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ors 살아남은 자들 4 - 어긋난 길 서바이벌스 Survivors 시리즈 4
에린 헌터 지음, 윤영 옮김 / 가람어린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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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에린 헌터의 ‘극한 생존 판타지’소설 『살아남은 자들』 4권이 나왔다. 이번 제목은 「어긋난 길」. 과연 어떤 길이 어긋나는 걸까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쳐든다.

 

온 도시를 휩쓴 ‘큰 으르렁거림’이후 파괴되고 방치된 도시, 그리고 오염된 환경에 남겨진 개들의 생존기를 그려내고 있는 『살아남은 자들』. 우여곡절 끝에 야생의 무리에 다시 받아들여지게 된 주인공 럭키는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강아지 릭(사나운 본성을 가지고 있어, ‘긴 발의 송곳니’라 불리는 ‘사나운 개’의 강아지다. 많은 개들은 릭이 자라면 자신들을 죽일 거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으며, 무리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나운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며 말이다.)을 돌보며 야생의 무리에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야생의 무리’ 곁에 나타난 ‘사나운 개’들의 무리로 인해 야생의 무리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이렇게 길을 떠난 그들은 ‘긴 발’(사람을 가리킨다.)의 마을에 가게 된다. 온통 긴 발의 시체로 가득 차 있고, 오염되어 있는 이곳에서 야생의 무리들의 생존 모험이 시작된다. 아울러 야생의 무리는 미치광이 개 테러가 이끄는 ‘두려움의 개’ 무리들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존재는 야생의 무리들에게 또 하나의 위협이 된다.

 

이처럼 이번 책에서도 여전히 야생의 무리들을 위협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사나운 개’들의 무리. ‘두려움의 개’ 무리. 그리고 또 하나의 위협은 다름 아닌 ‘긴 발’이다. 서열 3위인 피어리가 ‘긴 발’에게 붙잡혀 가게 된다. 이에 럭키는 알파의 허락(?) 하에 피어리의 짝인 문과 몇몇 개들과 함께 피어리를 구출하기 위해 ‘긴 발’이 있는 곳을 향하게 된다. 과연 이 구출작전은 성공하게 될까? 그리고 ‘긴 발’이 야생 개인 피어리를 잡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이야기에서도 럭키와 알파의 갈등이 계속된다. 아울러, 자신이 맡은 ‘사나운 개’ 릭을 향한 럭키의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의 갈등도. 여기에 남매간인 럭키와 벨라의 화해도 있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개 와인의 깐족거림과 얄미움도 곳곳에서 소설의 양념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이번 이야기는 ‘두려움의 개’집단과의 대립, 그리고 사람들에게 붙들린 피어리 구출작전이 큰 축을 이룬다.

 

이러한 스토리들을 통해,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는 리더의 자격이다. 무엇이 진정한 리더십인지를 말이다. ‘야생의 무리’를 이끌어가는 늑대개 알파는 강하다. 전투능력이 뛰어나다. 이러한 강함을 기반으로 무리들을 휘어잡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상황판단을 할 능력도 없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지혜도 없다. 무리 구성원들에게는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은 무리를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도 보여주는 것이 없이 그저 위에 군림할 뿐이다. 위에서 군림하며 그저 지시하고 통제하는 데에 익숙한 리더. 어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저 답답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을 밀어붙이는 못난 리더. 위에서 힘으로 누르며 군림하는 것을 리더십이라 착각하는 어리석은 리더.

 

한편 ‘두려움의 개’ 무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리더 테러는 두려움으로 무리를 이끌어간다. 어떤 규칙도 어떤 이성적 판단도 없이 그저 폭력을 휘두른다. 다른 개들의 공포심,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며, 이러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집단을 이끌어간다. 일명 공포정치의 대가라고 할까.

 

이런 두 리더들의 리더십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두 리더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커다란 재앙 이후에 남겨진 개들의 생존기를 통해, 이처럼 우리 사회의 잘못된 리더십을 고발하고 있다. 알파와 테러 같은 리더십이 우리 사회를 뒤덮는 리더십이 되지 않길 소망해본다.

