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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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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는 어떤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줄도 몰랐는데 잃어버렸고,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은 의외의 도움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때. 그것은 흡사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찾아내어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과정. 정반합의 정-반의 과정과도 같다. 마치 뒷마당에서 작물을 가꾸다가 산책 나온 고양이를 사뿐히 내려놓는 순간 평화로이 마찬가지로 산책하던 조그만 뱀을 보고, 뱀이 놀라고 고양이도 놀라고 나도 놀라 우리 셋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그런.....나도 알고 싶지 않았으나 겪었던 그런 일들.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용에게 잡아먹힐 때가 많지요.

-어슐러 K. 르 귄


 



 서재의 다락방님이 보내주신 어슐러 K. 르 귄의 말은 깔끔하고 담백하다. 

 먼저 있었던 일과 일어난 일, 그 후의 반동을 겪어낸 후 글과 함께 살아갔던 작가의 마지막 대담집인데, 이 조용한 목소리를 읽노라면......일타강사의 빈틈없는 수학 풀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헤매지 않고 깔끔하다. 단정하고 올곧다. 적당히 기댈 만큼의 여지를 주는데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낱말들이지만 나는 그가 쓴 말들을 통해 아주 조금은 발돋움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언어는 기이한 것이라든가 형식을 고민하고 문해력을 생각한다든지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그건 일종의 지옥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든지. 





 그 덧붙임 자체가 어쩌면 이 책의 정체성이 아닐까. 2019년 발간된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가 파드 이야기,미국 문학 시장, 동물을 먹는다는 것, 여성, 서사적 재능, 인종 문제를 다룬 범위가 넓은 책이었다면 이 책은 범위를 좁혀 글쓰기에 관한 데이비드 네이먼과의 대담집이다. 서로 마주하여 주고받는 말들. 이 대화 속에서 네이선의 목소리는 엇나가지 않는 길잡이처럼 어떤 방향을 제시하되 나서지 않고, 어슐러 K. 르 귄의 답은 열려있으되 자리배치를 두 번 하지 않아도 될만큼 정리된 생각을 담았다. 그리고 이 질문과 대답은 단 하나의 수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수많은 텍스트와 배경을 참조하는데, 이를테면 문학의 리듬감을 이야기할 때는 버지니아 울프와 톨킨을, 영어 사용에 있어서는 조지 오웰을, SF를 이야기할 때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의 말 속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산문에서 길고 섬세한 리듬을 사용하는 놀라운 실사례'라고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노라면 르 귄이 말하는 글의 소리, 올바른 리듬,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경험, 자신이 쓴 글에서 울리는 소리와 그 글의 작용이 어떤 것인가, 아스라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그런데  '등대로'가 대체 어떤 소설이었던가. 3부 구성, 램지 가족이 등대로 가는 이야기,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던, 그 흐름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펼쳤다가는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람?'하고 초조하게, 그러나 느리게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대목을 인용하여도 그 자체로 완전한 소설 또한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책 속에서 인용된 부분 또한 마치 하나의 완결된 산문처럼 산뜻하며, 프랙탈의 본보기로 삼아도 될 듯하다. '등대로'의 구석구석을 떠올려보다 다시금 돌아온 르 귄의 대담은 글쓰기를 넘어 글 읽기의 능력은 어떻게 쌓이는지를 보여주는 전문이다. 






 누군가가 쓰면 누군가는 읽는 법. 한때 나는 독자로서의 문해력을 폄하한 적이 있으나 어쩌면 이렇게나 출판물이 판촉물같이 나부끼고 모두가 많이 쓰는 시대에 최대한 적게 쓰는 삶을 경험 중이다. 일인칭과 현재시제와 부사어의 개미지옥을 넘나들다 읽게 되는 이 책은, 어쩌면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소설, 시, 논픽션에 대한 글. 글쓰기에 관한 생각.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역사상 모든 개인이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시대가 있었나 싶을만큼 개인저작이 많은 이 시대만큼 맞춤법과 단어의 용례, 적확한 사용이 이렇게도 무시당하는 시대가 또 있었던가. 이 대담집이 수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이전 세대는 관객이 사진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오류인 푼크툼과 사회적으로 공통된 느낌을 갖는 것,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스투디움 정도를 생각했다면 이제 우리는 뒤늦게나마 문해력을, 문장의 도해를 들추어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짧은 글 '사용 설명서'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 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 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동물과 SF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된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마치 한 세기가 지난 듯하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특정 시기가 존재하는 행성에 관한 SF를 쓴 이 작가는, 파드의 묘생 일기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고양이 파드의 눈으로 본 세계를 그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이 대담집에서 그는 '제가 파드를 완전히 인간 취급했어요. 하지만 식민주의 같은 짓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파드를 그냥 마음대로 이용하는 게 아니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아, 이 짧은 대답에 얼마나 많은 것이 깔끔하게 담겨있는지. 




