속 바쁘신가 봐요^^

새파랑 2024-10-08 19:31   좋아요 1 | URL
아직 일이 안끝나서 책읽기에 시간을 많이 못내고 있습니다 ㅜㅜ 책은 틈틈히 읽는데 리뷰쓸 시간은 없다는... 그래도 책은 열심히 사고 있습니다 ㅋ

stella.K 2024-10-08 2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담임 선생. 요즘은 그렇게도 안 부르잖아요. 담탱이라고 하지. ㅎㅎ
죄송한 얘기지만 가끔 선생님들 중엔 선생이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분들이 계시긴하죠? ㅋ
그나저나 그렇게 친구로 맺어져서 학교를 다니셨으면 정말 재밌고 다닐만했겠어요.
부러운데요?^^

페넬로페 2024-10-08 20:35   좋아요 2 | URL
그때는 쌤들이 폭력도 많이 사용했지만 말도 참 모질게 했던 것 같아요. 그 말에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이랑 재미 있었어요.
끊임없이 떠들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말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ㅎㅎ

바람돌이 2024-10-0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축억의 수학의 정석과 성문 기본영어
물론 다시 보고싶지는 않습니다. 저 책들이 정말 정석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앞쪽만 몇번이고 다시 풀었던 그래서 뒤쪽은 늘 깨끗했던 사람중 하나입니다 ㅎㅎ) 페넬로페님의 마지막 말이 제일 와닿네요. ^^

페넬로페 2024-10-09 00:27   좋아요 0 | URL
그때는 지금처럼 참고서가 다양하진 않았지만
‘수학의 정석‘만큼은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인강이라도 좀 있었으면 끝까지 다 봤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글의 정석이 최고입니다^^

구단씨 2024-10-08 2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허걱. 놀랐어요.
새벽 4시 반에 학교에 가도 구석 자리만 남아 있는 그 상황을 그려보는데, 진짜 멘붕이네요.
위에 언급해주신 책은 저도 가지고 있었는데, 앞부분 50페이지 정도만 손때 자국이 남았고, 다른 부분은 완전 깨끗했습니다. ㅎㅎㅎ
지금 저희집에는 중1 수학 교재가 있어요. 제가 머리 아플 때마다 풀어보려고 샀는데,
네, 사긴 샀는데, 몇 문제 못 풀었어요. 너무 어렵네요....

페넬로페 2024-10-09 00:32   좋아요 1 | URL
네, 지금도 그 날이 기억날 정도예요. 완전 멘붕이었어요.

중학 수학도 풀기 어려워요.
그나마 방정식이나 식의 계산 부분은 재미있기는 해요^^
구단씨님의 수학 공부를 응원할께요^

2024-10-10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1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4-10-18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나니 다 헛짓거리였지만
예전에 성문종합영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 달던 시절 생각이 나
네요...

참 그 시절에 중고책방에서 성문
영어와 수학정석 책은 상당히 값
을 쳐주더라는.

페넬로페 2024-10-18 18:18   좋아요 1 | URL
그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거의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영어로 공부했어요.
레삭매냐님은 유학파 아니신가요?
성문 영어로 공부한 저는 지금 스피킹과 리스닝이 전혀 안 되고 있어요 ㅠㅠ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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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도에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 1941년을 배경으로,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 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대학에서 강의하며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던 토니 모리슨이 직접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경험과 감정을 언어를 통해 풀고, 정리하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뼛속까지 사무친, 뭉쳐지고 일그러진 무수한 얘기 중에 어떤 것을 꺼내 어떻게 전개해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첫 소설을 뻔한 내용으로 채우지 않았다. 작가는 억울하게 핍박받은 피해자로서의 흑인을 서술하기보다, 검둥이로 불리는 흑인 공동체 안을 먼저 들여다봤다. 1970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지만 토니 모리슨은 뒤늦게 1993년판에 서문을 덧붙인다. 서문에서 그녀는 작품을 쓴 의도와 구성방식을 설명한다. 작가는 바깥에서 받은 미움이나 증오로 인한 스트레스와 힘듦을 왜 안에서 풀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남들의 멸시나 배척을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것에 작가는 관심을 가진다.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는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의 기질로 자신보다 약한 공동체 안(여자와 어린이)을 공격하거나, 또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아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p.8)’을 했다고 한다.

