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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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달빛은 뛰어난 예술가다
온갖 예사로운 것들을 다 불러모아
아름답고 애틋하게 치장해 내놓는구나



나도 그늘에만 숨어 있지 말고
주저 말고 나가 서야지



달빛 아래서라도 나도 저렇게
아름답고 애틋하게 바뀔 수 있겠지



그러다 문득 멈춰 선다
난감한 표정의 달빛을 볼 것이 민망하다



아무래도 너만은 안되겠는걸
달빛은 느릿느릿 도리질을 치겠지-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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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05-0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늘에만 숨어 있지 말고
주저 말고 나가 서야지>

내 마음에 와 닿는 글귀...
 
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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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輪舞)




하늘과 초원뿐이다.
하늘은 별들로 가득하고 초원은
가슴에 자잘한 꽃들을 풀로 덮였다.
낮에는 별이 피하고 밤에는 꽃이 숨어
멀리서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지만, 새벽이면



밤새 하늘을 지키느라 지친 별들이
눈을 비비며 은하를 타고 달려내려온다.
순간 자잘한 꽃들도 자리를 박차고 함성과 함께 뛰쳐나와
마침내 초원에서는 화려한 윤무가 벌어진다.



언제가 될까, 내가 그 황홀한 윤무에 끼여
빙빙 돌아갈 날은.-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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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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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마을이 안개에 덮여




안개는 많은 것을 감추고 조금만 보여주어
빈 쪽배가 보이고 산 넘어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는
저 쪽배를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저 오솔길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쉬엄쉬엄 요령 소리에 얹혀 넘어가던 길이다



이윽고 쪽배도 오솔길도 덮으면서
안개는 안개만을 보여준다-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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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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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맞으며




그 여자가 하는 소리는 늘 같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움막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구멍가게 자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섰는데도
그 여자는 목소리도 옷매무새도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을 서는 대신
모두들 제 스마트폰에 분주하고
힘들게 비탈길을 엉금엉금 기는 대신
지하철로 땅속을 달리는데도
장바닥을 누비는 걸음걸이도 같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 세상이.
이렇게 하려던 내 말은 그러나 늘 목에서 걸린다.
어쩌면 지금 저 소리는 바로
내가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세상이 두렵고 내가 두려워
속으로만 내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20~21쪽

아무도 듣지 않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올해도 죽지 않고 또 온 그 여자의
각설이타령을 들으며 걷는
달라진 옛날의 그 길에 시적시적 봄비가 내린다.-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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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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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1
느티나무를 돌고 마을 앞을 지나 신작로로 나가면
종일 통통대며 쌀겨를 날리는 정미소가 있고
매화가 피어 담 밖을 넘겨다보는 연초조합이 있었다.
병원이 있고 싸전 앞에 말강구네 밤나무집이 있고
그 아래 친구네 어머니가 빈대떡을 부치는 술집은
구수한 참기름 내와 술 취한 사람들로 늘 붐볐다.
양조장과 문방구와 잡화점과 포목점을 지나야
할머니와 삼촌이 국수틀을 돌리는 가게가 있었다.
할머니가 구워주는 국수 꼬랑지를 먹으러
나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이 길을 오고 갔다.
어두워도 나는 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게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전깃불이 동무였다.-11~13쪽

2
그날이면 아버지와 당숙들은 흰 두루마기를 차려입었다.
노란 들국화와 보랏빛 쑥부쟁이가 깔린 산자락을 오르면
갓을 쓴 일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 모여 있었다.
산소에 돌아가며 절을 하고 나면 할아버지들은
콧물을 훌쩍이는 우리들의 주머니를 다투어
대추와 밤과 곶감과 다식으로 채워주었다.
어른들은 이내 둘러앉아 술과 부침개를 먹으면서
누가 죽고 누가 잡혀갔다며 목소리를 죽였지만
모처럼 모인 아이들은 구슬치기로 신명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당숙들은 주막엘 들르고
먼저 돌아온 우리가 마중을 가야 자리를 뜨는데
비틀대는 어른들 어깨 너머엔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11~13쪽

3
장날이 우리 집은 그대로 잔칫날이었다.
아버지 광구에서 일하는 광부의 아낙들이 몰려와
아침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는 국수를 삶고 전을 부쳐댔고
아이들까지 따라와 종일 북새를 쳤다.
억센 사투리로 늘어놓는 돈타령 양식 타령이
노래판으로 바뀔 때쯤엔 남정네들도 한둘 나타나
어느새 마당에서는 풍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런 날일수록 아버지는 늦어서야 돌아왔다.
할머니를 따라가 광에서 훌쭉한 쌀자루를 들고
사내와 아이들을 챙겨 뒷문을 나서는
아낙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 뒷길에서
새파란 칸델라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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