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살아남기
줄리아 워츠 지음, 김보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새벽 3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

파자마 차림으로 크래커를 씹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날은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에 지문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내가 다녀와 본 곳, 가보지 못한 곳, 앞으로 가볼 곳. 첫인상으로,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그곳의 사람들로 채워진 지문은 하나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뉴욕의 지문과 캐리 브래드쇼가 가진 뉴욕의 지문은 다르다. 같은 공간과 시간, 어느 특정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도화지처럼 깔린 경험의 깊이가 다르기에 백 명이 백 개의 화두인 것처럼, 도시는 제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뉴욕에서 살아남기'의 줄리아 워츠는 우중충한 생활을 청산하고 거지 같은 생활을 펼친다. 상상 속의 산뜻하고 매끄러운 샌프란시스코의 생활을 청산하고 스타일리쉬한 뉴욕으로 하는 이사. 현실의 악몽같은 부업, 빌털터리 생활, 마약 중독자 오빠를 두고 얼어 죽거나 쪄 죽고, 에어컨도 개판, 집세는 지붕을 뚫고 사라지는 뉴욕이라. 그녀는 뉴욕을 예찬하지도, 샌프란시스코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도시를 비교하거나 정치관을 피력하거나 젊음의 패기를 자랑하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만화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에 앞서 등장하는 작가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았을 때 나는 뉴욕을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를 두서없어 세 페이지나 늘어놓았다. 내가 쓴 글은 뉴욕의 매력을 묘사하려는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실수처럼 빤한 이야기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가득했다. 뉴욕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웃음거리가 되기 쉬운 바보짓 같았다. 그래서 글은 접어두고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뉴욕에는 '이상적인 젊은이가 대도시로 와서 어려운 일을 겪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안타깝지만 이 책의 내용도 거의 그렇다.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라서 내 인생이 전개된느 그대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나만큼이나 이런 이야기에 신물 난 이들이 있다면 사과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독자들이 공감하리라 기대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또한 고향을 떠나 쓰레기 같은 집을 비싸게 얻고, 취직했다가 해고당하길 반복하며 예기치 않은 백수가 되기도 햇던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는 나쁜 선택을 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결과를 얻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첫해를 견딜 수 있는 팁이 한 가지 있다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그리하여 이 그래픽 노블을 펼치면 가장 먼저 접하는 이미지. 바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에서 새벽 세 시, 파자마 차림으로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줄리아 워츠의 모습이 한 페이지 가득하다. 이상과 현실의 갭이 가장 클 때, 그녀는 그 틈새로 도망칠 줄 아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다. 즐거운 일자리, 오크 마루와 커다란 창문의 집, 화목한 가족과 완벽한 남자친구가 아닌 구질구질한 서빙, 침실을 세주고 큰 벽장에 들어가 잠자야 하는 집, 마약 중독자 오빠와 장거리 연애 때문에 생기는 짜증이 나는 일들. 다른 누군가가 그 도시를 꿈꾸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는 그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장소를 바꾼다 하여 문제의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이동하는 것에 따른 책임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줄리아 워츠의 만화를 읽으면, 어쩌면 장소는 어떠한 문제의 근원이 아닌 문제의 조력자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겪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단, 그 장소 안에 똑같은 작가가 몸담고 있어도 장소는 드러내지 않고 뒤에 숨어서 어떤 일은 하게 해주고, 어떤 일은 은근슬쩍 가려주기도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을 슬쩍 내어놓기도 한다. 물론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 혹은 이하이다. 상상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는 세상에 없는 원더랜드 아닐까. 이 상상의 이상과 이하가 차례로 펼쳐지는 것이 줄리아 워츠의 만화.






 작가 자신이 2007년 챕터에서 비교한 바에 따르면, 맛있는 베이글과 피자, 맛없는 인도음식, 사계와 거미줄 같은 지하철,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며 바쁜 듯한 현지인, 그리고 덤으로 꼬질꼬질한 작가 자신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그곳에서 얻은 첫 번째 집은 재앙이었고 두 번째 집은 거지 소굴이었다. 거지 소굴이라. 자학이라는 장치는 참으로 기괴한 멋을 지녀서,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으면 그 기회를 놓친 타인에게는 이해와 공감이라는 감정만이 남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 거지 소굴에 왜 왔나' 하며 이리저리 뒤척인다. 마침내 밤을 새우고 아예 비상계단으로 나가 뉴욕의 일출을 보며 하는 생각. '샌프란시스코가 그리워.' 아, 만약 작가가 청년다운 패기를 내세우며 멜팅 팟이 어쩌고 했다면 화가 날 뻔 했다. 그는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 만화는 그렇게 기발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솔직한 감정이 더 기발해 보인다. 모두가 정성껏 치장한 무도회장에서 폴리냐크 부인의 수수한 모습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스스로가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 작은 일에 화내다가 신문 정치면을 보고 스스로 얼간이라고 자책하는 광경. 





 그래서 그는 저녁 7시에 벌써 잠을 자느냐는 말에 '실패만 하는 인생인 너무 피곤해서'라고 답하며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일자리를 구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뉴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사는 것이다. 특별한 일 없이 꾸려가도 종종 하루하루가 매달 서른 하나, 혹은 서른 개의 다른 얼굴로 보일 때. 죄책감이나 기다림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다가도 기다리던 전화 한 통에 '정말 다행이에요! 윽, 배고파.'라는 말이 나올 때. 그의 만화는 때때로 우습거나 불경스럽다. 비행기를 타기 전 소지품 검사를 너무 꼼꼼히 하는 직원, 엄마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앞서 집안에서 엄마가 보아선 안 될만한 소지품을 죄다 침대 밑에 밀어 넣지 못했을 때의 그녀는 난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클린턴이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텔레비전 앞에서 그녀는 '에이, 했네'라고 말하고 산타클로스 퍼즐이 정치와 같다는 점을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다는 점에서 온건한 자의식을 보인다. 다른 사람의 우울증에는 효과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우울증에는 놀랄 만큼 형편없이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다른 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묘한 위로를 보여준다.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랍니다. 뱃살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말이 주는 자학의 딜레마, 굳이 하려고 하지도 않고 건네는 작은 일상의 동질감.






 밤 아홉 시의 이웃집 음악 소리에 짜증을 내고, 텔레비전 재방송, 라디오 들으며 그림 그리기, 와인 한 병과 함께 일찌감치 침대에서 팝콘을 먹으며 책 읽기. 해고된 다음 드는 차라리 후련한 감정. 이따금 탈출해서 가장 퀴퀴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놀고 있는 그의 뇌,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돌아오는 오래된 지갑.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장소를 각인시키는 각각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뀌거나 이어지는 배경과 풍경, 장소가 사람에게 말을 걸기까지는 걸리는 시간. 곧, 지문이 인식되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채우는 느낌과 생각. 중요한 것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것은 쌓여서 역사를 만든다. 그는 2009년에는 전업 만화가가 되어 웨이트리스의 앞치마를 더 이상 입지 않게 되었다. 가족은 다른 방향으로 회복되고 있으며 술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물론, 어질러진 방의 소파에 앉아 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읽는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은 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게 변한다. 내 생각으로는 줄리아 워츠는 후자 쪽이다. 







 때로 잘못된 걸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더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 처럼 보여. 

