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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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본서는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세 사람,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에 대한 글이다.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그리고 성문제, 소명과 인격, 가르침, 죽음,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조금 산만한 느낌이 없진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들까지 열거함으로 오히려 핵심을 흐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본서는 본인에게 특별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솔직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함이 사실이다. 막연하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 소크라테스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당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는 정도.

 

그런 나에게 본서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에 붙들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소크라테스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산파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산파’로 살아감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확신했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영혼의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다름 아닌 무지로 봤다. 그래서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냐? 신에 대해서?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봤던 것. 이 일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평생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이 질문들을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함으로 그들이 내면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지식만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 지식과 함께, 이성을 넘어서는 지식, 즉 믿음, 직관 등을 붙잡았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시시때때로 신과의 접신(?)을 행하였으며, 내면의 목소리, 다이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았다.

 

또한 자신이 붙잡았던 인간의 삶, 즉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선을 위한 삶, 정의를 붙잡는 삶을 답으로 제시하였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비록 잘못된 판결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도망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붙잡았던 정의를 자신이 뒤집는 것이 되기에, 자신의 말이 행동에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모습이 참 멋지게 다가왔다. 소크라테스뿐이겠는가?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신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사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책의 뒷부분의 몇 단원만 읽어도 될 듯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 사람이 추구하였던 내면의 자유는 결국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무지, 예수는 원죄(사실 저자는 원죄라고 말하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후기의 개념이고 그냥 죄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붓다는 갈애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고, 자유함을 누릴 때, 그 자유를 가지고 옳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또한 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진리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 저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정의이며, 예수에게는 사랑, 붓다에게는 자비라고 봤다. 사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노예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에 있어 붙들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아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 믿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 삶이다.

 

솔직히, 붓다가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욕과 좌선을 붙잡고, 이것을 통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갈애,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너무 인간적이지 못해 공감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믿었던 그것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기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보다 그 앎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적 삶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음 글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p.371)

 

그렇다. 앎도 중요하지만, 실천적 삶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공부함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지게 되길 소망한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가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묘사할 때는 흐트러짐 하나 없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초인 같다. 반대로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이자 인간인 신비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에서 그를 묘사할 때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슬픔, 기쁨, 낙심, 격정, 연민,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간 말이다. 종종 눈물도 보인다.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120

소크라테스는 이성에 기반을 두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독단주의는 아니었다. pp.246-7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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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와 레몽의 집 - 알자스 작은 마을에서 맛본 조금 더 특별한 프랑스
신이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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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와 레몽의 집』은 저자의 시댁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가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살 때, 그곳에서 차로 6시간 가량 이동해야 하는 프랑스의 변두리 마을, 알자스를 방문한 이야기이다. 물론 한 번 방문은 아니고,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다시 일순하는 기간 동안 수차례 방문한 이야기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성장한 저자와 시댁 어른들 간의 문화적 차이가 줄어들며, 점진적으로 참 가정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행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타 여행서적처럼 과장됨은 없다. 마치 자신의 고향 마을을 찾아 고향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일상의 소소한 재미들을 담백한 뉘앙스로 써내려간다.

 

책을 통해 발견되는 알자스는 풍광은 이국적임에도, 마치 우리네 시골 마을의 느낌을 주기도 하다. 마을공동체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언제나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심을 갖는다. 예전 우리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자스 주민들 역시 대부분 그곳에서 자라고 죽어간다. 여전히 인심이 살아 있다. 무엇보다 먹거리의 풍성함이 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그리운 사람 향기가 물씬 풍겨내는 책이다.

 

마을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시댁어른들의 친지들이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며, 나갔다 또 들어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또 인사를 하고 나갔다 또 들어와 웃음을 나누는 장면을 보며,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된다. 우리네 인심 역시 이러하지 않은가! 현관에서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함께 타고 내려와 인사하고, 차에 타서 인사하고, 또 창문 내리고 인사하고... 이런 정이 느껴지는 모습들. 알자스와 우리네 모습이 별반 다르진 않다.

