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1 세계문학의 숲 17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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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백한 불빛 아래 점원의 표정은 묘한 활기를 머금어 화사한 블라우스의 빛깔과 어우러졌다. 때로 그들은 손에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케이스 너머 가죽으로 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혹은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을 원하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약간 어둑한 문으로 가로막힌 매장 뒤의 작은 창고에서 요구사항에 최대한 비슷한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손에 지갑을 들고 있으면 나는 종종 내 지갑이 그 공간에서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되듯 제 생명을 새로이 얻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공간은 에밀 졸라가 130여 년 전에 이미 그려낸 곳, 백화점이다.




 그곳, 백화점은 프랑스 파리 봉 마르셰 백화점(1852년)이 시작이었다. 루브르(1855년), 사마리텐(1869년), 갤러리 라파예트(1893년) 등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는 왕정복고 후반부터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의 부티크에는 가격표시가 없었고 상인과의 흥정은 필수였다. 소품종을 취급하며 고객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다. 그러던 차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는 현대의 백화점의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난다. 널찍한 상점, 현금 거래, 물건에 붙여진 가격표, 다양한 제품. 클리어런스 세일.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를 응시한다. 고객의 돈. 돈을 내는 자에게 천국이 있고 바라보는 자에게 욕망이 있다. 물건을 사는 것은 환상을 구하는 일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에밀 졸라가 시도한 것은 물론 루공 마카르 총서의 한 핏줄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중심인물은 이 호사스런 백화점의 주인 무레도, 그가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오.'라고 마음을 바치게 되는 드니즈도 아니다. 이 소설의 거대한 움직임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덮은 '무언가를 사고 싶은 욕구', '여자들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지금도 길을 나서면 볼 수 있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쇼핑객과 판매원의 모습은 욕망하는 자와 환상을 창출하는 자를 닮았다. 그 뒤에는 파리의 거대한 백화점과 그와 대조되는 모습의 상점이 있다. 매장의 재고를 정리하며 눈이 침침하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참고 견디는 직원과 목이 말라 음료를 마시며 돈을 쓰는 의문의 여인이 있다. 에밀 졸라가 다룬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당시 봉 마르셰, 루브르, 생조제프 백화점의 매장 책임자, 판매원, 건축가, 변호사 등을 취재 끝에 그 윤곽을 드러냈다. 안팎의 모습, 백화점 안에서의 하루. 계절과 상인들과의 거래가 백화점의 매출과 판매원의 생사까지 쥐락펴락하게 되는 과정, 판매원들의 경쟁과 동맹관계를 통해 쇼핑객의 동선이 드러내는 것은 백화점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당시 새로운 삶의 어떤 방식이었다.




 잠시 에밀 졸라의 전체 작품 속 이 소설의 위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에밀 졸라는 총 스무 권짜리 총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했다. 20대 후반부터 구상한 이 총서는 유전의 법칙이 세대와 시간을 거쳐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면서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다룬 작품이다. 전혀 다른 존재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서로 연결된 유기체와도 같은 유전의 법칙이 드러난다. 그가 관심을 둔 환경과 유전의 법칙, 결정론적 관점, 유전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의 발현을 보여주는 이 총서는 당시 제 2 제정시대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의성이 짙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목로주점에 가면 변두리 노동자가 있다. 제르미날에는 셔츠를 풀어헤치고 자신을 쏘라고 외치는 탄광촌의 광부가 있다. 에밀 졸라의 소설에는 무엇보다도 시대를 호흡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그러던 그가 유일하게 낙천성을 가미해 꾸려낸 소설이 바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고단한 판매원과 부유한 백화점 소유주의 감정은 이제는 낡고 구태의연한 것이 되었을지언정 정작 이 소설의 중심부에 있지 않다. 소설의 중심부는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며 분량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소설의 중심부는 오히려 다양해서 그 모습을 제각각 다르게 선보이는 인간 군상이 차지하고 있다. 어느 순간 등장한 자본가, 매장의 감시 직원, 상품을 어루만지며 거의 에로티시즘을 느끼는 여인. 이들을 엮는 일련의 감정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닌 여자와 욕망의 관계이다. 화려함의 격류, 두려운 속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더이상의 염세주의는 없다. 삶이 어리석고 우울한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말자. 그 반대로,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강력하고도 즐거운 것을 탄생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하자. 한마디로, 행동과 정복 그리고 노력의 시대와 함께하면서 이 시대를 표현하도록 하자. 그런 다음, 그 결과로써 행위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을 보여주도록 하자. -에밀 졸라



 


 

 에밀 졸라가 그리고자 한 것은 새로운 힘이었다. 그 중심에 백화점의 소유주, 최고 경영자, 옥타브 무레가 있다. 루공-마카르 총서 중 루공 가의 운명, 플라상의 정복에 등장하는 마르트 루공. 그리고 같은 책에 등장하는 프랑수아 무레. 이 둘의 아들인 옥타브 무레의 이름은 이 작품 말고도 앞서 언급한 두 작품과 무레 신부의 과오, 살림, 삶의 기쁨, 작품, 파스칼 박사 등에도 등장한다. 총서의 열번째 작품 '살림'에서는 옥타브 무레의 이전 삶이 펼쳐지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는 그 이후의 옥타브 무레가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인물이다. 변화에 강하며 자신이 누릴 즐거움을 당연한 것으로 취하며, 인간의 권력과 야심을 드러내되 현명한 여인 드니즈의 충고를 받아들여 번영을 이끌어낼 줄 아는 인물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욕심을 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는 이러한 인물로 그려진다.




