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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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진흙탕 위에 도시를 세웠다. 문학은 교회를 벗어나 현실로 파고든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는 이겼고 전제정치에 반대하며 개혁을 요구한 12월 당원,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실패한다. 살아있는 수많은 이들이 숨죽여 살던 나라. 피와 목숨으로 세운 도시, 뻬쩨르부르크가 있는 나라. 러시아의 단편 열세 편이 이 책 안에 담겨있다.

 


 이 열세 편의 단편은 19세기부터 20세기 작품이다. 읽으면 이야기가 보인다. 찍소리 못 내고 살던 하급 관리의 외투가 보인다. 거들먹거리는 장교가 보이고 아이를 잃은 아비가 모든 마차가 그 앞을 지나간다. 무도회가 끝난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고 아비를 죽이는 아들이 낄낄대며 웃는다. 독약을 먼저 마시려는 여자의 베갯머리에는 엷은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는 사이 모두가 추켜세웠던 아름답던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수술장을 뒤엎고 싶은 사회 초년생 의사가 꼴깍 삼키는 마른침 소리가 들린다. 너무 크다. 그 소리가.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 문학의 모방을 시도했을 뿐, 국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한 러시아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골, 투르게네프, 고리키. 이들은 모두 이 짧은 백 년 사이 등장한 인물이다. 대체 이 '어머니 러시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812년 러시아의 승리(그것도 나폴레옹을 상대로) 이후 알렉산드르 1세의 전제정치가 이어지자 앞서 말했던 데카브리스트의 사회개혁 요구가 일어났다.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에 맞추어 일어났으나 '데카브리스트 반란'이라 불리는 혁명은(이것은 반란인가 혁명인가?) 실패로 돌아가고 농노제와 전제 정치는 계속된다. 농노제는 크림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폐지되지만, 그것은 이름  뿐인 폐지. 이에 대해 자본주의의 필요를 부인하며 농민혁명을 통해 농촌 공동체와 조합를 기초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로드니카(인민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역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실패, 농노 제도가 실질적으로도 붕괴된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토대로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을 앓는 국가가 되어간다. 연이은 전제정치, 압정, 폭군, 반란, 봉기, 혁명, 실패. 곧 강압과 반발, 기대와 희망, 실패와 재시도 속에서 변화하는 사회를 토대로 러시아의 19세기, 20세기 문학이 서서히 그 맥을 드러낸 것이다. 

 


 1792년 까람진이 '가엾은 리자' 로 러시아 최초의 단편소설을 썼다면 1831년 연작 단편집을 발표한 푸쉬킨은 감상주의와 낭만주의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며 러시아 단편소설이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시구만 떠올려 보더라도 이 거장이 얼마나 쉬운 언어,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를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책 속의 '한 발'은 하필이면 결투로 사망한 푸쉬킨의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아이러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혈통의 모계, 명문 귀족 출신의 부계, 전혀 러시아인 같지 않은 외모에 완전한 러시아인의 삶을 살다 간 이 작가가 남긴 단편은 읽노라면 주고받는 결투의 흐름을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 한 발씩 쏘는 것이 규칙) 활용하여 단편 속의 단편을 만들어낸다. 어느 순간 화자가 바뀌고 흐름이 바뀐다. 독자는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자기 앞의 화자를 믿기 마련이건만, 이 무모한 결투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결투 당사자를 비웃는다면, 어쩌면, 이것은 낭만주의 문학의 요철을 잡아내는 일에 독자는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짧은 이야기 속에 놀랍다록 많은 재미를 숨겨놓은 단편의 정수. 과연 누가 '자네 나에게 한 발을 빚졌지. 이제 내 총의 약실을 비우러 왔네. 준비는 됐겠지?'라는 말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


 

 마침내 고골이 등장한다.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진흙탕 위에 건설한 뻬쩨르부르크는 당시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한다. 분명 이름 모를 사람들이 혹독한 노동으로 건설한 도시를 통해 러시아는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문학에서는 특히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러시아 고전주의가 두드러졌다. 그런 뻬쩨르부르크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골이 나타났다. 외부인의 눈으로 본 더욱더 생경스런 도시. 춥고 을씨년스럽지만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도시. 현란하고 세련된 도시. 조야하고 가난하고 돈 없는 이에게 더 추운 도시가 고골의 '외투'에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육신과 정신을 통해 펼쳐진다. 

 

 

 그리고 더이상 뻬쩨르부르그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사람은 없었고,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이 크고 화려하고 거대하여 개미 한 마리를 그 속에서 찾아낼 필요조차 없는 듯한 도시에서 가엾은 한 사람의 허름한 외투를, 그가 잃어버린 외투를 보는 일. 유럽으로 가는 거점이었던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고골은 가난하고 하찮은 작은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때로는 아예 외투가 생명을 가진 듯, 환상이 현실이 되는 듯, 꿈결이 거친 현실을 장악하듯, 고골이 그려가는 뻬쩨르부르그의 공기가 뜻밖에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은 고골의 재치있는 문체, 그의 인도주의적 시선, 인물에의 세심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추측해 본다. 

 


 


만일 내가,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내가 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날 이렇게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무도회가 끝난 후

 


 

고골이 자신이 본 세계를 그렸다면 톨스토이는 자신이 생각한 세계를 말한다. 톨스토이 사후에 공개되어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는 '무도회가 끝난 후'(표제작이기도 하다)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육체와 매 맞아 만신창이가 된 육체, 잘 다듬어진 옥 같은 피부와 짓이겨진 피부, 사치스러운 귀족의 따스한 집과 살을 에는 바람이 부는 거친 길바닥, 후려치는 매와 피하지도 못하고 적선을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관심을 가진 모든 주제의 응축과도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이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바뀌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짧은 단편은 대화체의 문장에서 시작과 끝을 같이 하며 어느 순간 유유히 페이드 아웃 된다. 어느 순간 암전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독자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질문을 거듭하게 하는 톨스토이의 재주. 강렬한 대비를 통한 이야기는 짧지만, 어느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어느 것을 모르는지, '무도회가 끝난 후'에야 주인공의 인생이 바뀌지만 결국 살아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첩경을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으며 갈 수 있다면, 비단 그것은 텅 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체홉의 단편은 '슬픔'과 '입맞춤'. 이미 일어난 사건,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이야기 속에서는 그 어떤 반전도 없다. 눈이 조금씩 쌓이는 것이 아니라 눈더미가 덮쳐도 그 눈을 털어낼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마부. 누군가에게는 얇고 포근한 너울. 누군가에게는 눈더미가 되어도 눈치채지 못할 장막. 아들을 잃은 남자이건만 그는 마차를 모는 마부일 뿐이다.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를 원하는 사람. 

