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하고 싶은 일본소설 베스트는?
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칠드런”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잡은 코타로 씨 신작이었다. 다른 작품은 신간 코너, 베스트 코너에서 눈여겨보기만 했을 뿐(간혹 몇 장 넘기고 살까 말까 갈팡질팡_ 중력 삐에로, 오듀본의 기도 등.), 그것으로 끝났다, 매번. 왜 그랬는지 이렇다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쏟아져 나와 널리다시피 한 느낌이 싫었던 게 제일 유력하다. 근데, 이 작품으로 다시금 코타로 씨에게 열광하고 있다. 아니 정정하자면, 문장의 느낌과 주관이 닮았단 이유로 내내 열광했지만, 달리 계기란 걸 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현재, ‘중력 삐에로’를 친구가 빌려주었고(나는 계속 사려다가 망설였었다.), 언젠가 질렀던 ‘사신 치바’를 읽고 있는 중이다.


여하튼 리뷰 쓰기는 여전히 조심스러운데(칠드런 리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받은 감동이 여전할 지 미지수지만, 그 당시에 그 소설과 코드가 맞았던 게 아닐까 싶다. 그 감동을 글로 풀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쫓기는 심정과,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핑계거리에 불과한 이유도 있지만.), 코타로 씨와 함께 진득하니 책에 몰두해 있는 동안, 번뜩이는 재치에 감탄해 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다소 엉뚱함에 입을 아, 벌리고 그 문장을 되풀이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기린을 타고 오겠다는 부분.] 한편으로, 억지다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뛰어내리겠다는 여자를 어떡해든 말려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녹아들어 있었기에 아릿해짐을 함께 느꼈다. 그 ‘구출한 여자’와 동거하는 설정도 허무맹랑하지만, 그런 설정을 넘어선 그야말로 천진난만함으로 휘저어진 뚱딴지 칵테일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한 번이라도 좋다. 그들과 모험을 감행하고 싶다, 라는 생각까지 했다면 말 다 했지.


첫 번째 단편 ‘동물원의 엔진’은 - 과거 회상 스타트.
일상의 환상, 여운이 남듯 결말 처리가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 후속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가졌다. 내가 느끼기엔, 다른 작품에 이어질 단서를 던져주었다는 생각이다. 제대로 풀어내지 않은 미스터리가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미 나온 장편소설에 포함되었을지도. (내가 그의 작품을 죄다 읽어본 게 아니라서 넘겨짚기로 끝난다.)


두 번째 단편 ‘새크리파이스’. 주인공 구로사와의 매력에 환호성을 질렀던 소설이다. 친구에게 넌지시 얘기했을 때, ‘중력 삐에로’에 등장했던 인물이라고 가르쳐주었다. 피쉬 스토리가 신간코너에 진열되기 전, 친구가 빌려주었는데, 어서 구로사와가 모습을 드러냈으면 바라게 되었다. (중반쯤이란다. 나는 지금, 초반을 읽고 있다.)
곳곳에 발견되는, 대사가 한 마디로 멋들어진다.
[“공범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의심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는 거지. 그런데 공범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가장 적합한 인간은 누굴까.”
-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 - 특별히 맘에 들었던 부분.
풍습의 비밀이 벗겨지는 것에 한껏 타격을 받았어야 했지만, 아마도 그럴 수 없었던 건 인물의 매력에 너무 심취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전에, 다소 복선이랄까 그런 암시를 찾은 바도 있지만.