 옥타브 무레가 이끄는 백화점과 그 안에서 일하는 드니즈의 삶은 생명체처럼 함께 호흡한다. 에밀 졸라는 에로티시즘을 제거한 이 두 남녀의 관계와 백화점의 공기를 통해 그가 만든 이상형의 인간을 선보인다. 흠 없는 남자와 이상적인 여인이다. 큰 키, 하얀 피부, 부드러운 눈빛, 압도적인 야심,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 차분하고 조용조용하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여자, 한 번 바라보기만 하면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매력, 바라는 것이 소박하고 이성적이며 자애로운 면모, 이것이 옥타브 무레와 드니즈 보뒤의 모습이다. 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것은 기쁨을 누리려는 의지, 척박한 삶이라도 그것을 일구어나가려는 애착,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밝음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에서 삭제된 듯한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 증폭되어, 백화점 곳곳을 물신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에밀 졸라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물신주의, 황금 만능주의 그 자체가 아닌 그것 때문에 뻥 뚫린 듯한 도넛의 구멍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백색 대전시회가 성황을 이룬다. 실제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는 연간 최대 비수기 2월에 백색 직물로 제작된 상품, 즉, 시트, 식탁보, 린넨, 속옷, 셔츠 등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판매했다. 무레는 그 속에서 대주교를 초청할 꿈을 꾼다. 이 역시 실제 프렝탕 백화점 개장일에 마들렌 성당의 신부가 그곳을 축복하는 의식을 거행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다. 종교와 세속은 이렇게 이상한 발걸음을 함께 했다. 백색 대전시회의 백색의 물결과 제비꽃, 응접실의 여성과 백화점의 여성, 감추어진 듯 드러나고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불타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백색으로 에밀 졸라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편의 욕망의 시의성, 물신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기슭에 선 인간군상의 다양함으로 직조된 세속화였다. 지극히 세속적인 로맨스, 백화점을 무대로 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 그 속에서 오가는 불타오르는 형형색색의 욕망, 고단한 노동과 돈으로 이루어진 소비 활동, 욕망을 욕심내고 환상을 사들이고 팔고 싶은 것을 팔지만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면서 돈을 쓰는 쇼핑객. 





  삶은 계속 움직이고 그 속에는 때로는 강력하고 즐거운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에밀 졸라가 행동, 정복, 노력으로 바라본 '새로운 시대'는 이제 다른 세기를 맞아 더욱 현란해 졌다. 결과로 존재하는 행위의 즐거움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덩치를 키워 에밀 졸라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 되어 인간의 삶을 지배할까 두렵다. 화폐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백색의 실크를 매만지고 새로운 시대의 발걸음을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에밀 졸라가 자연주의 작가로서 지켜온 원칙에 관하여 굳이 반칙해가며까지 그려낸 무레와 드니즈였다. 이제 그 속에 잠식당할 듯 백화점의 에로티시즘에 압사당하기 직전인 '지금의 새로운 존재'를 꿈꾸어야 할 때다. 혹은 이 거대한 공간에서 종잇장이 되더라도 그곳에 압사당하지 않고 군집 명사로 존재하는 이들을 종종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숙제가 아닌 독자의 삶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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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5-14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티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백화점 소유주와 판매원의 진부한 러브 스토리가 이미 졸라에게서 예고되었다는 것도요. <제르미날>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쟌느님의 리뷰로 다시 복기하니 너무 좋네요

Jeanne_Hebuterne 2013-05-15 18:34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종종 우리 생활 속 가장 흔한 비유, 은유를 살펴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처음에는 놀라운 표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마찬가지로 지금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이야기도 처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비록 요즘에는 가장 간단한 부의 재분배가 이런 백화점 소유주와 판매원, 자본가와 노동자의 결혼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흔한 것이 되었지만 말이에요. 에밀 졸라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러브 스토리에 치중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힘찬 발걸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로티시즘을 살짝 재배치한 것을 보면 그래요. 두 남녀의 눈빛보다는 부채, 실크, 가방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한숨 같은 눈빛이 더욱 농밀했으니까요! 제르미날은 영화로도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프랑스인들에게는 이 작가의 작품이 우리에게보다 더 친근한 것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 책을 집어들면서 블랑카 님의 페이퍼를 떠올렸는데, 이럴 때의 좋은 작품은 꽤 괜찮은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듯해서 반가웠어요.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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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미각에서 얻는 쾌락과 지적인 것의 충만감이 만드는 정신의 기쁨은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지 않다. 주린 위장의 배고픔과 정신의 공허가 초래하는 고통이 그렇듯이. 그 둘은 하나로 포개진다. 그런 맥락에서 철학은 차고 뜨거우며 쓰고 달콤한 음식이다. 오래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정신적 탐식에의 욕망으로 온갖 철학을 삼키고, 위와 장에서 삼킨 것들을 소화시켜쓰며, 마침내 이 화사한 철학들은 내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철학자의 사물들>은 사물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사유와 철학을 즐긴 흔적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사물들의 이모저모를 뜯어보고 그 철학적 의미들을 반추하는 동안 나는 사물의 행복한 감식가 노릇에 만족한다. 당신을 이 자유분방한 사유의 축제에 초대하니, 여기 와서 사물의, 사물에 의한, 사물들을 위한 축제를 즐겨라!

-저자의 말 중에서.

 

 