 일찍이 독일 낭만주의가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에서 꽃피었고 일본의 근대문학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계기로 시작되었다면(이 작품 당선을 시작으로 소세키의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니 계기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슐러 K. 르 귄의 고양이 파드 자서전은 본인이 바라본 고양이의 감정이나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을 타인과 함께 나누어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경로 이탈이 아닌 경로 재탐색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이 작가의 타계 당시 구글의 수많은 연관검색어가 '파드 입양', '고양이 파드는 어디로 갔나요', '파드 누가 키워요'(정답은 딸이 키운다, 입니다)였을 정도이니 실제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지구상에 종이라고는 인간밖에 없다는 듯한 이 행성에서 자신은 본 적도 없는 다른 종을 걱정하게 되는 도시 전설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른 뭔가, 틀림없이 인간이고 감정적으로 대단히 이해할 만하지만 정말 다른 뭔가와 접촉했다는 감각이야말로 소설이 해주는 위대한 일 중 하나죠.

-책속에서


 

 

 이 다정한 대담집을 이토록 처음에는 가볍게,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묵직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내 주변의 그 많은 활자들 중 쓸모 있는 것은 '마침내' 몇 가지 안 되지 않는가, 하는 자조적인 거울 보기 같은 마음이 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사람이 되었으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시궁창에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왔으나 어느 순간, 관성처럼 상상력을 깎아내리게 된 순간, 적절한 대담을 알맞은 때에 읽게 되어 다행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만 읽거나, 시만 읽거나 논픽션만 읽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이 한탄처럼 말했듯이 SF는 한 권도 읽지 않고 폄훼하기도 얼마나 쉬운가. 지금의 독자는 간행물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더 좋은 작품을 골라 읽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책장을 덮으며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나도 모르게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책 읽기의 의무감을 다시금 손에 쥐여준 책. 우연한 기회에 나는 잠시 잃어버렸던 줄도 몰랐던, 이야기를 경청하고 타인을 향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능력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따뜻한 대담집. 독서의 타성에 젖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덧붙이기 1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는 가스오 이시구로입니다. 


덧붙이기 2

-좋은 책을 보내주신 다락방님, 고마워요!


덧붙이기 3

 


-파드는 잘 지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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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3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쟌 님의 글도 반갑고, 뜻밖의 파드의 소식도 반갑네요.
:)

Jeanne_Hebuterne 2023-02-01 04:57   좋아요 0 | URL
3년만인가요? 비번에서부터 서재로 돌아오는 길이 멀었습니다. 아이패드 지문인식 없이 내가 뭘 했을까! 싶었을 정도..
 
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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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에 책 한 권이 있다. 4285라는 숫자, 삶, 희망, 기록, 이것만으로도 아...하고 고개를 젓게 되는데, 뒷표지를 보면 더하다. 인생 기록, 오프라 윈프리, 뉴욕 타임스, 피플, 보스턴 글로브. 이 책에는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는 없지만, 일단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이 세사람의 추천이라면 나는 일단 피하고 본다. 