 

이 책은 유독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이곳 알자스가 프랑스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내외를 반겨 맞는 노부부의 마음 씀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할머니들도 손주들이 온다면, 이것저것 평소 먹지 않던 음식들까지 장만하여 대접하였던 것처럼. 그래서 이 책은 알자스 지역의 특별한 맛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이 책은 공복에 보면 안 된다. 나 역시 깊은 밤에 이 책을 보다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식탐이 일어나 애써 하고 있는 몸매관리에 구멍이 뚫릴까 걱정되어서. 하지만, 반대로 저자가 전하는 알자스의 여러 맛을 더 확실히 느껴보고 싶다면, 공복에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온통 군침을 흘리게 될 테니 말이다. 선택은 여러분들의 몫이다.

 

또한 포도주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맨 정신에는 끝까지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느샌가 여러분들 손엔 포도주 잔이 들려 있을 테니.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는 나 역시 알자스의 포도주에 혀끝을 적셔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니...

 

무엇보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알자스에는 추억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시아버지 레몽이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리고 그 마을이 지금도 그대로 있기에 며느리에게 보여주며, 옛 추억을 꺼내놓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박물관(다락)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손주가 사용하기도 한다.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낙후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 안의 추억이 스토리텔링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추억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그 존재가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은 레몽의 곁을 떠난 아내, 루시의 요리책이 레몽을 통해, 다시 레몽의 삶 속에서 루시의 손맛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담가 두셨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그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이미 곁을 떠나신 분이지만 그분을 추억할 수 있기에, 그분은 자신이 담가둔 포도주를 통해, 후손들에게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전통과 추억, 인심, 무엇보다 음식의 맛이 살아 있는 알자스. 언젠가는 그곳에서 아무런 관계없지만, 나 역시 온 가족과 함께 느긋한 쉼의 시간을 갖게 될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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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동굴의 단서 Maths Quest 4
데이비드 글러버 지음, 어린이를 위한 수학교육연구회 옮김, 팀 허친슨 그림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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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동굴의 단서』는 수학책이며, 동화랍니다. 스토리텔링이 있으니 동화라 말할 수 있죠. 하지만, 단순한 동화는 아닙니다. 매 장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가 등장하게 되고, 이 문제를 풀었을 때, 사건 해결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이번 책에서의 사건 해결은 감춰진 보물을 찾는 것이랍니다.

 

당연히, 수학 문제를 옳게 풀었을 때, 가장 빨리 보물을 찾아 갈 수 있겠죠? 저는 일부러 틀린 답 쪽으로 먼저 찾아가 봤답니다(그래야 책 전체를 다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어떤 때는 즉각 다시 되돌아가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다시 틀린 그 문제의 페이지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 어떻게 풀어야 제대로 풀게 되는지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고 말입니다. 이런 부분이 확실히 아이들 수학공부를 위한 책이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결코 딱딱하지 않답니다. 자연스레 아이들에게 수학공부를 하게 하는 신개념학습법(?)이랍니다. 효과적인 학습법인 것 같네요. 수학을 싫어하는 딸아이가 이 책을 보더니, 단숨에 읽어나가는 것을 보면 말이죠. 그것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 딸아이(초등1년)의 수학실력의 한계로 인하여 한 가지 단서를 얻는 데에서 그쳤답니다. 다른 단서를 얻기 위해선 곱셈, 나눗셈을 알아야 하는데, 이건 아직 무리인 듯하여, 그저 단서를 다 찾았다 치고, 보물이 있는 곳으로 직행했답니다.^^(그래서 초등 3-4학년이 대상입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한 자리 숫자의 덧셈 뺄셈 밖에 배우지 못한 딸아이가 두 자리 숫자, 심지어 네 자리 숫자의 덧셈 뺄셈을 금세 배우네요. 아마도 보물을 찾기 위한 집념의 결과인 듯 보이네요. 이것 역시 이 책이 갖는 파괴력이 아닐까 여겨지네요. 공부를 흥미롭게 접근하게 하는 놀라운...

