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품절


그의 정신은 다른 어딘가에서, 그에게 늘 붙어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허구들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는 읽는 법을 잊어버렸지만 아직까지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이름을 말할 수 있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사물들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아직까지 읽는 법은 알고 있을 수도 있다.-(7쪽)~(8쪽)쪽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나가는 시간의 기록, 눈에 보이는 증거일 뿐이다.-(10쪽)쪽

좋은 일하고 나쁜 일이 모두,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예요.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거죠.-(43쪽)쪽

지금은 불안정한 시기이고 나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잘못된 사람에게 던진 단 한 마디 말로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비난을 받게 되면 그가 하는 일들 하나하나가 다 부당하고 의심스럽고 이중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내 경우에는 문제가 된 그 흠이 악의에서가 아니라 고통에서, 교활함에서가 아니라 혼란스러움에서 생겨났다. … 몹시 안 좋은 밤과 맞닥뜨릴 때마다 내 생각은 나를 저버리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서 곧 나는 나 자신의 숨결에 숨이 막히곤 했다.-(79쪽)쪽

나에게는 중요합니다. 내 모든 삶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꿈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95쪽). 나에게는 그 꿈이 유일한 기횝니다. 그건 내 잃어버린 한 부분 같은 거고 그래서 그걸 찾아내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지요.-(93쪽)쪽

곤란한 일은 누구에게나 닥쳐오고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과 화평을 맺는 법이니까.-(82쪽)쪽

우리는 지금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모든 게 다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으니 말이오.
(152쪽)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의 미래를 예상하는 데서는 비관적이지 않은 그는 끊임없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에 다시 한 번 더 체념하고 만다.-(149쪽)쪽

그는 자기의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 그 자신의 목소리는 아닌,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를 듣지만,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권위 있고 확신에 차 있어서 그것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인정한다.-155쪽~쪽

일단 세상 속으로 던져지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우리가 죽은 뒤에까지도 우리의 이야기들이 계속 이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222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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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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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읽었음에도,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리뷰와 함께, 살짝 미뤄두고 있었다. 내내 머릿속으로 흐릿한 영상을 그리면서, 어떤 식으로 풀어야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작가와의 만남은 이번이 (실질적으로)처음이다. 슈거 푸시란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는데, 읽다가 말았던 과거가 있다. 그때는 공감 코드를 발견하지 못했던 걸지도. 알라딘에서 소개를 우연히(의식적 우연인가, 새로 나온 책 코너는 늘 기웃거리니까/) 발견하고 궁금하여 얼른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2007년 4월 26일 아침 매장 신간코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하고 찜해두었다가, 동행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누가 가져갈 세라) 냉큼 구입하고서 집을 향해 갔다. 그때, 동생이 선물로 주었던 문화상품권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0426~0505)기간 동안 하루에 단편의 반쯤, 혹은 단편 하나까지 읽을 때도 있었다. 느릿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단편이 있고, 후딱 해치운(?)단편도 있다. 더러 공감하거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솔깃한 표현을 찾고 환호하고, 나름 세심하게 밑줄 긋기 기록을 하면서 집중했다. 그리고 이미 밑줄 긋기 등록은 마쳤다. 리뷰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서, 심적 부담이 컸다.
뒤의 해설 부분에서는 작가의 문학적 변화가 엿보인다는 이야기를 바탕에 깔아두었다. 사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파악이 안 되었으나, 일단, 변화라는 영역 안에서는 내가 끌어갈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찾았다는 생각이다. 제자리에 머물기보다, 무언가 탈출구를 찾듯 뚫고 나갈 수 있는,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소설을 적극 선호하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참 반가운 타입의 작가다.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단편집을 낼 터이고, 여러 번 파고들 수 있었으면 바라고 있다. 주목하는 작가 리스트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고, 조만간 슈거 푸시를 통해 그녀의 세계를 재차 탐험해볼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은 단편은 [미니 초코파이]. 또한 개인적 판단으로 구성이 돋보였던 소설은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한 문장, 거푸 되짚으며 읽었던 단편은 [정직한 너에게]. … 다 풀어낼 수 없는, 정리할 수 없는. 각각 단편들은 각양각색의 이미지로 다가왔으며,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