 각각의 이름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면서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미리 강조하자면 한 번도 그 쇼를 보지 않고도 몇십년을 살다 보니 주워들은 풍문에 의하면, 일단 금전이나 건강, 각종 문제를 겪는 호스트가 나온단다. 모두가 그의 불행을 듣고 이런저런 위로를 하고나면 나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라, 내지는 당신은 더 소중한 사람이다, 같은 처방과 함께 산더미 같은 선물들이 쏟아지는데, 그 규모가 음료 교환권이나 숙박권 등의 범주를 넘어 자동차 같은 고가의 선물까지 아우른다는 말을 듣고나니 아, 나도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호스트의 고민은 잊게 되고 '내가 뭘 본거지?하는 느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힘들 때마다 김연아의 밴쿠버 경기영상을 돌려보고 카모메 식당을 보는 친구 하나가 몹시 힘들 때면 이 책을 한번씩 펼쳐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길 잃었다는 이름의 이 저자의 책을 펼쳐보았다. 아마도 더 큰 불행, 더 큰 힘을 지녀서 업계 판도를 바꾸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살다 보면 다양한 얼굴과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특정한 나이의 어떤 기회가 있기 마련이라면 셰릴 스트레이드의 방황은 적절한 때에 펼쳐졌고 알맞은 시기에 매듭을 지었다. 그것이 술이든, 인생의 미친짓이든, 여행이든, 나는 인생의 총량, 내지는 일정량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쪽인데 이것을 세상에서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고. 셰릴 스트레이드는 매 맞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 함께 대학을 다녔고, 하필 그 학교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갈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데다가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하버드나 예일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갈 생각도 못 했으며 혹시나 생각했다 하더라도 합격 못했을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는 대목을 보았을 때, 자기를 사랑해주는 아버지의 느낌 자체를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할 때, 에스키모인들의 얼음 지옥과 적도인들의 불지옥이 떠올랐다. 현실은 얼마나 상상력을 제약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가까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모 프랑스 전 대통령의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저 현실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이 여실해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오리건까지의 여행으로 자기에게 닥친 일들을 좀 해결해보고자 우연한 기회에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람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의 여행을 돌아보면, 풍경과 환경,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며칠만 지나도 우리는 동행인들과 우리 아버지는..우리 어머니는..내 친구들은..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마침 혼자 떠나 혼자 매듭짓는 와중 계속해서 자기 마음속의 라디오 주파수를 찾듯 생각을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아버지 생각에서는 '나는 그런 일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 광경을 떠올릴 수가 없었고 사랑이나 안전함, 확신, 혹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감정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제대로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라고 하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그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을 듬뿍 주는 어머니였다'라고 한다니, 이것은 오락가락인가 아니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생각인가...싶다가도 떠오르는 말 한마디가 있으니, '마음은 상태일 뿐이다'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신임하는 심리상담가의 조언. 얄궂지만 맞는 말이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컨디션, 그날의 기분, 이런 것들은 불안정한 대기처럼 늘 바뀌고, 저자는 어떤 롯지에서는 미리 보내둔 보급품에 돈을 잘못 보내는 바람에 거의 무일푼이 되고, 캠핑장에서 무임으로 몰래 머무르려 하다가 쫓겨나고(몰인정하다고 뒤끝 작렬로 써놨는데 돈이 없으면 나가는 것이 인지상정), 곰이나 여우를 보면 꼭 곰이다! 내지는 여우다! 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PCT에 가보고 싶지만, 그것은 무모하니까 애팔래치아 트레일 정도면 되지 않을까? 마음 정리도 좀 할 겸...'이라는 말에 지인은 '그 정리는 꼭 애팔래치아까지 가야 되는 거냐'라고 반문하여 곧바로 수긍했는데, 어쩌면 인생의 총합을 한 번 정도 내기로 한 이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상상의 근거지를 바꾸는 일, 내 주머니 속 밑천을 꺼내어 모두 살펴보는 일, 결국, 스스로 해야 할 일. 어떤 이에게는 마약, 술, 도박, 쇼핑중독, 일 중독, 기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일들을 셰릴 스트레이드는 혼자 하는 PCT로 실행한다. 가끔, 어떤 자리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물리적 고행, 여행, 고난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 아버지. 내게는 아버지가 아닌 남자. 그 사실이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다.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언제나. 온갖 일이 다 있었지만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의 잘못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PCT에서 어두워지는 대지를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아버지 때문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그보다 놀라운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글쎄....세간에 유튜브로 많은 돈을 버시는 크리에이터들은 자존감을 채워라, 남이 준 감정 쓰레기는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당장 내다 버려라, 여러가지 말들을 하는데 적어도 이 사람의 대단한 장점은 여기에서 빛이 난다. 그는 휘둘리지 않고 방황이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었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사람이다. 결론을 자기 안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 이 점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순간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상담사를 찾아갔다. 이 도보여행을 시작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신뢰나 믿음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빈스가 알려준 다른 상담사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풀어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아,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풀어줄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니. 저자가 별로 힘주어 쓰지도 않고 지나가는 문장을 보면, 일단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할 줄 알고, 그것을 풀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스스로' 자기 확신을 끌어내는 힘. 그래서 역설적으론 나는 이 책을 읽고도 내 마음속 온갖 궂은일들의 해결 실마리는 조금도 얻을 수 없었다. 이 책 자체가 '물은 셀프'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처한 상황이 다르듯 저자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다름도 자명했기에.





 그럼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말이 최악의 고통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볼 때, 척추가 부러진 연필심처럼 내려앉은 어머니를 볼 때, 맞지 않는 신 때문에 죽은 발톱을 뽑을 때, 그리고 침묵 속에서 머릿속이 텅 비어 머리 전체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노래가 떠올라 미칠 지경이라는 말을 할 때, 순간의 점들을 저자는 입체감 있기 연결해 낸다. 이 수많은 순간을 유기적으로 정리해서 내어놓는 글 전체를 끌고 나가는 리듬감을 느끼며 이 책을 읽는 것은 말하자면....힘든가요? 나는 더 힘들었어요. 라고 말하는 수련자를 보는 마음이랄까. 

 잘 짜인 로드무비는 불행의 총합이 아니며 책 한 권이 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자체의 리듬을 지녀야 한다는, 잘 쓰인 논픽션의 전형. 550쪽이 마치 50 페이지라도 되는듯 읽는 이의 눈을 붙들고 자기 마음을 담담하게 쓰는 능력을 지닌 작가이다. 물론, 마지막 몇페이지를 보면 오프라 윈프리가 좋아할 만하겠다.....라는 내 머릿속에서는 딱히 긍정적인 느낌으로 분류하기에는 머뭇거려지는 생각이 떠오른다. 뭐, 내가 젊은 도전정신의 미국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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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2-25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별로 좋아할 수 없는 캐릭터여서^^; 그렇게까지 열광적으로 환호할 정도인가 싶었어요. 재미있다는 건 인정^^ 늘 고급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Jeanne_Hebuterne 2020-03-19 03: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달밤님!! 뭐랄까 뜰 여지는 충분히 있고 왜 인기있었는지도 알겠으나 나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요! 술술 넘어가기는 했어요 ㅎㅎ 그리고 칭찬에 너무 기뻐 혼자 댓글 보며 막 좋아하고있습니다. 서재 오랜만에 와도 좋은건, 이렇게 익숙한 모습들이 보여서인것 같아요. 늘 있어주셔서 고마워요, 친절한 달밤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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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그날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 날 죽은 사람 한 명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자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살을 속죄할 수는 없다.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이 흘렀다. 그 열여섯 해를,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쳤다. 어떻게 창창한 아이의 삶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로 내 눈앞에서, 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전문가들, 우리 식구들, 딜런의 친구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대체 무얼 노힌 건지,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었는지. 내가 쓴 일기를 들추고 또 들추었다. 법의학자처럼 엄밀하고 철저하게 우리 가족의 삶을 파헤치고 일상적 사건이나 대화를 곱씹어보며 내가 놓친 단서를 찾았다. 뭘 놓친 걸까? 어떻게 했어야 할까?