 하지만 다 같은 곳에 있을거야. 망설이지 마. 좋아하는 곡을 틀어. 뭘 좋아하는지 말해줄래? 

 계속 해. 머리카락은 그대로 늘어뜨려도 돼. ... 곱슬머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해. 

 가끔은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괜찮아. ... 




 이미 해봐도 가질 수 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네가 원하는 걸 해. 

 너는 어디선가 너 자신을 찾겠지. 어디선가,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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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2 0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 커피 홀릭 철학자와 커피 전문가 21인이 커피와 철학을 논하다
스콧 F. 파커 외 엮음, 김병순 옮김 / 따비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자동판매기 식당, 에드워드 호퍼. 캔버스에 오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따르세요.

 

 이제 진한 주황색 커피 같은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니까요. ... 커피는 보통 사람들에게 황금같이 귀중한 존재죠. 마치 황금처럼 모든 이에게 호사와 고결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고마워요, 후안 발데스. 

 -밥 딜런, <테마가 있는 라디오 시간 Theme Time Radio Hour>.

  '커피'. 방송 시작 멘트.

 



 마분지 슬리브를 끼운 종이컵. 라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치노 종류의 카페인. 코너마다 늘어나는 커피 프랜차이즈, 독립 매장. 백 가지 커피, 백 가지 이야기. 하지만 다른 것은 없을까. 어떤 것일 수도,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소중했을 수도, 그저 그런 하루의 순간이었을 수도. 아침을 시작하는 누군가의 일상이었을 수도, 전투에 들어가기 위한 군장의 일부였을 수도 있었을 커피.

 

 

 



 커피에 관한 책이 나왔다. 철학, 이데올로기, 이야깃거리가 되는 테제와 안티테제, 공간과 비공간, 녹색무역과 소비, 장소와 고독, 역사와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을 읽노라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신입 앤디에게 미란다가 '세룰리안 블루'에 관해 천천히 말하며 조소하는 장면이 겹친다. 너의 그 허접스러운 아웃핏을 완성하기 위해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처음 그 세룰리안 블루를 등장시켰을 때 패션업계는 환호했었지. 혹은, 영화 속에서 편집자 나이젤이 '너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롱 아일랜드에서 바느질 수업 대신 축구 클라스에 억지로 들어가야 했던 어린 소년에게 이런 잡지는 빛나는 이정표였어. 라고 말하던 대목. 패션이든 커피든, 어떤 대상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우선이다. 읽고 난 다음 좋고 싫음을 가리는 정도의 예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최소한 '전 어떤 무엇을 볼 때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래서 아예 읽지(보거나 듣거나 먹거나) 않아요.'라는 말이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엮음이 울퉁불퉁하여 그 불협화음이 오히려 협화음을 만들어낸다. 깊게 파려는 욕심 대신 넓게 나아가려는 욕망을 택했다. 다양한 화제가 커피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곡선을 그린다. 묵직하고 가볍다. 때로는 그 애정 탓에 약간의 억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자. 커피가 없었다면 발자크의 소설이 없었을까. 커피가 없었다 하여도 철학은 존재했을 것이고 토론의 장은 다른 형태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첫 번째 장, 커피와 형이상학의 각각의 글을 읽노라면 커피가 무엇인가를 오히려 거칠게나마 생각해 볼 수 있다. 커피의 수요가 이렇게 늘어나기 전, 혹은 사람들이 커피를 이렇게 많이 마시기 전에도 잠에서 깨기 위해, 혹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커피 비슷한 무언가는 있었다. 요컨대 어떤 필요로 이미 커피의 본질은 세상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이 오히려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의 본질이라고 치환해 본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먹고 마시고 떠드는 어떤 사람이 있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본질은 존재해 왔었다. 어쩔 수 없게 정해진 운명. 첫째, 혹은 둘째로 태어나는 운명. 프랑스나 가나에 태어날 운명.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마시기도 전에 알 수 있을 때 더욱 또렷해지는 그 굴레를 우리는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것은 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기대. 운명하는 기대가 아닌 운명된 기대를 둘러싼 욕망과 갈등.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타인이 요구하는 본질. 이에 반대해서 스스로 회복해 나가는 실존에의 과정. 역설적으로 1장에서 다섯 명의 저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커피를 통해 떠올리는 실존과 본질의 가치이다. 커피는 매개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은 형이상학이어야 했다.

 

 




 1장의 책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커피는 커피이고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떤 의미를 가진다 해도 커피가 다른 이름일 수는 없다. 단, 중독성이 다른 중독성 물질(발륨, 코카인, 헤로인 등) 낮으면서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음료 자체의 신비로움, 혹은 그 음료에 바치는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책이 1장으로 끝나지 않고 2, 3, 4장으로 엮인 것이 당연하다.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2, 3장을 읽노라면 각기 다른 아홉 명의 저자는 굳이 엮은이로부터 '애정을 담아서 부드럽게'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깊이 바라보고 찬찬히 관찰하고 천천히 마시는 가운데 이들이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보인다. 개인이 사적인 경험, 떠오르는 경험. 그것이 옳은 일인지, 겉치레와 허세 가득한 일은 아니었을지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1장보다 억지가 덜하다. 예의를 갖추어서 다른 가치를 허용하는 조용한 글쓰기가 아래와 같은 생각으로 조용히 빛난다.


 


 


 따분한 근무일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커피는 짧은 휴식과 각성을 제공한다. 돈을 벌어 무엇에 쓸까? 중산 계급의 빠듯한 수입으로 실컷 살 만한 것이라고는 5달러짜리 커피밖에 없다. 단조로운 일터와 고립된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 곳은 어딜까? 유감스럽게도 미국에서 공공의 공간은 소비 공간이다. 커피숍은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외출할 기회를 제공한다. 시간에 쫓기며 통근하는 직장인의 삶에 무슨 낙이 있을까? 비록 차 안에서라도 커피 마실 시간은 있다. 캐러멜 시럽을 탄 커피는 몇푼 안 되는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향락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Brook. J. Sadler.

 


 


 빠듯한 업무 시간, 혹은 해야 할 과제. 또는 깊이 숙고해야 할 어떤 일. 계속 나아가야 하는 어떤 과정 중에서 시간을 남겨두기. 커피가 많은 사람에게 하는 가장 흔한 일은 이런 것일 것이다. 위의 저자가 말하는 커피 일상에 있어서 문화적 공간을 벗어나 다른 방향에서 다른 곳을 본다 하더라도 많은 각색이 필요하지는 않다. 즉, '커피를 마시는 것에 내재한 현실은 우리의 삶에 냉정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하나씩 줄여나가는 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집과 우산을 구한다. 언젠가 걸릴지 모르는 암을 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한다. 혼란스러움, 필사적인 발버둥. 불안함, 소비. 긴박감, 서두름. 이러한 커플링의 한가운데 종종 커피가 있다. 커피는 겹쳐져 정신없는 서류 몇 장 위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구두 굽과 함께, 공사장의 먼지를 배경으로, 혹은 활자와 숫자, 말소리와 함께 있다. 별도의 형식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음료는 기대와 충족이 만나는 점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배경으로 존재하는 공간은 어떨까. 나는 그것이 스페셜티 커피이든, 스타벅스의 커피이든 대부분의 카페가 공항과도 같은 일종의 비장소non-place를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카페 첸트랄, 카페 드 플로르 내지는 데멜 같은 이야기가 있는 몇몇 카페가 있다. 그러나 평소 사람들이 자주 가는 카페는 묘하게 단절된 에어 커튼을 치는 느낌이 든다. 종종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카페는 여전히 비장소이다. 분명히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카페에 혼자 갈 때 나는 누구도 내 공간에 들일 생각이 없다. Will Buckingham이 아래에서 말하는 종류의 고독이 피어나는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숍의 고독은 묘한 종류의 고독이다. 나는 파스칼이 자기 방에 홀로 있었을 방식으로 홀로 있지는 못한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하는 고독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타자와 함께하는 특별한 종류의 고독이다.  (중략) ... 그것은 타자를 배제하는 고독이 아니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서 글을 읽거나 커피를 마실 때, 역시 고독하게 커피를 마시는 다른 사람들과 일종의 동지애를 느낀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두려워할 법한 비 사회, 곧 연대 없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처럼 월요일 오후에 게으름을 피우며 숨는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예의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고독을 존중한다. 우리는 마치 저마다 타자의 고독을 보호해주는 사람인 양 서로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함께 있는 것이다. -Will Buckingham