 " 나리. 제 아들이 말입니다...... 이번주에 죽었네요." 

 세상에 없던 문장을 만들어내는 슬픔,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아비. 흡사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았던 것 마냥 아무것도 나눌 수 없는 상태를 견디는 인간을 체홉은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긴장이 아닌 다른 분위기의 긴장감으로 이야기한다. 사람은 이렇게도 외로운 존재이건만 끝내 그것을 이겨내야만 살 수 있음을. 이것은 단편소설과 극의 대가가 들려주는 짧고 강하지만 거칠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 뒤를 잇는' 스물여섯과 하나'는 막심 고리끼의 소설로, 이 단편소설집 '무도회가 끝난 후'에서 분위기를 바꾼다. 가볍고 잔잔히 흐르던 물결이 급류를 이루고, 어느 순간 물살이 다른 곳을 향한다. 볼셰비키 혁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러일전쟁,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을 이루었다. 문학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닐까. 어쩌면 어떻게든 그 목소리를 달리 하지만 일관되게 꼭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이 책에서 체홉의 뒤를 이어 등장한 고리끼를 살펴보면 그 실마리가 잡힌다. 혼란스런 분위기, 귀족들의 위기, 비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희망과 인간의 숨겨진 힘. 이런 것들을 체홉이 단편소설 중흥기를 열며 이야기했다면 고리끼는 신사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하층민의 생활, 혁명에의 예감을 그려낸다.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작가. 어두운 현실, 쉽게 만들었다 지울 수 있는 우상, 도리어 멸시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고리끼는 그 속에서 도리어 인간의 모든 밝음과 어둠을 일관된 글쓰기로 이끌어낸다. 바닥의 바닥, 갱도의 막장까지를 파고들어 치열하게 고민하는 글쓰기, 지식인의 진짜 글쓰기의 전형을 나는 고리끼의 글에서 발견했다.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이야기해야 할 상황에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사실을 진실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고리끼처럼.

 


 


 아마도 이 단편소설에서 가장 정치적인 색채가 덜한 작품을 고르자면 단연 미하일 불가꼬프의 작품, '철로 된 목'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졌다'로 시작하는, 의학부를 갓 졸업한 스물네 살짜리 의사의 이야기. 이는 작가의 단편집 '젊은 의사의 수기'에 실린 것으로, 시골로 발령받아 위급환자가 오면 어쩌나 전전긍긍 하는, '우등상은 우등상이고 탈장은 탈장이다.', 도대체 이러자고 내가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했단 말인가' 하는 그의 읊조림이 들린다. 마침내 '선생님' 이라는 말끝에 대체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인데, 정작 미하일 불가꼬프의 오른쪽과 왼쪽은 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당연히, 어쩔 수 없이, 그는 스탈린 체제의 강화와 함께 모든 작품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다. 망명조차 거절당했으며 사망 전까지 단 한 편의 작품도 출판할 수 없었던 작가. 그가 그린 젊은 의사의 이야기는 긴장의 구조가 워낙 탄탄하여 하나의 박진감 있는 드라마를 구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지금 보이는 달의 이 뒷면은, 그가 써냈던 글들은 어떠했을까.




 그다음 나타나는 이삭 바벨의 작품은 이 단편 모음집을 통해 처음 만났던 작품. 역자 소개에 의하면 20세기 전반의 가장 탁월한 문체주의자라고 한다. 고리끼의 후원 속에서 문필활동을 하였으며 스탈린 시기의 대숙청 시기에 체포되어 원인불명, 아마도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그의 짧은 작품 '편지'는 '이것은 우리 발송계의 꼬마 꾸르쥬꼬프가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내가 받아쓴 것이다.'로 시작하여 부자가 서로 쳐죽이는 장면을 스쳐지나 그의 가족사진으로 끝이 난다. 배고픔과 추위, 칼질과 매질의 세계를 '보고 싶은 엄마, 예브도끼야 표도로브나.'라며 '꼬마'의 목소리로 알리는 일은 감정이 배제되고 축약된 이삭 바벨의 문체를 빌어 생경스러울만치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책의 큰 장점은 러시아 문학사의 큰 흐름과 줄기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제쥬다 떼피, 예브게니 자먀찐, 이반 부닌,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단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특히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단편 '암소'는 송아지를 잃은 어미 소의 자살, 멈춰선 기차의 이야기를 다룬다. "암소야, 암소야." 라고 말하는 소년. 동물의 말이 다르고 사람의 말이 다를진대 러시아 문학 속의 인간은(어쩌면 세계문학 속 인간은) 간간이 동물에게 말을 걸게 된다. 끝내 알아듣는가. 마는가. 하지만 인간의 허기가 지나가서 언젠가는 사라진 다음, 아이가 어른이 되듯 다른 어딘가로 접어들게 되는데 안드레이 쁠라또노프는 이 순간의 날카로운 각을 접지 않는다. 눈앞의 살아있는 소와 눈앞의 고깃덩어리가 무엇이 다른가. 생명의 알레고리, 기계의 메커니즘. 

 


 

 하나의 큰 물줄기. 이러한 일이 생기던가. 저러한 일이 생기던가. 그러면 그런 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문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와중 스탈린 치하에서 망명조차 금지당하거나 처형된 작가들, 거슬러 올라가면 표트르 대제의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보인다. 푸쉬킨으로 시작하여 고골, 톨스토이, 체홉, 고리키로 이어지는 이 단편소설집의 맥락은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 낭만주의부터 시작하여 리얼리즘까지 뻗치는 러시아 문학사의 흐름을 짚는 것이다. 팔딱거리는 맥을 짚으면 모세혈관이 보일 것 같다. 그 아래 흐르는 피 속의 더운 심장이 눈앞에 보일 듯한 구성이다. 다름 아닌 혁명과 실패, 기대와 이상, 모반과 창조,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인간에의 탐구가 어우러진 격변기의 러시아 문학을 그 흐름에 따라 만나볼 수 있는 적절한 구성.

 

 

 

 

 

덧-러시아어의 한글 표기는 지금도 나홀로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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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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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조각, 건축, 공예. 내가 보는 어떤 사물, 대상. 손으로 만지고 책에서 보고 모니터에서 들여다보고 안다고, 혹은 모른다고 생각했던 영상. 발을 내디뎠던 공간. 그것은 책 속에만, 모니터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친, 쌓아나갈 아름다운 어떤 것. 이러한 맥락에서 먼저 스스로 묻는다. "미술"은 무엇이며, 무엇이 "미술품"인가. 미술을 보는 시선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미술품을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근대 미술의 출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 까닭은?