 

수학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답니다. 다른 페이지로 옮겨감이 즉각즉각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페이지가 길게 이어지지 않고, 한 페이지, 많게는 두 페이지 단위로 끊어져 곧장 다른 페이지를 찾아 옮겨감이 몰입도를 배가시키는 거죠. 단지, 셈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스토리 전개에 대해 소홀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답니다. 물론, 스토리 전개 역시 여타 동화와 같은 맛은 적구요. 초점이 책을 읽는 아이들의 수학 셈을 통한 선택에 있기 때문이죠. 아울러, 짧게짧게 다른 페이지를 찾아 옮겨 다님이 문제를 풀고, 보물 동굴을 찾아 가는 데에는 몰입도가 높지만, 반대로 스토리 전개의 몰입도는 떨어뜨리는 단점도 된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수학에 있으니, 이것이 그리 큰 단점은 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무튼 수학에 흥미를 붙이는 데에는 큰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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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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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재는 작가의 딸이다. 은재는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은재는 장애아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은 다운 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딸, 그 딸로 인해 비로소 아빠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을 잉태함에서부터 딸의 출생을 기다리는 과정, 딸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 슬픔, 슬픔 뒤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먹먹함에 짓눌린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축하 받아 마땅한 출생이 축하받지 못하는 모습이다. 아이의 잘못은 없다. 산모의 잘못도 없다. 아빠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축하받지 못함에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나도 두 아이의 아빠다. 늦둥이 둘째는 태어난 지 아직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아이를 갖게 되면,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은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여느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안도하고, 감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 감사할 자리에 걱정과 원망, 슬픔이 자리하게 된다. 뿐 아니라, 자랑하고 싶은 아이에서 감추고 싶은 아이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더하여 부모의 뭔가 알지 못할 잘못으로 인해,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은 아닌지 자책하게도 된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 축복 가운데 태어나야 할 아이가 장애를 가졌음에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닐지 반성한다. 어린 시절 장애우를 향한 조롱과 무관심의 대가는 아닌 지 말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아이의 출생을 기다렸을 부모, 온갖 희망의 풍선들을 쏘아 올렸을 부모, 첫 아이에 대한 부푼 기대를 설계했을 부모. 하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의 출생으로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자녀를 기르며,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가 조금씩 채워질 때, 부모는 행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진 저자에게 찾아 온 것은 슬픔. 하지만, 그 슬픔 뒤, 기대감이 무너진 자리에, 아이를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딸의 존재 자체만으로 저자는 행복을 찾아간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 부모의 기도는 마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역시 어쩌면 부모의 기준에서,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기대는 자칫 자녀를 꼭두각시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저자의 눈이 아닌 은재의 눈으로 은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 역시, 어쩌면 슬픔 속에서 허락되는 예기치 못한 축복이 아닐까?

 

『잘 왔어 우리 딸』은 먹먹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먹먹함 뒤편에 아름다움이 감춰져 있다. 슬픔 가득한 글이지만, 역설적으로 저자의 글맛은 달다. 슬픔의 맛이라기보다는 행복의 맛이다. 딸 은재를 향한 아버지의 참 사랑, 아름다운 사랑이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은재의 앞길을 축복해 본다.

방금 아이가 완행열차를 탔다. 꽤 오래 달릴 것이다.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창문을 보며 가야 할 것이다. p.92

은재야, 아프니?
나도 아프다.
그러고 보니 3월하고도 중순이 되었다. 창밖은 이미 봄이다.
은재의 옆구리에 보송보송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상처가 깨끗하게 소독되는 중이다. p.172

나는 머릿속에 그렸던 그래프를 벗겨내 찢어버린다. 아이가 어디에 있든, 거기가 어디든, 유일하게 반짝이는 하나의 점이다. 무한한 면에 수많은 별이 반짝인다. 별들에게는 상하와 고저가 없다. 그곳은 수학책 그래프의 면이 아니다. 상상 밖의 아득한 우주다. 거기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제 빛을 내고 있다.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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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붕대 스타킹 반올림 31
김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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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무엇보다 화란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선혜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들 때문이다.

