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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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는 불행한 유년기를 가진 아이이다. 왜냐하면, 그는 쉽게 얼굴이 빨개지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그로 인해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아이. 남과 다르다는 것이 실제로 그 사람의 본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 특별히 다름은 분명 귀찮은 문제일 것이다. 아니 귀찮은 것뿐이 아닌 창피하고 부끄러운 요소가 된다.

이처럼 남과 다르다는 차이로 인한 부끄러움 속에 성장해야만 하는 마르슬랭에게 자신만큼이나 특이한 친구가 생긴다. 새로 이사온 이웃인 르네 라토는 시시때때로 재채기를 해대는 아이이다. 자신의 얼굴이 불쑥 불쑥 붉어지는 것과 같이...

이러한 특별함이 서로를 가까운 친구로 묶게 된다. 그 유별남이 서로를 향한 우정을 키우게 된 그들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르네 라토가 이사를 감으로 말미암아 그 우정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 단절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성인이 된 그들이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각자의 커다란 컴플랙스에도 훌륭하게 성장하여 어엿한 사회인이 된 그들은 그 우연한 만남과 몇 차례의 조우를 일회적인 것이고 의례적인 만남에 그치게 하지 않는다. 우연한 그 만남은 이젠 서로를 향한 끈끈한 우정으로 자라간다.

이 짧은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들이 차별의 요소를 오히려 서로의 우정을 키우는 밑거름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아픔이 바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 다름을 차별과 조롱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다름이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소외감과 아픔의 근원이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많은 아이들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고 자신과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인격이 형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왕따’로 인해 눈물짓는 청소년들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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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양장)
이케다 가요코 구성, C. 더글러스 러미스 영역, 한성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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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젼이란 말을 많이들 한다. 젊은이라면 당연히 비젼을 가지고 그 비젼을 향해 젊음을 던져야 한단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본다. 무엇을 위한 비젼인가? 만약,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 그리고 자기만의 잘됨을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것도 비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타인을 향한 돌아봄이 없이 높은 곳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큼 위험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비젼을 말하는 사람들은 높은 곳만을 이야기하지만, 난 높은 곳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보다는 낮은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 나보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눈물과 한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나의 생명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보다 살 맛 나는 세상이 되며, 아름다운 터전으로 변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짧은 글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 바로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한 환경운동가의 글에서 시작된다. 그의 글이 인터넷 상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옮기고 옮겨지면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건네 주던 것이 오프라인 상에서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세계를 100명의 마을로 환산함으로 백분율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여러 수치들을 보여준다. 지구상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많은 이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보여줌으로써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신과 다름을 존중할 것을 은연중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또한 소수가 많은 자원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모순과 다수가 굶주림 속에서 있음을 수치를 통해 보여줌으로 분배의 불합리함과 모순을 꼬집고 있다. 아울러 문맹과 컴퓨터 보급률, 그리고 대학진학률 등을 들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단지 우리에게 문제제기만을 할 뿐이다. 그 다음 몫은 바로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단순히 ‘아 그렇구나’라며 읽고 그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보다 낮은 자들을 위해 생명을 나누고자 결단하길 기원한다.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 책에 실린 글의 처음 생성 목적이 환경문제를 위해서였음을 생각한다면, 필요이상으로 꾸며지고 있는 책의 상태를 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짧은 글이기에 친지들이 책을 돌려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향해 시선을 옮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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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 - 초록도깨비 낮은산 작은숲 15
김중미 지음, 유동훈 그림 / 도깨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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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우리에게 좀더 쾌적하며 안락한 생활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개발’이란 명목으로 삶의 자리를 빼앗겨 억울함 가운데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이웃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김중미의 글은 바로 이런 ‘개발’의 이면에 도사린 어두움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어두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그려낸다. 그 희망은 비록 작은 이들이지만, 이들이 함께 나누는 정을 통하여 새록새록 자라간다. 그의 글은 궁극적으로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짐으로 그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는 가난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빈민촌인 ‘만석동’에 이사온 한 가정의 아이들이 쓴 일기를 차례로 살펴보는 형식을 취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만큼이나 북적거리며 살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그 속에 피어나는 정(情)을 아이들의 눈을 통하여 보여준다.