 

과연 미술(Art) 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보자면 한자로는 美術 로 공간(空間) 및 시각(視覺)의 아름다움을 표현(表現)하는 예술(藝術). 회화(?), 조각(彫刻), 건축(建築), 공예(工藝)를 일컫는다. 그런가 하면 독일어로는 Kunst 라 적으며 예술, 미술, 문예, 예술 작품 이라고 번역하며 재주, 기술, 기예, 숙련, 솜씨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미술의 사전적 정의가 이러하다면 "사람이 만들어낸 무엇" 이라는 조건에 대입한다고 보았을 때, 미술품은 "사람이 만든 아름다운 것" 이라는 명제도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이 미술이라는 단어의 관념은 과거 수만 년 전에도 같았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술은 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미술은 곧 존재하는 관객, 혹은 언젠가 존재할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 과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근대에 와서야 가능해졌다. 서양 미술에서 20세기 이전의 미술은 정복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전제군주를 위해, 후원자를 위해 존재했다. 지위가 낮았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 미술가는 당연히 자신의 개성보다는 지켜야 할 법칙을 따랐으며 그것을 위해 기술 습득을 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유 확대, 각종 산업, 과학의 발달로 미술가는 이제 개인의 느낌을 그릴 자유를 얻었으며 미술품은 반드시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변화의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10회에 걸쳐 도미에, 시슬레, 고흐, 고갱, 마티스, 칸딘스키, 세잔, 브라크, 클레와 샤갈과 같은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들려주었으며 그것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출간한 지 사십 년이 훌쩍 넘은 이 책의 원제는 "Kleine Geschichte der Modernen Malerei", 즉 근대 회화의 작은 역사이다. 이제 '근대 회화의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왔다.

 

글에도 첫인상이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의 글에 대한 느낌은 클라이브 벨과 로저 프라이로 대표할 수 있는 형식주의와 다른 느낌이다. 사회의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고 미술 그 자체로서의 형식미를 찾으려 했던 그들과는 달리, 야우스와 잉가르텐이 주장한 수용미학으로서의 해석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닫힌계" 로서의 미술품이 아니라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주는 자세. 저자는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작업에 대한 아르아드네의 실을 풀어준다. 그 실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라비란트의 입구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말이 왜 아름다운지, 아름다운 말에 적용하는 미의 규칙과 아름다운 꽃에 적용하는 미의 규칙이 왜 달라야 하는지를 밝힌다. 물고기의 밤 노래가 세이렌의 밤 노래와 다른 까닭이 있다. 그런 모든 이유가 그 화살촉을 겨누는 한 점, 그 점에 대해 게오르크 슈미트는 조용히 천천히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초콜릿의 단맛을 느끼기 위해 미뢰의 어느 부분이 작동해야 하고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듣기 위해 청신경이 활동해야 하듯 흐르는 것이 아닌 쌓이는 것으로의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회화 열 점을 골라 소개하고 미뢰와 청신경이 작동하도록 감각을 깨우도록 하고 있다.

 

 

여기 이 책에서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 네 점의 그림이 있다. (작품은 될 수 있으면 바젤 미술관에서 이미 발행한 원색판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경제적 이유로 선정, 제한되었다는데 나는 여기서 다른 작품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이 네 점의 그림을 보면서 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작품 중에 가장 익숙한 작품은 무엇이며 어떤 점이 훌륭한가? 그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는 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게오르크 슈미트의 의도에 따라 답을 하자면 어쩌면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우리는 서양미술의 한 단면만을 보아서는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서양미술사 책(H.W 잰슨 & A.F 잰슨)의 책을 따라 서양 미술을 네 시기로 나눠 보자면 첫째는 "콘트라포스토" 라는 위대한 발견을 거쳐 뛰어난 사실주의를 완성한 그리스 시기로. 둘째는 지오토의 공간개념의 혁신과 함께 교회의 권위, 신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던 중세. 셋째로는 여러 미술적 표현기법과 예술가의 위치를 격상시켰던 이른바 3대 거장(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이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르네상스와 그 뒤를 이은 바로크, 로코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넷째로는 신고전, 그와 대척점을 지니는 낭만을 거쳐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는 시기인 근현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흐름 속에서 각자가 어떻게 현대 미술을 열고, 그 의미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각자 공평하게 왜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 작가가 책에서 소개한 첫 화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 Daumier, 1808 ~ 1879) 이다. 강렬한 풍자로 시대를 날카롭게 보여준, 도미에는 "엄격한 명료성"을 반대하여 낭만주의적 화풍을 구사한 들라크루아(1798~1863)와 동시대 인물이며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잰슨의 말에 따르면 쿠르베는 realism 이라는 단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와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했다고 하였다.)적 회화를 구사한 쿠르베(1819~1877) 와도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 네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화가로 도미에를 등장시켰다. 과연 왜일까 

 

 

 

 

 

 

도미에  :    <가르강튀아>             /              <삼등열차>

출처 http://www.artble.com/artists/honore_daumier/more_information/biography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가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개인의 재산축적이 가능해지는 시기. 지금 내가, 혹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사는 시기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 잉여물이 생기고 자본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진 시기. 거꾸로 말하자면 부자와 더 가난한 자가 생긴 시기. 계급 대신 사슬이 생긴 시기. 바로 도미에는 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자신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술가는 누군가에게 봉사하거나 무엇을 미화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도미에는 시대를 그것을 보고 진실을 기록하며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근대 회화의 문을 열었고 게오르크 슈미트는 도미에의 날카로운 눈과 손을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남긴 삽화에는 계층과 군중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실었는데 단순하고 거칠고 미완성인 듯한 묘사는 삼등 열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단점이야말로 도미에의 특징이며 장점으로 다가온다. 그 까닭은 그가 나타내는 진정한 휴머니티에 있다.

 

도미에가 보았던 시대의 렌즈 속에서 등장하는 계층과 군중을, 시간과 시간 사이 존재한 수많은 이들의 존재를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나머지 화가들-시슬레, 고흐, 고갱, 마티스, 칸딘스키, 세잔, 브라크, 클레와 샤갈-의 회화에서 어떻게 발견하고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말한다. 보이는 대로 볼 것. 그러나 주의 깊게 볼 것. 그러는 한편 역사성을 잊지 말 것. 기왕이면 몇 가지 기준-선원근법, 색채원근법, 물체성, 재질성, 해부학적 비례, 대상색, 대상의 발언-을 가지고 읽어내고 느껴보라고 말한다.