세 번째 단편, 표제작이 되었던 ‘피쉬 스토리’. 시작은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 수 없었다. 상징 기법이 눈길을 끌었던 소설이다. 고독, 용기, 좌절을 물고기로 표현했음에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에 힌트를 얻었다고 하는 데서, 그 소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39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152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177
“내 좌절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비통과 우스꽝스러움에 강에도 바다에도 살 곳이 없어질 것이다.”*
[표제작 '피쉬 스토리'는 한 의문의 작가의 소설이 남긴 문장이 시공간을 넘어 변주되면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이야기다. 만년에 폐가에 칩거했다는 한 소설가의 문장이, 무명의 록밴드가 남긴 마지막 노래의 가사가 되고, 그 연결고리들의 숨겨진 관계성 안에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책 소개.]
역시, 면장 선거에서처럼 내가 밴드를 너무 좋아하는 탓인지, 피쉬 스토리 여러 테마 중에서도 밴드 이야기에 주목했다.
"이거, 좋은 노랜데, 아무한테도 닿지 않는 거야? 거짓말이지. 누구에게든 닿게 해. 우리는 다했어. 하고 싶은 걸 했고 즐거웠지만 여기까지였어. 닿게 해, 누구에게든." 고로는 그렇게 말하더니 시원한 목소리로 웃었다. "부탁이야."
보컬의 토로하는 대사들이, 일렁이는 영상을 펼쳐지게 했고, 이 밴드의 연주와 보컬의 목소리가 귓가에 그대로 닿아 내가 그 현장에 가서, ‘이게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소설 속 상황과 현실을 잠시 분간 못하는 자아의 해체를 시도했다. 좋아하는 밴드의 갑작스런 해산 소식을 종종 접하고, 뒤흔들렸던 감각을 경험했다. 그 음악에 그 보컬은 하나뿐이라고 발끈하고 우기기도 하면서, 혼자 광분했던 적을 떠올리고 더 절실하게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에서 생각해본다.
다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 아니 나부터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일들에 대해 되짚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헛된 것을 움켜쥐고 있지 않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지 않나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치우치는 평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자신의 주관, 취향에서 벗어나면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았을까 떠올려보기도 하고. 착잡하고, 씁쓸하다. 코타로 씨의 날카로운 지적에 몸이 쓸리는 느낌이다.
하나 혼란을 느낀 게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읽었다가 시공간을 초월한 이야기라는 걸 한참 후에 알았다는 것이다. 피쉬 스토리의 처음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이, 나중에 비행기에서 여러 사람을 구하는 그 남자일 거라 무턱대고 제멋대로 연관까지 지은 결과에 이르렀다.


마지막 단편 ‘포테이토칩’ 제목에 은근 귀여운 매력이 풍겨서, 많이 자유분방한 소설일 거라 슬쩍 생각하고, 집중했다. 구로사와가 다시 등장해 마구 방방(물론 속으로)뛰었던 소설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서 읽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코타로 씨의 인터뷰 글귀로 더욱 인상 깊은 소설이 되었다. 인터뷰를 접하기 전에도, 여러 요소랑 소품이 적절히 녹아든 스토리라인과 결말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나 자신이 야구를 좋아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야구장 장면은 술술 읽히고,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비슷한 습관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싱글거리기도 했다. 나에게도 특별히 좋아하는 단어가 있어, 어느 장면에 꼭 그 단어를 쓰면 딱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강렬한 단어를 골라 쓰기도 하니까.

[이 단어는 좋아하고 저 단어는 싫어하는 경향이 저한테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로서는 좋아하는 단어를 계속해서 선택해왔던 지난 6년의 작업이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강한 단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315쪽 포테이토칩이라는 소설이 있으면 귀엽고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포테이토칩이라고 10번 정도 입력해 봤는데 ‘역시 좋아!’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확실히, 아저씨의 매력에 휘둘리다시피 한 것 같다. ‘중력 삐에로’, ‘사신 치바’에 이어 ‘오듀본의 기도’, ‘마왕’까지도 소장해서, 거듭 읽고, 판단하고, 되새기고 싶다. 진작 아저씨를 알고 좋아했지만, 작품 읽기를 게을리 한(그 당시에 너무 알려졌다고 투덜거렸지-_-) 스스로에게 막 툴툴대고 있다. 그러면서, 아저씨의 뚱한 얼굴을 떠올리며, 킥킥거리면서, 어설픈 리뷰를 마친다.

