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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권은 교토의 역사, 4권은 명소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적 순서대로 장소를 옮기면서 해설하는 방식을 취하니 과연 서문에 나온대로 일본 역사를 쭉 훑게 된다.
덕분에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원정정치, 남북조 시대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 정원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는 마른 산수, 석정 등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도판이 어두운 게 많아 아쉽지만 사진만으로도 너무나 매혹적이다.
특히 고보리 엔슈가 조성했다고 여겨지는 가쓰라 이궁이 무척 인상적이다.
다이묘가 조경 건축가였다는 점도 신기한데 중국 원림이나 창덕궁의 후원 등과는 또다른 정갈하면서도 감각적인 느낌의 일본식 정원에 마음이 간다.
저자가 교토 박물관에서 셋슈 서거 500년 특별전을 보기 위해 새치기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일본인의 줄 맞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 공감했던 것이, 작년 여름 도쿄 디즈니랜드를 갔을 때 퍼레이드를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대충 앉으면 될 줄 알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더니 안내원이 와서 계속 줄을 맞춰 앉으라는 거다.
줄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길가에서 공연보려고 앉아 있는 것도 나란히 줄을 맞춰야 하다니 처음에는 무시했는데 두 번 세 번 와서 지적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옆사람과 줄을 맞춰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니 내 뒤로도 네댓 줄이 열맞춰 앉아 있는 걸 보고 질서의 나라임을 새삼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인상깊은 구절>
220p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비가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은 사람, 나는 나, 어찌 됐든 내가 가는 길을 가는 간다"
236p
더욱이 그것이 은각사에서 보았듯이 기술 집단에 의해 제작되어 장인도 대접받고 생산량이 많았던 데에는 부러움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조선왕조에서 기술을 천기로 생각하여 건축, 무용, 음악, 도자기, 목기, 금속공예의 장인들을 모두 '쟁이'로 취급함으로써 장인의 이름 석 자를 거의 남기지 않은 것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 이에 반해 조선왕조의 예술에서 공예는 이름 없는 장인에게 의지했지만 서화만은 '쟁이'에게 다 맡기지는 않았다. 사대부가 직접 참여하거나 중인 신분의 화원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했다. 화원도 문인 취미라는 것을 이해해야 대가가 되었다. 이것은 서화가 지닌 미학이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문정신을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왕조에서는 장식화보다 감상화가 주류였기 때문에 예술의 본령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44p
와쓰지 데쓰로는 자신이 왜 古寺순례를 쓰려고 하는가를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사실 고미술 연구는 나 스스로에게는 옆길이라 생각된다. 이번 여행도 고미술의 힘을 享受함으로써 내 마음을 닦고, 나아가 풍족하게 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본래 감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연구도 필요하다."
269p
답사란 장소에 대한 확인만으로도 뜻을 새길 수 있는 것이다.
325p
요란한 장치나 기발한 구조로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평범성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하며 기능에 충실한 형식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우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현대건축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기능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모든 뛰어난 기능을 갖는 것은 동시에 형식도 뛰어나다'라는 명제를 내걸었다. 때때로 이 말은 오해를 낳았자민 가쓰라 이궁은 나의 주장이 맞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410p
우리 유물을 조사하자는데 왜 이리 까다로우냐고 항의를 하니까, 이렇게 철저히 비공개로 하는 것이 사찰의 엄격한 보관 원칙이라면서 그렇게 보관했기 때문에 700년 이상 된 불화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양해해달라고 했다. 이런 식의 답변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434p
신유한은 비와호를 지나면서 그 풍광에 취해 "어떤 오랑캐가 이렇게 좋은 강산을 차지했을까"하고 탄식했으며 ...
신유한은 문예 교류에 대해 증언하면서 일본은 무인이 지배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문장이 볼품없고 졸렬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오류>
94p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인 고사가 천황이 이궁을 세웠고, 아버지인 가메야마 천황이 여기에 머물러~
->고사가 천황은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증조부이고, 조부가 가메야마이고, 아버지가 고우다 천황이다.
231p
1628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벌어진 '오사카의 여름 전투'에서 희생된 장수들의~
->오사카 여름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 사이의 전투다.
343p
고미즈노오 상황은 삼촌과 조카가 대를 이어 지은 가쓰라 이궁에 두 번을 다녀오며
->가쓰라 이궁은 고미즈노오 상황의 삼촌인 도시히토 친왕과 그 아들인 도시타다가 지은 궁이다. 그러므로 삼촌과 사촌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