 

이제 서양미술사로 너무나도 유명한 E. H. 곰브리치가 말했던 세 작가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자. 곰브리치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라는 장에서 세잔, 고흐, 고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할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 불만을 느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554-555)

 

각각 입체주의(Cub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원시주의(primitivism) 로 흐르게 되는 이 세 명의 작가들이 현대 미술에 기여한 바는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슈미트 또한 이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그는 세잔, 고흐, 고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잔은 새로운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대상의 발현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사과나 식탁보, 유리컵, 나뭇잎,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는 이미 대상으로서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인상파의 경우에는 상으로서의 관심이 비록 약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세잔에서는 그것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세잔이 그의 형태를 자에서 얻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만, 그 형태를 자연에서 독립시키고 있는 것 또한 의심할 바 없습니다. (144p)

 

... 고흐가 색채 표현에서도 크게 발전하여, 색채의 '글자 그대로의 진실'에 대해, 즉 자연주의적인 대상색에 대해 (그의 말대로) '거짓을 저지르고', 대상 색과는 별개로,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 이상으로 진실하게 될 때, 그때 반 고흐의 성숙함이, 그의 전모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반 고흐에게 색채는 물질로서의 성격과 표현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면서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찬송가와 같이 현실 긍정을 표현하는 색채로 됩니다. 하지만 인상파의 낙천주의와 성숙된 반 고흐의 현실 긍정은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59, 64p)

 

시슬레나 고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갱의 그림에서도, 회색이나 갈색의 색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체가 색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갱 역시 고흐처럼 인상주의를 통과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고흐가 그의 '자장가'에 대해 "하나의 조그만 색채 음악의 시도"라고 한 말을 기억하실 테죠. 순수한 색채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 이것은 고흐뿐 아니라 고갱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악기 또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것처럼 스펙럼의 6원색, 즉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로 조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수한 색채의 멜로디를 산문적인 회색이나 갈색에다 섞을 필요가 조금도 없는 것이죠. 노래로 부르는 오페라를 언어로 말하는 연극으로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72p)

 

잠시 고흐의 해바라기를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흐의 해바라기. 누군가가 그린 해바라기가 있다면 그 해바라기가 왜 눈앞에 펼쳐진 것과 다른 '특별한' 해바라기가 되는 것일까? 화가는 무엇인가를 그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고백이며 약간의 과시가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작품은 시대 속에서 어떻게 호흡하는가? 예술 발전의 일정 시기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개인으로 존재하는 화가와 집단으로 존재하는 관객이 맺는 관계는 어떻게 나타날까? 어떠한 선택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의 척도를 살펴보는 작업이 회화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임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일러준다. 시간이 이루어낸 역사 속에는 필연적으로 연결 고리가 있기 마련이다. 홀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고리.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고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개인의 시간마저 바꾸는 유일무이한 어떤 것. 게오르크 슈미트는 그런 '어떤 것'을 찾아 관객에게 소곤소곤 전한다.

 

새로운 어떠한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저자에게도 고흐는 현존하는 기법과 완벽히 다른 미술가였다. 빛 대신 어둠만을 보기. 투명하지 않고 끈적한 흙덩이 같은 바람. 해부학상으로 완벽한 손이 아닌 일하는 손을 그린 화가. 게오르크 슈미트는 고흐에게 중요한 것이 언제나 그림의 가장 내적인 토대였음을 지적한다. 그의 회화가 지나치게 어쩌면 개인 중심적이어서 도리어 회화사에서 고갱보다 뒷전인 것을 고려하면 기법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균형 감각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회화는 홀로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산업과 정치. 산업화와 민주주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 취득의 역사이다. 누구나가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 정반합과 작용 반작용의 시간. 결국, 각종 사조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서로 섞여 지금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모던 아트, 근대 회화의 시작에 고흐, 고갱, 세잔이 있었다. 고흐의 진실에의 집중, 고갱의 아름다움에의 집중, 세잔의 형태에의 집중, 이들의 작업이 바로 근대 회화의 시작이었다면 그 시작 이후 또 다른 시작은 없을 것이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우리는 더는 새로운 '히바 오아'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본문96 페이지)"이라고 전한다.

 

 

마티스 <붉은 화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표현성이다. ...... 그러나 내가 말하는 표현성이란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내게 '표현적'인 것은 그림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배열 방식이다. 즉 사람이나 물체, 그들 주위의 텅 빈 공간, 비례 등 이 모든 것이 각각 표현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앙리 마티스

 

지금 우리가 보는 회화의 새로운 기법의 틀을 마련한 화가로 저자는 마티스를 소개한다. 초록색 풀잎의 붉은 반점, 주황색 건물의 청색 그림자, 파란 하늘의 주황색 구름, 건물에 비치는 가장 밝은 노란색, 보라색으로 보이는 나무의 그림자 등으로 보색대비를 통해 색채의 회화를 구현한 시슬레와 모네는 회화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화가들이다. 반면 도미에, 고갱이 사회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했다면 마티스는 초기의 인상주의를 끝까지 끌고 나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묘형의 세부에 있어서는 고갱도 고흐도 인상파에 비해 다시금 더 엄격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노린 것은 사물 그 자체였지, 빛과 색채에 의한 사물의(외적인) 현상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앵그르와 같은 고전파 미술의,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세부적 묘사의 충실성에 비교한다면, 고갱이나 고흐의 데셍은 표현상으로나 조형상으로나 전례없이 대담한 본질적인 것으로의 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묘형을 조형상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마티스가 가장 절실히 수행했고 따라서 장대한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100p.)

 

마티스가 지닌 미완성의 재주는 곧 보색대비를 이용한 색채의 회화를 이룩한 인상파와는 정반대로 색감의 변화를 최대한 억제하여 평면과 입체의 틈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세잔이 하지 못한 장식적인 표면 효과를 마티스는 선 몇 개와 유기적인 각각의 요소가 이루는 관계로 이룩해낸 것이다. 야수파의 마티스가 이루어낸 파급 효과가 고흐와 고갱의 영향까지 아울렀다면, 그를 초월한 칸딘스키는 근대 미술의 문을 지나 추상 미술의 세계를 연다. 대상의 발현을 높이고 대상에서 비대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던 사람. 슈미트는 몬드리안과 함께 추상의 시대를 연 칸딘스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칸딘스키 <구성>

 

1910년 칸딘스키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그의 붓을 아예 붓 자체에 맡기고 선과 색채로는 어떠한 대상도 묘사하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말하자면 선과 색채 그 자체를 조형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요. 우리가 마티스와 함께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그 문이 밀쳐져 열린 것입니다. ...... 칸딘스키는 '자유로 가는 문이다' 하고 환성을 질렀지요. (119p)

 

'자유로 가는 문'은 어느 날 한순간에 열린 것이 아님을 게오르크 슈미트는 지적한다. 이미 회화에서는 추상 미술로의 변화가 조금씩 일고 있었다. 1908년의 칸딘스키의 작품에서는 대상이 색채와 선을 위해 존재하다가 1910년에는 추상을 향한 움직임을 서서히 드러낸 것이다. 이는 후기 상징주의의 장식미술 분야에서 먼저 나타났으며 아폴리네르는 입체파가 비구상 미술을 가능케 하여 추상을 향한 첫걸음을 마련했다 평하기도 한다. 한편 게오르크 슈미트가 전하는 칸딘스키의 작품은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붓의 착상으로서 모든 것이 끝 가는 데 없이 풍부하다. 바우하우스 시대의 칸딘스키, 비대상 미술의 위대한 입법자.