  

 한 아이를 기르는데 십육 년, 그 아이가 죽은 다음 그 아이 생각을 하는데 십육 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 중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어서 운을 떼기조차 어려운 사건을 담은 이 책의 표지에는 두 모자의 사진이 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강렬한 제목 뒤에 숨은 원래 제목은 이보다 훨씬 조용하게 말한다. 엄마의 회고록. 비극 이후의 삶. 



 습관대로 제목 뒤의 목차를 본다. 1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즉 총격, 마지막 밤, 다른 사람의 삶, 쉴 곳, 불길한 예감, 어린 시절, 엄마가 엄마에게. 슬픔의 자리, 비탄을 안고 살아가기, 현실 부정의 끝. 2부는 이해를 향해. 즉 절망의 깊이, 치명적인 역학, 자살로 가는 길, 폭력으로 가는 길, 부수적 피해, 새로운 인식, 선서증언, 뇌건강과 폭력의 교차점. 

 



 딜런을 키우는 16년과 딜런이 죽은 다음 16년이 1부와 2부 사이 그 어딘가에 평행선을 그리듯 놓였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결론과 주, 자료이다. 결론에서는 모든 이에게 안전한 세상이라는 제목에 각종 자살 예방, 폭력 예방, 총기 안정, 위협 평가 관련 도움을 받거나 지침을 참조할 수 있는 곳이 실려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벌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 관해 끝없이 사과하고 참회하고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비슷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막을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다. 

 목소리는 내도록 조용하고 끈질기다.  자기가 남긴 빵조각을 찾아 거꾸로 집에 가는 길을 찾으려는 눈길처럼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다르게 보며 다르게 읽는 일. 마침내 수 클리볼드가 딜런 클리볼드의 마음에서 읽어내려는 것은, '왜'이다. 그러나 대답할 아들은 세상에 없으며 그에게는 다시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죄를 짊어지고, 온갖 소송이 난무하고, 모든 언론이 그들에게 눈길을 쏟는 당시 빠르게 도망치면서 수 클리볼드가 하는 일은 단 하나, 끝없이 파헤치는 일이다.




 정말 몰랐을까?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거짓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했다, 하지 않았다 정도로 간단한데 문제는 그 간단함이 제대로 된 질문을 만났을 때만 열리는 문과 같다는 것. 수 클리볼드의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 혹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애초에 수백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해 수백가지 경우의 열쇠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기대와 끝없이 펼쳐지는 서로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경우에는 통하는 방법이, 어떤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딜런이 주머니에서 스테인리스 술통을 꺼냈다. 위쪽에 깨진 부분을 솜씨는 없고 땜납은 많은 누군가 지저분학 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게 뭐니? 내가 물었다. "어디에서 났어?"

딜런은 주웠다고 했다.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딜런이 페퍼민트 슈냅스가 들어 있다고 했지만 그 술이 어디에서 났는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늘 읊는 술의 위험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딜런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저를 믿어도 되고 로빈을 믿어도 된다고 말슴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오늘 밤에 마시려고 술을 담아놨어요. 아주 조금밖에 안 먹은 것 보이죠." 딜런은 나에게 술통을 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듯이. "처음에 조금 마시고 그 뒤에는 안 마셨어요. 보여요? 거의 차 있잖아요." 나는 술통이 거의 차 있다는 걸 알겠다고 했다.

 "절 믿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딜런이 말했다. 나는 아직 약간 충격 받은 상태였지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너를 믿어." 그럭는 아닛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술 한 번도 입에 안 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한테 먼저 말해주었으니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용한 한밤에 있었던 어마와 아들 사이의 이 사적인 순간을 그 뒤에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돌아보면 나에게 그 술통을 보여준 게 딜런이 나에게 한 가장 잔인한 장난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딜런이, 한편에서는 학살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내가 자기를 믿도록 일부러 조종한 것인가? 나를 놀린건가? 이러나저러나 며칠 안으로 죽을 생각이었다면 왜 나의 신뢰를 더욱 북돋으려 한 걸까? 내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가, 아니면 내가 혹여 자기 방을 뒤질까봐 쐐기를 박은 걸까?

 이런 생각들을 정신과의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딜런이 솔직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어쩌면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 뒤에 있었던 일과는 무관하게요.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요인과 한 가지 답을 지니지 않아서 이제 없는 아이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는 엄마의 마음은 더욱 막막하다. 그때 딜런은 왜 술통을 보여주었을까? 담배를 피우냐는 말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라고 왜 답했을까? 정신분석학자가 말했듯, 남을 죽이려고 갔는데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아이가 에릭이었고, 자신이 죽으려고 갔는데 남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딜런이었는데, 대체 왜 자살과 학살 직전 SAT 시험을 치르고, 몇몇 대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기술사를 보러 가고, 프롬에 참석하였던 걸까?