 영화 '클로저'에서 영국인 주드 로는 처음 만난 미국인 관광객 나탈리 포트만에게 런던의 일상을 소개한다. 튜브라고 부르는 지하철, 보비라는 애칭의 경찰. 붉은색 벽돌 같은 이층버스. 입술 양 끝을 벌려 발음하는 티. 오후 네 시의 크림 티, 타인과의 거리를 끔찍이도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이 탄 이층버스, 시민 사이를 천천히 걷는 경찰, 운행을 자주 중단하지만, 도시의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지하철. 무심히 보아넘긴 사물은 이국의 관광객에게는 신비한 물체로 다가선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어떤 존재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상외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고개를 들어보면 늦게 와서 빨리 지나치는 봄 공기를 타고 커피 향이 실려온다. 테이크아웃 잔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 이야기를 하거나 뭔가를 들으며 스쳐 지나간다. 그 많은 얼굴 속에서 내가 아는 얼굴을 찾기 전까지 가만 앉아있노라면 내가 든 가방, 그 속의 잡다한 물건들이 때때로 말을 건다. 그것은 영화 파니 핑크에서 오르페오가 보지 말라고 했던 시계이기도 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쓰는 밝은 갈색의 가죽 수첩이기도 하다. 원하는 만큼만 인간적인 커피 전문점의 종업원이 내게 건네준 커피가 식기 전까지 짐짓 처음 보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더 깊은 이야기가 들린다. 아마 장석주는 '철학자의 사물들'을 펴내기 전 이런 시간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장석주는 해마다 천여 권의 책을 읽는 다독가로 유명하다. 이 책은 그의 다독의 경험과 일상의 관찰력,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의미로 엮어내려는 노력의 결과다. 이를테면 여행 가방에서 그는 암스테르담과 서귀포를 떠올린다. 배와 기차, 비행기, 기상이변, 무수한 변곡점과 계획의 수정이나 이행을 떠올린다. 여행은 그에게 생각을 낳는 커다란 여행 가방으로 환원된다. 의미를 비틀고 환원하여 그 본질을 자기 생각으로 대치시킨다.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떠나기에 일회성을 지니는 여행을 생각하며 장석주는 떠남과 나아감으로 존재하는 인생 역시 하나의 여행임을 상기시킨다. 하나의 부분이 전체가 되는 순간이다.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이라는 분류에 따라 서른 개의 사물을 서너 페이지에 걸쳐 다소 느슨하게 계열화하고 그 사물에 관해 묻고 대답했다. 철학자의 시선은 종종 인용과 요약으로 장석주의 시선과 어우러진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일상의 사물이며 따라서 우리가 자주, 때로는 무심하게 지나치는 존재다. 하지만 같은 사물도 철학자의 필터를 거치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김훈은 타인과의 연결 통로, 알랭 드 보통은 무심한 연인의 손에 들어가면 악마의 고문 도구로 본 휴대전화기를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했는데 장석주는 이를 고독과 온전함의 자유를 잃게 하는 도구로 본다. 그는 휴대전화를 손의 구조와 그 기능의 한계 속에서 진화하는 사물로 보기도 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광신론적 믿음의 종교적 실존 도구로 보기도 하며 기술의 핵심과 시간 압축을 가능케 한 진화의 매개체로 보기도 한다. 그 사이사이 블랙베리, 모토로라, 삼성, 아이폰 등이 등장한다. 케빈 켈리(기술의 충격), 파스칼 피크, 장 디디에 뱅상, 미셸 세르(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저술이 인용된다. 

 

 

 

담배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다.

-보들레르


거울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

-라캉


카메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손택


시계

권태란 안쪽에 극히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비단으로 안감을 댄 잿빛 천과 같은 것이다.

-벤야민 



 

 


 엄청난 시간을 자신에게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 무생물의 형성, 생물의 진화로부터 획득한 권위를 지닌 존재, 기호 순환으로부터 획득한 권위를 지닌 존재, 호미니언과 존재, 계통 발생의 시간에서 얻은 권위를 지닌 존재라고 인간을 정의한 파스칼 피크, 장 디디에 뱅상, 미셸 세로의 인용 끝에 저자는 그러나 스마트폰과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진화를 멈추었고 평한다. 필요성, 가치, 첨단 기술로 꾸민 스마트한 기기에 마음 설레는 사람이 많건만 저자는 그것을 쓴다 하여 자신의 생이 화사해지지도 화창해지지도 않을 것임을, 자기 존재의 현상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결심한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겠노라고. 

 


 

 사과에서 애플을 떠올린 저자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란 삶을 위한 발명품이고 선택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가 바라본 스티브 잡스는 경영자 이전에 인문학자였다. 11월 들어 세 번째 맞는 목요일의 차가운 빗방울에서 따뜻한 수프의 위로와 욕조의 휴식을 생각한다. 늦게 배달된 신문에서 일상의 커피와 신문으로 드러나는 휴식과 연결고리를 이야기한다. 책에서 종이 재질과 독서의 역사, 재료와 구조까지 그의 생각은 꽤 넓은 범위를 어렵지 않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그러나 깊은 고찰을 통해 드러낸다. 사과와 스티브 잡스, 욕조와 사사키 아타루, 조간신문과 마샬 맥루한, 책과 움베르토 에코가 짝지어 등장한다. 이 속을 함께 산책하는 것은 독자인 나의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즐거움은 아마 일상에 희석될 것이다. 아마 앞으로 많은 나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장석주의 말에 따르면 항생제 가득한 돼지고기로 저녁을 위안하고 신용카드를 긁으며 소비사회의 톱니바퀴가 될 것이며 자동판매기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침대에서 몸을 수평으로 만들어 다시 아침을 맞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계속하는 담배 같은 습관을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선글라스로 훌륭한 가면을 만들고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삶은 이렇게 지속된다. 파릇한 바람에서 겨울의 공기를 잊고 차가운 서리에서 남풍을 기약하듯 계속 나아가는 것. 일말의 위로와 사유를 통한 직관, 평범을 통한 비범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잠시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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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5-0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가 쓴 책을 읽다보면, 고독에 너무나 잘 적응한 사람 같기도 하고, 고독을 제2의 자신으로 여기고 붙어 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해요.
제목만 보고는 어떤 내용일지 감이 안왔는데 에뷔테른님 리뷰 읽어보니 감이 오네요.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사유, 탐닉, 분석, 이 세 단어가 다 하나인 듯한 느낌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5-10 14:26   좋아요 0 | URL
hnine님의 댓글을 가만히 다시 읽다가 이 책을 생각하니 이 책의 저자는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는 일에 무척 익숙한 사람, 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고 사물이나 개념에서 자기 생각과 의미를 찾아내어 어렵지 않게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글쓰기를 어느 정도는 타고난 느낌도 함께 들어요.
어떤 자세로 사물을 바라보았는지가 책의 서두에 저렇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읽고 나니 정말 초대장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각 사물에 따라 서너 장에 걸쳐 생각이 전개되어서 틈틈이 읽기에도 편했어요. 주말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hnine님! :)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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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것은 화가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진이다.
현실에서 시간이 정지되는 일은 없으므로.
-로댕