 

게오르크 슈미트는 각 작가의 작품의 유기적인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회화의 알레고리, 유기적인 연결고리, 새로운 의미 구조, 화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생각의 과정을 독자는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는 브라크를 이야기하며 정물과 추상의 울림이 들려주는 리듬을 소개한다.

 

 

 

브라크 <음악가의 책상>

 

인상파가 자연의 광선을 분해하여 스펙트럼의 요소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림에 순수한 멜로디를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큐비즘은 대상의 자연적인 형태를 분해하여 입체기하학적인 요소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림에다 순수한 리듬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상파 회화에서 순수한 색채를 보는 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또 순수한 리듬을 보는 법에 익숙해질 수 있겠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브라크의 정물화를 보면 볼수록 그 풍부하고 기품 있는 울림으로부터 떠날 수 없을 것이며, 몇 겹이고 겹쳐진 형태관계를 추적해도 싫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음악가의 책상]이라는 표제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 실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큐비즘이라는 것은 결코 파괴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음악의 정신에 의한 회화의 재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1912년에 브라크가 그린 [음악가의 책상]과 흡사한 구조를 가진 또 한 폭의 그림이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의 경의]라는 표제로 된 것을 알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163p)

이 설명을 읽다 보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이 책에서 클레를 소개하지 않았다면 서운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목으로 화가가 그 의미를 은유성을 관람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화가. 인간의 어리석음. 기계화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자신이 창조해낸 기호로서의 회화 언어가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와 인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던 화가. 냉소, 불안, 노골적이면서도 은근한 유머와 아이러니의 화가. 서늘한 회색으로 색채의 울림을 더한 화가.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클레는 멜로디를 운반하는 화가이며 가장 음악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클레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온갖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얘기하는 클레는 회화 언어가 드러내는 주제가 대상의 특징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 대상 체험의 수문을 연 화가이기도 하다. 슈미트의 관점에서 볼 때 브라크가 바흐의 언어를 그렸다면 클레는 리듬과 멜로디의 기능을 자신의 엄격한 형식 속에서 나타낸 색채의 화가였다.

 

클레는 색환에 배열된 순수한 색채를 가능한 모든 뉘앙스, 모든 멜로디로 엮어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기 속에 다시금 따스한 갈색조와 서늘한 회색조를 포함시킵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색채 면에서도  정당성 띠게 됩니다. 즉 단순한 기하학적인 윤곽 속에서 그들 색채가 한결 순수하게 울립니다. 그뿐 아니죠. 스스로 멜로디적인 것이 되기 위해 그의 색채는 멜로디를 짊어진 자로서 단순한 기하학적인 평면의 리듬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클레의 간결한 '직사각형의 그림'은 가장 멜로디적인 것이 됩니다.(179p)

회화는 때로 이렇게 흥얼거린다. 눈을 감고 책 속에 소개된 열 점의 회화를 떠올려보면 시슬레에게서는 드뷔시가, 고흐에게서는 베토벤이, 고갱에게서는 마리아 칼라스가, 브라크에게서는 바흐가, 클레에게서는 R.E.M이 들린다.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있으면서 제각각 목소리를 지닌다.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이들의 회화는 각각의 대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통을 계승한다. 부정하거나 강화한다. 이 화가들의 회화에 게오르크 슈미트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는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저 스스로 호흡하는데, 그 호흡을 이끌어낸 이는 작가라 하더라도 호흡을 지켜보는 이는 현재의 관람객일 것이다. 어떤 그림을 어떻게 보고 읽어야 할까. 그 아름다움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까닭으로 어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발현의 문제이다. 원래 그런 그림은 없다. 관람방법에야 지구에 현존하는 인구보다 많은 방법이 있겠으나 어떤 의미가 있는 그림을 어떻게 볼지, 심미성에 눈길을 둘지 사회성에 마음을 둘지 그림 값에지갑을 둘지는 보는 이의 기준에 달렸을 것이다. 게오르크 슈미트가 제안하는 방법은 미술사의 한 단계에서 특색이 있는 그림들을 예술 발전에서 이루어진 걸음, 계단을 따라가는 것. 그리하여 그 변화를 읽어 보자고 그는 권유한다.

 

여기 등장하는 10명의 화가.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던 도미에서부터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을 기록하려는 환영성을 제거하고 우리 눈이 그대로 지각하는 대상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인상주의자들의 노력,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세잔과, 고흐, 고갱. 1905년 열렸던 살롱 도톤느 전에서 격렬한 색채의 혁명(그뿐만 아니라 전통적 공간개념파괴)을 시도하며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열었던 마티스, 추상의 문을 연 칸딘스키, 사물의 분해와 재현을 통해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브라크, 입체주의와 오르피즘을 섞어 또 다른 울림을 만든 클레,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꿈꾸는 세계를 보여준 샤갈에 이르기까지. 표면상으로 보면 불과 몇 십 년이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작가들과 그들이 남긴 기록이지만 미술사의 흐름에서 보면 모두 큼직한 발자취  지닌 작가들이다. 그들의 언어를 보다 읽기 쉽게, 수용자의 편에 서서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Kleine Geschichte der Modernen Malerei(근대 회화의 작은 역사)"에서 회화가 어떻게 이전 시기의 문턱을 넘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회화를 이야기하는 그의 음성은 전공 개론서에서는 듣지 못했던 친근하고 다정한 높낮이다.



 

[fugue no.1 BWV 846]

 

Prelude and Fugue No. 1 in C major, BWV 846.

from the Well-tempered Clavier by Johann Sebastian Bach. Played by Friedrich Gulda; recorded 1972, MPS-Tonstudio, Villinge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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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프랑스의 문제적 작가로, 사회, 역사, 문학과 개인 간의 관계를 예리한 감각으로 관찰하며 가공도 은유도 없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했다. 


