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구판절판


첫해부터 후회가 되었다
집 가까이
그 나무를 심은 것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밤마다 창을 두드린다
첫 시월부터 마지막 여름까지
가지마다 비와 얼음을 매달고서
나의 부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바람에 갇힌 영혼같이
상처 입은 불같이

겨울이 떠나면서 덧문을 열어 놓고 갔을 때는
잠 속까지 걸어 들어와
꽃으로 내 삶을 두드린다

나는 그 나무로부터 너무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마저도
심장을 건드리는-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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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1996년 10월
구판절판


고구마여
고구마여
나는 이제 너를 먹는다
너는 여름 내내 땅 속에서 감정의 농도를 조절하며
태양의 초대를 점잖게 거절했다
두더지들은 너의 우아한 기품에 놀라
치아를 하얗게 닦지 않고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도 넌 네 몸의 일부분만을 허락했을 뿐
하지만 이제는 온 존재로
내 앞에 너 자신을 드러냈다

남자 고구마여
여자 고구마여
나는 두 손으로 너를 감싼다
네가 진흙 속에서 숨쉬고 있을 때
세상은 따뜻했다
난 네가 없으면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쌀과 빵만으로 목숨을 연명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슬픈 일
어떻게 네가 그 많은 벌레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돌투성이의 흙을 당분으로 바꾸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고구마여, 나는 너처럼 살고 싶다
삶에서 너처럼 오직 한 가지 대상만을 찾고 싶다
고구마여
우리가 외로울 때 먹었던 고구마여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결국 무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내 앞에는 고구마가 있다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넌 말하는 듯하다
모습은 바뀌어도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나 우리 모두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고-44~46쪽

그렇다, 난 모든 길들을 다 따라가 보진 않았다
모든 사물에 다 귀 기울이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감히 대지의 신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고구마여, 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희망은 나의 것이라고-4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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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지음 / 열림원 / 1996년 10월
구판절판


소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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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2-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소중하고 고마운 소금이다...
 
백귀야행 음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3년 1월
절판


"연기, 연기 연기 연기. 어디나 연기투성이였어요. 그때, 만일 경찰이 오지 않았다면 저는 틀림없이 그 불탄 자리로 달려가서 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겁니다."
"연기를 ㅡ 뒤집어써?"
아저씨 ㅡ 유스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대체 연기란 무엇일까요. 저는 배우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건 기체입니까? 가스와는 다르겠지요. 김과도 달라요. 안개와도 노을과도 다르지요?"
"연기는 연기야."
"그래요, 연기는 연기예요. 연기는 사물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물은 무엇이든지 타지요. 그리고 타면 연기가 나요. 사람도 타면 연기가 나요. 그러니까 연기는 덩어리입니다. 연기는 스윽 하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사물의 더러움이 불타 버려서, 마지막에 연기가 되는거예요. 타고 남은 재라는 건, 진짜 찌꺼기예요. 그러니까 연기야말로 모든 사물의 진실한 모습이지요."
"바, 바보 같은 소리. 연기라는 건 가느다란 검댕이야. 검댕 중에서 작은 것이 따뜻해진 기류를 타고 올라가는 거겠지. 찌꺼기라면 연기도 찌꺼기라네."
"그건 아니에요. 연기는 연기예요. 하얗고 청정한 연기와는 달라요. 게다가 연기는 흩어지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250~251쪽

연기는 어딘가로 갈 뿐이에요. 결코, 사라져서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연기야말로 사물의 진정한 모습니다."
"유스케, 자네ㅡ."
연기는ㅡ영원(永遠)이다.
마키조는 굳어졌다. 굳어진 채 뒤로 몸을 뺀다. 눈에 불신감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아마 마키조는, 아니 확실히 마키조는 유스케가 정상인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광이로 보는 눈이다.
ㅡ이상하다.
"그래요ㅡ저는 이상해요. 소방조에 들어온 이유도, 그러니까 그 대략적인 이유는 있지만, 실은ㅡ틀림없이 연기의."-250~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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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음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3년 1월
절판


그때.
기모노의 소매가 가볍게 올라가고,
종이를 바스락ㅡ하고 치우고,
기모노 속에서 여자의 팔이,
스윽ㅡ하고 나왔다.
ㅡ아내의 손이다.
스기우라는 허둥지둥 기모노를 팔째 접어, 덮치듯이 방바닥에 눌렀다.
ㅡ나오지 마, 나오지 마.
아아ㅡ등 뒤가 무방비하게 비어 있다.
등 뒤에는 장롱이 있다.
스기우라는 그 장롱의 밑에서 두 번째 서랍이 소리도 없이 열리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ㅡ나오지 마!
그리고 서랍에서 몇 개나 되는 가느다란 팔이,
소리도 나지 않는 소리를 내며,
슬슬, 슬슬, 슬슬.
슬슬.
"하지 마! 그만해!"
스기우라는 큰 소리를 지르며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52년 8월 31일 저녁때의 일이다.-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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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2-0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을 읽는데도 으시시한데, 앞으로 더 으시시하면 어쩌나...ㅎㅎ
그래도 재미있어서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