 



 공기가 사라진 대기. 배경이 멈춘 공간. 그 사이를 채우는 커피.

 음료치고는 꽤 훌륭한 매개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의미를 두고 싶어한다. 종종 부러 어떤 느낌을 간직하기도 한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월요일 오후 조용한 카페를  Will Buckingham은 조용한 배려가 있는 공간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도약을 피하려는 듯, '카페가 일시적인 휴식의 장소라는 것 또한 명백하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영원함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커피 브레이크는 브레이크일 뿐이다. 

 반증에 반증을 거듭하여 이 책을 중간 즈음 읽어가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고 어려우며, 요구에 응하는 일은 성가시고 무언가를 훌륭히 해내기는 더욱 어렵다.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 나에 대한 중압감, 눈을 떠서 잠들기 전까지 닿지 않는 바닥에 닿으려 허우적거리는 와중 커피는 종종 괜찮은 친구가 되어준다. 그곳이 스타벅스이든 블루보틀이든,  길모퉁이 카페이든 간에 커피가 있는 곳은 스톱 버튼은 아니더라도 일시 정지 버튼 정도는 될 수 있다는 것.

 

 

 

 



 커피와 공간에 대한 생각이 2장을 채웠다면 3장과 4장은 녹색 커피, 직접 무역과 커피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을 담았다. 저자가 다르기에 그 굴곡이 마치 비포장도로를 랜드로버로 운전하는 기분이다. 공정 무역을 통해 커피 농민의 삶을 개선해왔다는 한 저자의 글을 읽고 나면 실제로 커피 농민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여전히 거의 없다는 목소리가 있다. 다 읽은 다음 엮은 이 두 사람의 에필로그에는 흥분과 과장이 있다. 시작과 끝이 다른 커피 볶는 공간에 들어선 느낌의 책. 그 책을 따라가는 독자의 호흡도 종종 울퉁불퉁, 비뚤비뚤해짐이 당연하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읽기는 글쓴이의 호흡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리뷰가 원문을 이길 수 없다는 변명으로 끝을 맺기에는 뭔가 좀 허전하다. 마치 아래 영화에 나오는 두 명의 케이트 블란쳇을 본 느낌이랄까.


 

 

 



 앞서 보았던 레비나스의 그 구절을 다시 읽는다. "여기서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게 될 때까지 완벽하게 긴장을 푼다. 사람들이 영혼 없는 세상의 공포와 불의를 견뎌내는 것은, 카페에 가서 모든 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다양한 뜻이 담긴 개념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공포와 불의를 용인하지 않으며, 우리의 대응 능력과 의지를 유지하는 것-우리가 할 수 있는 처지에 있고, 능력이 있으며, 우리의 행동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을 때-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끔찍한 짓과 사건을 접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 세상을 견뎌낸느 법뿐 안라 올바르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견뎌낼 수 없는 것과 마주칠 때 가장 좋은 대응책은 힘겨운 의무감이 아니라 일종의 발명, 곧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는 것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생각과 발명, 창조성이 꽃피는 열린 공간도 없다면, 세상에 어떤 희망이 남을 수 있겠는가.-Will Buckingham



 



-글 속 모든 인용은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발췌.

-영화는 짐 자무쉬 감독, 커피와 담배 중의 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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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3-0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읍~ 왜이리 오랫만에 오셨어요~~~

커피로 이렇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할수 있군요...

이책을 읽지 않았지만,
감히 리부가 책보다 나을것이라고 믿쓤니닷*^^*

Jeanne_Hebuterne 2015-03-05 09:38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2월엔 이런 저런 일들로 산만하고 분주했지 뭡니까. 그러면서 마음이 무엇인가 의아했어요. 그게 무엇이길래 어제와 오늘이 같은데 나만 이렇게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 어제는 잘 읽던 책을 오늘은 한 페이지를 단숨에 못 읽고 이리 딴생각을 하게 하는걸까.
이 책은 여러 사람이 각자 커피에 관련된 생각을 쓴 글모음집이어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제가 읽기에 시기적절했습니다. 칭찬은 잘 읽으셨다는 인사로 들을게요.
대형황사가 곧 들이닥친다는데 3월도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바라요 :)

VANITAS 2015-03-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참 좋아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5-03-05 09:41   좋아요 0 | URL
VANITAS님!

이 책은 사실 저자에 따라 호오가 심하게 나뉘었던 책이었어요. 아무리 커피가 그리 대단한 물질일지언정, 커피가 없었다 해서 형이상학이 없었을거라는 생각은 좀 과장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그 애정의 강도가 커피를 좋아하는 저로서도 좀 갸웃하게 되기도 했거든요. 그치만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읽기에는 꽤 괜찮은 책 같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커피, 공항, 요리, 이런 식의 눈에 보이고 제가 인상적으로 접했던 소재가 참 재미있어요 :)

2015-03-0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6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코이 2015-05-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향이 물씬 풍겨지는 리뷰 덕분에 어떤 책일지 좀 더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Jeanne_Hebuterne 2015-05-14 07:48   좋아요 0 | URL
요코이님, 커피를 마시며 썼어요. 정말로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요즘은 조금씩 읽거나 보는 중인데 의외로 제가 이 두 가지를 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한다는 생각만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가까이서 계속 바라보니 그 전과는 다른 것이 보이더라구요.
요코이 님 댓글을 보고 나니 또 커피 생각이 떠올라요! 고맙습니다 :)
 
인문학, 공항을 읽다 - 떠남의 공간에 대한 특별한 시선
크리스토퍼 샤버그 지음, 이경남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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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려면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야 한다. 일단 앉으시라. 내 좌석은 통로 쪽이고 당신은 창가 쪽이다. 갇힌 셈이지. 당신은 페이퍼백을 펼친다. 지난봄에 히트를 친 법정 스릴러다. 혼자 있겠다는 뜻이로군.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사실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멋진 남자 승무원이 음료수를 가져온다. 내게는 얼음 조각을 하나 넣은 2퍼센트 저지방 우유를 주고 당신에게는 와일드터키를 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활주로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어두워진다.