1991년 발표한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루며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시선으로, ‘나’라는 작가 개인의 열정이 아닌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열정을 분석한 반(反)감정소설이다. 아니 에르노는 발표할 작품을 쓰는 동시에 ‘내면일기’라 명명된 검열과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운 내면적 글쓰기를 병행해왔는데, 『단순한 열정』의 내면일기는 10년 후 『탐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작가는 ‘나’를 화자인 동시에 보편적인 개인으로, 이야기 자체로, 분석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객관화하여 글쓰기가 생산한 진실을 마주보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후 『부끄러움』 『집착』 『사진 사용법』 및 비평가인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교수와의 이메일 대담집인 『칼 같은 글쓰기』 등을 발표했다. 2003년 그녀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고, 2008년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 선집 『삶을 쓰다』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작가로는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출판사 제공 작가 소개.






 아니 에르노의 세계는 정확하고 명확하다. 추측을 버리고 분명함을 택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 전경과 후경이 명확히 구분된 글이 그녀의 글이다. 가르치지 않는 대신 일러준다. 고백하고 뇌까린다. 그런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 끝에서 독자가 만나는 것은 독자 자신이다.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떠날 것이라는 말과 겹쳐질 때. 끝을 묻지 않았던 말끝이 끝을 닮아있을 때. 아니 에르노는 그 순간을 칼같이 써내려간다. 질문과 추측. 확신과 대답. 귀에 닿는 노크처럼 무언가의 확신이 아니 에르노의 머릿속에서는 경험과 지식, 교양, 직업, 이 모든 것이 연결된 글쓰기라는 작업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 투사된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이 글쓰기는 그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며 글쓰기가 끝이 났을 때 개인은 풍경과 사건 뒤로 숨고 보이지 않는다. 그 뒤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곧 글을 읽는 나 자신을 보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의 골을 견뎌내지 못해 커피, 냅킨, 접시 수집, 자동차, 개인의 성취, 애완견 등의 주제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이해한다. 그러나 늘 그녀가 택하는 것은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이 아니다. 노 저어 올 수 있는 잔잔한 호수가 아닌 쉽사리 넘보지 못할 풍랑이 몰아치는 격한 감정의 상태. 죄수가 간수의 호출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듯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그녀를 알아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남자의 그 여자는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잘 먹고 살 살아주어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된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에르노는 그녀를 발명해 내야 했을 것이다. 나비의 날개 같은 란제리, 성적 충동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사건, 가장 힘든 때에 쓰는 연애편지, 혹은 자신의 다른 남자 등으로.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위태로움과 균형을 아니 에르노는 겪는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이미 입에 든 약을 삼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 그러니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었다. 그들 마음속의 진흙탕과 무지개는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끝내 겨우 그것에 닿았다 생각할 무렵 진흙탕은 굳고 무지개는 사라진다.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책 속에서



 아니 에르노에게는 뒷걸음질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순수한 지적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될 앎에의 기쁨을 '그 여자'의 연락처를 찾아내며 느낀다. 그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방이 수화기 너머 아니 에르노가 만들어낸 침묵에 공포를 느낄 때 원시인이 사냥에서 느꼈을 법한 쾌감을 얻는다. 아니 에르노의 질투는 물끄러미 속을 응시한다. 그 속이 비지 않았음을 알아낸다. 심연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심연에 동화되는 과정을 용케 피해 가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실재하는 실재처럼 쌓아나간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이때 그 남자가 아니며 그녀가 질투하는 것은 그 여자가 아니다. 에르노는 성적인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만족감 너머의 무한함. 그 무한함이 글쓰기로 재현될 때 그녀는 그것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본다. 



 상대방의 말에서 공백을 찾아내어 빈틈을 파고든다. 감각과 반응을 추적하여 아니 에르노는 질투를 다시 확인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과 글쓰기를 눈앞으로 불러내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작 당장 글을 쓰는 그녀 자신을 이기지는 못할 것인데 에르노의 글쓰기는 언제나 실재를 의식한다. 작은 쪽. 말 한 마디. 사소한 이야기.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말. 모든 것이 그녀의 실재하는 무엇이 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끝내 혀끝에 맴도는 말 한마디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공허감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아니 에르노는 써내려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가엾고 순진한 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유혹에는, 우물 안으로 몸을 수그려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영상을 바라볼 때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무시무시한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강렬한 의식. 그때 지각할 수 있는 사랑이 허락하는 공간 허용과 감정 격차. 아니 에르노는 그의 신체와 감정이 그녀에게 반응하는 순간을 잊지 않는다. 그 순간 그곳에는 언제나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듯,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처럼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을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고 불러내어 재현한다. 어느 순간 자신의 그 놀라운 집중력이 사그라진 다음 남는 자명한 사실. 내가 무엇을 했나. 내 얼굴에 그때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던가. 거울에 비친 낯선 사람이 아닌 내가 보고 느끼고 알아온, 내 일생을 통해 일구어낸 생생한 형상으로서의 나 자신. 아니 에르노는 그런 존재를 발견해낸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나는 그 시기에 가졌던 욕망, 감각, 행위들을 추적하여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겪은 대로의 질투를 써나가고 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 강박관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본질적인 무언가를놓칠까봐 두려워한다. 요컨대, 실재에 대한 질투로서의 글쓰기.

-책 속에서


 

 가상의 그 여자를 당해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순간 누구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 무엇보다 빠르게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순간이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머릿속과 내 모든 신체 기관이 어떤 한 존재로 채워지는 때가 있다. 집중력과 사고력이 단 한 점을 향해 달려갈 때 나는 사라져버린다.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순간의 마지막 남은 나, 혹은 겨우 닿을락 말락 사투를 벌이던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를 오감으로 느끼기를 지나쳐 한없이 단순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세계는 늘 끝나 있었다. 가장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보내지 않은 편지를 내 서랍에서 발견할 때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토록 다양한 모습의 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일상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타인을 통해 다시 검사하고 바라보아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을 차근차근 일러준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지금 이 순간을 명확히 바라보기 위해 필요하다면, 아니 에르노의 화살표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성적 쾌락에서 모든 것을,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사랑, 융합, 무한, 글쓰기의 욕망. 이제껏 내가 그에게서 얻어냈다고 여기는 최상의 것. 그것은 냉철함으로, 감상주의에서 탈피해 갑자기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책 속에서



 



Whistler, 

Nocturne in Grau und Gold, Schnee in Chelsea

Oil on panel.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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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5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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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댓글입니다.

pommelion 2013-01-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셨는지요? 오랜만에 소식 전합니다. 이런, 에르노 문학상이 생겼군요. 명색이 불문학을 한다면서 게으름이 하늘을 찌릅니다. 저는 그 동안 좀 오래, 좀 멀리 집을 떠나 있었어요. 그리고 보니 돌아온지 좀 되는데 이제야. ㅠㅠ 이 서재를 이제야 다시 찾았네요. 찬찬히 둘러볼 생각을 하니, 박하맛 나는 과자 같은 게 여기저기 갈무리된 벽장문을 연 기분입니다.^^ 이게 2012년 마지막 리뷰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에는 콘 판냐와 에스프레소가 만나질까요?

