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껏 포장되어 배달된 책을 받았다. 아직 발간되지 않은 가제본의 책. 마치 소설 속의 나오가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정성껏 밀봉한 봉투를 여는 설렘으로 상자를 열어 소설책을 펼펴본다.

캐나다의 섬 마을에 살고 있는 소설가 루스는 어느 날 파도에 밀려온 밀봉된 비닐봉지를 줍게 된다. 비닐봉지 안엔 손으로 쓴 조그만 편지 묶음 하나, 빛바랜 낡은 책 한 권, 골동품 손목시계 하나, 그리고 헬로키티 도시락이 들어 있다.
이 편지는 일본에 살고 있는 16살 소녀 나오(야스타니 나오코)의 편지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제목의 낡은 책은 펼쳐보니 원래 책을 떼어내고 집어넣은 노트에 나오가 쓴 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렇게 캐나다의 외딴 섬마을 작가 루스는 태평양 건너편 일본의 한 소녀가 적은 일기를 받음으로 둘 간의 시간을 넘나드는 소통이 시작된다.
과연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일기를 읽는 루스 눈에 띤 놀라운 구절이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곧 시간을 졸업할 거예요.” 얼굴도 모르는 소녀 나오는 자살을 앞두고 있다. 급한 마음에 일기를 읽어보는 가운데 알게 되는 사실은 이렇다. 미국에서 어려움 없이 살던 나오는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해직을 당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의 고국이지만, 낯선 환경에 떨어진 나오는 학교에서 온갖 왕따와 폭력의 희생양이 된다. 또한 계속되는 취업의 실패에 결국 아빠는 사회적 외톨이마냥 집안에 은둔하며 자살 시도를 거듭하곤 한다. 이런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삶의 마감을 생각하는 소녀 나오.
태평양 넘어 먼 곳에 있는 루스는 걱정한다. 과연 나오가 지금도 살아 있을까? 게다가 이렇게 먼 곳 캐나다 외딴 섬까지 흘러들어온 물건들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물건들이라는데, 그럼 자신이 읽고 있는 이 일기의 주인공 나오는 어떻게 된 걸까? 동일본대지진의 희생자가 된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을 알기 위해 루스는 한편으로는 나오의 아빠를 찾고, 또 한편으로는 일기를 계속 읽어나간다. 과연 루스가 만나게 되는 나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는 캐나다의 루스 이야기와 일본 나오 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다. 이렇게 긴 분량의 소설이 강한 흡입력보다는 은근한 흡입력을 가진 잔잔한 분위기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적 묘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간혹 판타지적 요소도 섞여 있어(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나오가 생령이 되어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의 눈을 다치게 하고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이루어진다거나, 나오가 쓴 일기를 루스가 읽을 때 글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기기도 한다.) 소설 분위기는 다소 묘하다.
전쟁, 왕따, 실직, 자살, 환경파괴 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아우르는 소설 기저에 흐르는 사상은 선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자, 과학의 양자물리학이다. 아마도 이런 양자물리학의 사고로 소설을 쓰다 보니,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 곁에는 고양이가 존재한다(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알면 이 소설이 보인다. 잘 모르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설명하면 이렇다. 두 개의 상자가 있다. 한쪽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또 한쪽엔 무조건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고양이를 둘 가운데 한 곳에 넣는다. 그럼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상자를 열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럼 상자를 열기 전엔? 그때 상자 안의 고양이는 완전히 죽어있는 고양이도 아니고, 완전히 살아있는 고양이도 아니다. 아니 반대로 완전히 죽어 있으며, 또한 완전히 살아 있다. 이런 중첩의 상태에 고양이는 처해 있다. 이런 상태의 고양이를 상자를 열어 관찰자가 관찰하는 순간, 완전히 죽은 고양이나, 완전히 살아 있는 고양이가 된다는 것이다(맞게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고로 소설을 볼 때, 루스가 나오의 일기를 금세 읽어버리지 않고, 나오가 일기를 쓴 템포로 읽어나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루스가 나오의 일기를 다 읽기 전까지는 나오의 상태는 죽은 상태도 살아 있는 상태도 된다. 중첩의 상태. 설령, 나오가 자살했더라도, 설령 대지진의 피해자가 되었더라도 루스가 일기를 다 읽어 상자를 완전히 열기 전엔 나오는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양자 역학이 말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세상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선택한 상자가 아닌 또 다른 상자의 세상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두 상자 가운데 어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으로 갈리는 것처럼 우리의 세상 역시 이처럼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고, 지금 이곳과 또 다른 선택의 다른 어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계속하여 수많은 세상이 나뉘게 되고, 지금 여기와 다른 모습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 이런 사고로 소설을 볼 때, 희망이 읽어진다. 혹 상자를 완전히 열어 알게 되는 사실이 나오의 자살이나, 또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희생자가 되었다면, 양자역학이 말하는 또 다른 세상에서는 어쩌면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는 나오가 활짝 웃으며 여전히 살아 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말장난, 논리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실제 존재한다면 좋겠다. 그래야,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 집단 괴롭힘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청소년들, 세월호로 희생된 희생자들이 끔찍한 지금 여기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양자역학의 사고는 선불교의 연기론과 유사하다(물론 선불교의 연기론에 대한 나의 이해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 혹 잘못되었다면 이는 전적으로 나의 몰이해에 의한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설명 역시 마찬가지다. 혹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용서하시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외침이다. 하지만, 이 외침은 선불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한 것은 나만 홀로 잘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와 너가 따로 없이 모두가 하나이기에 홀로 존귀하다는 의미일 뿐. 세상은 하나다. 나와 너가 하나다. 캐나다에 있는 루스와 일본의 나오가 일기장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나오의 큰할아버지와 아빠가 이름도 같을뿐더러 같은 고민을 했던 모습 등을 통해, 세상은 하나다. 어쩌면 환경 문제를 이야기 하고, 태평양의 쓰레기 섬 문제가 언급되는 것도 역시 이런 지구는 결국 하나라는 사고를 말하려는 것일지도. 아무튼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구하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제목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는 결국 이런 하나됨.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연결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말이 길어졌다. 루스 오제키의 소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는 개인적으로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면서도 뭔가 어렵게 느껴지는 묘한 소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소설도 아닌, 뭔가 묘한 힘이 담겨 있어 계속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