-업 인 디 에어, 월터 컨.


 


 


  다른 날. 밝았던 낮이 사라진 캄캄한 어둠, 그러나 눈앞의 무언가를 볼 수는 있을 정도로 일부러 꾸민 어둠 속에서 인체공학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목을 쭉 펴고 사방을 본다. 통로 건너편 11시 방향의 남자의 모니터에는 운항정보가 보인다. 그 옆에 앉은 누군가의 모니터에는 액션 영화가, 그 뒤에서는 아예 모니터를 끄고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다. 옆의 누군가는 리딩 라이트를 켜고 책을 읽는데,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페이퍼백인 것을 보니 필시 댄 브라운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페이지 터너 같은 책인듯하다. 늘 항공기 안은 춥고 또 추워서, 담요를 세 개 정도 둘러서 얼굴만 빼꼼 내놓고 다시 눈을 감는다. 때로는 너무 갑갑해서 내리고 싶고, 때로는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안도감에 좋아한 공간, 비행기 안. 연락 두절의 매혹과 기다림의 마법을 담은 공간. 이륙할 때 중력이 가볍게 사라지고 착륙할 때 중력이 삶의 무게만큼 느껴지던 곳. 재빨리 스쳐 지나가던 공항을 떠올린다. 새를 닮은 비행기와 여행 가방을 닮은 공항에 관한 책을 읽는다. 

 다음 떠남을 계획하거나 이전 떠남을 반추하는 이에게 알맞은, 공간에 대한 관점을 또렷이 밝힌 글.

 

 


 


 

 이 책은 공항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일상에서 회자되는 평범한 공항 이야기면서 공항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공항의 겉모습에 감추어진 당황스럽거나 언짢은 이야기다. 나는 미국에서 공항이 현대생활의 특정 개념을 보호하는 방식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공항은 사람들의 정체를 수상히 여기거나 신분을 확인하는 장소이고, 남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장소이고, 사생활이 먼저냐 국가 안보가 우선이냐를 놓고 갈등을 빚는 현장이며, 애국심과 기동성의 특권을 조장하는 종합 공장이다. 동시에 공항은 금방 잊게 되고, 때로는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 포괄적인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항은 통과하기 위해, 그것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설게되었다. 인류학자 마크 오제가 비장소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의 전형이 공항이다. 또한 공항은 장소와 지역과 표준 시각의 문제와 얽힌다. 이런 것들도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주제의 일부다.

-책 앞부분에서.

 

 

 

 

 일상이 이토록 어수선하고 불확실한데, 이만큼 매력적인 휴식처가 또 있을까? 요컨대 공항은 떠나기 위해 만든 곳,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한 곳. 저자는 공항이 떠나기 위해, 그것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설계된 곳이라는 점을 짚는다. 국경을 넘기 위해 만든 곳이고 통과해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만든 장소. 마크 오제가 설명하는 non-place는 바로 이런 장소, place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라면 참지 않을 일을 공항에서는 참는다. 반면 일상생활에서라면 불가능할 정확성을 공항에서는 기대한다. 정확하게 사람을 가려낸다. 사람이 하는 일. 심증만으로도 사람을 검문한다. 카프카가 보았다면 '성'의 장소를 '공항'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부조리하면서 복잡하고, 간단하면서도 비일상적이다. 

 911 이후 조지 부시가 patriot act에 서명하는 모습은 샤를 드골 공항의 공항 책임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승객의 흐름을 끊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장면과 이상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은 흡사 이 책에서 발췌한, 공항 안 무빙 워크에서 일부러 반대로 걷는 운동을 하는 인물이 일으키는 생경스러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장소라고 하기에는 기묘한 곳. 

 인천국제공항만 하더라도 그곳에 가려면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량을 도심에서 달려야 한다. 중국의 베이징은 고속철로 한 시간 반의 거리를 칠 분으로 줄였지만, 늘 세계각국의 공항을 오가는 길은 평균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의 거리. 그것이 버스이거나 승용차이거나 택시이거나 리무진이거나, 베이징의 경우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지리상의 거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곳은 늘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도착지와 같은 출발지, 떠남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요컨대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본 공항은 씨실과 날실이 모여 하나의 텍스타일을 만드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읽기'는 어떤 의미인가? 또한, 그 장소 자체를 읽는 것은 어떤 일일까? 사람들이 떠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은 무엇인가? 모든 일터가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공항도 마찬가지일진대 그곳의 숨은 무늬는 어떤 것일까? 911 이후 공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보안심사, 탑승절차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복잡해졌다는 것, 제한사항이 더 늘었다는 점 말고 또 무엇이 달라진걸까? 계산하고 수거하는 수하물 공간은 어떤 곳일까? 저자의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흩어진 구슬을 한데 그러모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손바닥에 들어 올려보기도 하는듯 다각도에서 조망된다. 총 아홉 개 장으 따로 흩어진 이야기는 책장을 덮을 무렵이면 일상으로 희미하게 사라진다. 

 

 


 


이러한 각 장을 채우는 것은 이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 시, 소설, 논문, 신문기사, 저서 등이다. 그것은 마크 오제의 비공간이기도 하고 제인 베넷의 존재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보낸 일주일 이야기이기도 하며 디프랑코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은근한 안개가 책장 속에 자리 잡기도 한다.


 


 



차를 기다리며



짐 옆에 서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스틴텍사스 공항-내가 탈 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전처는 집에서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아들 하나는 좀처럼 볼 수 없다.

다른 아들과 그의 처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내와 양딸은 주중을 읍내에서 보내고 보낸다

그래서 그 아인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96세인 어머니는 여전히 혼자 살고, 역시 읍내에 있다.

항상 제정신을 찾는 일이 드물다.

전전처는 특이한 시인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변변치는 않지만                       다 됐다.

올해의 만월은 10월 2일, 나는 월병을 먹고, 데크에 나가 잤다.

소나무 검은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백색 달빛

부엉이 울음소리와 덜걱거리는 사슴뿔,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힘차게 떠오른다.

부극ㄱ성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면 좋을 텐데

지금 우리의 밤하늘도 미끄러져 가버린다는 것을,

나야 못 보겠지만

아니 볼지도 모르지, 한참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하늘에 난 정령의 오솔길을 걸으며,

정령의 기나긴 걸음-거기서 너는 곧바로 다시 떨어져

"좁고 고통스러운 바르도의 통로"속으로

너의 작은 머리를 들이밀어 봐

그러면 다시 그곳일 테니


네가 차를 타기를 기다리며

(2001년 10월 5일, 스나이더)


 

 


 