상미네 가족이 만석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족이 함께 살게된 희망으로 일기는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가난의 불쾌함과 불결함이 덕지덕지 엉켜있는 어촌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의 부지런함에도 그들은 가난을 벗지 못한다.

“엄마는 아버지랑 둘이 버니까 이제 금방 부자가 될 거라고 좋아한다. 근데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 엄마 아버지들은 거의 다 공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 별로 부자 같지 않기 때문이다.”(25쪽)라고 첫째 상윤은 말한다.

가난이 이들의 게으름 탓만이 아님을 저자는 아이의 눈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잘못과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이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모르겠다”(94쪽)는 넷째 상희의 질문은 가난한 이들을 대변해서 저자가 사회를 향해 외치는 함성이다.

왜 그들은 가난해야만 하는가? 왜 그들은 항상 궁색함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가? 그처럼 아등바등 노력함에도 가난이란 괴물을 떨쳐버리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왜 다른 이들은 매일같이 유유자적하면서도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왜 사회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선전함에도 찢어지는 가난이 여전한 것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느 샌가 만석동 곁에 자리잡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신들의 삶이 그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가운데 그들의 아픔은 커져가지만, 셋째 상미의 바램은 의외이다. 비록 만석동이 가난의 궁색함과 불결함과 불쾌감이 스멀거리는 곳이라지만, 자신들의 삶의 추억과 작은 기쁨들이 있던 곳에서 가족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더 이상 아파트가 그곳에 들어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란 제목은 만석동이 아파트와 대조된 빈민촌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아울러 그곳에 아파트가 더 이상 들어서지 않아 정겨운 이웃들이 함께 살아가기를 희망함이 투영된 것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비밀 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왕래하며 살아가는 빈민촌의 모습. 반면 안락함과 편리함은 있지만, 이웃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 단절의 상징인 아파트는 대조를 이룬다.

우리네 삶이 점차 편리해지고 발전해가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웃 간의 정을 잃어 가는 현시점에서 이 책은 진정 우리가 회복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엔 더 이상 단절과 이기주의의 상징인 ‘아파트’는 없어야 한다. 움켜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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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이야기 어른을 위한 동화 3
김지수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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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곤 한다. 그러면서 흔하지 않은 희귀한 것들을 귀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진정 소중하고 존귀한 것들은 우리의 주위에 언제나 함께 하는 것들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우리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소중한 것들은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차별 없이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한 예로 공기와 물, 그리고 나무를 들 수 있지 않을까?

껓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물론, 들꽃이건 온실에서 자란 화초이건 간에 꽃이 아름답고 소중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값없이 감상할 수 잇는 들꽃들보다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는 꽃들을 더욱 귀하게 여김 역시 사실이다. 물론 값을 지불하고 사는 가꾼 꽃들이 들꽃들 보다 화려함이 사실이다. 하지만, 들꽃들은 그들 꽃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은 뒤진다손 치더라도 은은함과 투박함 내지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 이처럼 은은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댐 공사로 인해 수장될 운명에 놓인 한 시골 마을. 모두들 보상금을 받고 떠나버린 그 마을엔 오지 않을 죽은 아들을 기다리며 자신이 거둔 벙어리 소녀와 함께 외로이 살아가는 한 노인이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그에게는 속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들꽃 보살핌의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들꽃들 하나하나에 잊혀져간 과거 사람들의 영혼이 실려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들꽃들을 소중히 키워나간다.