-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

미래는 구불구불 미로처럼 까마득하고 이렇다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에, 몇 번이고 밑그림 수정이 가능하다. 나 또한 어릴 적 모험을 꿈꾸는 아이에서, 지금은 현실에 적응하고, 부당하다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시기도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인생이 펼쳐질 지 장담하고 단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스케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 흥미진진하게 도전하고, 배움의 묘미를 깨달을 생각이다. 이 열정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어디든 언제까지나.

-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

나도 아직은,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뿐 아니라, 내 주위 친구들, 그리고 혹 이 글을 보고 있을 여러분들도. 그리고 나에게 비상구랄 수 있는, 대학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소설, 작가의 말처럼 왜 쓰는지 더는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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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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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0505)

허리춤에 칼을 꽂은 조련사들이 쓰레빠를 끌고 다니듯 여기저기로 코끼리들을 끌고 다녔다. 코끼리들의 배설물 위로 또 다른 배설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국의 언어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어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한 사내에게 붙박여 있었다.
… 최소한 자신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만은 ‘몰락’이라고 해도 될 만큼 초라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13쪽)쪽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지. 이해 못 하는 걸 무서워하는 인간과 이해 못 하는 걸 찾고 만들려 하는 인간."-(23쪽)쪽

일 달러를 벌려다가 뭔지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들, 그 소녀들의 몸과 그 소녀들의 연인과 그 연인의 아비와 어미와, 헐벗었으나 수천 년 동안 힘들게 지켜온 그네들만의 삶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는 일 달러에 대해 다른 사람 아닌 타이 한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진은 그 순간만큼은 타이 한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약기운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26쪽)쪽

마약에 취하거나 돈에 집착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결국은 모두,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뿐이다.-(33쪽)쪽

그러나 들썩이는 어깨와 토해내듯 ‘한국’이라는 말을 뱉어놓고는 그 말이 불러일으킨 파문에 휩싸여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목소리만으로도 어진은 알 수 있었다. 타이 한이라는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오래 참아왔는지를. 겉으로는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타이 한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다. 마약을 하거나 뚜쟁이 노릇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실은 실패와 후회로 얼룩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쪽

냄새는 묘사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냄새는 정직해서 은유와 상징으로 포장할 수도 없다. 냄새는 그저 발가벗는다.
(…) 너는 동굴 같아. 네 속으로 들어가면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까매져. 분명하던 것들의 윤곽이 흐려지고 어둠만 남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가만히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거야.-(42쪽)쪽

노트를 하나 마련해봐. 거기다 다 써버려. 쓰다보면 기억이 날걸? 네가 네 속에 숨겨놨던 것들이 너를 찢고 나올 거야. 다 받아 적어. 그리고 묻어버려.-(59쪽)쪽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그 아득함이 실제의 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 당황하고 있었다.-(69쪽)쪽

테이프를 되돌려 감듯, 지나온 삶을 되돌려 감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 인생에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한 사람, 그는 리와인드 버튼을 한 번 더 누를 시간마저 갖지 못했다. 설령 이제 누군가가 그를 기억해내어 그를 대신해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준다 해도 끝까지 돌다간 그의 테이프는 절대로 되감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 죽었으니까.
(…)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변명일 뿐이다. 참회를 하고 눈물을 흘려도 여기, 살아 숨 쉬는 자의 참회와 눈물은 트로피를 거머쥔 승리자의 한때의 도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지금 내 뱃속에서 나를 쥐어뜯고 있는 저 정체 모를 통증……나쁜 짓을 한 것도, 내가 원한 것도,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불쑥불쑥 나를 찾아와 들쑤셔대는 저 통증……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익숙하면서도 매번 낯설기만 한 저 통증을 향해 나는 주먹질을 했다. 내 몸이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내 주먹으로 내가 내 몸에 멍을 만들리라.-(84~85쪽)쪽