 

피어리 구출작전을 이끌어가는 럭키의 리더십도 생각해보게 된다. 먼저 앞에서 솔선수범하는 리더십. 강요와 밀어붙임이 아닌 각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수렴하는 모습.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서는 밀어붙이는 결단력까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리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지혜라는 착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두려움을 품지만 그럼에도 사나운 본성을 가진 릭을 맡아 돌보며 성장시키는 모습은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 럭키와 같은 리더십이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럭키의 리더십과 돌봄 아래 성장하는 릭은 여전히 수시로 사나운 본성을 드러내곤 하지만, 그럼에도 야생의 무리에 도움이 될 존재로 점차 성장하게 된다. 과연 이 릭(소설 말미에서 ‘스톰’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이 어떤 멋진 전사로 성장하게 될지도 기대해 보며, 이제는 5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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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보낸 편지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8
알렉스 쉬어러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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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바닷가 작은 어촌 델윅이란 마을에서 살고 있다. 대대로 뱃사람으로 살아가는 마을. 톰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외삼촌도 뱃사람이다. 물론, 지금은 외삼촌뿐이지만.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그리고 아버지는 1년 전 해양사고로 돌아가셨다. 톰 역시 뱃사람을 꿈꾼다. 그렇기에 톰에게 바다는 동경의 장소이자 한편으론 슬픔의 공간이며, 또한 일상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런 톰이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유리병에 편지를 써 바다에 보내면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인가? 그리고 답장이 오게 될 것인가?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톰은 그대로 행한다. 광대한 바다에서 누군가 내가 보면 병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설령 누군가 받아 보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보낸 답장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확률은? 아마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세상에는 이렇게 놀라운 일이 많은데,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멀쩡히 일어나는데, 병에 담은 편지라고 가능성이 없을까? 병이 안전하게 어딘가로 흘러가서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답장이 돌아오는 것이 영 불가능할까? 세상 곳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매일 일어나서 이제는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잖아. 그런 일이 하나쯤 더 일어나지 말란 법 있어?(34쪽)

 

그런데, 정말 답장이 돌아왔다. 그것도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은 천에 예스러운 글씨체의 편지가. 뿐 아니라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이 있는 곳이 ‘데이비 존스의 함’이란다(영국의 뱃사람들은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보물이나 배, 그리고 익사한 사람들의 영혼은 저승이라고 부르는 ‘데이비 존스의 함’에 넣어 수집된다고 한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 망자의 함≫에도 등장한다.).

 

‘데이비 존스의 함’에서 온 편지라니. 이게 말이 되나? 누군가 톰을 악의적으로 놀리는 걸까? 아님, 정말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답장이 온 것인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톰은 데이비 존스의 함에 사는 테드 본즈라는 사람과 유리병에 담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비록 배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상하리만치 정확하게 배달되는 이 편지를 주고받는 일에 톰은 빠져들게 된다.

 

그래. 톰은 생각했다.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서 바다에 던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거기까지는 별로 이상할 게 없어. 하지만, 바다가 답장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건 얘기가 다르다. 기괴하고 요상하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좀 섬뜩한 일이기도 했다.(179쪽)

 

그렇다. 이런 기괴하고 요상하며 불가사의하고 섬뜩한 일에 톰은 빠져든다. 더욱 기괴한 건, 바다에서 죽은 뱃사람들의 영혼이 모인다는 그곳 ‘데이비 존스의 함’에 사는 테드 본즈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물어봤더니,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 그러니 1년 전 배사고로 죽은 아빠가 죽지 않았던지 아니면 바다가 아닌 땅에서 죽었단다. 톰에게 전달되는 편지는 정말 누군가 톰을 놀리기 위한 악의적 행동인가? 아니면 정말 죽은 자의 공간에서 온 편지가 맞다면, 톰의 아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알렉스 쉬어러의 2016년 신간 『바다에서 보낸 편지』(원제: A Message to the Sea, 2016)는 알렉스 쉬어러의 특유의 유머를 품고 있으며, 또 한 편으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청소년소설이다. 유리병에 담은 편지를 띄워 보낸다는 다소 낭만적 접근. 여기에 더하여 죽은 자들의 공간과 산자의 공간 간의 편지의 왕래라는 다소 기괴한 발상. 또한 죽은 줄 알았던 아빠와의 극적 재회가 가미된 가족 사랑까지. 소설은 처음엔 철부지 장난꾸러기 같은 분위기로 시작하여, 다소 기괴한 분위기를 지나, 가슴 뭉클한 가정 회복으로 끝을 맺는다. 결말이 뻔히 보인다는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미스터리 추리소설도 아니니 실망할 것 없다.