 

 거꾸로 짚어 보자. 딜런은 에릭이 종종 만나자고 하면 엄마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그럼 수 클리볼드는 딜런, 너 오늘 방 청소해야 해! 라는 등의 말을 꺼냈고, 딜런은 '엄마가 잔소리해서 못 가' 같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또한, 시합에서 졌을 때 에릭이 너무나도 분통을 터뜨리며 딜런을 모멸스럽게 대할 때에도 딜런은 '괜찮아요. 늘 저래요.'라고 말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에릭은 딜런 말고도 다른 몇몇을 물망에 올린 적이 있으나 콜럼바인 학살에 참여한 것은 에릭과 딜런, 두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의 어떠한 교집합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엄마가 여겼던 아들과의 친밀한 감정 공유는 아이가 다른 특정 친구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거절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속이 깊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되짚어 보니 자기 주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르다고 생각한 일도 참게 되는 일이 된다. 한마디로 수 클리볼드가 되짚는 모든 일은, 당시에는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겪어보니 몰랐던 일들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만고 불면의 진리이건만, 이 복잡한 마음과 관계의 양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한 편지는 검은 마커로 쓴 굵은 글씨로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스스로도 밤낮으로 던지는 질문. 심지어는 장애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나름대로 과보호라 생각할 정도로 딜런의 교우관계, 가족 내에서의 위치에 신경을 썼던 수 클리볼드로서도 답할 길이 없는 질문.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 혹은 이웃과 친구들의 이해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받아들인다. 잘못된 점을 군소리 없이 사과하고 되짚어나가려고 한다. "좋은 부모라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죠."라는 컴퓨터 교사의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판단할 줄을 안다. 자기가 기울인 수많은 노력이 더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때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다른 방향을 찾게 되는 지점은, 마침내 보안관 사무실에서 증거 영상을 보는 시점이다.


한 가지 사실이 의문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딜런이 그 일을 했다는 것.


 의미와 무의미, 헛됨과 전혀 의도치 않았던 사건의 결실 앞에서 이 사건이 뜻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 있고,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 

'엄마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아이는 감추지 못하고 어떤 아이는 감춘다는 것. 

수없이 많은 '만약에'는 다른 경우를 대비하여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을 몰랐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된 질문을 해보는 것.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만 대비할 수 있는 어떤 일에 앞서 수 클리볼드가 이 책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아들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하고 참회하는 것. 그리고 다른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악의 얼굴은 단순하지 않고 사랑의 얼굴 또한 맹목이 아님을, 어둠의 역설을 통해 써내려간 책. 생각의 맺음을 책표지 뒤의 서천석(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씨의 말로 대신한다.



이 책은 어둠이다. 저자가 위험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멀쩡한 바닥이 무너지며 갑자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 속의 희미한 빛과 촉각에 기대어 그 어둠을 통과해나간다. 그 힘은 아이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란 많은 부분이 설명할 수 없기에 평소엔 살짝 가려져 있을 뿐 막막함은 본질이다. 그 막막함을 통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책이다.-서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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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now Child (Paperback)
Eowyn Ivey / Little Brown & Co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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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bel said. "As fantastic as it all sounds, I know the child is real and that she has become a daughter to us. But I can't offer a single bit of evidence. You have no reason to believe me. I know that."

 메이블이 말을 이었다. "듣기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난 그 애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 애는 진짜이고, 우리에겐 딸이나 다름없어요. 물론 그걸 에스더 당신에게 확인시켜줄 방법은 하나도 없어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지난 세기의 알라스카, 눈과 얼음의 땅, 아이 없는 부부가 눈이 오는 날 밤 눈사람을 만들고 외투와 모자를 씌워준다. 그 다음 부부를 찾아오는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작은 여우. 


 



 환상과 현실이 섞인 이 허구에 앞서 소설은 어떻게 소설 속의 세상을 직조해 내는 것인가, 회의감과 궁금함이 생긴다. 대형서점의 수많은 책 속에서, 헌책과 새 책, 떨이로 파는 책과 신간 속에서, 헌책방의 두툼하고 편안한 쿠션이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순간 설핏, 들었던 이천사백 년도 더 된 의문. 소설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작은 이야기'라는 정의를 중학교 문학 시간에 들은 이후 이 작은 이야기에 한눈을 파는 나는 드라마 팬과 다름없었다. '걸 온 더 트레인'의 레이첼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망설였고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면 문학 속의 소설이, 이 작은 이야기는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것일까.