현실에서의 시간이 정지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사진은 시간과 시간, 분과 분, 초와 초, 찰나를 늘 열어두는 매체다. 밀물과 썰물, 들숨과 날숨처럼 수없이 쌓이고 부딪혀 제 흔적을 만든다.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 그 순간과 찰나를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했다면, 그의 사진에 감동하여 야구선수에서 포토그래퍼로 전향한 조던 매터는 '움직임’에서 ‘멈춤’으로 향하는 기억을 잡으려고 노력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니콘 D3S, 1/320의 셔터 속도, 연속 촬영이 아닌 한 컷의 사진, 어도비 브릿지, 폴 테일러 댄스 컴퍼니,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 아스펜 산타페 발레단, 애틀랜타 발레단, 발레 이스파니코, 휴스턴 발레단, 노블모션 댄스단,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단, 파슨스 댄스 컴퍼니, 새러소타 발레단, 테이크 댄스단, 조던 매터, 그리고 사람이 사는 일상의 어떤 움직임.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어떤 것들. 시간은 늘 흐르고 사람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가 화를 내기도, 움츠러들기도,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한다. 그 자체로 문학이 되는 날씨, 몇 장으로 한숨을 내쉬게 하는 영수증, ‘예스’라는 말에 뛸 듯 기뻐지는 사랑의 설렘, 자기 자신에게 거는 기대.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이고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동적인 자세, 열렸다가 닫히는 존재.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한 번의 심호흡이건만 정작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들숨과 날숨이다. 인생을 이루는 모든 중요한 요소는 이렇게 기억 속에서 잠시 잊혔다가 결정적 순간에 모습을 나타낸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어떤 부분을 포착하려는 시선.








본다는 것은 곧 지각하는 것. 무언가를 보려면 어둠 속이라 하여도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빛과 굴절이 필요하다. 사람의 신체를 타고 흐르는 빛, 피부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 이 책에서 포착한 모습에는 긴장된 근육, 극대화된 움직임이 정지된 공간 안에서 점, 선, 면 없이 그 형체를 드러낸다. 회화와는 달리 사진은 시간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드러내려는 노력을 숨기지 않는다. 이 사진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보는 것은 곧 만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깊이와 빛, 움직임에서 정지된 것으로 가는 때를 잡는 시선. 끊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였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






거리를 걷노라면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무언가에 바쁘게 길을 걷는다. 그 사이를 묵묵히 걸으며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어 쓰다 보면 종종 궁금해질 때가 있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재미로 살지?’ 이 책은 그 질문에 참으로 깜찍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빗속에서 춤을 추는 댄서의 모습. 전부를 던져야 사랑을 얻는다는 바디 서퍼의 멈춤. 혹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도 있다. ‘나만 힘든가?’ 그에 관해서는 전철이 오고 있는데도 핸드폰을 바라보는 여자의 정지된 순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맹위를 떨치고 지나간 집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여자의 어로. 잠든 순간 꾸는 꿈속에 머물고 싶어하는 듯한 묘지 위에서 애도하는 자의 침묵으로 등을 토닥인다. ‘사는 거 무섭다.’라고 중얼거릴 때면 이 책은 또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계산서 속에서 할 말 잃은 여자의 빚더미. 지하철을 갈아타는 남자의 바쁜 뜀박질. 사랑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저녁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이렇게 무섭고 힘들어서 어디 제대로 살겠어?’라는 자조와 한탄에는 그러나 이 책은 또 다른 말을 건넨다. 건강하게 죽은 시체는 없으므로 가능성도 희박한 전기충격기를 든 수호천사의 손길. 이렇게 힘들어도 카스트로 디스트릭트에서 나누는 남자들의 키스와 달빛 아래서의 소나타로.






고단하고 슬프고 기쁘고 지루한, 그와 동시에 긴박하거나 산만하고 길거나 짧은 하루하루 그날그날은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고 모르는 것의 감정과 느낌을 극대화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보았다고 믿는 것, 느꼈다고 자부하는 것.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잠깐 교류할 수 있는 찰나의 가장 완벽한 맞닿음. 인간 육체의 경이로움을 넘어서 완벽한 자기절제를 뽐내는 무용수들은 우리 일상의 구태의연함을 찬란하게 잡아냈다.






이 책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깊이라든지 미셸 푸르니에의 산문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단지 훨씬 더 극화되고 화려해서 조금은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은, 처음 날갯짓을 하는 듯한 커다란 새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기획의 참신함과 일상의 포커스가 세련된 무용수의 근육을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재미와 다채로움, 감각. 앞으로 조던 매터에게 깊이가 더해지기를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화사하게 정지되어 일 초 전에 움직였음을, 일 초 후에 움직일 것임을 잠시 잊게 하는 흥밋거리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짧은 시간이나마 쉬엄쉬엄 누군가의 뷰파인더 너머로 우리의 일상 그 자체를 넘겨다 볼 수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숨 내쉬기는 이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덧붙이기-책의 서문에는 그가 사진을 하게 된 동기, 가족 이야기 등이 있다면 연속하는 사진의 말미에는 짤막한 사진 뒷이야기가 실려있다. 모든 뒷이야기가 다 실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사진을 찍을 때 느낌, 찍게 된 경위, 연출의 변 등을 참여 인원과 함께 소개하는데, 그의 홈페이지에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 중이며, 연출과정을 보면 와이어, 이미지 수정 없이 이런 사진을 선보이게 된 과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http://www.dancersamong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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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4-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대박이네요!
어쩜 저렇게 역동적이면서 화려하고 또 멋질까.
절묘하게도 사진을 잘 찍었군요.