 

참, 소설은 성경의 전도서 구절을 계속 인용한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1)

 

소설은 이를 ‘때로는 운에 맡겨라, 모험을 즐겨라,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선행을 베풀라는 뜻’이라고 풀어준다. 그렇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투자의 의미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물 위에 던지는 떡이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구절. 그러니 투자 역시 한 곳에 올인하기 보다는 여럿으로 나뉘어 하라는 구절. 사실 성경구절로는 상당히 재미난 구절이다.

 

작가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톰이 편지를 유리병에 담아 바다에 던지는 행위와 연관 짓는다. 결국, 이렇게 던진 유리병은 잃었던 아빠를 되찾는 놀라운 결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처음부터 결과를 단정 짓고 포기하기보다는 뭔가에 도전해보고 부딪혀볼 것을 말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다.

 

그렇다. 누군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능성이 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 치부한다 할지라도,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때,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전해주는 희망이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음이 이끄는 일들을 함으로 놀라운 결과를 만나는 축복이 있길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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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지대 - 바그다드에 내린 하얀 기적
캐롤린 마스던 지음, 김옥진 옮김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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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리와 탈리브는 사촌이다. 동갑에 같은 반 절친 중에 절친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예기치 않은 일로 깨지게 된다. 누리 외삼촌이 수니파의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리네 가족은 시아파다. 가족 모두. 아니, 큰 집 식구인 탈리브네 가족만 제외하고 말이다. 탈리브와 누리는 친사촌간이지만, 탈리브네 엄마는 수니파다.

 

외삼촌이 희생된 사건 이전에는 누리네 큰엄마가 수니파인 것, 누리네 가족이 모두 시아파인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삼촌의 죽음 이후 누가 수니파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시아파인지 수니파인지가 말이다. 그전에 함께 웃고 호흡하던 이웃이 어느 파인지에 따라 관계가 단절된다.

 

누리네 외삼촌의 죽음에 사촌 탈리브네 가족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누리도 잘 안다. 하지만, 누리는 이제 탈리브가 밉다. 탈리브 역시 누리의 이 감정을 알게 되고, 둘은 멀어진다. 아니 두 가족은 이제 서로 왕래하지 않게 된다. 뿐 아니라, 누리는 외삼촌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결국 탈리브에게로 향하게 된다. 늦은 밤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탈리브네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린다. 끔찍한 경고문구와 함께 말이다. 이로 인해 탈리브네 가족은 집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평화의 거리인 무타나비 거리로.

 

이렇게 깨어진 둘의 관계, 그리고 누리와 탈리브 가족 간의 관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 『바그다드에 내린 하얀 기적 백색 지대』는 이라크 땅에 붉게 물들인 반목, 미움과 증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소설은 평화롭던 두 가정, 두 형제의 가정이 어떻게 반목하게 되고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웃의 단절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도 보여준다. 지성과 평화의 상징이었던 무타나비 거리가 어떻게 끔찍하게 변하게 되었는지도 말이다.

 

소설이 누리와 탈리브 두 사촌간의 관계를 그려내면서, 이와 함께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하나는 신에 대한 자세,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의 개입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과연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폭력이 정당한지. 아울러 평화라는 이름으로 개입한 미국의 전쟁이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같은 신을 찾고, 같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신의 이름으로 상대를 죽이는 아이러니. 단지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부조리에 대해. 아울러 이라크의 불행은 단순히 독재자 탓만이 아닌, 미국의 오만한 개입이 불러들인 재앙임에 대해 말이다.

 

어쩌면 우린 그 땅을 여전히 ‘악의 축’의 땅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보게 된다. 소설은 그 땅 역시 우리와 같은 온기가 있는 이들이 살아가는 땅임을 보여준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폭력을 사랑하는 괴물들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은 단지 폭력의 희생자임을 말이다. 폭력 앞에 우리처럼 아파하고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끼며 눈물 흘리는 삶이라는 것을 소설은 오롯이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그 땅에 하얀 기적이 찾아온다. 파괴와 살육, 미움과 증오의 땅에 하얀 눈이 내려 잠시 서로를 향한 폭력을 멈추었던 순간을 하얀 기적이라 말한다. 이 하얀 기적은 물론 일시적인 기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순간의 기적을 통해, 소설은 반목과 미움의 자리에 화해와 공존이 찾아올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길 희망하며, 촉구하고 있다.

 

소설을 통해, 그 땅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졌던 무의미한 전쟁을 말이다. 후세인의 독재, 그리고 독재자가 위협하는 세계평화라는 명목, 대량살상무기를 찾겠다며 미국이 시작한 이라크 전쟁. 그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독재자를 몰아낸 것 외엔 아무런 성과(물론 미국의 입장에서의 성과는 있지만 말이다.)가 없는 미국의 개입. 아니 오히려 여전히 끝나지 않는 더 큰 상처와 반목을 낳은 전쟁이다.

