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66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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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며, 잘 알려진 내용이다. 드라큘라 영화는 누구든 한두 편은 봤을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 “드라큘라”를 제대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드라큘라의 작가가 브램 스토커라는 분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워낙 캐릭터가 강해, 자신의 창작 캐릭터에 묻혀, 저자의 이름은 사람들이 별로 기억치 않는다는 소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는 걸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이미 출간된 지 100년이 훨씬 넘는 스릴러의 고전. 6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는 분량의 소설. 이 “드라큘라”가 열린책들에서 상, 하 두 권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렇게 나눈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단순히 분량이 많아 두 권으로 나눴을 수도 있겠지만, 드라큘라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물론 본인의 느낌이다). 게다가 상, 하에서 드라큘라에게 전염되는 두 여인이 각기 등장한다. 물론, 두 번째 여인 미나 하커는 상편에서는 처녀적 이름 미나 머레이로 계속하여 등장한다. 아무튼 이 두 여인을 기준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은 주로 각 등장인물의 일기와 편지의 형식이다. 물론, 모두가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주로 조너선 하커, 미나 하커, 루시, 존 수어드의 일기를 통해, 각자의 눈으로 사건을 들여다보며 접근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이처럼 일기와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기에 긴박감이 없을 듯싶은데, 그렇지 않다. 특히 상편에서는 잔잔한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긴박감이 최고다. 상편이 훨씬 흥미롭고 스릴이 넘친다.

 

갓 변호사가 된 조너선 하커는 상관의 지시에 의해,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을 찾아가게 된다. 드라큘라 백작이 런던에 집과 영지를 사는 문제를 의뢰해왔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것. 하지만, 그곳 백작의 집을 찾아가는 첫날부터 대단히 음산하고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조너선 하커는 백작의 비밀에 서서히 접근하게 된다.

 

한편 하커의 약혼자인 미나, 그리고 미나의 둘도 없는 친구 루시는 함께 휘트비로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순결하고 고결한 여인 루시는 드라큘라의 희생이 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데. 과연은 루시는 죽음으로 끝일까?

 

 

드라큘라의 전반부가 흥미롭고 스릴이 넘친다면, 반면 후반부는 대사 하나 하나를 곱씹게 하고, 사색하게 하는 상당히 철학적 내용을 품고 있다. 물론, 후반부 역시 스릴을 전제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가 그렇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상편이 왠지 미신적인 접근을 주로 하고 있다면, 하편에서는 그 이면에 담긴 신앙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게 한다(저자가 의도하였던지 그렇지 않던지 간에).

 

드라큘라 이야기에서 중요한 모티브 중에 하나는 선과 악의 문제이다. 물론 드라큘라는 악의 쪽에, 그리고 그 상대편에 있는 등장인물들 루시, 아서 홈우드, 조너던 하커, 미나 하커, 수어드 박사, 퀸시 모리스, 반 헬싱 박사 등은 선의 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이 영원하지 않다는 화두를 저자는 던진다. 특히, 악은 선을 오염시킨다. 이것이 드라큘라에게 물린 자들이 흡혈귀로 점차 변하게 되는 모티브 아닐까?

 

또한 이러한 강력한 악을 이길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은 악과 맞서 싸울 용기, 절망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확신이다. 이는 특히, 흡협귀의 전문가(?)인 반 헬싱 박사의 대사에서 두드러지게 나온다. 게다가 반 헬싱 박사의 이름이 아브라함 반 헬싱이라는 것에도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유대인들에게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반 헬싱 박사는 현대인들의 의심에 경종을 던진다. “의심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칼집, 갑주, 무기가 될 수 있다(p.542)”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보이는 것조차 의심하는 현대인들의 의심이 드라큘라의 존재를 믿지 않게 하고, 이런 의심을 이용하여 악은 자신의 영역을 확산시켜 나간다.

 

또한 드라큘라 이야기는 무엇이 참 불멸인지도 보여준다. 과연 악에 물들어 누군가의 피를 빨아 얻는 불멸이 참 불멸인가? 아님, 전편에서 보여줬듯이 흡혈귀가 된 루시가 흡협귀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면을 누리는 것이 참 불멸인가? 괴물이 되어 누군가의 희생을 전재로 영원한 삶을 누린다면 이것은 벗어버려야 할 굴레가 아닐까? 아무튼 “드라큘라” 재미있으며,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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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베를 쏘다
김정현 지음 / 열림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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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아베를 쏘다』에서 저자는 죽은 안중근을 다시 살려낸다. 그리고 안중근은 100여 년 전 자신이 이등 박문(저자는 요즘은 모두 일본사람 이름을 일본식 발음 표기로 하지만, 저자는 일본식 표기를 앞세우지 않고, 예전의 한자식 발음으로 한다. 의도적 표기가 아닌가 싶다)을 쏘았던 그 현장에서 아베를 다시 쏜다. 그래서 판타지라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소설의 인클루지오를 이루고 있을 뿐, 대부분의 전개는 안중근 재판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을 읽어가는 가운데 갖게 되는 느낌들은 분노, 경외, 통쾌, 공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분노는 우선 안중근을 두려워하며 야비하게 행동하는 일본의 행태에서 느끼게 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권이 중국, 또는 러시아에 있음에도 자신들의 힘으로 윽박질러 자신들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이다. 아울러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베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주장과 행보에 대한 분노이다.