Jeanne_Hebuterne 2013-04-29 20: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참 감각적이고 쾌활하지요?

심지어는 슬픈 사진마저도 쾌활하게 찍어내는 재주는 아마 이 사진작가의 천성인 듯 싶어요. 야구선수에서 사진작가로 전향했다는데, 그의 경력이 사진에 미친 영향도 어느정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책 안을 보면 더 화려해요. 영문판과는 달리 한국판에는 기억할 만한 말 몇 마디를 덧붙이기도 했고, 사진의 영어 원제를 살짝 비틀기도 했거든요. 저 사진을 찍던 순간을 동영상으로 웹 상에 올려두었던데, 그것을 보면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 시선이 더욱 절묘하답니다.

다락방 2013-04-28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들이 정말 좋으네요, 정말. 저도 어서 빨리 이 책을 봐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9 20: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다락방님께서 읽으신다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합니다.

정작 이 책의 리뷰는 많지 않아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 리뷰를 쓰기 전에 조금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사람마다 감상이 무척 다르겠지만 제목과 사진의 분위기가 이 책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했답니다. 포토그래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이들이니까요. 그럴 때의 제목은 부연설명이라기 보다는 주제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보시면 시선을 잡는 몇몇 사진이 있을 거에요.

망고 2013-05-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유머가 있네요. 헤헷 사진이 재밌어서 기분 좋아져요^^

Jeanne_Hebuterne 2013-05-02 08:13   좋아요 0 | URL
미래님, 카페인 하이 같은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정말 그렇지요?
경쾌하고 밝은 핫핑크 같은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진이 다 밝기만 한 것은 아니고, 꽤 묵직한 사진들도 많았어요.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

다크아이즈 2013-05-0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 시도 만에 겨우 사진 구경합니다. 멋지구리하옵니다.
근데 테른님은 이런 책 어디서 정보를 얻고 구할까요?
전 고리타분한 책만 눈에 띄는데 글 쓰는 안목이나, 책 고르는 안목이나
그 감각적인 면은 테른님을 따라갈 자 없사옵니다. 크~~


설마, 설마 엄마와 아그 사진은 합성이겠지요?
괜한 생각 ㅠ

Jeanne_Hebuterne 2013-05-02 08: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팜므느와르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모쪼록 이 봄, 이제 안 아프셨으면 좋겠어요!
사진이 꽤 괜찮지요? 그냥 쓱 훑기에도 나쁘지 않은데, 작가는 '현실과의 연결'에 꽤 큰 의미를 둔 듯합니다. 나오는 모든 이들이 '현장'에 있는 이들이거든요. 말인즉, 엄마와 아기는 실제 혈연관계이고 레스토랑의 으르렁대는 연인은 실제 커플이어요. 물론 인간의 이야기는 사진과는 달리 늘 진행형이어서 아기는 더 자랐을 테고 레스토랑의 연인은 지금은 헤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체의 와이어, 보정작업,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았다니 팜므 느와르님이 말씀하신 저 사진은 실제 찍은 것일 겁니다.

이 책은 알라딘 매체에서 꽤 적극 홍보해서 알게 되었어요. 제가 선호하는 매체가 몇 군데 있는데(외국 작가들의 경우, 해외 언론에서 먼저 접할 때도 잦습니다), 매체와 지인의 추천, 알라딘 서재의 선호도를 보면 꽤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럼 이 봄, 팜므 느와르님의 리뷰와 페이퍼 기다립니다!

덧-제 안목은 평균인데, 책이 워낙 다들 훌륭해서 이런 칭찬 글 남겨주신 것이겠지요? 고맙습니다! :)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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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들과 만나 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그게 우리 정체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김애란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에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박물관을 지킨다. 마지막 화자가 숨을 거두면 그 언어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 먹먹함을 파고드는 것은 대체재 없는 침묵이다. 말하는 없으면 소멸하여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사라져 뚜렷한 형체도 없지만 그 스스로 말하는 존재, 소멸하는 언어. 말 속에 자신을 새기고 떠나고 빈자리로 몸을 움직인다. 중세 국어의 순경음 비읍의 흔적이 부산 경남 지역 사투리에서 흔적을 드러내고 제주어는 이제 관광지의 언어로 남았다. 전 세계 약 육천여 개 언어 가운데 많은 언어가 빠른 속도로 침묵에 빠져든다. 말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다. 쓰는 이가 있고 읽는 이가 있다. 침묵은 곳곳에 스며든다. 생각은 빠르게 잠식한다

 

 

 

 

 역사상 언어와 그 언어가 몸담았던 작은 사회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사라져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도, 아직 버티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감사해 한 적도, 이를 기록화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도 없었다.-본문 발췌

 

 

 

 

 니콜라스 에반스는 field linguist, 현장 언어학자이다. 연구실과 강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기록되지 않은 언어를 연구하고 소수민족, 방언을 쓰는 사람들, 고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현장 답사를 하며 채집, 기록, 연구, 보존까지 하는데 그가 그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에서 자취를 알리는 것은 에보리진과 파푸아뉴기니의 언어까지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사라져가는 언어라는 점. 이 책의 원제는 dying words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 절벽 같은 낙차를 니콜라스 에반스는 두려워한다. 모든 언어는 생각의 틀, 공유하는 인지구조를 체계화하고 소통한다. 그가 밝혔듯 어떤 언어든 언어가 전달하는 핵심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는가'인데 이는 결국 구성원 제각각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공공의 재원으로 쓰이는 것이다. 의미이자 존재 자체,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발화되고 쓰이는 순간 생명을 갖는 무엇이다. 매개체이자 형식, 개인재이자 공공재이다. 사회 없는 언어도, 언어 없는 사회도 없다. 배우고 소통하고 가르치고 충돌하고 고친 다음 다른 무엇으로 바뀐다.

