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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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음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통영




설거지를 마치고
어린 섬들을 안고 어둑하게 돌아앉습니다.
어둠이 하나씩 젖을 물립니다.



저녁비 호젓한 서호시장
김밥 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니댁이
도두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끙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 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께서도
억세고 정겨운 통영 말로 봄장마를 고시랑고시랑 나무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어
끙,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드리면, 이래 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 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서



앳된 보슬비 업고 걸려 민주지산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아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
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엉덩이



영주에는 사과도 있지
사과에는 사과에는 사과만 있으냐,
탱탱한 엉덩이도 섞여 있지
남들 안 볼 때 몰래 한입
깨물고 싶은 엉덩이가 있지.



어쩌자고 벌건 대낮에 엉덩이는 내놓고
낯 뜨겁게시리 뜨겁게시리
울 밖으로 늘어진 그중 참한 놈을 후리기는 해야 한다네
그러므로,
후려 보쌈을 하는 게 사람의 도리! 영주에서는
업어온 처자 달래고 얼러
코고무신도 탈탈 털어 다시 신기고
쉴 참에 오줌도 한번 뉘고
희방사 길 무쇠다리 주막 뒷방쯤에서
국밥이라도 겸상해야 사람의 도리!



고개를 꼬고 앉은 치마 속에도
사과 같은 엉덩이가 숨어 있다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
정미소 둘째 닯은 허여멀건 소백산쯤
없어도 그만이다 싶기도 하지
남들 안 볼 때 한입 앙,
생각만 해도 세상이 환하지 영주에서는.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던 쉬파리들 있었네.
한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 나는 된장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개가 울밑에 숨겨
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죽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옛 우물




늙은 거미처럼이라고 적는다.


버려진 집에 뒹구는 이 빠진 종지처럼이라고



서리 덮인 새벽 둑방 길처럼



섣달 저녁의 까마귀처럼이라고 적는다.



폐분교의 엉터리 충무공 동상처럼



변두리 차부의 헌 재떨이처럼이라고



찾는 이 없는 옛 우물과



오래전 버려진 그 곁의 수세미처럼



문을 닫고 힘없이 돌아서는 처용이처럼이라고 적는다.



선득 종아리에 감기다 가는 개 울음소리처럼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이라고 적는다.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미안한 일





개구리 한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끌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보살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날을 나도 힘도
안 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허요. 그저 좋아 자꾸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짜르르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먼,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길로 그만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믄 혀라우.

에이 시브럴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땀은 흐르고 배는 고프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은 저물고



바로 이때 나직하게 해보십지
`에이 시브럴ㅡ`
양말 벗어 팽개치듯 `에이 시브럴ㅡ`
자갈밭 막 굴러온 개털 인생처럼
다소 고독하게 가래침 돋워
입도 개운합지 `에이 시브럴ㅡ`
갓땜에 염병에 ㅈ에 ㅆ, 쓸 만한 말들이야 줄을 섰지만



그래도 그중 인간미가 있기로는
나직하게 피리 부는 `에이 시브럴ㅡ`
(존재의 초월이랄까 무슨 대해방 비슷한 게 거기 좀 있다니깐)
얼토당토않은 `에이 시브럴ㅡ`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
크게는 못하고 입안으로 읊조리는
`에이 시브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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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229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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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산신각 터 벼랑 끝은 가을이다

 

 

벼랑 아래 가을은 어쩌다, 저토록 깊어서

손금 가늘고 빛이 옅다

이 가을에 닿기 전 쉰 번쯤 고비를 넘겼을 듯하다

 

 

도토리 한 분 집 떠나는 소리가 우레다

빈 손, 먼 길 아니더냐

물어올 듯 꽉 다문 입술이 붉다

홀로 걸어와 모르겠노라, 고요히 나도 붉은 침묵이다

 

 

 

품고 온 사람 모두 부려놓았는지

저 가벼운, 투명한 나비 한 마리, 체송화 못 본 척

돌숲으로 총총총 걸어가는

도토리도 나도 신발 끈을 고쳐 묶는 구절사

 

 

벼랑 끝에 홀로 선 가을도 어언 벼랑 끝이다

 

-13페이지

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그러니까 내가 이 골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늦바람이 든 거다