 잠시 다시 눈을 돌려 에오윈 아이비의 스노우 차일드를 다시 읽는다. 장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스노우 차일드'의 도입부 내지는 말미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거나 그저 슬프기만 하지는 않는다. 눈의 결정처럼 어느 순간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아이. 동화와 민담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사라지는 아이'라는 점에 계속 주목한다.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하는 입술이 주목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단어와 단어가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을 찍고, 여우가 그 발자국을 따른다. 에오윈 아이비의 단어와 문장은 지극히 조용하고 고요해서 가장 격동적인 순간, 남편 잭이 눈길에서 크게 다치고 메이블이 집안을 일구어 나가는 장면에서조차 통나무 집 안에서 바깥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이 사각사각, 회오리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다시 거대한 백색의 눈. 





 "frost...and snowflake... turned to flesh and bone."

  "얼음, 눈 속에서 나타난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





 메이블이 어느 순간 눈 속에서 나타나 봄과 함께 사라지는 아이, 파이나를 이렇게 보며 꿈꾸는 사이 잭은 파이나의 눈 속에서 부모가 죽고 혼자 살아남아 살아가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다시 생생하게, 백조를 사냥하고 죽이는 파이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백만 가지 눈의 결정을 하나씩 보여주듯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파이나의 다른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 전부가 조금씩 움직여 조용히 켜켜이 쌓인 눈밭을 보기 전까지, 독자의 눈이 보는 것은 사각사각 눈이 밟히는 알래스카의 겨울 풍경이다. 





 그 겨울이 호흡하는 것은 눈의 아이, 파이나의 숨결.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삶의 접점과 맞물린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살아있는 삶일까. 알래스카의 몰아치는 눈, 폭풍, 굶주리는 겨울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상하게도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먼 곳이 어느 순간 창문을 열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눈과 얼어붙은 강물, 숲과 산, 그리고 야생동물이 빚어내는 리듬감일 것이다. 그 리듬을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멀리서 울부짖는 야생 곰이, 겨울이 오면 자취를 감추는 야생 딸기가, 오븐에서 겨울을 버티게 하는 파이와 약간 한기가 도는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과 수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읽다 보면 추워지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어느 순간 현실이 이와 같다고 여기다보면 생각지 못한 순간에 작가는 자신이 직조한 언어의 짜임으로 놀라운 스타카토를 만들어 낸다. 에오윈 아이비는 고요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알래스카의 창밖 묘사를 시작으로 독자의 경계심을 풀어낸다. 민담과 동화가 섞인 눈의 아이 이미지를 곳곳에 넣어 진짜 눈의 아이 파이나를 만들어 낸다. 처음 파이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는 메이블과 나중에 파이나와 사랑에 빠지는 가렛의 파이나를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말미, 파이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이 다른 방향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갈등을 일으킬 때조차 두 사람의 반응은 모두 가능케 한다. 메이블은 파이나를 눈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숨 쉴 수 있도록 얼어붙은 겨울 바람 속에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렛은 파이나를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돌고 숨결이 조용한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메이블은 파이나를 품는 어머니이며 가렛은 파이나를 객체로 보는 인간인데, 에오윈 아이비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애매한 중간을 선택하게끔 종용하지도 않는다.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비극에서 중도가 제공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 마땅하다. 





 결국, 이것은 모두 문학의 일이다. 인물을 다루는 작가의 부분적인 방식들이 구조를 이룬다. 독자는 잭, 메이블, 파이나, 에스더, 가렛 등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사건을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양옆에서 살펴보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쉴 틈이 생기면 눈의 아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독자는 파이나가 사람을 경계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아이이며 메이블이 자기 죽은 아이를 그리면서도 파이나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잭이 아버지 같은 태도로 파이나를 대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이것이 눈의 아이 민담, 동화와 이 소설의 묘한 상충관계를 일으켜낸다. 독자는 눈의 아이 민담에서 어떤 단락이 오든 간에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오윈 아이비의 이 소설에서도 그럴 것인가? 소설 끝에서 파이나가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함께 생활을 꾸려나갈 때까지도 독자는 살짝 의심을 거듭하게 된다. 그간 작가가 파이나를 묘사할 때마다 사용한 단어는 눈, 서리, 안개, 눈 폭풍우, 차가운 공기 등이며 파이나와의 모든 대화에는 따옴표가 없다. 한마디로 작가는 문학의 많은 언어를 자기의 것으로 활용한다. 





 이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에오윈 아이비가 성글게 쌓은 눈사람같은 이야기를 읽노라면 앞서 생각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그가 이야기하는 형식을 따른다. 소설의 이야기는, 문학의 내용은 언어와 분리할 수 없는 경험이다. 언어가 도구로 전락하는 가구 조립 설명서 같은 실용문과는 달리 문학에서의 언어는 핵심이자 본질, 실체이다. 파이나, 라고 말할 때의 파열음이 눈의 조각처럼 느껴지고, 내뱉는 숨이 차가운 알래스카의 공기처럼 느껴진다면 실로 묘한 일이다. 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작가는 그 이름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동화와 실제가 실재하는 마법같은 이야기. 읽고나면 차가운 겨울, 12월 밤이 생각나는 알래스카의 이야기.



 Jack and Mabel gasping for breath. The moon lit up the entire valley, gleaming off the river ice and glowing on the white mountains.

 Let's keep going, Faina whispered, and Jack, too, wanted to skate on, up the Wolverine River, around the bend, through the gorge, and into the mountains, where spring never comes and the snow never melts.