 

한 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는 여전히 닫히지 않는다. 지금도 서로를 향해 폭탄을 터트리는 땅. 그곳에 과연 평화가 도래할 날이 올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먼 것 같다. 하지만, 그 땅에도 평화가 하얀 눈처럼 내리길 바란다. 아울러 결코 그 평화의 눈은 녹지 않길 원한다. 그럼으로 소설 속의 누리와 탈리브가 현실의 삶 속에서도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하며 함께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행복의 일상을 맛볼 수 있게 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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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쪽으론 숨도 쉬지 않았다 - 제5회 한우리 문학상 청소년 부문 당선작 한우리 청소년 문학 6
장혜서 지음 / 한우리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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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서 작가의 『내 쪽으론 숨도 쉬지 않았다』란 제목의 청소년소설은 제5회 한우리 문학상 청소년 부문 당선작입니다. 청소년소설이지만, 분위기가 가볍지 않고 묵직하네요. 대체로 청소년소설의 경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도 분위기는 가벼운 느낌으로 접근하는 것과는 분위기와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엄마들이 절친이라는 인연으로 함께 어울려 다니는 승희, 승지, 히라, 은기의 이야기입니다. 승희와 승지는 남자 쌍둥이 형제고, 완전히 똑같은 외모이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른 형제입니다. 승희는 뭐든 잘하는 아이로 존재감이 높은 아이인 반면, 승지는 이에 비해 다소 루저의 느낌을 갖게 하는 존재감이 약한 아이입니다. 승희는 냉정한 아이고, 승지는 정이 많으면서도 다소 4차원적인 소년입니다. 게다가 승지는 히라(히라는 승희와 연인사이입니다.)를 사모하면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기도 합니다.

 

히라와 은기는 친자매는 아니지만,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은기의 엄마가 화재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당시 만삭이던 상태에서 은기만이 살아나게 되었고, 후에 히라의 엄마가 데려와 함께 살아갑니다. 은기는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투명인간과 같이 존재감이 없는 아이입니다. 반면 히라는 반대입니다. 어딜 가도 존재감이 강한 환상적 외모의 아이. 히라의 모든 것을 아이들은 좋게 평가하지만 실상은 대단히 냉정한 아이입니다.

 

히라가 존재감이 강한 것은 외모 탓도 있지만, 어린 시절 유괴 당했던 전력, 그 소문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 유괴당한 것은 히라가 아닌 은기입니다. 그래서 히라는 은기를 부러워하죠. 은기의 인생은 온통 드라마 같은 특별함이 가득하니까요.

 

왜 너만! 왜 너만 빈사의 사자상 아래 버려지고! 왜 너만 엄마가 불타 죽고! 왜 네가 미친놈한테 유괴당한 건데!

난 고작 별거 중인 부모가 있을 뿐인데. 죽이고 싶은 아빠 같은 건 흔해 빠졌어. 누구나 머릿속에서 아빠를 마흔 번쯤은 죽이잖아. 전혀 특별하지 않아!(123쪽, 히라가 은기에게)

 

사실 특별함을 추구하고 좇는 것 같지만, 실상은 평범함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절규처럼 느껴져서 더욱 아프게 다가오던 장면입니다. 히라는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고, 관심을 끌고 싶으면서도 결코 아빠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거든요. 아니, 오히려 아빠를 경멸하죠.

 

히라 뿐 아니라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의 부재가 처음에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소설입니다. 이런 충격은 다음으로는 아픔으로 다가왔고요. 아이들 역시 과연 진정한 우정이 존재한지,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전개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철저히 어두운 묘사들, 닫힌 심리 상태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닫힘 이면에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뿐 아니라, 네 아이들이 겪는 아픔, 어두움, 극단적 선택 등은 모두 부모의 세대에게서 대물림 한 것임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같아요. 어쩌면 지금 겪는 청소년들의 아픔 역시 청소년들 탓이 아니라 부모가 만들어 놓은 아픔이며, 부모가 물려준 유전된 아픔일 수 있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소설의 시점이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 아쉬움으로 남네요. 처음엔 3인칭 전지적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은기 입장에서의 1인칭 시점으로 바뀌거든요.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어느 순간 1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이게 누구인지 혼란스럽다가 소설 말미에서는 확연히 은기임을 알 수 있어요. 작가의 의도인지 실수인지가 모호하네요.