 독립된 여정, 서로 모르고 알 생각도 없이 한 장소에 일시적으로 모이는 행위,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생기는 묘한 매력을 저자는 '버려진 땅과 뜰과 건물 지대, 여행객의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대기실과 역의 플랫폼, 계속되는 모험의 가능성으로서 도망자의 기분이 계속되는 우연한 만남의 장소, 할 일이라고는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뿐"이라는 느낌이 드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버려진 땅, 생명이 움직이는 땅,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기다림이 지배하는 공간. 이 공간이 갖는 매력 속을 스미는 기억을, 스나이더는 산문시 blast zone에서 끌어낸다. 단도직입적인 도입, 개인의 연고와 기억, 생태와 천문에서 시가 닻을 내린다. 그 확고한 지점은 독자를 오스틴 공항의 수하물 찾는 곳에서부터 노스 캐롤라이나 생태 지역으로 이끌고 간다. 별이 떠도는 법을 생각하고 속도를 없앤 느린 시간에 맞춘 시선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생각과 영혼이 흘러가는 길이 은하수라면, 저자 크리스토퍼 샤버그가 인용한 스나이더의 산문시는 컨베이어 벨트를 은하수로 변환한다. 인용 시에서 스나이더는 공항에서 자신이 탈 차를 기다린다. 다른 시 '강인한 영혼'에서 그는 '공항에서 그를 곧 만날 것' 이라고 밝힌 다음 '세관에서 [고은을] 만나기 위해 공항으로' 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왜 하필 공항이어야 하는가. 무대는 바다 가까운 산등성이의 무덤일 수도, 풀이 무성한 야산일 수도 있고 에코 모텔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필 공항이어야 했던 이유를 저자는 '시에서 공항은 주변적이고 삭막하고 단순한 무대 배경으로 존재한다.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공항이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잠시 속도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힌다. 

 

 

 


 

 

 일레인 스케리가 말하는 평범하고 당당한 형태, 일상과 상호작용의 패턴을 가로질러 활보하는 그 무엇의 무대가 되는 곳. 스나이더의 '건물 지대'에서 출발해 오제의 '체험 강도'를 높이는 공간. 속도가 순간 사라지고 기다림이 가득 채워 다음에 일어날 일만을 기다리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은 잡지를, 페어퍼백을,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킨들을 읽는다. 그러나 무엇을 읽을 수 있는 라운지와는 달리 수하물 앞 컨베이어 벨트에서는 모두가 뚫어져라 가방이 고무 커튼을 통과하거나 검은 입구를 통해 나오는 광경을 주시하며, 말 그대로 '기다림' 말고는 할 일이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른 점은 정확한 때와 대상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이며, 카프카의 '성'과 다른 점은 언젠가는 다른 장소로 진입할 것이라는 '다음'의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여러 모로 이 공간은 확신과 불확실성이 만남으로서 그 특징을 갖는 공간이다.


 


 


그 불확실성이란 무엇인가. 

 911 이후의 불안. 심증만으로도 길게 누군가를 심문할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아는 누군가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출입국심사대의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오는지 가는지 신경 쓰지 않으련다'와 '당신이야말로 미래의 불체자 혹은 테러리스트'. 크나큰 환대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후자의 경우가 사람 신경을 긁는 것은 오로지 심증만으로 생면부지의 관리가 승객을 세컨더리 룸으로, 심하면 입국을 불허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샤버그는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마틴 에이미스)을 인용함으로써 추측과 무작위의 가상영역과 연결되어 표준화된 전산과정을 이야기한다. 

 

 

 




"가방은 직접 꾸리셨습니까?"

무함마드 아타의 손은 이마를 향해 움직였다.

"예."

그가 말했다.

"가방을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까?"

"예."

"누가 운반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비행 일정이 시간대로 진행됩니까?"

"중간에 갈아타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가방들은 곧장 갑니까?"

"아니오. 로건에서 다시 수속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절차를 또 겪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테러행위가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룩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세상의 지루함에서 순증가를 이룬 것만은 분명했다. 세 가지 질문을 묻고 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데드타임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항공기 운항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무함마드 아타는 더 많은, 아마도 훨씬 더 많은 데드타임을 지구 곳곳에 남겼을 것이다. 테러가 또한 가장 확실한 적을 적극조장한다는 것은 적절한,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지루함이라는 적 말이다.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 마틴 에이미스





 911의 간접적인 발현은 공항에서였다. 수수께끼로서, 해석해야 하는 장소로 드러나는 공항. 일상과 떨어져 있고 구분할 수 있는 장소. 이야기를 왜곡하거나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장소.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에서 911 테러범의 하루를 공항에서 재현함으로써 그곳은 출입구이자 걸림돌이었으며 세세한 내용을 기억하고 다시 말하게 한다. 같은 소재를 우리는 상상하고 재현할 수 있으며 이 자체는 911을 기억하는 것, 혹은 중재하는 것을 복잡하게도 하고 시간을 중첩하기도 한다. 설화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 아닐까.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하나의 아우라를 뿜는 일.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아우라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아우라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서 폐쇄 회로와 공항 검색대, 출입국 수속과 서류 더미, 감시 카메라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그 모든 문답과 계획, 감시와 이동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육하원칙이 이보다도 존중받는 공간이 또 있을까? 또렷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불안할수록 순서는 복잡해진다. 전신 스캐너 앞에서 신발과 노트북, 핸드폰까지 스캐너에 맡긴 채 신체를 검색한다 해도 마약은 누군가의 몸속에, 폭발물은 100밀리리터 이하 액체 병이 아닌 항공기 좌석 밑에 미리 장착될 수도 있다. 혹은 저자가 직접 보았다는 증언에 따라 음료수 병 속에 권총을 넣어서 탈 수도 있다. 요컨대 이것은 막고자 하는 자와 막히지 않으려는 자의 대치이다. 그 사이에 수법은 다양해지고 자유는 제한된다. 전신 스캐너까지 등장한다면 이제는 무엇이 더 남았을까. 불안은 높은 밀도의 조사를 동반한다. 계획적인 진부함, 특정 시간 동안 소비하는 일회적 여흥을 거치고 나서 돌아오는 곳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의 존재 확인이다. 늘 내 존재의 압축을 보는듯한 묵직한 수하물을 찾고 나면 여행이 끝났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물질과 부담, 여행이 끝난 후, 공항이 이제 저 너머 일상 속으로 희미해지는 부분. 그 곳에 있을 때는 늘 인생의 어느 부분을 좀 더 깊이 조사받은 이후의 묘한 허탈함이 느껴진다.








사진, 음악 출처는 

SF airport International lounge by Jeanne_Hebuterne

New Yorker cover by Adrian Tomnie

Samson, by Brian Goggin

Music for airports by Brian 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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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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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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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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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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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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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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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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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2 1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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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쁜 꿈을 잊듯 그녀를 잊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고 꾸미고 나자, 그날 현관에서 그녈르 보았던 사람들은 일부러 재빨리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살고 사랑에 빠졌던 사람들은 잊는 데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녀가 했던 말을 한마디도 기억하거나 되풀이할 수 없게 되었고,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도 그녀를 잊어버렸다. 기억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어디서, 혹은 어째서 웅크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 물속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이었는지 그들은 영영 알지 못했다. 그녀의 턱밑에 난 미소에 대한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남지 않은 곳, 그곳에는 걸쇠가 걸렸고, 그 금속 걸쇠에는 이끼가 푸른 사과 빛깔의 새순을 붙여놓았다. 빗물이 빗발친 자물쇠를 손톱으로 열 수 있겠다는 새악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을 나누고 쪼개지 않고 사는 여자.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과거의 악몽, 잔인한 미래에의 상상 대신 오늘을 사는 세서의 이야기. 악몽과 상상 중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지점에서 쓰임새 없이 노래하는 글자들. 그 글자들은 글씨가 되어 나를 오랫동안 휘감았고 나는 그 무용한 것들이 도리어 유용해지는 물결을 지켜보았다. 강물이라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을 것이었고 바닷물이라면 그래서 도리어 영원히 달이 이끄는 순환에 몸을 맡겼을 것인데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이것이 강물도 파도도 아닌 그 속에 발을 담근 사람의 이야기였다. 강물의 흐름과 파도를 지나쳐 그 안에 발을 담근 사람을 보는 힘. 나는 그것을 토니 모리슨의 도도한 문학적 성취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





 작가의 상상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건으로부터 이러한 들여다보기가 시작되었다.