곰곰 짚어보자면 바람은 생의 발단쯤에서 복선처럼 스쳐갔던 것,


절정의 뒤꼍에서 가으내 골목 힐끔대는 이 노릇이란
내게 휘어질 생의 굽이가 한 마디쯤 더 남아 있는 탓이려니,



때도 없이 붉어지다 뼈가 부러진 옆집 대추나무 훔쳐보듯 은근슬쩍 바라보면
봉충다리 막냇누이의 봉숭아물 같은, 눈물 같은


선홍(鮮紅),



누군가의 연모 지우려 제 스스로 허벅지 찌르지 않고서야
저토록 노랗게 붉어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늦바람이 든 거다
저도 나처럼 울긋불긋 바람의 단풍이 든 거다

진흙밭




황태탕 먹다 내려다보니 그 어른 참 고우시다



톡톡 살갗 터뜨려 이룬 생의 무늬들 눈부시다



맨발로 걸어온 길이 천 갈래 만 갈래 또렷하다



뒤엉킨 밥풀조차 수련인 듯 뽀오얀 진흙밭이다

저수지




김치찌개 냄비에서 고기가 또 낚이는 것이다



밥그릇은 어언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데



둘이나 셋쯤 끝날 줄 알고, 푹, 푹 숟가락질 했는데



냄비 기슭에서조차 돼지비늘이 튀는 것이다



물속이, 주인 여자가 두어 길 저수지여서



진흙에 빠진 듯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다

웃다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 앉아 만원 열차를 보내고 열차를 기다린다



ㅡ아......, 배고파

옆자리 여자의 목소리가 십 리는 가라앉았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는,
마른 몸을 톡 튕기면 주르르 뼈들이 흘러내리겠다



ㅡ엄마, 참아

엄마의 옆구리에 파묻힌 형제가 이구동성이다
둘이 합해 열 살쯤 될까
참을 수는 있을까



엄마도 형제도 더는 가라앉을 바닥이 없는 지하철
여자는 침묵이다
여자와 나 사이 한 뼘 거리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이다



몸집 큰 여자가 심연 속으로 철벙철벙, 안개꽃을 안고 걸
어온다
꽃다발이 여자의 얼굴을 다 가렸다



ㅡ얘들아, 저 꽃 봐

꽃을 향해 엄마가 일어선다
꽃에 대한 기억이 사무치는지 숨죽여 웃는다



열 살이 따라 웃는다
나도 웃는다
열차가 웃고 꽃이 하얗게, 하얗게 웃는다





대둔산 오르막 삼거리, 노점상 여인이 인사한다.
차를 향해 열 배 스무 배 한다.
허리가 반나마 접힌다.
골짜기처럼 깊다.
깊어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안심사 10킬로미터......
길에서 절이 주춤한다.
어디로 가나.
옥수수 품고 가는 내게로 오나,
나를 품고 가는 옥수수에게로 오나.
안심사 2킬로미터, 저만치 절이 앞서 간다.

아카시아




어젯밤 부들부들 손 떨며 쌀밥에 숟가락 꽂던 늙어 가장이
보란 듯 꽃을 피웠다



상추쌈이 흔들려 된장 덩어리가 엄지발톱 위로 떨어졌
는데, 발가락이 떨렸는데



대추씨 같은 몸속으로 상추쌈 밀어 넣으며 젖 먹던 힘 쏟
은 게 분명할 꽃이 피었다



꽃씬 줄 모르고 된장 주워 삼킨 손자 놈 고추에도 몽글몽
글 꽃망울 맺히는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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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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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현재의 자기 직분을 놓칩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러 와 놓고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러 왔는데 그걸 방임하는 사람도 있고,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도움을 준 사람을 욕하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





이 세 가지에 늘 깨어있으면
삶에 후화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나고 보면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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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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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지 말고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워오세요.
어차피 장가 간 김에, 어차피 자식 낳은 김에, 어차피 부도난 김에,
어차피 암에 걸린 김에, 어차피 늙은 김에
괴로워하지 말고
깨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세요.
늙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병이 났을 때만 깨칠 수 있는,
이혼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배신당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도리가 있습니다.
원효元曉도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다가 토했을 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에 있어요.
그것을 알아차리느라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 육도를 윤회하며 헤맬 수도 있고
단박에 해탈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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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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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삶에서 부딪히는 일을 안으로 살펴야 해요.
타성적으로 보지 말고 새로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울고 있어도 슬픔에 빠지지 않고
웃고 있어도 기쁨에 빠지지 않고
병이 나고. 늙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야 안심입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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