 

토니 모리슨이 던진 이 문제의식은 단지 흑인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든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존감의 결여는 어린 아이의 자존감을 빼앗아 결국 폭력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양산한다. 다만 흑인이나 유대인처럼 민족 전체가 핍박받은 경우는 해결되지 못한, 뿌리 깊고 복합적이며 단단한 문제가 더 많을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늘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안 좋은 일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도 그것이 극복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오면 웃을 일이 생기고 지난했던 과거는 자신을 성장시킨 밑거름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억울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 오하이오주 로레인에 사는 촐리, 폴린 브리드러브부부에게는 결코 그런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그들은 잠시 사랑(연민인지도 모른다)에 빠져 결혼하지만 곧 촐리는 바깥을 돌며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폴린이 일하러 가야할 곳은 백인의 집이다. 녹색과 흰색이 섞여있는, 문은 빨간색인 예쁜 집에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웃으며 제인과 놀아주고, 강아지와 고양이가(p.17)’사는 흑인들이 동경하는 백인의 집에서 폴린은 마치 그곳이 자신의 집인 양 쓸고 닦고 열심히 요리를 한다. 촐리는 분노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아내에게 퍼붓는다.

 

당연히 촐리와 폴린은 싸운다. 남자가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에 여자가 되받아치며, 부부는 육탄전을 벌인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그들의 아들인 새미는 촐리의 머리에 프라이팬을 내리친다. 촐리는 정신을 잃고 그제야 싸움은 끝난다. 촐리는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아내 머리를 후려친다. 그 가족은 나앉게 된다. 전형적인 불행한 집구석이다.

 

[내쫓기는 것과 나앉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데가 있지만, 나앉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나앉는다는 건 무언가의 끝이었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조건을 정의하고 보완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었다.()당시 셋집살이를 하던 흑인 촐리 브리드러브는 자기 가족을 나앉게 만들었기에 인간적 배려가 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짐승 무리에 합류한 것이다. 정말로 늙은 개, , 쥐새끼 같은 검둥이가 되었다.

-p.32~33]

 

그런 짐승 같은 환경에서 자란 그들의 딸 페콜라는 의지할 대상이 없다. 가족이 페콜라를 보호하거나 지탱해주지 않으므로 그녀는 당연히 자존감을 지킬 수 없다. 정체성의 혼란이 와 인종적 자기혐오를 나타내게 된다. 페콜라는 자신을 부정하며 노란 머리의, 얼굴이 하얀,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 본연의 모습에서 시작된 모든 것을 거부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페콜라만이 아니다. 백인의 피가 섞여 있는 갈색 피부의 깡마른 여자들은 조용한 흑인 동네에 살며 집을 멋지게 가꾼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백인의 일을 세련되게 하는 법을 배운다. ‘펑키함을 죽을 듯이 싫어하며, 자신의 몸에서 그것이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여자들이 남자를 잘 수발할 것을 알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남자가 그들을 선택해 결혼한다. 자신은 유색인이라 생각하며 검둥이를 혐오한다. 미묘하며 구분이 잘 되지 않은 자신의 검둥이 성향을 언제라도 뭉개려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p.113).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와 그의 언니 프리다에게 주어진 환경 역시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신분과 계급 모두에서 소수자인 건 페콜라와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모는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들도 걸핏하면 매를 맞는다. 겨울날 가죽띠로 맞는 둔탁함보다 봄의 개나리와 라일락에서 꺾은 녹색 회초리로 맞는 쓰라림의 강도가 훨씬 강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과 페콜라가 다른 점은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에게 불이익이 닥치면 같이 맞서 싸운다. ‘나앉는 것의 두려움을 알기에 재산과 소유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셋집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맨다. 페콜라가 끔찍한 일을 당해 임신했을 때 클로디아와 프리다만이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기원한다. 그들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둘이었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연대, 특히 여성 연대의 필요성을 그들이 보여준다.

 

똑같은 상황일 때, 인간의 행동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매번 궁금하다. 누군가는 내부로 향해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부에서부터 사랑하고 뭉치며 같이 저항하는지가?