 잭과 메이블은 숨을 몰아쉬었다. 달빛이 언덕 전체를 뒤덮어 하얀 산과 얼어붙은 강이 어슴푸레 빛났다. 

 계속 가요. 파이나가 속삭였다. 그리고 잭 역시, 스케이트로 계속해서, 울버린 리버를 지나, 옆으로 살짝 꺾어서, 협곡도 지나서, 산 속으로, 봄이 결코 오지 않고 눈이 절대 녹지 않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읽다 보면 쉼표와 숨표, 녹아버린 따옴표와 공백이 서리처럼 녹아내리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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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안전성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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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날 가만,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 굳이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문 앞에 서서 내가 키우는 그 고양이가 문을 한 번 보고 야옹, 내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야옹, 내가 다른 곳으로 가면 따라와서 또 뒤에서 나를 보고 야옹. 나가자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깃털 같은 그 몸을 가볍게 한 손으로 안아 들어 품고 문을 열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바람은 살랑살랑. 야옹,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눈은 동그래졌고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한 발짝 더. 꼬리가 가볍게 들리고 목을 길게 빼며 얼굴은 앞으로 쭉. 하지만 그 작은 몸은 여전히 내게 꼭 붙어있다. 그러다 한 발자국 옮겼을 때 저 너머에서 작은 소음. 고양이의 몸이 홱 틀어지면서 내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발톱을 세웠고 그 발톱은 내 팔을, 목을, 어깨를 단단히 갈고리처럼 움켜쥐었다. 악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긴장한 그 몸은 내 어깨에 닻처럼 상륙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단단하고 여린 발톱이 내 어깨를 붙들던 순간. 나는 그가 본디 육식동물이면서 호기심 많은 포식자임을 다시 직감했다. 사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숨겼던 발톱을 어느 순간 내세우는 모양새를 내 몸으로 겪는 일. 동그란 애원하는 눈과 어둠 속에 빛나는 맹수의 눈을 다시 확인하는 일. 햇빛은 사그라지고 바람이 잔잔해지면 이 일상이 다시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일.


 


 홈스의 '사물의 안전성'은 그런 맹수의 발톱과 아기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 사이의 간극을 오간다. 내가 가진 펭귄판 페이퍼백에는 안전핀의 날카로운 끝이 그림자를 가볍게 드리웠다. 만지기가 망설여지던 책. 당신의 일상은 얼마나 안전합니까? 라는 질문과 그 아래 무엇이 놓였을까, 하는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면, 그 다음 오는 것은 그 위태로운 왈츠이다. 내가 한 발자국 나가면 상대가 매끄럽게 끄는 힘이 느껴진다. 고개를 쑥 내밀면 상대는 살짝 고개를 젖힌다. 미끄러지거나 발을 서로 밟을 때도 있다. 심지어는 내가 헛발을 짚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멀리 누군가가 살짝 눈을 빛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귀엽기도 하다. 어린아이처럼 텔레비전에 빠져 놀고 있는 폴이라니. 하지만 그 모습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애처로운 면도 있다.

 "소리 좀 줄일 수 없어?" 일레인이 말한다.

 폴의 자동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져 광고판을 들이받는다. 자동차는 불길에 휩싸이고 '게임 오버, 게임 오버'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내가 뭘 하고 있으면, 가만히 좀 봐주면 안 돼?" 폴은 재시작을 누르며 소리친다.

 "별것도 아닌 게임이나 하면서 뭘."

 "나 좀 내버려둬."

 일레인은 위층으로 올라간다. 폴을 참아줄 수가 없다. 뭐 하나 참아줄 만한 게 없다.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보는 방식. 전부 다 싫다. 그도 그녀를 미워한다는 걸 알기에 더하다. 미치겠다. 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를 미워할 수는 없는가.

-adults alone.


 


 아이들을 캠프에 보낸 후 일레인과 폴은 데이트하고, 콜레스테롤을 잠시 잊고 외식을 한다. 대마초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신다. 그 친밀함의 시간, 사랑한다는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온 다음 별것도 아닌 게임을 하는 남편 폴을 보는 일레인의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를 거리낌 없이 미워해야 한다는 원문의 마음이 한국어판에서는 좀 더 조용한 책망의 목소리를 띤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책 사이의 간극은 독자가 바라보는 일레인의 표정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차이의 날 선 감정은 이 두 부부의 일탈에 맞서 조용히 반짝인다. 




 함께 식료품 쇼핑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스테이션 왜건을 몰며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삶. 왜 아니겠는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아이들이 혹시 상어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조용히 작동하는 집안 사물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을 이렇게 예리하게 잡아채는 순간이 있는데. 뭉툭한 발 사이 숨겼던 발톱을 조용히 꺼내게 되는 순간. 그것은 기지개를 켜다 시원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두려워서일 수도, 위협을 하려 그럴 수도, 상대가 싫어서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때 드러난다. '미워서 죽겠어!'에서 '미워서 죽여 버리겠어!'로 단어 하나가 바뀔 때. 일 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일이 일 초 후엔 더이상 그러지 않을 때. 사물은 더 낯설게 숨 쉬고 그 앞에서 나는 낯익은 숨을 내쉰다. 나는 숨 쉴 수 있고 너는 숨 쉴 수 없다는 착각은 그럴 때 사그라든다. 어쩌면, 내가 눈뜨고 눈감는 이 하루가 좀 더 위태로운 지반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닐까.