 

첫 번째 괴물은 욕망에 충실한 자들이다. 이들은 꽃다운 아이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짓밟으려는 자들이다. 저자는 안치환의 노래로 유명한 정지원 시인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통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위험하고 악한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고발한다. 이들,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모습이 딸을 가진 나의 마음에 분노를 지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분노를 접고 질문하게 된다. 나 역시 욕망에 충실한 괴물은 아닌지.

 

두 번째 괴물은 선혜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엄마다. 엄마의 모든 고생은 딸 선혜를 위해서이다. 억척스럽게 슈퍼를 꾸려나가는 엄마이지만, 딸의 학업을 위해선 어느 것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 딸을 위하는 것일까? 혹 자신의 기대, 자신의 만족, 자신의 행복을 위해, 딸을 옥죄는 것은 아닐까? 딸을 위한다는 허울 속에 감춰진 엄마의 욕망으로 인해, 선혜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전락한다. 무엇보다 엄마는 딸의 아픔을 직시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며, 애써 딸의 아픔을 덮어버린다. 이러한 엄마의 어긋난 사랑은 또 하나의 괴물이 되어 선혜를 공격하며, 선혜가 얼음 붕대 스타킹 속에 숨는 일에 동조한다.

 

세 번째 괴물은 남의 불행조차 자신들의 가십거리로 만드는 자들이다. 친구 수겸이 그 역할을 한다. 언제나 소문을 물고 다니는 아이. 그 소문을 전하는 자신과 듣는 친구들이 즐거워한다. 물론, 이 아이 수겸의 행동은 악의는 없다. 하지만, 그 호기심은 결코 선하지 않다. 도리어 악마적 호기심이다. 그 호기심으로 인해, 누군가는 견딜 수 없는 압박을 받고 고통당하며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네 번째 괴물은 감춰진 괴물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한 자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전념한다. 고시텔 안에 틀어박혀 자신의 꿈(어쩌면 욕망일지도)을 향해 전진하며, 주변의 아픔에는 무관심한 자들이다. 설령 불의가 행해짐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어쩌면 가장 무서운 괴물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방관, 침묵, 무관심이 있기에 공터는 더럽고 무서운 범죄의 현장이 되는 것 아닐까?

 

이처럼 수많은 괴물들로 인해, 주인공 선혜는 점차 검정 스타킹 속으로 숨게 된다. 그리고 그의 몸과 마음은 점차 얼어간다. 아니 영혼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 얼음 스타킹을 깨뜨리고, 선혜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 그건 여전히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혜를 향해, 관심을 가져주고, 작은 돌봄의 손길을 펼치는 현이 언니. 친구를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선혜를 품어주는 지애. 그리고 초등학교시절부터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은근하게 선혜를 위해주는 창식. 이들의 사랑과 관심, 격려를 통해 선혜를 감싼 “얼음 붕대 스타킹”은 깨져나간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노란 수선화로 활짝 피진 못한다 할지라도, 알뿌리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가 활짝 피게 될 날을 준비하게 된다.

 

이 땅의 다음세대들, 청소년들 역시 지금 당장은 흙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알뿌리의 시간을 잘 견뎌냄으로 결국엔 노란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날 그날을 소망해 본다.

 

하지만, 다음세대들의 알뿌리의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방치해선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싹을 잘 틔울 수 있도록 보다 더 좋은 토양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의 의무이고 몫이 아닐까? 이 땅의 다음세대들이 힘겨운 시간을 딛고, 활짝 피어나게 되길, 그리고 그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 꽃보다 아름다운 인생들이 되길, 이 땅의 괴물들조차 변하여 꽃으로 피어나게 되길 소망해 본다.

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그 줄을 조정하는 건 엄마였고 나는 그 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오가는 생각없는 바보 같았다. 학교, 고시텔, 모든 것이 엄마 작전대로였다. 엄마는 그걸로 내 인생이 활짝 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들고 초라해졌다. p.65

내 목표는 내 몸을 친친 감고 있는 얼음덩어리를 녹이고 깨부수는 것이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한 발 내딛는 것. 그것 말고 다른 목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p.124

열일곱, 키와 마음이 자라는 나이라는데 우리 마음은 자랄 틈이 없었다. 공부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사랑도 가족애도 뒷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니, 나는 목이 말랐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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