 

촐리는 젊은 시절 덤불 속에서 어린 소녀와 성행위를 할 때 백인에게 발각되며 굴욕당한 경험이 있다. 그는 그때 자신이 느낀 충격과 무력감에 대한 분노를 그 대상인 백인에게 표출하지 않고 어린 소녀를 증오하며 경멸한다. 그 이후로 촐리는 모든 분노를 바깥인 아닌 내부로 퍼붓는다.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아내와 딸에게 푼다. 이런 일은 너무 많다. 나약하고 졸렬한 인간들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퍼붓는 폭력적 성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이 생각났다. 그동안 완전 잊혀 진 기억이었다. 누가 나에게 그 인형을 선물했는지 모르지만 인형의 생김새는 페콜라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 긴 속눈썹이 있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을 눕히면 눈이 감기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난 인형을 갖고 놀았지만,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선물 받은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는 그 인형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인형을 망가뜨려버린다. 자연스럽게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에게 옮겨놓는 무심함을 클로디아는 경계한다.

 

토니 모리슨의 첫 장편소설인 가장 파란 눈은 촘촘하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여러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사계절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넘나드는 시점에 군더더기가 없다. 작가가 제기한 인종적 문제의식은 결국 보편적 인간 삶으로까지 확대되고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다만 팽팽했던 전개가 소설의 후반부에 촐리와 폴린의 삶의 설명으로 전환되는 부분이 아쉬웠다. 긴장이 풀어졌다. 서문에서 말했듯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랬다.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 여자아이의 파란 눈을 갈망하고, 그 갈망의 중심에 자리한 참혹함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그런 갈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끔찍한 폐해뿐이다.그애가 받은 손상은 전면적이었다.팔을 접어 손을 어깨에 얹은 채 파닥거렸다. 날아오르려 영원히 기를 쓰지만 그 헛된 노력이 기괴할 정도인 새처럼. 닿을 수 없는-볼 수조차 없는-마음속 계곡을 가득 채운 푸른 허공만을 응시하며, 날개는 있지만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헛되이 파닥거리는 새.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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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02 17: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몇 안되는 제 전작주의 작가
중의 한 명이지요.

어떤 책은 또 모니터링도 해서
더 애착이 가는 그런 작가일까요.

내부의 번뇌와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투사하는 촐리 속
에 내재된 악에 대한 묘사가 참...

<Home>의 출간도 기대해 봅니다.

페넬로페 2024-10-02 19:29   좋아요 3 | URL
책을 읽다보면 전작 읽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오래간만에 토니 모리슨의 소설 읽었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언어의 풍부함에 놀랐습니다.
기회되면 조금씩이라도 토니 모리슨 다시 읽기 하고 싶어요^^

서곡 2024-10-03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꽃잎이 진한 파란색 수국 같네요...페넬로페님 오늘 개천절 휴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10-03 13:06   좋아요 2 | URL
아, 수국인가요?
저는 파란 눈만 보느라 정작 꽃잎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책에 표지 디자인 설명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게 없더라고요.
서곡님!
휴일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요^^

서곡 2024-10-03 1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니 모리슨은 제 기억에 제가 완독한 책은 오래 전에 읽은 ‘재즈‘ 밖에 없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10-03 13:0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예전에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읽었는데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이번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잘 알게 되어 쉽게 읽은 것 같습니다^^

서곡 2024-10-03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란 수국 사진 제 블로그에 포스팅했답니다 ㅎ 제주도에서 다채로운 수국꽃들을 잔뜩 본 추억이 떠오릅니다...

페넬로페 2024-10-03 15:11   좋아요 2 | URL
네,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4-10-04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빌러비드>가 취향에 안맞았어서 손 놓았는데, 약간 빌러비드랑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페넬로페 2024-10-04 18:31   좋아요 2 | URL
빌러비드보다는 훨씬 편하게 읽으실 수 있어요. 아무래도 흑인의 이야기니 내용은 비슷하게 흐를지 몰라도 이 소설은 잘 읽힙니다^^

독서괭 2024-10-08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똑같은 상황일 때, 인간의 행동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매번 궁금하다. 누군가는 내부로 향해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부에서부터 사랑하고 뭉치며 같이 저항하는지가?˝
이거 저도 항상 궁금합니다.. 어떻게 애들을 후자의 누군가로 키울 수 있을지?!!
<가장 파란 눈> 아직 못 읽었는데, 예쁘게 새로 나왔군요! 페넬로페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4-10-08 15:37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궁금했는데, 토니 모리슨 작가가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주제로 글을 써주어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정답은 없었어요.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게 간다는 것이 아쉬웠고요. 독서괭님께서는 당연히 애들을 후자로 키우시죠. 지금 잘 하고 계시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