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아는 거는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것보다 더 나빠.
중요한 건 깨닫는 거야.
아는 것과 깨닫는 거에 차이가 있다면
깨닫기 위해서는 아픔이 필요하다는 거야.

―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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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그 아픔이 가슴에 통증을 일으킬 정도로 크든,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든.
그래서 깨달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왜 낫지 않고 계속 곪는지 알 수 있다면.
아픔 따위 두려워 할 순 없지.
 

나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연한 자에게는
몰두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든 간에,
적어도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상황을 잊을 수도 있다.
그런 종류의 일로 나는 채린에게 책을 권하고 싶다.
이를테면 추리소설 같은 것.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해될 확률보다
아는 사람,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사랑은 잔인하다.

- 본문 222~223쪽에서

 

 

- 백수생활백서, 박주영.
((민음사 2006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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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아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것 -
상대의 영혼을 죽일 수 있다는 것.
 

2006.08.21 23:21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놓고 보면 역겨우리만큼 평범하다.
완전한 일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로서 몸 속에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
당구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네 개의 공 속에서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 개똥벌레,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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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흔히들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물' 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동물이나 인간처럼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닐 뿐, 식물이 가만히 있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도 함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쓸모없어졌다고 버려지는 모든 물건들에 애도를 표합니다.
'버림'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302moon 2007-05-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글보다 더 끌리는!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비로그인 2007-05-1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엣, 별말씀을...(머쓱)
 



2006.07.02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국 끝났다.
기다리는 대상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시간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된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때 난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 그때 나는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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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왠지 저도 훗날에 저 대사를 읊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잔잔한 피아노곡을 듣고 있는데.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는 글인지. (웃음)
 
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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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읽었음에도,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리뷰와 함께, 살짝 미뤄두고 있었다. 내내 머릿속으로 흐릿한 영상을 그리면서, 어떤 식으로 풀어야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작가와의 만남은 이번이 (실질적으로)처음이다. 슈거 푸시란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는데, 읽다가 말았던 과거가 있다. 그때는 공감 코드를 발견하지 못했던 걸지도. 알라딘에서 소개를 우연히(의식적 우연인가, 새로 나온 책 코너는 늘 기웃거리니까/) 발견하고 궁금하여 얼른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2007년 4월 26일 아침 매장 신간코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하고 찜해두었다가, 동행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누가 가져갈 세라) 냉큼 구입하고서 집을 향해 갔다. 그때, 동생이 선물로 주었던 문화상품권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0426~0505)기간 동안 하루에 단편의 반쯤, 혹은 단편 하나까지 읽을 때도 있었다. 느릿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단편이 있고, 후딱 해치운(?)단편도 있다. 더러 공감하거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솔깃한 표현을 찾고 환호하고, 나름 세심하게 밑줄 긋기 기록을 하면서 집중했다. 그리고 이미 밑줄 긋기 등록은 마쳤다. 리뷰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서, 심적 부담이 컸다.
뒤의 해설 부분에서는 작가의 문학적 변화가 엿보인다는 이야기를 바탕에 깔아두었다. 사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파악이 안 되었으나, 일단, 변화라는 영역 안에서는 내가 끌어갈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찾았다는 생각이다. 제자리에 머물기보다, 무언가 탈출구를 찾듯 뚫고 나갈 수 있는,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소설을 적극 선호하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참 반가운 타입의 작가다.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단편집을 낼 터이고, 여러 번 파고들 수 있었으면 바라고 있다. 주목하는 작가 리스트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고, 조만간 슈거 푸시를 통해 그녀의 세계를 재차 탐험해볼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단편은 [미니 초코파이]. 또한 개인적 판단으로 구성이 돋보였던 소설은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한 문장, 거푸 되짚으며 읽었던 단편은 [정직한 너에게]. … 다 풀어낼 수 없는, 정리할 수 없는. 각각 단편들은 각양각색의 이미지로 다가왔으며,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

-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

미래는 구불구불 미로처럼 까마득하고 이렇다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에, 몇 번이고 밑그림 수정이 가능하다. 나 또한 어릴 적 모험을 꿈꾸는 아이에서, 지금은 현실에 적응하고, 부당하다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시기도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인생이 펼쳐질 지 장담하고 단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스케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 흥미진진하게 도전하고, 배움의 묘미를 깨달을 생각이다. 이 열정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어디든 언제까지나.

-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

나도 아직은,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뿐 아니라, 내 주위 친구들, 그리고 혹 이 글을 보고 있을 여러분들도. 그리고 나에게 비상구랄 수 있는, 대학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소설, 작가의 말처럼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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