 1856년, 켄터키 주 노예 마거릿 가너는 도망 끝에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에게 붙잡히기 직전, 두 살짜리 딸을 칼로 베고 다른 자식도 죽이려다 실패한다. 체포 후 재판에서 예상 밖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형사법과 재산법의 갈등이었다. 마거릿 가너를 인간으로 보고 살인죄를 적용하여 처벌할지, 아니면 도망노예법을 적용해 잃어버린 재산으로 간주, 무죄방면할지를 고민했다는데 마거릿 가너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끝까지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유를 찾아주다가 노예의 삶을 피하는 차선으로 아이를 죽이는 마거릿 가너의 이야기는 흑인이 신문지상에 나타날 수 있는 접점, '아무것도 아닌' 것과 '유혈이 철철 넘쳐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것의 중간 지대에 있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는데, 이것이 어쩌면 제도와 권력의 맹점이 아닐까. 이 눈먼 지대에 가장 먼저 있는 것은 제도. 토니 모리슨이 그녀의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노예제는 무척 예측 가능한 무엇이다. 노예제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오히려 작가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제도가 있었고, 이런 일과 저런 일이 있었고, 이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토니 모리슨은 무척 진실하게 탐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머리와 마음을 거쳐 손끝으로 나온,

그 목소리는 이러한 것들.


죽은 아기들의 원혼으로 가득한 집.

어느 날 돌아온 아는 남자.

그 남자를 맞이하는 도망 노예 여자와 그녀의 딸.

그 여자가 생사를 알 수도 없는 그녀의 남편.

결혼식 없는 그들의 결혼식.

남편이 평생의 돈을 내어주고 자유를 얻어준 그의 어머니.

어느 날 돌아온 그 남자는 몰랐던 그 여자의 살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손금도 없이 빛을 뿜는 빌러비드.





 형용사 빌러브드가 명사 빌러비드로 변하는 순간, 이야기는 빛을 발한다. 

 이 빛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세서, 결혼식도 없는 결혼을 하고 여자 흑인 노예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겪고, 즉, 살아남기를 자처하며 딸 덴버를 낳고, 덴버가 어머니와 죽은 아기 언니를 지켜보는 일. 

 하늘이 파랗거나 검은데 피부가 없는 사람이 물 위에서 다리 위에서 왔다가 사라지고 좋은 몇몇 백인이 있으나 나머지가 남은 일. 이 사이를 훑는 것은 토니 모리슨의 열정과 질척거림을 없앤 형용사와 동사, 명사다. 그것은 그저 증오에 차거나 그저 결의에 찬 것이 아니다. 그 안의 모든 단어가 발버둥 치거나 소실점을 향하여 가기만 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한풀이에 그쳤을 텐데,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는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1873년에 이르자 집에 남은 희생자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 뿐이었다.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것은 124번지. 그 집은 작가의 시선이 열리고 독자의 마음이 머무는 곳인데 하나의 숫자로만 나타난다. 

나는 모르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열린다. 

다른 곳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곳, 이 특별한 집은 124번지이다. 



 소설의 첫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소설이 집이라면 모두가 드나들고 가장 크고 육중한 대문이 있을 것이다. 곁문이나 뒷문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별채가 있을 수도, 헛간이 있을 수도 있다. 독자는 초대장을 들고 그 집 대문을 통해 정원을 걷고, 현관문을 열고 집주인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처음부터 집 대문을 쉽게 열어주지는 않는다. 작가의 시선이 집의 특정 부분을 보여주었다가 감출 때, 독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는 쪽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124번지, 갓난아이의 독기, 그 집 여자들, 세서, 덴버라는 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때,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려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어떤 형용사도 없는 124라는 숫자 앞에서 자기 집 주소를 가진 흑인이 가질 당당함, 123번지나 125번지와 다를 무엇을 느끼기도 전에 드러나는 것은 한이 서린, 갓난아이의 독기, 이런 설명이다. 무엇도 아닌 나름의 '특징'을 가진 집. 언어가 가는 그 길을 벗어난 언어로 이루는 문학에는 제도가 아닌 인간이 서 있다. 일상을 느끼고, 그 일상이 깨어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보고, 그 혼란을 딛고 일어나려 애쓰고, 어떻게든 무서운 기억을 잊으려 애쓰고,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도 해보고, 기억이 가하는 생생한 협박에 무릎을 꿇기도 하는 한 개인의 경험. 통제하면서 놓아주는 일. 노예 생활 이전에 개인의 경험. 그 생각의 생생한 무서움과 두려움, 재갈을 물려도 생생해지는 눈빛, 애써 가져오려 했던 귀고리, 아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그런 것. 





 세서에게 미래는 과거의 접근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덴버가 살고 있다고 믿는 '더 나은 삶'이란 단순히 과거의 삶이 아닌 삶이었다.

 폴 디가 바로 '그 과거의 삶'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잠자리로 기어들어왔다는 것도 더 나아진 일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 혹은 그가 없다 해도 미래라는 생각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덴버를 위해서도, 세서가 해온 대로 여전히 그애를 기다리고 있는 과거부터 그애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거릿 가너 사건이 대표하는 역사성에서 출발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그 한 여자를 책임감, 자유, 위치, 본질, 의미를 찾아낸다. 세서는 모든 것을 아는 여자, 하나의 열쇠 구멍이었다. 빌러비드라는 열쇠가 매끄럽게 들어가서 여는 잠긴 문이기도 했다. 맞는 열쇠를 찾을 것. 작가의 끈질긴 펜은 변명도 수치도, 당당함 마저 없이 아주 자명하게 모든 것을 고스란히 떠맡는 세서를 보여준다. 자식들에게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할 수 없어서 자식의 머리를 붙잡고 톱질을 할 수밖에 없는 엄마. 가너 부인에게 결혼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묻는 노예 여자. 학교 선생이라 불리는 노예 주인에게 수치스러운 취급을 당하는 노예 하나. 폭행, 성폭행, 매질을 당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는 커졌다가 줄어들고, 티끌만큼 작게 사라졌으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세서의 생각은 매우 단호했다. 자유가 지금과 같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촌스럽게까지 들리는 지금에 와서 판단하건대 세서 이전의 마거릿 가너는 토니 모리슨의 판단처럼 '지성과 잔혹성, 그리고 자유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불사할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그녀 앞에 빌러비드가 나타난다. 묘석에 디얼리 빌러브드 를 새길 수 없어서, 십 분 동안 몸을 허락하고 빌러브드라고만 새긴 묘석의 주인공이 나타나던 날, 세서는 죽도록 오줌이 마려웠고 양수가 터지듯 오줌 줄기를 뿜던 그때 빌러비드는 사막을 건너온 듯 물을 켠 다음 죽음에 가까운 잠을 잔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만 바라볼 수는 없는 관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였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파괴적인 관계. 그 관계의 사슬이 마침내 끊어지고 빌러비드가 진짜 빌러비드가 되는 것은, 세서의 얼음송곳이 빌러비드가 아닌 울타리 너머 아른거리는 모자를 향할 때였다. 단 하나,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간절했을 뿐이다. 자식에게 무서운 기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의 목을 향했던 톱이 그 날을 다른 쪽을 겨눌 때, 이것은 기억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잊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바깥, 뉴욕 타임즈와 1987년 했던 작가 인터뷰를 보면 아래와 같은 회답이 드러난다.