 

 

 언어는 또한 역사 안에서 사회의 발전 혹은 쇠락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사회에는 종교, 역사, 사상이 핏줄처럼 흐른다. 일례로 다른 세계의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와 종교 전파를 위해서였다. 이방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는 선한 것만 기록하고 사악한 것은 기록하지 말라는 교회의 지침을 따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 의한 것이었다. 수도학교 원장이었던 사아군이 수행한 업무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에 관한 관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 목적은 물론 선교였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 이익에 다름없으며 일부는 누락하고 일부는 기록하는 이중 잣대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는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를 살펴보면 당시 사아군은 현재의 필드조사의 최초 수행자임을 알 수 있다. 즉 여러 곳을 여행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하고 풍속을 그림이나 글로 남겼으며 그에 관한 설명을 남겼다. 그와 같은 국적의 스페인 사람이 아닌 현지 멕시코 부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업은 종교 재판에서 유죄판정, 즉 사탄숭배로 간주되어 끝나고 만다. 사회는 이렇게 때로는 언어의 틀을 규정하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 기록마저 사람의 인지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만져진다.

 

 

 니콜라스 에반스의 관심은 언어의 기록에도 닿는다. 그의 눈을 통해 본 가독과 기록은 뜻을 함께하지는 않더라도 맥을 함께 할 수는 있다. 책의 탄생은 다음으로 생각한다 하여도, 책이 이렇게 범용화된 것은 오래지 않다. 디지털 장비는 말하지 않아도 더하다. 물론 고가의 무거운 녹음 장비를 이끌고 밀림으로 언어 채집을 하려 들어가는 수고 대신 칩셋을 꽂은 녹음기로 그를 대신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동시에 그는 기술이 발전함과 더불어 이미 기록한 죽은 언어를 담은 기기 자체의 사용 불가를 우려한다. 이것은 매체의 특성과 함께 오는 기록에의 양면성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짐 뿐만이 아니다. 그는 모든 식음, 그 열기가 저절로 사그라져 재가 되는 과정을 걱정한다. 그 걱정은 기록과 전파로 변이한다. 조사 당시 호주 원주민 공동체의 원로가 사망하는 때도 여러 번. 그는 장례식을 여러번 참관할 때마다 하나의 사회가 죽어감을 본다. 그것이 비단 그 사회의 죽음만은 아니다. 무시당하여온 이름없는 언어가 속한 모든 문화의 소멸이다. 한 사회의 인구는 사회 집단이 가지는 질문의 척도까지도 가늠한다. 니콜라스 에반스는 매일 발화되는 언어가 어떻게 모든 것, 어떤 사회 집단 구성원들의 속도, 시간, 활동, 행위의 의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자문한다. 개별 언어는 다른 언어에 스며들 준비를 스스로 한다는 간단한 답이 나온다. 언어는 동일한 개념의 각기 다르게 존재하는 명칭만을 이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더 넓은 문화권의 다른 단위 개념을 포용할 태세를 늘 갖추고 있다. 현상과 사물, 방향과 지시는 한 언어에서 다른 것으로 번역하는 순간 다른 단어로 종종 변모한다.

 

 

 

 이러한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소수 언어의 종말은 곧 다양성의 종말이다.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지만 서사라는 장르 내에서의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를테면 시는 언어를 압축하여 밀도를 높여준다. 인간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노래를, 소설을, 발화를 가능케 한다. 일찍이 꿈꾸어보지 못했던 자유로운 형태 내에서의 창조를 꿈꾸게 한다. 곧 다양한 언어가 세상에 있을수록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생각의 발현은 언어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지닌다. 그 가능성의 소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하여 암울한 침묵의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지막 챕터는 현장언어학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견해다. 마지막 챕터, '들을 수 있을 때 들어라'에서는 사라지는 언어를 채집하는 현장에서 느낀 두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지막 화자가 죽음으로 사라질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화석처럼 변화고 서사는 잊히고 우리가 몰랐을 비밀은 영원히 입을 다물어 새로움은 더욱 요원해지고 기록은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어의 죽음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문제에 기반을 둔다. 지속되는 사멸은 다양화의 상실을 뜻한다. 그 언어가 발화되던 사회가 가진 역사, 서사, 마음, 고유성이 침묵과 어둠에 묻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라짐으로 드러내고 드러남으로 잊힌다. 잊히는는 것은 슬프지 않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슬픈 법이다.

 

 

 

 개별의 요소는 큰 장치에 편입되고 시와 서사는 멜로디를 잃은 음악처럼 헛돈다. 니콜라스 에반스가 일반인도 읽기 쉬운 그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얼음장 같은 미래다. 이러한 아카데믹한 용례와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읽고 쓰고 말하는 고유의 언어를 기쁘게 지켜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자의 언어를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글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고 타인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모든 언어가 말하는 것은 그 각각의 개성이며 다양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말과 글은 그 자신만의 생명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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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김애란 소설이,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했었는데, 이 책과 쟌님의 글이 딱 어우러지니까 당장 이 책 사러나가야 되겠어요. 안읽은지 한오백년(노래부름) 된 이상문학상 수상집도요! 이제는 수상집이 나오면, 이건 또 당선작 상금이 얼마야, 뭐 이런것부터 찾아봅니다..^^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기 전에는 하나의 언어였다고 하잖아요. 언어가 같다면 지금처럼 싸울일도 없었을까요, 아니면 아랍권, 라틴권, 영미권 뭐 이런 문화권 자체가 존재할일이 없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말과 글도 그렇고, 쟌님의 글들도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좋은 오후!

Jeanne_Hebuterne 2013-04-29 09:05   좋아요 1 | URL
아무렴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겠습니까(각종 문학상 상금, 부럽습니다.)

저는 이러한 책이 낯설어서 아주 느리게 느리게 읽었지만, 언어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친근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하려 한 듯합니다. 지금도 니콜라스 에반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계속해오기도 한다는 소식을 떠올려본다면 이 학자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지금 다양성이 사라져가고 여러 언어가 사멸해가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겠지요. 경각심과 지식은 이럴 때 보면 비례해요.