Jeanne_Hebuterne 2013-01-09 15:04   좋아요 0 | URL
어딘가 다녀오셨군요!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르노 문학상, 그런 것도 생겼습니까?
과연 세상에 문학 천재들이 넘쳐나는데 저는 읽기에도 급급합니다. 발버둥쳤으나 소용돌이만을 남긴 자락에 관한 과분한 칭찬, 고맙습니다. 원문이 훌륭하지만 그를 제대로 담지도 못한 '뒤쥭박쥭(정조 대왕 버전)'만을 남긴 기분입니다.
올해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연주했던 것과 똑같군요. 당신 기억나요? 우리는 저기에 있었죠.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저 음악가도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어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나 보죠. 하기야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조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크를 바라보았다. 베르나르가 그녀의 시선을 뒤쫓았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에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186,187 페이지



 


 


 

 




어떤 작가는 작품만큼이나 선연하게 떠오른다. 스피드광, 마약중독, 도박광이면서 돈을 다 잃었을 때에도 '본래 돈이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 마약 소지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을 변호한 사람. 연이은 이혼, 신경 쇠약, 노이로제, 수면제 과용, 정신병원 입원. 프랑스 내 도박장에서 5년간 출입을 금지하자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도박 원정을 갔던 사람. 그녀는 지드를 읽고, 카페에 출입하여 담배를 피우고, 소르본에서 교양과목 시험에 떨어지자 두 달간 은둔하며 쓴 작품(슬픔이여 안녕)이 당선되자 인세로 재규어, 모피 코트, 뒤셀도르프의 별장을 사들이고는 누구에게나 되는 대로 술을 사고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바로 버리고 새로 사들였던 사람, 프랑수아즈 사강. 



 모호하고 교묘했다. 안개처럼 닿는 글. 잡으려 하면 닿을 수 없는 글. 경험한 적 없으며 알 수 없는 것은 글로 쓸 수 없다는 (아니 에르노가 떠오른다) 사강의 글은 의지도 신념도 계획도 없다. 그 어떤 빛도 어둠보다 어둡고 그 어떤 어둠도 빛보다 밝다. 그 젊은 날들이 그런데 꼭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중얼거리는 작은 음성. 통속이 따로 없다. 감정의 격랑이 휘몰아친다. 희극인 듯한 비극, 비극인 듯한 희극. 너저분하지 않고 이야기 전반을 관통하는 예리한 시선이 느껴진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이야기 전반에 드러나는 것은 이들의 연애이다. 니콜이 베르나르를, 베르나르가 조제를. 에두아르가 베아트리스를, 베아트리스가 졸리오를. 



 사강의 글이 가진 힘은 바로 수면 아래 물고기의 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금씩 흔들리는 물결의 움직임, 가끔 떠오르는 기포를 이야기하는 듯한 모호함에 있다. 그녀는 결코 심리적 안정과 개인의 굳건한 심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흔들리는 마음, 사형선고를 내리는 듯한 마음으로 헤어지자고 말할까 망설이는 사람의 입술을 이야기한다. 한 여자를 사랑해서 파리 시내에 존재하는 길이라고는 그녀에게 가는 길밖에 없는 청년이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깃든 불안에서 나온다. 사랑받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어 고독을 택하지만 이로 생긴 슬픔을 조용히 책임지는 것은 개인일 뿐이다. 사강의 지성은 곧은 날을 뽐내지 않는다. 대신 삶이 우리에게 주는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강의 지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습관에 의해' 행복할 것이고 예의바를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간다는 것의 행복은 "죽는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이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사물의 무지막지함"과 모든 것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권태를 좌절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만약 삶이 '어떤 미소'의 도미니크가 느끼는 것처럼 "긴 속임수" 라면, 그 소임수는 너무나 고독한 나머지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임수는 순진한 사람들과 계속해서 게임을 할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규칙에 따라 게임에 임하면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이보다 더 자연에 반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 모두 기분전환 거리 없는 고독한 왕이 아니겠는가? -필리프 바르틀레.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이면서 다른 이의 도덕을 오락거리로 삼지 않는 문체. 자신이 경험한, 익히 아는 사람들을 캐릭터로 만들어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가는 구조 속에서 사강이 드러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물에 대한 이해이다. 인물의 생각과 작가의 말, 과거시제와 현재시제, 대화와 생각, 시공간의 이동, 이 모든 것이 사강의 글 속에는 뒤섞여 있다. 낭만주의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자신의 세계에 솔직해지는 순간, 사강의 글은 인물들을 비판하지 않고 이해하게 한다. 그녀가 뜻했던 대로 설득하지 않고 매혹하게 되는 글. 부드러운가 하면 딱딱하고 찰나인가 하면 영속적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던 과거가 미래가 되고 오지 않은 미래는 소용없음을 말한다. 양면성과 이중성, 자신이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데에서 오는 권태와 영광과 좌절을 한 번에 관통하는 시선. 사강의 글은 행복해지고 싶지만 그러지 않은, 혹은 않았던, 않을 모든 이의 찰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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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1-2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름 만으로도 프랑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프랑수아즈 사강.
참 오랜만에 Jeanne님의 글을 통해 그녀만의 글과 이미지를 다시 보게 되는군요.
한 달 후, 그땐 일년 후가 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때도 되었는데, 사강의 소설책 한 권이 그런 생각에 강력히 대항하라고 부추기는군요. ㅎㅎ

Jeanne_Hebuterne 2012-11-28 17:55   좋아요 0 | URL
시간은 끊이지 않는데 사람은 그것을 끊어 생각하는 것이 신기했어요. 한 달 후, 일 년 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의 불안함을 짚어내는 사강의 문체, 사물을 다루는 그녀의 도덕적 내재율에 감탄했어요. 감탄한다는 뜻은 곧, 나는 그리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부러움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달 후의 일 년 후부터는 어떤 날들이 이어질까요?

치니 2012-11-2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었을 때, '어휴, 사강은 역시 힘들어' 라고 제껴놨던 저의 무감성이 부끄러워지는 리뷰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2-11-28 17:56   좋아요 0 | URL
치니님, 감성은 예민한데 공감능력은 사이코패스같은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blanca 2012-11-2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헤어스타일이 젊을 때랑 거의 같잖아요. 나이든 얼굴, 손을 보면 청춘이라는 게 얼마나 찰나이고 허무한 것인지. 이 책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어린 시절 읽었던 그 '슬픔이여, 안녕'의 상큼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조제'란 이름이 참 독특하고 낯익네요. 불어로 이런 발음이 가능할까요?