 

당시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사형에 처하고 급하게 집행한 이유를 검사 구연의 말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많은 한국인이 그 행동을 본뜰 것이며, 일본인들은 겁이 나서 일상을 온전히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단순 살인자, 단순 테러분자로 규정하고 사형에 처한 이면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연함과 그 높은 애국의 정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시대를 떠나 마찬가지이다. 권력자들이 민중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과도한 대처를 하는 이유는 사실 두려움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근원은 본인들의 그름에 있다. 본인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과도한 대처를 하거나 온갖 거짓 주장들을 억지로 주입시킬 필요가 없다. 이는 오늘 이 시대를 돌아보게도 한다.

 

둘째, 경외의 감정은 언제나 의연함을 잃지 않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갖게 된다. 그리고 안중근의 정의심에 이 감정을 품게 된다. 끝까지 나라와 동포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서 경외의 감정을 품게 된다. 오늘 우리는 국가나 동포보다는 ‘나’가 더 중요하진 않은가?

 

셋째, 통쾌함은 아베를 처단하는 장면에서이다(물론 이런 감정은 옳지 않은 감정이지만, 본인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일본사람은 일본사람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고, 일본 ‘놈’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것처럼 여기는). 하지만, 더욱 통쾌함을 느끼는 장면은 아베를 죽인 후 다시 열리게 된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가 당당하게 소견을 밝히는 장면이다. 특히, 아베의 죄에 대해 조목조목 밝히는 부분에서는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공감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이다. 비록 미운 일본이다. 어쩌면 용서가 쉽지 않은 일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바로 그러한 대안을 생각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을 쏜 것은 대안 없는 폭력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동양평화론에서는 공감을 느끼게 된다.

 

『안중근, 아베를 쏘다』, 8월에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인클루지오 부분(프롤로그, 제3부)만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통쾌함만을 마음껏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껍질만 먹는 것이다. 조금은 지루한 감도 없진 않지만, 안의 내용물도 섭취해야 저자가 성의껏 장만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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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의 마들렌
박진희 지음 / 리즈앤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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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유래한 말인데,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프루스트 현상’ 또는 ‘마들렌 효과’라 부른다고도 한다.

 

바로 이런 모티브에서 이 책의 제목, 『나른한 오후의 마들렌』이 나왔나 보다. 마들렌의 달콤한 향,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 느낌에 젖어 옛 추억을 회상하며 가볍게 적어낸 에세이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이 책은 무겁지 않다. 거창한 철학적 에세이집도 아니고, 연구 에세이집도 아니다. 특별히, 어떤 주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일상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쉬운 언어로 적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주된 주제가 있는데, 바로 사랑이다. 저자는 마치 차 한 잔 마시며 옛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듯 사랑에 얽힌 추억을 꺼내기도 하며, 사랑에 대한, 그리고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풀어낸다. 아울러 이러한 이야기를 영화 이야기와 함께, 그리고 술에 얽힌 추억들도 함께 말하기도 한다.

 

쉽게 읽혀지는 내용이기에 제목 그대로 ‘나른한 오후’에 차 향기에 젖어 읽기에 적당한 에세이집이다. 아울러 그 내용에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읽으면 좋을 듯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전반적인 글의 분위기는 따스하지 않다. 추억의 회상이라면 마땅히 따스한 느낌이 강할법한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저자의 사랑 관에서 유래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다. 자녀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어쩌면 이것이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여우의 신포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저자의 자기 반응 논리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에세이집이면서 전체적인 느낌은 자기 변명, 자기 최면의 넋두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때론 염세적이기도 하고, 자조적이기도 하다.