김애란의 소설은 때로는 소설 쓰기의 얌전한 모범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어요.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살짝 떠올려보면, 자신의 탄생에 관한 관심과 자전적 성향을 역사와 적당히 섞는 재주를 점점 다듬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요. 아이리시스 님은 김애란의 이상 문학상 수상작과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같은 작품을 읽을 때에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이 문학 아니겠어요? 그런 점이 또 무척 재미있어서 서재의 글을 읽기도 하고요.

언어가 같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은 언어의 다름과 더불어 어른이 되면 점차 완고해져서 자신이 옳다는 가정을 지나치게 굳건하게 다져서 그 과정에서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동시에 종종 영어 안에서도 영국식과 미국식('butt'이 영국에서는 담배꽁초, 미국에서는 엉덩이라고 하지요?)영어가 충돌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충돌에는 언어의 틀도 어느 정도 관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쓰는 사람의 손을 떠는 글은 독자적으로 생명을 가진다는데 모쪼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형상을 다듬어 나갔음 하는 바람으로 서재 생활을 하는데, 칭찬(맞지요?) 고맙습니다.

자, 이제 저는 이 시각 즈음 되면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좋은 아침!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착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삶이 주는 일반적인 해답 이외에는. 그 해답이란 이렇다. 사람은 그날그날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꿈을 꾸어 잊는다는 것은 적어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바랄 수 없다. 이제 목이 긴 병의 여인들이 부르던 그 노래가 있는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에서의 꿈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안나 카레니나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아우르는 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 그 하나하나가 갖는 밀도가 아우러져 이루는 전체를 조망하려는 욕심을 비춥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갖는 감정과 상황, 각자의 개별성을 찬찬히 다루는 데 더 집중하곤 합니다. 후자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전자는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단편에서조차 비교, 대조를 통해 전체를 아우르곤 하지요. 그것은 집의 안팎을 한번에 쓱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가 관심을 두는 어떤 주제에 관한 응축물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때 전체와 총합은 다릅니다. 어떠한 요소가 한데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는 한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결과가 전체라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전체란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와 소설은 그 걸음을 늘 함께 해온 것은 아닙니다. 드물게 영화 이후 소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노희경 작가, 김형경 작가가 그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소설이 먼저, 그다음이 영화입니다. 이때의 주제와 변주는 종종 창의적인 결과를 만드는데,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전형이나 모범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재미있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는 작년 겨울 개봉 레 미제라블, 봄 개봉작인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하지요. 물론 웜 바디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굵직한 작품,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각색을 시도했습니다

 

 

 

 각색에 참여한 인물을 살펴볼까요. 키라 나이틀리, 아론 테일러 존슨, 주드 로. 장소는 런던 근교 셰퍼튼 스튜디오이며 의상은 재클린 듀란입니다. 영국 감독과 영국 배우들이 영국에서 발렌시아가와 샤넬, 디올 풍의 의상을 입고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키라 나이틀리가 그 이름을 올렸는데 어떤 점에서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레타 가르보가 있습니다. 1935년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스타덤의 그레타 가르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는지 영화 속 의상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가르보의 안나 카레니나는 종종 미국 켄터키주의 여자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종종 1967년의 러시아판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레빈의 역할이 무척 사소했을지언정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합니다. 이는 감독이 레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인데, 소설에서는 레빈이 더 비중이 높지만, 영화의 기본 캐릭터는 안나라는 점을 볼 때 감독으로써는 이례적인 선택이 분명합니다. 1948년에는 비비안 리가 가냘프고 우아한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쾌활한 남부 아가씨와는 달리 신경쇠약 직전의 안나였어요.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가 나오기 직전에는 1997년 소피 마르소의 안나가 있습니다. 실제 러시아인들이 상상하는 안나 카레니나와 너무 다른데다 국적도 러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평단의 호평은 얻어내지 못했다는데 국적 보다는 페르소나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Ivan Nikolaevich Kramskoi, , 1883, Oil on canvase

;러시아인의 안나 카레니나 이미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상류층에 맞설 힘이 없는 개인이 우연한 사건을 만나 파국에 이르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공의 개성이 특출하기는 하나, 환경에 비해 크게 우위를 점하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경우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해지지 못하고 파국을 피하려 하지만 파국에 부딪힙니다. 그녀는 일반 독자, 혹은 관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녀는 브론스키를 원합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꿈꾸듯 구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 브론스키를 얻습니다. 결국은 브론스키를 잃는 과정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 파장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직함이 죄가 되는 과정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도 보여주지요. 영화의 관심 역시 '브론스키와 춤을 춘 그날과 안나가 기차에 뛰어들던 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는 과정입니다

 

 

 

 이 평이한 토대의 서사가 이렇게도 자주 영화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틈이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로서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음이 어떤지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뿐, '어떻게' 그리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도, 레빈도 아닌 19세기 러시아 상류층 사회입니다. 비중이 조금 큰 인물은 레빈, 그리고 키티 정도입니다. 안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나가 죽은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모든 것은 안나와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레빈, 키티, 오블론스키,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이 모두를 사회라는 관점에서 조금씩 들여다보기에 안나 카레니나 한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도 효율적인 각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톨스토이는 안나를 처음에는 키티의 눈으로, 그 다음에는 브론스키의 눈으로, 그런 다음에는 카레닌의 눈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를 보듯이요. 소설에서 자살 직전 안나의 내면 독백은 아주 이례적인 일일 정도입니다. ,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는 만들기 쉽기 때문에 자주 가능한 일입니다

 




Keira Knightley in Joe Wright's Anna Karenina




 

 

 