 "I was just looking." I said.

 "Whose room is this?" he said.

 I shrugged.

 'Whose?" he asked.

 "Yours."

 "Did I say you could look? Did I say you could come in here? Did you ask? NO!" he yelled into my face. "Some things belong to a person himself. They're private and you can't take them away."-Looking for Johnny


 "그냥 둘러봤을 뿐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게 누구 방이지?" 그가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 방이냐고?" 그가 물었다.

 "아저씨 방이요."

 "내가 너더러 봐도 된다고 했어? 여기 네가 들어와도 된다고 한 적 있어? 나한테 들어와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냐? 천만에!" 그가 내 얼굴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에겐 제각각의 소유물이라는 게 있어. 그건 아주 개인적인 것이고 너는 그걸 엿봐서는 안돼. -조니를 찾아서





 놀이터에서 놀다 자신을 조니라고 부르며 엄마 대신 찾으러 왔다는 남자가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알 수 없는 약을 먹이고 엄마는 지금 다른 일로 분주하며, 자기가 당분간 돌보러 왔다며 차에 아이를 태우고 자신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며칠간 지내게 되는, '조니를 찾아서'. 그러나 이 남자가 조니라고 부르는 이 아이가 겪는 것은 엄격한 통제와 강력한 권유. 방을 들여다볼 땐 불같이 화내며 뜨거운 김을 뿜어댄다. 그 다음 날엔 아이에게 낚시를 가르쳐준다. 아침을 주고 장작을 패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사이 나타나는 이상한 연대의 감정. 이 사람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과 엄마를 보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이 시소의 양쪽을 오가다가 어느 순간 휙 기울어질 때가 있다. 





 "Let's go." I finally said.

 "Go on, give it another try."

 -Lookig for Jonny.





 마침내는 엄마에게 몰래 전화를 하려다 남자에게 들키고 만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엄마는 왜 통화 중인 걸까. 어쩌면 진짜 이 아저씨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스스로가 멍청하게 여겨질 때, 이제 가자고 말할 때 오히려 이 남자는 '다시 걸어 봐. 한 번 더 해 봐.'라고 말한다. 그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일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느낄 때. 이제 이것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오히려 남자는 에롤을 집에 데려다준다. 그 일상이 너무 낯설어서,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지만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추측이 무럭무럭. 다시 돌아온 일상은 사그락사그락. 어쩌면 나의 무심한 하루는 다른 누군가의 굳건한 등에 위태롭게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남편의 등이 측은하다가 밉다가(어른들끼리), 무서웠던 어떤 남자의 등이 듬직해지기도 했다가(조니를 찾아서), 숨어서 도저히 그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가(그럼 이만),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아들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우게 되거나(밤의 에스더), 아무런 말 없이 웃는 바비 인형을 향한 사랑이 사그라지는(진짜 인형) 것이다. 





 그 모든 감정은 홈스의 열 편의 이야기 속에 조용히 출렁거린다. 바다의 파도가 일을 쉬지 않듯 홈스도 글을 쉬지 않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장편과 다른 단편.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일관적인 이야기.

 42.195 킬로미터가 아닌 42.195 미터의 산책을 하다 보면 숨이 가빠지지 않는 대신 발밑이 어지러워진다. 어떠한 사건을 지나가는 사람의 가쁜 숨 대신 저물녘 찰나를 막 지난 이의 어지러움. 대차대조표처럼, 어떠한 사건을 가장 잘 꿰뚫기 위한 작가의 조용한 바느질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아이와 어른, 낯선 사람과 친숙한 사람, 아이들이 있는 일상과 아이들이 없는 일상, 모두가 똑같이 보이는 쇼핑몰에서 발견한 낯익은 소녀의 얼굴 속에서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흔적. 회사에서 폭탄 테러의 위협으로 집에 와서 잠시 쉬게 되는 남자가 느끼는 혼란. 일상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이의 낯선 눈매.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날 선 발톱을 언제든 내 어깨에 초대할 수도 있는 낯선 사건. 

 넓게 퍼진 구름 가운데, 어느 구름 뒤에 비가 숨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작가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비구름만 가려낼 수는 없지만, 달무리를 보면 다음 날의 비가 보인다고. 비가 내리건 바람이 불건, 살아있다면 이 날선 낯선 일상을 감수하는 것이 독자와 작가의 일이라고. 






 Downstairs, as they are cleaning, Elaine and Paul look at each other and as if they've each had the same thought at the same moment, as if they're sharing a secret, they go into the living room and carefully check the cushions on the sofa making sure there's nothing there, no empty vials. -Adults Alone.

 아랫층에서 청소를 하며 일레인과 폴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이 같은 순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비밀을 나누는 듯한 느낌. 그들은 거실 소파의 쿠션을 청소하며 집안에 텅빈 약병과 같은 잔해가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한다.-어른들끼리.



*인용은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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