''There are certain emotions that are useful for the construction of a text, and some are too small. Anger is too tiny an emotion to use when you're writing, and compassion is too sloppy. Almost everything that makes you want to write, or feel like writing, is not useful in the act of writing. So it's the mediation between those two states, the compulsion and all those feelings, that make you compelled.''


"소설을 구상할 때 몇가지 유용한 감정이 있지만 어떤 것은 너무 작아요. 분노는 글을 쓸 때 너무 사소해 보이고 연민은 질척거리죠. 사람들이 쓰고자 하거나 아니면 쓰고 싶어하는 거의 대부분은 사실 글을 직접 쓸 때엔 그리 유용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대부분의 느낌과 충동 사이를 잘 조절할 때 글이 나옵니다."

-토니 모리슨, 1987년 8월 26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




 육천만 명 혹은 그 이상. 소설의 앞장에 있는 그 숫자 앞에 생략된 단어는  devoted to 이기도, written by이기도 하지만 그 숫자는 어떠한 단어 없이도 오롯이 혼자서 그 힘을 다한다. 내쫓고 내쫓기지만 요요처럼 돌아오는 역사 앞에서, 그 과거가 미래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세서가 과거의 정면으로 부딪쳐 자기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순간이다. 아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와서 들여다보기만 해도 거울이 깨지고, 케이크 위에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가 찍히는 과거. 읽고 나면 세서의 텅 빈 눈빛 뒤로 작은 의문이 떠오른다. 

 당신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습니까?



 


 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124번지 뒤로 흐르는 시내 근처에는 그녀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발자국은 아주 친숙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발을 대어보면, 꼭 맞을 것이다. 발을 빼면,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발자국은 다시 사라진다. 

 곧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발자국뿐 아니라 물과 그 물 아래 있는 것 전부가 잊힌다. 남는 건 날씨뿐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고 행방이 묘연한 이들의 숨결이 아니라 처마를 스치는 바람, 혹은 너무 빨리 녹는 봄의 얼음이다. 그저 날씨뿐. 물론 키스를 바라는 아우성도 없다.


Beloved.








따옴표 속 인용은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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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
실비아 플라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잊었다. 전기밥솥에 밥도 넣지 않고 코드를 꽂아둔 채 '보온'을 눌러둔지 까맣게 잊었다. 마지막 취사가 기억나지 않았으니 얼마 동안 부푼 공기를 애써 덥혔는지. 잊지 말아야지. 오랫동안 밥통을 쓰지 않을 때엔 반드시 코드를 뽑아 두자. 그러나 이를 어쩌나. 오늘 아침밥이 한가득 남아있다. 이대로 먹지 않고 잊으면 이제 내리 석 달을 밥통은 신이 나서 제 온기를 돌려댈 것이다. 나는 이렇게 까마득히 잊는 일이 많다. 잊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망각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잊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육화하여 안에 지니는 일이다. 반대로 잊는 것은 무엇인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일이다. 내다보아서 내 것이 되지도 않고 단열과 방음이 잘 된 방에서 기껏해야 부러워만 할 뿐이다. 무엇의 안쪽에 있는 내게는 무엇의 안쪽만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밖에서 들여다 보는 이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 고단함과 휴식, 바윗덩이와 자갈이 보일 것이다. 서랍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고 싶었으나 내 서랍은 텅 비었다. 잊었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흐린 아침......지난밤 한 시간의 여유가 주는 달콤한 선물. 매일 이럴 수는 없을까? 자닌, 디나, 제스 마리까지 여자 신입생들은 모두 아침을 먹은 뒤 성경책으로 단단히 무자하고는 예배가 마치 버스라도 되듯 놓치면 안된다고 재잘거리면서 교회로 몰려갔어. 나는 무신론자의 커피를 석 잔째 마시며 친구들을 향해 자애로이 웃어 보이고는 실존주의자의 달걀을 먹었지. 다들 착하지만, 아, 맙소사, 너무 어려. 무 어리다고, 스무 날만 지나면 스물네 해도 끝나고 스물다섯 해를 맞이하겠지. 이렇게 말하면 잔인할 수도 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사반세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이야. 오, 주님. 나머지 칠십오 년은 해가 뜨건 달이 뜨건 폭풍우가 불건 피바람이 휘몰아치건 주님의 영광으로 복되게 해주시옵시서.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이 나왔다. 책장을 넘겼다. 나의 사랑 테디에게 보내는 1956년 10월 7일의 실비아 플라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육하의 거의 모든 것을 안다. 1956년 10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대학 여자 기숙사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에게 편지를 사랑을 담아 썼다. 그러나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완벽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와 '왜' 이다. 둘 중 하나는 어떻게든 추측했도 나머지 하나는 흐릿하다. '나의 사랑 테디' 이 음절이 주는 잘 막힌 띄우기와 시원하게 뚫린 은근함에서 오는 비는 공간.




 

 아마도


 어느 흐린날,


 어쩌면


 두 사람이 손 맞잡고 건너도 충분한 길을 


 언젠가


 에이리얼의 입김처럼 황홀하게 걷는 걸음으로


 다시, 아마도


 '아마도' 였을 것이다.


 



 일요일은 싫어. 편지가 안 오니까. 편지로 읽는 당신 목소리가 그리워. 얇지만 글이 명쾌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책을 읽어봐. 이 책이 바로 나의 실존이야. 화날 정도로 잘 쓴 책이지. 제발 금요일에 런던으로 오라고 이야기해줘. 일요일까지 같 있을 수 있게 말이야.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어. 



 

 '아마도'의 눈길로 책장을 넘기면 테드 휴즈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위와 같은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실이 매듭을 짓듯,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여 보고 싶다는 말로 되돌아간다. 책 읽는 손끝. 육하를 다 끼워 맞추었으나 끝끝내 남는 '아마도'. 바다 우뚝 외딴섬처럼 그것이 전달 못 하는 진실.




 느낌이 말한다. 



 들리세요?



 귀기울이면


 



 나의 사랑 테디. 

 운을 떼던 그녀가 '엄마,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라는 편지로 잠시 옆을 본다. 

 데 듀 콩티노 호텔, 프랑스 파리, 1956년 8월 25일. 그 옆 각주가 따귀처럼 따라붙는다. 플라스는 어머니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증오한다고 밝혔노라고. 이 선명함. 이 불안함. 무지개의 흔들리는 스펙트럼을 무지개 안에서 밖으로 바라본다. 편지는 밝고 경쾌하고 간결하다.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 어떤 것을 보았다는 것. 이 수많은 '것'들이 실비아 플라스와 오릴리아 플라스 사이를 오간다. 종이에 펜과 잉크로 호기심 많은 고양이를, 테드 휴즈를, 호텔 전경을 그린다.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보면 실비아 플라스가 바라본 고층에서 떨어진 깃털이 보인다. 