모든 것이 0과 1로 단순화되는 디지털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한 주변인의 이야기란, 죽은 자에게 목덜미를 잡혀 자신의 삶으로 죽음을 대신해야 했던 영식이 아저씨의 이십 년 세월 앞에서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1975년 4월 28일에 신체검사를 받았다는 한 남자의 생이 이쪽 원에서 저쪽 원으로 건너가고 있는 테이프를 매만지며 가짜와 진짜, 이쪽과 저쪽, 그 사이에서 소설의 자리는 어디인가.-(92~93쪽)쪽

"그대로 놔둬. 방이 환해지는 거, 뭔가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 모두 귀찮아졌어."
(106) 방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은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다 나가버린다.-(103쪽)쪽

빛을 가로막고 있는 블라인드를 본다. 이제 저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상상 속의 고래가 늘 훌쩍 뛰어넘어가버리곤 했던 그 문턱을 본다. 방문은 닫혀 있다. 문은 꼭 잠겨 있다.
… 내 등에 그가 꼭꼭 눌러 새겨준 그 검은 글자들이 아프게 아로새기고 있는 무늬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지금도 날카로운 조각칼을 들고 어디선가 무늬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120쪽)쪽

우리의 열아홉은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은 선물상자 같은 것이었지.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 속에는 ‘내일’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무엇이 들어있었어.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쪽

나는 뒤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이제 막 사진액자의 네모난 틀 안에 붙박여버린 어떤 풍경을 지켜보았지.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들…… 화살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상처들마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 풍경은 내게는 너무나 낯설어서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단다.-(218쪽)쪽

밑동에서 조금 올라가다 제 몸을 기꺼이 반으로 나누어 땅을 향해 휘어 있는 저 나무라면 그 뿌리로 전설 하나쯤은 움켜쥐고 있을 법도 하지 않니?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버리게 된 곳, 그곳은 어디였을까?-(223~224쪽)쪽

길 양편으로 갈라져 서 있는 낡은 집들이 안개 속에서 길을 연다. 나는 그 길 위로 올라가 희뿌연 안개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쫓는다. 그것은 손짓하는 듯도 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듯도 하다.
(…)공원은 쇠와 장구와 북과 징이 만나 얽히고 풀리고 맺히고 꿈틀거리는 소리로 깨어나고 있었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저리로 달려가서 이 지랄 같은 열기가 내 몸에서 다 빠져나갈 때까지 진저리치고, 뛰고, 날아올랐으면……-(254쪽)쪽

검은 땅에서 날아올라 하늘에 길을 내는 새, 강으로 흘러들어가 강 너머의 들판과 맞닿고, 돌을 뚫고 들어가 땅속에 더 너른 길을 예비하는 길……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찾아낸 길, 책을 뒤져 찾아낸 길들이란 저 살기등등한 바다 앞에서는 전부 무효였다.-(284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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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바이 리틀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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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만들기 놀이.

 

 

(05.04)


  2004년 출간 당시, 서점에서 바로 발견해서 약간 기간이 지나 구입하고, 읽었던 기억. 최연소 수상작가라고 거창하게 소개한 띠지와, 너무나 얄팍한 분량에 처음엔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번 쓱 봤다가 도로 그 자리에 꼽아놓았다. 그러다 표지와(좋아하는 타입의 일러스트;)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 보니,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어 읽기에 별 무리가 없을 듯 판단해서, 그 후엔 이것저것 따지기를 접고 구입했다. 그 당시, 복잡하고 까다로운 교재와 거듭 파고들어도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고 건지지를 못해 잠시 미뤄두고픈 소설책이 여럿 있었기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간절히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두세 번 되풀이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책 두께는 한없이 얇다. 그리고 스타트를 접했을 때, 굉장히 싱거운 맛이 났다. 갓 20살이 된, 여자아이의 시선에 닿는 가족, 풍경, 그리고 기다림과 아기자기한 사랑 에피소드.
 