 

소설의 제목이 『내쪽으론 숨도 쉬지 않았다』입니다. 그러니, 뭔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거죠. 서로를 향해 진심어린 마음을 주지 않고, 마음의 벽을 세워버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는 상처받지 않으려 미리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차가움을 알기에 친구가 상처받지 않도록 미리 차단하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사전 차단이 도리어 상처가 되지만 말입니다. 이런 오해가 소설을 마치며 씻겨져요. 뿐 아니라, 은기와 연관된 유괴와 은기 엄마의 화재 사건 역시 오해가 씻기고요. 이런 오해의 씻김과 단절 속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통해, 화해로 나아가려던 걸까요?

 

아무튼 다소 광기가 느껴지기도 할 만큼 청소년들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조금 어렵기도 하고요. 독자로서 나의 부족함 탓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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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나의 집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6
조 놀스 지음, 최제니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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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슴 먹먹한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미국 작가 조 놀스의 『꿈꾸는 나의 집』(원제: See You at Harry's)란 제목의 소설이다(소설 내용을 생각할 때, 원제가 더 낫단 생각이다. 훨씬 임팩트도 강하고 찰리의 잔상도 계속 남는 문구이기에.).

 

주인공 펀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녀다. 그런 펀은 언제나 생각이 깊고 다소 소심한 소녀다. 터울 많은 남동생 찰리에게 온통 관심과 애정, 사랑을 빼앗겼다 여기면서도 정작 찰리 돌보는 일은 도맡아 해야만 하는 펀. 사람들에게는 존재감이 별로 없어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접 받는다 여겨지면서도 정작 남동생 찰리를 돌보는 일에는 결코 투명인간이 될 수 없는 아이러니 앞에 속상해 하는 게 펀의 모습이다.

 

언제나 가족들을 총동원하여 ‘해리네 레스토랑’ 사업을 일으켜 세울 궁리만 하는 아빠는 이 일로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언제나 바쁘기만 하다. 엄마는 명상에 푹 빠져 바쁘고, 첫째인 세라 언니는 레스토랑 남자 직원과 사랑에 빠져 틈틈이 사라지느라 찰리를 돌볼 수 없다. 오빠 홀든은 게이란 비밀 아닌 비밀(아빠만 모른다. 다른 가족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느라 힘들고.)로 인해 언제나 집 밖으로 나돌기만 한다. 그러니, 찰리를 돌보는 일은 언제나 펀 차지.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 펀은 찰리를 돌보는 일에는 이처럼 투명인간이 될 수 없다. 다른 가족들은 그리 쉽게 투명인간이 되어 빠져나가는데.

 

그러던 펀네 가족에게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놀던 찰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 이 일로 가족은 와해된다. 무엇보다 모두 자신들의 잘못으로 찰리가 떠났다는 자책으로 힘겨워한다. 이런 엄청난 슬픔 가운데 가족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준다. 쉽게 떨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가정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게 되는지 작가는 그려내며, 어쩌면 이렇게 다시 일어섬이야말로 우리말 제목처럼, ‘꿈꾸는 나의 집’임을 보여준다.

 

소설은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축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홀든 오빠의 성 정체성. 게이이기에 또래 남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가족에게 고민을 밝힐 수 없어 고민하지만, 사실 가족들은 모두 이런 사실을 알고 인정하며 홀든을 감싸줄 준비가 되어 있다(물론 아빠만은 이 일로 끝까지 갈등하지만 말이다.). 펀은 이 일로 오빠를 괴롭히던 머저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소설 중반쯤에 벌어지는 막내 찰리의 죽음. 이 두 가지 사건으로 가족은 갈등하고 상처 나며 깨어진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치유되어지는 과정,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과정, 그 치유와 회복의 과정들을 소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커다란 돌멩이로 심장을 꾹 내리누르는 것 같은 먹먹함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먹먹함을 뚫고 솟아나는 밝음의 줄기가 있다. 마치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행복한 댄스파티를 벌이는 것처럼. 여전히 슬픔을 온전히 털어낼 수는 없지만, 이런 뭔가 밝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가족의 회복, 친구의 우정이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우리들 삶 역시 펀네 가족처럼, ‘상실의 아픔’으로 힘겨워 할 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오히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매사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어쩌면 여전히 갈등하며 상처주고 상처받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유하고, 더욱 단단해지는 가정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네 모든 가정이 책 제목처럼 행복을 ‘꿈꾸는 나의 집’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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