You walked in, laughing, tears welling confused, mingling in your throat. How can you be so many women to so many people, oh you strange girl? 



 테드 휴즈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사이 끼어드는 그림을 보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에 걸린 실비아 플라스의 말 한마디. 1952년에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으니 이 드로잉북보다 조금 전이다. 그러나 그 후에 끼어든 아빠는 또 다르지 않았나.




At my twenty I tried to die...but they pulled me out of the sack.

And they stuck me together with glue.






 천천히 번지는 어둠과 쉽게 스미는 절망을 섞으려는 시도. 검정과 보라가 1963년 11월 아침에 드러났다. 빛과 밝음이 주는 그림자, 이런 실마리는 그러나 이 드로잉집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찬란한 흐림을 첫 문장에서부터 느낀 것은 오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 보이지 않는 무지개. 그러나 일부 스펙트럼이 눈 끝에 걸린다. 관찰, 그리고 관찰한 것을 표현하려는 움직임. 펜 끝을 세우거나 눕히고, 짙거나 옅게.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 이 전체를 지나고도 독자 안에 틀어박힌 무심한 이는 '무엇을 보았나?' 라는 질문에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을 보았어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작 보아야 하는 것은 다 놓친 채.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하고 모두 잊어서 슬픈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해서이다. 지나치고 잘못 알 정확하지 않은 무엇. 정보와 느낌이 섞인 글. 시선이 어긋난 달의 옆모습. 그 옆모습은 무엇인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고전을 읽으라는 공허한 말. 어떤 영화가 내게 큰 감동을 주리라고 도리어 내가 벼르고 갔던 나날. 느낌이 그저 '좋으니까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것에 그쳤던 그릇된 감상. 너무 볶아서 나오는 쓴맛을 구수함이라고 느끼던 어느 날.




 그래서 그 맛도 향도 느낌도 감동도 길도 정작 나의 길과 일치하지 않았던 허무함. 




 이 안타까움을 읽지 못하면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은 습작에 불과한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라는 고양이를 다룬 수필도, 백석의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시 구절도,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다는 실비아 플라스의 편지도, 결국은 관계에의 애정, 사랑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건만 그것을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속에 숨은 것을 찾아내고 그 밖에 나타난 것을 거울에 상하 좌우 앞뒤 비추어 본다.

사람이 사람의 입으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지리와 멸렬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눈길. 그 길을 눈으로, 발끝으로 내딛는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의 다른 글에서 "my lusts and my little ideas"라는 어구를 남긴 적이 있다. 작은 생각이라는 부분에서 눈이 멈춘다. 붉음이 옅어지고 흐려져 흰색이 되는 어느 지점, 말할 필요 없는 것은 자르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언어로 남기려는 노력. 언어를 업으로 삼는 이의 노력은 이런 것이다. 짧고 간결한 편지 속에는 광기도 어둠도 괴로움도 없다. 아빠, 개자식. 이런 외침도 없다. 그러나 나무는 마침내 헐벗고 만다는 시를 노래하는 시인의 또 다른 생활이 그녀가 눈으로 찍은 자신의 시선으로 들어있다. 




 농게가 득실거리는 록하버 만의 진흙 웅덩이에서 괴이한 광경 목격. 바스러질 듯 메마른 습지 풀이 갯가를 에워싸고 간기가 끈끈히 배어나는 황록색 개펄이 저 멀리 펼쳐진, 물 빠진 갯바닥. 한복판으로 갈수록 질척해지는 개흙 밭. 딱딱한 껍데기를 등에 얹은 채 바스락바스락 붅히 움직이는 흑녹색 농게들로 진흙 바닥이 살아서 꿈트랜다. 큼지막한 연녹색 집게발 하나를 쳐들고 옆으로 기어가는 모양새가 마치 거미와 갯가재와 귀뚜라미를 잡종 교배한 듯 사악하다. 둑 가까이 있던 놈들이 우리 발소리를 고는 잽싸게 둑으로 기어오르더니 거무튀튀한 진흙 바닥에 난 구멍으로 쏙 들어가거나 풀뿌리 사이로 몸을 숨긴다. 물 빠져 시커멓게 드러난 질척한 갯바닥 한복판에서는 농게들이 얕은 진흙의 겉켜를 파고들지만 집게발은 여전히 툭 튀어나와 있다. 바싹 마른 풀뿌리와 메말라가는 홍합 껍데기 더미 사이에 난 수억 개의 구멍에서 집게발과 눈알이 밖을 또록 내다본다. 야트막한 둔덕에 게딱지로 만든 전구가 수억 개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미지 하나. 게들이 저 아래 덩이진 개흙에서 사락사락 살아가고, 기이한 습성이 지배하는 진흙으로 이어진 별세계, 그곳에 대한 괴이한 이미지.









 나는 앞서 망각과 기억, 안과 밖, 앞과 뒤, 바라보기와 그 속에 숨은 것을 생각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습작과 짧은 편지를 보노라면 생각 도중 '아마도'로 뒤덮인 한 구역이, 무엇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녀가 쓴 글은 이미 완성을 거쳐 우리 앞에 있다. 내 앞에, 당신 앞에. 우리는 끝내 그 글을 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끝난 채로, 매듭을 가졌으니까.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테드 휴즈의 생일 편지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선집, 일기와 편지, 드로잉으로 실비아 플라스를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육하원칙을 떠올려도 '아마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보라색이 왜 검정으로 변하는가?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을 때 어떻게 숨을 쉬었는가?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빈 공백을 자기 생각과 상상으로 채워선 안 된다는 것. 언어는 슬프면 슬픈 대로, 비어있으면 비어있는 대로 전달해야 할 그 자체의 역설을 극복하고 결코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을 빈약의 비극을 극복해 가며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문학은 그런 것이며, 이것은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집 뿐만 아닌 문학과 언어 전체에 걸쳐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시계가 쉬지 않아 부쩍 많이 쉬게 된다. 


너절하고 비루한 생각과 텅 빈 밥통의 나날.


그러나 그래도 다행은, 


아마도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현실과 실제에 뿌리내린 삶의 복된 이면과 윤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에 실린 편지글 발췌)


그러니 많이 기억하고 꺼내어 보자. 





*영어 인용은 책 밖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일기.

*한글 인용은 책 안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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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2-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나는 책이네요 ㅅ

Jeanne_Hebuterne 2014-02-17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 하늘바람님. 퍼스나콘이 정말 화사하니 따뜻합니다 :)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나왔을 때 바로 샀는데 리뷰를 조금 늦게 올리게 되었답니다. 책 두께가 얇고 펜으로 그린 연습작품이 많아요. 타이핑한 시 원문, 습작 드로잉, 어머니와 테드 휴즈에게 쓴 편지. 이중에서도 습작이 가장 많아 쉬엄쉬엄 넘기기에 좋은 책인듯 합니다. 보노라면 실비아 플라스는 애정을 듬뿍 담아 테드 휴즈를 그리고(실제보다 미남으로 그렸어요), 일상의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리는 등 좀더 다른 시선을 원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펜끝이 그리는 어떤 관찰과 노력이 엿보입니다. 이제 곧 봄, 퍼스나콘과도 같은 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