 

에세이집이 갖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따스함의 단상에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세상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바라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글로 독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결혼생활이 물론 환상과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결혼생활 가운데 부정적 부분보다는 긍정적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님을 저자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자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때론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로 인해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감사하며, 축복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가정 역시 수없이 많다. 나 역시 언제나 자녀로 인해 감사하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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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홍수까지 - 양승훈 교수의 아주 특별한 창세기 주해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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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39권의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유독 사랑받는 성경이다. 신앙인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속의 이야기를 한두 번쯤 들어봤을 정도이다. 그만큼 잘 알려진 성경이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창세기에 대한 연구서적이나 설교집을 발간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의 강단에서 구약 가운데 가장 많이 설교되어지는 성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토록 많이 알려진 창세기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이 나왔다. 바로 양승훈의 『창조에서 홍수까지』란 책이다. 이 책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양승훈 교수의 아주 특별한 창세기 주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주 특별할까? 그것은 양승훈 교수는 목회자가 되기 전, 물리학교수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창조과학회 활동도 오래 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과학자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 범위는 창세기 전체가 아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역사(창세기 1-11장) 부분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실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원역사 전부가 아닌, 창조이야기(사실 창조이야기 역시 저자는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반쪽 창조이야기일 수도 있다)와 홍수이야기 부분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제목을 『창조에서 홍수까지』라고 하기보다는 『창조와 홍수』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원역사에서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의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마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처럼 창조이야기와 홍수이야기를 저자는 과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관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용들은 우리의 성서해석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또 한편으로는 흥미로움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과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신학자의 관점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없지 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점을 잃지 않고 거듭 강조하며, 우리에게 알려준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창조과학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긍정적인 성과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은 신앙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지도 않다. 창세기 1장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장을 접근하며,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집중하게 되면, 잘못 접근하게 된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가 아닌,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홍수이야기 역시,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는지 보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홍수 사건 이후에 재창조 사역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 안에 역사가 담겨 있다. 하지만, 성경은 역사책은 아니다. 성경 안에서 과학적 내용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다. 과학적인 접근, 해석을 한 후에도 다시 돌아와 이 부분을 짚어 준다. 이처럼 과학자로서의 접근을 하면서도, 신학자, 목회자로서의 접근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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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지음 / 다섯수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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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하셨던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다. 무엇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자의적 사임,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는 2번째) 교황직을 사임하고 선출되었다는 이유가 한 몫 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출된 인물이 비유럽권으로는 최초의 교황이라는 점. 아메리카 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이라는 점도 화제집중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요소들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가톨릭 인구의 대다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기 때문에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의 교황이 선출된 것은 시대적 부응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탈리아 이민자 2세이기에 어쩌면 가장 많은 교황을 배출한 나라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기에 일조함이 없지 않겠지만, 그의 가장 큰 인기 비결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서,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는 철저하게 이 부분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본서는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서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서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재와 같은 신학적 사고를 갖게 된 배경, 그가 교황이 되기 이전에 교회의 신학작업에 끼친 영향, 그리고 그에게 그러한 신학적 영향을 끼친 신학사조와 교회의 작업들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 교회의 역할, 교회의 목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발견하고 찾아가는 작업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저자가 추구하는 방향, 그 부분의 모습만이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관점은 건강하고 옳다. 물론, 교황의 외적 영성부분이 아닌 내적 영성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그 내용은 대단히 건강하다.

 

교회(가톨릭, 개신교, 동방교회 등 모든 기독교 교회)는 결코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닫혀 있는 교회를 ‘자기 참조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교회는 복음 전파보다는 교회 보존에 열을 올리는 폐쇄적인 교회로 건강한 교회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복음 전파 역시 교회 보존의 수단으로 삼는 교회가 있는데, 이를 저자는 ‘영적 세속성’의 늪에 빠진 교회라고 말한다. ‘영적 세속성’이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대다수 교회 인사들의 열정은 바로 이 ‘영적 세속성’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이익 창출의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 역시 아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옳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야 하며,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문을 닫고 안에 평안히 거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방향성을 변두리로 본다. 세상의 모든 존재적 변두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변방이 교회가 갈 곳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지 않으셨다. 당시 변방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약자들의 눈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무관심한 채 끼리끼리 모여 거짓 평안을 위안삼아서는 안 된다. 주님은 약자들의 눈물, 아픔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다. 이제 교회 역시 이런 연민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교황을 통해, 가톨릭이 옳은 방향으로 변혁되어지고, 이 건강한 물결에 개신교 역시 건강한 자극을 받게 되길 바란다. 사실, 중세 시대 가톨릭이 타락하여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교회가 새롭게 시작될 때,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출발이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 최초 교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개신교 역시 누구의 영향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새로워짐이 중요함을 깨닫고 함께 새로워지는 축복이 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처음 선포하신 말씀을 살펴봄으로 서평을 마친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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