+ p. 289 잔치 분위(기). 괄호 안 글자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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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구판절판


"다 큰 어른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겠지만, 반대 운동을 하는 주부들 틈에 끼어 있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나무는 숲에 숨기고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는 장승처럼 서 있는 주부들 사이에 숨기라는 거지."-38쪽

곤란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적당히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수법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거나 죽음에 대한 것, 공공연히 밝히기 힘들 것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 -75쪽

제물이 된 자들의 흔적이 동굴 안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목숨이 붙은 채로 갇혀버린 자들의 흔적, 가령 벽을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라든가 피로 쓴 저주의 말,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한이나 증오의 덩어리 같은 것이 체류하는 묵중한 공기가 동굴 안쪽에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벽에 찬 습기나 부서진 돌멩이의 틈새기마다 숱한 영혼들의 음울한 집념들이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124~125쪽

"공범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의심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는 거지. 그런데 공범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가장 적합한 인간은 누굴까."
-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127~128쪽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130쪽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은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158
"아버지 말씀이, 중요한 것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준비라는 거예요."
"준비?"
"강한 육체와 흔들림 없는 마음. 그것들을 익히는 준비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요."-157쪽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152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177
"내 좌절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비통과 우스꽝스러움에 강에도 바다에도 살 곳이 없어질 것이다."-139쪽

이 단어는 좋아하고 저 단어는 싫어하는 경향이 저한테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로서는 좋아하는 단어를 계속해서 선택해왔던 지난 6년의 작업이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강한 단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310쪽

포테이토칩이라는 소설이 있으면 귀엽고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포테이토칩이라고 10번 정도 입력해 봤는데 ‘역시 좋아!’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315쪽

"지금 갈 테니까." 이마무라는 머리카락을 세차게 쥐어뜯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여자의 깔보는 말투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죽으면 안 되는데’ 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 장소 말해"하며.-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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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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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미래의 상징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건물이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흥분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으며, 조화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고 절제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다.-66쪽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내심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면서, 왜 자신의 작품을 주로 기술적인 맥락에서 정당화했을까?
그들의 신중함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비판에서 면제된 스타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딕이나 티롤 건축의 추종자들이 모더니즘 주택의 외양에 목소리를 높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면, 반드시 고압적이고 오만하다는 비난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민주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학에서도 최종 심판관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비난자를 막고 동요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 용어의 매력이 돋보이게 되었다.-71쪽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에서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 말한다.-77쪽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80쪽

건물이나 사물이 물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한곳에 모인 돌, 쇠, 콘크리트, 나무, 유리의 배치가 자신을 표현하는―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묘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하얀 벽 안에 20세기의 추상 조각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에서 우리는 3차원적인 덩어리들이 의미를 얻고 또 전달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의 설비와 주택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지 모른다.-82쪽

때로는 거대한 귀마개나 뒤집힌 잔디 깎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물체를 두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웃음을 터뜨리기는 쉽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해몽이 꿈보다 좋다고 비난하는 대신, 추상 조각가들이 온갖 종류의 비구상적인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 한 번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뭇조각과 줄, 석고와 금속 장치를 이용해 우리에게 커다란 관념들, 예를 들어 지혜나 친절, 젊음이나 노쇠와 관련된 관념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언어로 또는 인간이나 동물을 모방한 형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재능이다. 실제로 위대한 추상 조각가들은 독특한 분열된 언어로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조각가들 덕분에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건물이나 가구를 포함한 모든 사물의 소통 능력에 강렬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미술관에 가서 영감을 얻고 나면 샐러드 사발은 샐러드 사발에 불과하다는 이전의 산문적인 믿음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이제는 샐러드 사발에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완전성, 여성성, 무한성 등 의미 있는 연상들이 머문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책상, 기둥, 아파트 건물 같은 실용적인 물체를 볼 때도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한 추상적인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85쪽