 조 라이트는 이전의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와는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전의 두 작품도 각각 제인 오스틴, 이언 매튜언의 작품으로 소설을 각색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더 과감해지기로 한 듯 아예 무대를 연극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과 취소를 몇 번이나 뒤집고 촬영 전에도 몇 번을 방문한 끝에 촬영을 석 달 앞두고 조 라이트는 런던 근교의 세퍼튼 스튜디오로 장소를 결정합니다. 프러덕션 디자이너 사라 그린우드와 세트 디자이너 케이티 스펜서는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도 조 라이트와 함께 일했으며 그들의 경력을 연극무대에서 시작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해 함께 일했기에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 배경에 있어 균열이 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 그 이상으로 공동 작업에 기반을 둔 매체이니까요

 

 

 

 그리하여 탄생한 안나 카레니나의 배경은 정교하고 역동적인 세트, 연극 무대의 형식을 빌려 온 구성입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연극의 막이 오릅니다. 카메라는 무대 앞, , , , , 우를 훑습니다. 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문을 열고 러시아의 설원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입니다. 러닝 타임이 마감 시간처럼 존재하는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이 무대 효과를 통해 시간을 절약했기에 키티와 레빈의 이야기를 할 여유가 있습니다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엔 될 수 있으면 낮은 기둥, 무너질 것 같은 대들보, 어두컴컴한 조명을 씁니다. 역광으로 인물을 비추다 광활한 초원 위에 선 레빈을 보여주는 식으로 마치 생쥐와 인간을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그러다 카레닌의 침실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대리석, 높은 기둥, 그의 자기 과시적 품성, 딱딱함, 좁은 시야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 침실과 무대를 배경으로 안나는 검은 옷을, 붉은 옷을, 키티는 흰 옷과 파스텔톤의 크림색 옷을, 카레닌은 회색의 제목을 입고 오갑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각색이 허용되고 창의적으로 차용된 부분이 의상 부분일 겁니다. 코코 샤넬이 태어나기도 전인 시점에 안나 카레니나는 동백꽃 모티브의 코코 샤넬 주얼리를 하고 나옵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지방시, 발렌시아가, 샤넬풍입니다. 자신의 외도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될 때에 그녀는 붉은색 드레스를, 다른 이들은 모두가 옅고 밝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처음 춤을 출 때엔 검은 드레스를 입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대사는 인물의 허울만 비출 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사보다는 종으로 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각자의 집,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의상, 대사보다 직접적인 움직임과 춤입니다

 

 


 



 

Yi-Lin Cheng for Focus Features

 


 

 매체의 특성을 잠시 생각해보자면, 소설의 독자, 영화의 관객은 무엇을 할까요. 행간을 읽고 단어를 파악하고 문단에 따라 호흡을 달리하는 이들이 독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 그럴싸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는 이들이지요. 아무 곳에서 쓸 데가 없어서 오히려 독자는 자유롭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영화의 관객은 시퀀스를 따라갑니다. 카메라가 눈이 되어주고 음향은 귀가 됩니다. 의상이 색채를 덧입히고 빛이 이 모두를 아우르지요. 관객은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롤랜드 아처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될 때, 대부에서 마피아 보스가 어두컴컴한 실내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지시할 때,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가 정신 나간 듯 정원을 헤매거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마침내는 낯선 자신에게 침잠해 들어갈 때, 관객은 종이 위 활자가 마침내는 누군가의 의도를 투영한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목격합니다. 물론 문학과 영화, 이 두 장르를 상하로 파악해서는 안 되지요. 예술의 장르가 기능 올림픽의 종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이 두 장르가 종종 서로 대화를 나눌 때 그 묘한 접점과 발화를 바라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인간이 헤맬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원을 보여줍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성공 혹은 실패를 맛보며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을 내딛다 농노제 폐지를 생각하는 레빈에게 그가 더 큰 비중을 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문학을 아마도 톨스토이는 선택했을 것입니다. 글은 모두 다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어떤 글을 읽는가에의 문제라고 본다면, 대문호와 그저 글을 쓰는 이의 차이는, 인간의 한계를 조망하고 생각의 깊이를 하나의 축으로 전개해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독자는 이 모든 글 사이에서 끝없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영화는, 그것이 이미 있는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한 것이든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것이든 그 형식 본연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모든 안나 카레니나에 앞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조 라이트는 형식과 주제의 연관성을 깊이 생각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연극을 차용해 그 폭을 넓게 하고 요점은 카메라, 의상, 세트로 간결하게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멜로에 집중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 개인이 이런 사회와 부딪혔을 때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비극, 떨어질 때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허무함, 그럼에도 계속되는 타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요. 작가가 문장을 고민하듯 감독은 형식을 고민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재미있는 실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과 영화의 대화를 통해 독자와 관객은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겠지요. 사회를 생각하고 개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계단의 아래를 돌아보는 일, 그런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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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4-2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저희 집 근처 극장에서 너무 어이없게 빨리 막을 내려버리더라고요. 시간 텀도 너무 어중간했고요. 참, 아쉬웠는데 쟌느님 덕택에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톨스토이는 정말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대단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2 11:25   좋아요 0 | URL
이럴 땐 멀티플렉스가 참 야속하지요. 옛날에는 한 달까지도 영화 상영을 지속할지를 두고 봤는데, 요즘은 개봉일에서 사나흘이면 상영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하더군요. 상영한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인기가 없으면 상영시간대가 영화를 보기 어려운 시간대로 변경되어버리고요. 이 영화가 참신해서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블랑카님께서 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음악, 의상, 조명, 세트, 그리고 제가 여기에는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 동영상을 링크하기는 했지만, 안무가 대사 이상으로 발언권을 얻어서 굉장한 파급력을 보여줍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형식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한다면 오 년 후에는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보일 것 같아요. 의상은 보디스가 분리되어 있어서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면 투피스의 형상이고 무척 현대적이기까지 한데,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더군요.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체를 조망하려 한 톨스토이의 원작 전부를 담지는 못했지만(그건 어느 영화도 불가능하겠지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시간을 절약한 덕분에 안나와 브론스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을 둘러볼 여유를 갖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요. 집나가서 객사하시지만 않으셨더라도......늘 천재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