  커다란 충격을 몰고 올 사건은 터지지 않고, 이렇다 할 외적갈등은 없으며, 여자 아이의 내면에서 생긴 불안이다. 그렇다고 그런 불안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매일 겹쳐지는, 어쩌면 무지 사소한 일상에서 자그마한 구석에 웅크린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후미는 그 ‘무서움’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거의 결말이 다가올 즈음, 남자친구 슈에게 조그마한 단서를 넌지시 비출 뿐이다.

 

“가끔은, 무서워.”
“무슨 말이야?”
“모든 것이, 하나같이 전부. 오늘 자고 나면 내일 아침 아르바이트, 인파, 따분한 평일, 잠들기 전, 전부.”
“그런 때는 어떻게 하는데?”
“죽은 것처럼 눈 꼭 감고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지나가니까.”
“왜 무섭다고 말 안 하는데?”
“말로 하면 분명해지니까. 한 번 말이 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 160~161.

 

  전체적으로, 이 소설의 분위기와 전개되는 양상은 마치 투명 유리병 캡슐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안에 캡슐이 들어있다는 건 뻔히 보인다. 편지(소설의 분위기랄 수 있는)라는 건 대강 짐작이 가지만, 곳곳에 숨겨놓은 주인공의 심리 변화(캡슐 안, 편지 내용)를 보여줄 하나하나 에피소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것처럼. 살짝살짝 궁금하여, 잠깐 휴식에 책을 덮어놓고도 이내 슬그머니 들추게 만든다.

  *어릴 적 좋아했던, 비가 시원하게 바닥을 간질이듯 톡톡 떨어지는 풍경이 비친다. 내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마루에서 내려와 마당을 거닌다. 손바닥을 내밀어 조그마한 물방울이 그 위에 퐁퐁 연주를 하면, 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던, 한 장면. 어렸을 적에는 때때로 학교 현관에서 한참 지켜보다가, 마지못한 듯 우산을 켜고 집으로 갔다. 여전히 비 내리는 그 회색빛 풍경은 마구 좋아한다.(오직, 풍경만 좋아할 뿐. 통행에 불편해서, 다닐 적에는 구시렁구시렁;)취향의 음악을 틀어놓고, 멜로디를 짚어나간다. 현재도, 띄엄띄엄 지나가는 비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 타이밍에 과감하게 쏟아지는 비에 열광.
더불어 자랑하듯 마루에 책을 늘어놓으며(구연동화를 펼치고, 빗줄기랑 속닥거리기)뿌듯해하던, 한 장면.
구불구불 골목길을 더듬어가다, 미로처럼 숨겨진 길을 발견했을 때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호기심, 한 장면.……*
소설을 읽으며, 나름 유쾌한 조각이 등장할 때, 내 어릴 적 겹쳐지는 기억 파노라마를 풀어놓고 동동 띄우며 함께 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모드, 답답하고 불안할 때, 꽁꽁 숨기다가, 그나마 조심조심 비밀리에 소설을 건드리곤(썼다, 는 다른 의미를 부가한 내가 좋아하는 단어)했던, 한 장면.
소설이란 도화지에 여러 바탕을 칠하고, 갖가지 물감을 짜놓고 추상미술을 펼치듯,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에 각각의 색을 입혔던, 그 장면.……*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나름 숨이 턱 막히듯 후미의 심리가(내가 겪기도 했던)떠오를 때, 또한 겹쳐지는 과거랑 현재의 이야기 퍼레이드를 펼치며, 따라간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밑바닥에 보이는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꼭 old fish의 음악이 겹쳐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몽롱한 기운에 영상 만들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까지는 일단, 색다른 경험으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그냥 괜찮다는 거지, 소설이 대단하다고 평할 단계는 아니라는 거다. 신인상과 아쿠다가와 후보작이라기엔 어딘가 엉성한 데도 많았고, 좀 더 깊이 담기지 못한 심리 표현도 몇 가지 내 눈에 띄었다.(주관이 섞였을 거라는 것도 인정한다.)
언젠가 다시 또 책을 끄집어내 파락파락 넘길 때, 다시금 끌어당기는 요소를 쥐고 굴릴 수 있도록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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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바이 리틀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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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5. 04) _ 밑줄 긋기를 위해 2004년 이후 오랜만에 꺼내 듦.
그래서 생일이 다가오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직도 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를 새로 먹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역 앞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있는 듯한 기분.-(34쪽)쪽