그러한 마을을 찾은 한 풋내기 사진작가에게 꽃에 얽힌 사연들을 하나하나 전하는 노인. 노인의 도움으로 들꽃들의 마음을 엿보면서 사진작가의 작품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다. 유명세와 함께 젊은 작가는 화려하고 안락함을 상징하는 모델과 사랑에 빠지면서 들꽃마을을 잊게 된다. 시간이 지나 모델과의 화려한 사랑이 끝나버린 사진작가는 세상을 떠난 노인이 자신을 죽었던 아들이라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들꽃을 돌보던 노인과 사진작가의 만남은 결국, 벙어리 소녀와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처음엔 그저 시골 소녀에 불과했지만, 어느덧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 버린 벙어리 소녀와의 결혼은 바로 은은한 아름다움의 발견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랑이 왠지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화려함만을 쫓아가는 행태에 있지 않을까? 눈에 틔는 화려함을 추구하며 그 아름다움에 몰입하지만 쉬이 식어버리는 사랑의 세태를 저자는 꼬집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네의 사랑이 들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일견 투박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소박한 작은 아름다움을 키워 가는 사랑이라면... 그러한 사랑으로 조금씩 키워간다면 들꽃의 생명력처럼 우리네 사랑도 영원하지 않을까? 노인이 들꽃을 키워갔듯이 나 역시 삶의 자리에서 작은 사랑을 키워가리라. 영혼이 실린 사랑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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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기
노먼 메일러 지음, 조성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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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접근하면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는 바로 성서의 기록, 수집, 편집 작업이 성서 내용이 가리키고 있는 시대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시대와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약성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4복음서의 경우, 이들의 기록은 예수 당시가 아닌,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시대이다. 그렇기에 복음서들의 내용은 예수 당시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복음서들이 기록되어지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그들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 기록되어졌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자신들 공동체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서 신격화되어 있는 예수상을 그들 복음서에 투사하였다. 그렇기에 각각의 복음서들은 유사한 부분이 있으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인류의 구세주로써 그는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복음서 속에 있는 예수에 대한 접근에 있어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접근이 지나치게 터부시되고 있는 경향 역시 있음이 사실이다.

노먼 메일러의 <예수의 일기>는 그의 글 첫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기록에 과장이 많이 있음을 전제하고 글을 전개해 나간다. 또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인 예수, 하지만 한 인간이었던 그가 겪었던 갈등, 두려움, 성냄, 슬픔, 기쁨, 내적 혼란, 주저함, 자신감 등을 매우 잘 그리고 있다. 그는 이런 예수의 내면 세계에 주로 관심하면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예수의 시각에서 일인칭시점으로 예수 일대기를 풀어 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기에 본서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의 강조와 그의 인간적인 고민을 엿본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첫머리에서 말했던 예수에 대한 과장이 적지 않다는 전제는 글이 전개되어감에 있어 실망을 안겨준다. 여전히 작가는 지난 2천년간에 형성된 기독교의 전통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눈에 띄는 복음서 저자들의 과장을 그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글을 써내려 간다. 어쩌면 그러한 부분은 그가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기에 갖는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이 격찬을 받을 만한 것은 기독교 역사가 옷을 입힌 예수의 신격화 작업을 그는 예수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오히려 인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인간 예수가 행하지 않았을 법한 예수 신격화의 작업들을 그는 예수의 사역으로 인정하면서, 그런 신격화 작업의 흔적들을 예수 일대기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인간적인 내면세계를 파헤치는 재료로 삼는다. 이런 그의 작업은 과히 격찬 받을 만 하다.

그의 글에 있어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을 찾는다면, 예수의 일대기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오류인데, 모든 복음서의 내용들을 짬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각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전통에 의해서, 또는 각자가 추구하는 신학적 지향점에 따라 자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써 내려가고 있고, 또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에 복음서 이야기들은 각각의 복음서가 추구하는 관점에 의해 읽어져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하려다 보니 그들 각각의 예수 사역들을 짬뽕시켜서 국적 불명의 예수를 만들고 있음이 그의 실수라면 실수일까?

노먼 메일러의 <예수의 일기>는 그럼에도 오늘의 지나친 예수 우상화세태에 있어 신선한 충격을 일반 독자들에게 줄 수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인간적 접근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의 인성 가운데 신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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