활자로 찍은 글자처럼 작은 것에서도 풍부하게 발전한 개성을 탐지할 수 있으며, 그 삶과 백일몽에 관하여 어려움 없이 단편소설 하나라도 써낼 수 있다. 헬베티카 활자 ‘f'의 곧은 등과 빈틈없는 꼿꼿한 태도는 정확하고, 깔끔하고, 낙관적인 주인공을 암시한다. 반면 폴리필루스 활자는 그 숙인 머리와 부드러운 이목구비 때문에 졸린 듯한 느낌, 수줍은 모습으로 시름에 잠긴 듯한 느낌을 준다.-89쪽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 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따라서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기원을 넘어 살아남고, 최초의 관객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우리의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속 좁은 인상의 밀물과 썰물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108쪽.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102쪽

우리가 환경에 민감한 이유는 인간 심리의 곤혹스러운 특징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에 수많은 자아를 품는 방식 말이다. 그 모든 자아가 똑같이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협화음 때문에 어떤 분위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의 진정한 자아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불평하기도 한다.-110쪽

우리 주위의 재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는 최고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성실과 활력이 지배하는 정신 상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속으로 해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깊은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방 전체와 마찬가지로 그림 한 장도 우리 자신에게서 사라졌던 의미 있는 부분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125쪽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위험물들―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다. -166쪽

취향 뒤에 놓인 심리적 기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태도는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에 저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하고 물어야 한다. 그들의 선택에 열광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들의 박탈감은 이해할 수 있다. -175쪽

취향의 충돌은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파편화하고 고갈시키는 세계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 우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도 취향의 스펙트럼에서 계속 새로운 부분, 새로운 스타일로 이끌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이 현재 우리 내부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집중된 형식으로 구현할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선언하게 된다. -178쪽

순진하게 민속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을 갈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차이가 건축적 수준에서 적절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일 뿐이다. 나는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 과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전등스위치, 그 연장선상에서 건물 전체를 원했다.-236쪽

<겐지 이야기>의 가장 훌륭한 번역이 개별 단어에는 광범한 자유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다. 꼼꼼하게 단어만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원래의 의도에 충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65
설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을 씻어내고, 끈질기게 우리의 조건반사 뒤에 감추어진 기제를 쪼개보고, 불을 끄거나 수도를 트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의 신비와 아연할 정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242쪽

우리는 건물이 우리 뜻에 따라 지어진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불도저나 크레인의 방향을 안내하는 미리 결정된 각본은 없다. 잃어버린 수많은 기회를 아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쪽으로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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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빡해서, 살짝 늦었다.

♪완료.

*행복의 건축.

*자료 수집, 기발한 생각의 이끌기에 감탄하며, 드문드문 함께 하기.



↗진행.

피쉬 스토리.

*구로사와라는 인물의 매력에 흠뻑 취함.
표제작 피쉬 스토리 각각의 독자적 이야기에 삽입된
물고기 상징 고독, 용기, 좌절의 메시지에 주목.


타인의 얼굴.

*어떤 영상, 관념적 표현을 함께 하며,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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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물 위에 눈에 보이지 않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맴돌고 있는] 저 크고 아름다운 배들, 꿈꾸는 듯 한가해 보이는 저 단단한 배들, 저 들은 우리에게 소리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것 같지 않은가? 너희는 언제 행복을 향해 돛을 올릴 것이냐?”

 

- 보들레르.

- “행복의 건축”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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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나는 언제 행복의 돛을 올릴 것인가.

302moon 2007-06-13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댓글은 지금에서야 봤군요. 밑줄 긋기 등록하고 있으니, 메가패스 타임코디를 쓰고 있어서 밤 12시 살짝 지나 인터넷이 끊어지더라는.-_-
저도 과연 언제 올리게 될까 계속 찾고 있습니다!

2011-11-20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들레르 시 좋네요. 그림이랑도 정말 잘 어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