열린 창문 너머로 높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타듯 떠 있는 둥그런 달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볼 때면 나는 곧잘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으로 많은 사건들을 그린다. 바깥의 어둠에 비추어 내듯. (…)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절대 잊지 말자고, 내게는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떠올린다.-(41쪽)쪽

빛이 눈에 반사되어 지면은 밝은데, 뾰족한 잎 사이사이 풍경은 어둠에 갇혀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둠이 보였다. 이 먹색 같은 어둠이, 산의 밤 풍경 자체라고 생각했다. 점점 짙어지는 먹색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그 경치를 봤던 순간과 비슷했다.-(50~51쪽)쪽

"재미있고 없고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같은 말이라도 말투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글자도 그렇다. 너나 나나 모두 쓰는 언어가 나만의 언어가 되어 종이 위에 출현하는 것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53쪽)쪽

그의 등에 몸을 기대자 고동이 이중으로 들려, 마치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였다.-(82쪽)쪽

담 너머로 넒은 마당과 툇마루가 보이고, 마당에서 무슨 빛이 반짝반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손전등을 든 야나기 씨와 부인이 마당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윤곽을 잃은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해, 마치 두 마리 개똥벌레가 너울거리는 것 같았다.-(89쪽)쪽

곧바른 길이 계속 이어지는 데다 대부분이 언덕길이라 한없이 멀게만 보여 늘 우울했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걸으니 전혀 다른 길 같았다.-(102쪽)쪽

그 후로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하고, 뜬금없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천천히 불안이 밀려왔다. 그때, 아니 그 이전부터 시간이 멈춰 있는 장소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16쪽) 험한 꼴을 당하면 당할수록, 언젠가는, 하고 기대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멀어질수록 머릿속에서 실상과 다른 모습이 제멋대로 형성된다. 많은 기억 중에서 희망을 낚으려 한다.
-(115~116쪽)쪽

"어떤 말이든 내뱉고 나면 혼이 깃들어. 말에 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서도도 마찬가지지. 쓰는 순간 말의 힘이 종이 위에 살아나니까. 그리고 쓴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122쪽)쪽

어둠에 익은 눈에 희미한 잔상처럼 그의 등이 비치자, 이대로 손을 목에 두르고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무방비한 상태로 자고 있는 그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 깨워, 이렇게 쉬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서 무슨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정말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웠다. 눈을 감자 폭도 깊이도 없는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낀 보일락 말락 한 틈새로 새로운 어둠이 퍼졌다.-(138쪽)쪽

나는 이제 아무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벌써 오랜 옛날에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물론,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다.-(145쪽)쪽

"가끔은, 무서워."
"무슨 말이야?"
"모든 것이, 하나같이 전부. 오늘 자고 나면 내일 아침 아르바이트, 인파, 따분한 평일, 잠들기 전, 전부."
"그런 때는 어떻게 하는데?"
"죽은 것처럼 눈 꼭 감고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지나가니까."
"왜 무섭다고 말 안 하는데?"
"말로 하면 분명해지니까. 한 번 말이 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160~16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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