Jeanne_Hebuterne 2012-11-28 17:57   좋아요 0 | URL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워요. 사강의 이미지를 구경하다 블랑카님이 (당연히) 떠올랐어요. 불어 발음이 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불어를 하는 지인에게 전화로 들려달라고 해야겠어요. 조제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제, 호랑이, 그 영화도 떠오릅니다. 많은 이들이 그 링크를 타고 이 책을 읽기도 하더군요!)

blanca 2012-11-29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는 말이 너무 좋아요. 정말이에요.

Jeanne_Hebuterne 2012-11-29 12:26   좋아요 0 | URL
blanca님, 제가 아니라 조지 버나드 쇼의 말입니다. 출처를 밝혔어야 했는데, 이런 ㅜㅜ 이 분은 묘비명'오래 살다 보면 결국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를 마지막으로 칼같은 말들을 남기셨지요.
 
Westminster Legacy - Chamber Music Collection [59CD] [세계 최초 한국 1000조 한정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외 / Westminster / 2012년 9월
절판




1000조 한정 세트. 웨스트민스터의 박스반. 1949년 런던 출신 뉴요커가 설립하여 1950년 첫 발매를 시작으로 1970년대 마지막 발매를 끝으로 더는 나오지 않는 음원이 일본의 MCA에서 낱장 발매되다가 두 달 전, 한국 라이센스, 박스반으로 발매되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초기 녹음들은 대부분 스위스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는 1950년대 '메이저 마이너' 레이블의 선두주자였던 웨스트민스터와 비엔나 콘체르토하우스와의 상관관계 때문이었을 거라는 업계 관련자들의 말이 있다.
피아니스트 Jörg Demus, Paul Badura-Skoda, Nadia Reisenberg, Reine Gianoli and Edith Farnadi, 바이올리니스트 Peter Rybar, Jean Fournier and Walter Barylli, Vienna Konzerthaus Quartet과 지휘자Hermann Scherchen 등이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을 거쳐 갔다.






이 박스반 속 음반들은 하나같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한 장씩 꺼내어 듣노라면 초기 녹음은 닐카롭고 예리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섬세하며 친근하다. 음질에 신경을 쓰는 이들에게도 '친절한 소리'를 들려준달까. 따뜻하고 친절하다.




속지에 등장하는 전 객석 편집장, 류태형의 글. 웨스트민스터의 역사에 대해 17 페이지가량을 할애하여 설명하는데, 이 레이블에 대한 궁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더 상세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레코드판의 미니어처 복제품을 만난 듯한 느낌. 모든 것이 똑같다. 두꺼운 종이의 케이스, 음반 보호 비닐, 재생했을 때의 날카롭지 않은 뭉근하고 따뜻한 소리까지. 다른 것은 단 하나, 이 안에 든 것이 CD라는 사실 뿐.

이 겨울,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클라리넷 퀸텟을 레오폴트 블라흐의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 지금보다 지역색이 또렷했던 시절 빈의 느낌.

'빈 필하모닉의 클라리넷 수석을 지낸 전설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레오폴트 블라흐(1902~1956)는 빈 음악원을 나와 1930년부터는 모교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클라리넷은 빈 풍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풍만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절제가 돋보이며 가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박스 속지의 글 부분발췌(54페이지)

추운 겨울, 김이 서린 창문을 바라보며 따뜻한 홍차와 귤을 먹는 느낌. 옛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은 연주자, 지휘자의 지역의 색채와 느낌이 많이 줄었으나 그 당시의 확연했던 또렷한 경계선. 레오폴트 블라흐는 무리하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그것을 펼쳐 보인다.







앨범 넘버링은 표지 앞뒤에는 없고 표지 등을 세우면 드러난다. 이미 그러하지만 아마 컴팩트 디스크도 곧 사라지겠지. 레코드판을 복원하여 날카롭지 않은 옛 소리를 찾는 느낌이 십 년 후만 되어도 다른 대상으로 변할 것이다. 클래식은 현존하는 모든 음향을 불러 모은다.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이미 음이 포화상태여서 새로운 소리는 어렵다는 어느 로커의 전언에만 깃든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LP판을 CD로 복원하여 재생한다. 당연히 CD도 무언가로 대체되겠지만 나는 아직도 연주자의 이름, 레이블, 녹음연도가 찍힌 정보와 해석의 여지를 주는 CD 재킷의 앞뒤를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더 선명한 느낌은 손쉽게 얻을 수 있겠으나, 지금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음의 균형, 단일 마이크로폰을 쓰는 기술. 이를테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손쉽게 보았던 이런 레이블의 마크를 이제는 얻을 수 없어 이렇게 박스반이 나오면 사람들은 집에서 그때의 연주를 들을 것이다.




'외르크 데무스, 프리드리히 굴다와 더불어 빈 삼총사로 불리는 파울 바두라 스코다는 1927년 태어나 빈 국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에트빈 피셔를 사사하고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 등 유명한 지휘자와 협연했다. 섬세하고 낭만적인 연주에서 학구적인 녹음까지 폭넓은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속지 부분발췌(45페이지)

첫 번째 음반의 뒷부분. 웨스트민스터 옆의 1996 MCA Record.




덧붙이기-박스 뒷면에 이런 종이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보너스 디스크는 클라라 하스킬의 스칼라티 피아노 소나타,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월광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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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11-2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보니 꼭 이 음반을 사야 할 것 같아요.

Jeanne_Hebuterne 2012-11-27 09:37   좋아요 0 | URL
blanca님, 이 얼마만이에요!!! 정말 반갑습니다!!!

클래식을 즐겨 듣는 이들은 라이센스반은 구매를 기피하신다든지, 가격도 비교해 보시고 하던데, 이 박스는 사는 것이 좋다는 조언에 힘입어 샀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음반들.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희소성을 생각하면 괜찮아 보였어요. 저 박스반에 든 음반이 장당 삼만 원 가까이(그것도 다 구할 수는 없대요) 일본 레이블에서 팔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옛날 소리가 들려요.

oren 2012-11-27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 그대로 소장용 박스세트네요.
긴긴 겨울밤 곶감 빼먹듯이 하나하나 빼들고 '지나간 네 개의 계절들'을 오롯이 음미하면서 들을 수 있다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Jeanne_Hebuterne 2012-11-28 15:30   좋아요 0 | URL
oren님! 네, 오래오래 갖고 있다가 생각날 때 하나씩 들으면 좋을 듯 합니다. 지나간 네 개의 계절, 하니 사계가 생각나요. 어느덧 또 네 개의 계절이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