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을 처음 본 것은 올해 5월. 동네 길고양이들 밥을 주곤 했다. 그들은 검정 점박이, 카오스 자매, 올블랙, 아메리칸 숏헤어 무늬의 장모종 하나, 그리고 샴 링스포인트. 

 해질녘이면 캔 하나, 건사료 두어 접시, 물그릇 하나를 뒷마당에 내놓았다. 조용한 손님. 말없이 먹고 말없이 쉬다 사라지곤 했다. 

 

녀석을 처음 본 것은 그날 저녁. 

날 기다리고 있었다.


사료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다가가자 얼른 도망친다. 


가지 마. 가지 말고 밥 먹어야지. 밥 먹고 가라. 괜찮아. 밥 먹자.


녀석이 뒤돌아서서 날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는 몇 초, 그때부터 몇 달. 녀석은 내게 다가오더니 물을 마시고, 사료를 먹었다. 먹는 것에 방해가 될까봐 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 안된다고들 하던데 녀석과 매일 눈인사를 했다. 어느날은 일이 있어 해가 진 다음 귀가했는데 불켜진 뒷마당에 녀석이 뒷문을 보고 앉아있었다. 그날도 밥을 주고 몇마디 건네고 돌아섰다. 


펀딩을 해볼까..아니면 동물보호센터에 데려가 볼까..

생각하게 되었다. 녀석은 귀가 쫑긋, 줄무늬 꼬리의 샴 링스포인트. 품종 고양이인만큼 유기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코가 없었다. 생살이 너덜거렸는데 하루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구더기가 보였다. 

펀딩은 시간이 걸리고 동물보호센터는 무료 진료기간이 정해져 있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스노트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아마도 안락사 할 거란 답을 듣고 그 날 저녁, 이동장에 스노트를 넣어 야간응급진료 병원을 찾아갔다. 깨끗하고 24시간 진료도 하는 곳인데 진료소 뒷쪽에서 고통스런 개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병원 로비의 텔레비전에서는 고든 램지가 참가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고 나는 스노트를 꺼냈다.

직원들의 한숨소리. 어차피 예상했지만 그날의 진료 내용은 예상하지 못했다.


보호자분 고양이가 아니고 길고양이라니까 말씀드리는건데요, 안락사 시키세요. 이런 길고양이는 안락사가 제일 나아요.


무슨 병인가요?


피부 암이에요. 안에 구더기도 파고 들어갔네요.더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지만 만약에 단순처치 하실거라면 지금 이렇게 액수 들거고요, 정밀검사 원하시면 견적 낼 수 있어요. 근데 안락사 하시죠?


한참 생각하다가 지금 결정 못하겠으니 일단 데려가겠다고 했다.


스노트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말 달게 잤고 뒷마당에 돌아와서는 습식 캔 하나를 다 먹었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은 더 그러했다. 

아침 일찍 경찰이 서류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병원에서 이야기 들었는데, 길고양이를 어제 데려오셨다고요. 안락사 시켜야 할 고양이라고 듣고 왔어요. 저희가 데려가서 안락사 시킬게요. 


온 세상이 이 조그만 샴 고양이에게 죽으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혹시나 치료받을 가능성도 있는지, 입양될 수 있는지 물어보자 아마 어려울 것 같다고, 최대한 치료하겠지만 의사 소견으로는 치료가 힘든 경우였고 안락사 대상일거라는 말을 들었다. 


제가 뒷마당을 혹시 봐도 될까요? 지금 데려가려고 차량을 갖고 왔거든요. 


그날 내가 불렀지만 스노트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24시간 이내 스노트를 잡아 대령하여야 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시간이 없었다.


조그만 샴 링스포인트. 찡찡이. 스노트 스노트! 부르면 늘 장난스럽게 겅중겅중 뛰어나와 나와 장난을 치고 갸르릉대는 고양이. 하늘같은 파란 눈이 예쁜 용감한 고양이.

나이 열 살 이상 추정, 중성화 된 수컷. 아마도 누군가가 키우던 고양이. 얼굴 절반이 없고 구더기가 있는 늘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나는 그날밤 스노트를 이동장에 불러들였다. 내일아침이면 스노트는 어디론가 가야한다. 시간이 없다. 스노트에게 시간이 없는건지 내게 없는건지 우리에게 없는건지는 몰랐지만 다음날 아침 일단 차에 스노트를 태웠다. 그리고 경찰서가 아닌 동물병원으로 스노트를 데려갔다. 다른 동물병원, 더 친절한 곳. 스노트가 비명을 지르지 않을 곳. 이름은 뭔가요? 어이구 녀석, 성격 참 순하다. 자 한번 볼까. 라고 말을 건네주는 곳. 스노트의 상처를 보고도 한숨쉬지 않는 곳. 


헉 소리나는 진료비를 치르고 몇시간 걸려 구더기도 빼고 상처도 치료했다. 경찰서에 전화해서 내가 입양했다고 전하고 진료 후 스노트를 집으로 데려와 기존의 고양이들과는 격리했다. 이동장 문을 열어도 어리둥절 나오지 않던 스노트는 내가 말을 건네자 마취도 덜 깼으면서 비틀비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손을 잡아라, 내 고양아. 놓지 말고 잡아라. 내가 모든 걸 다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따뜻하거나 시원한 집. 신선한 밥과 물, 가족을 주고 싶었다. 모두가 그렇게 네 등을 떠밀지만은 않는다고, 누군가는 너를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검사결과는 기록적인 비용과 함께 좀더 후에 나왔다. 박테리아와 피부암이었다. 전염은 안되지만 눈에 보이는 상처 뿐만이 아니라 얼굴 대부분을 잘라내는 공격적인 수술을 해야 했다. 아마 눈까지도. 그런 다음에는 재건수술을 해야 하는데 스노트 경우 이식할 피부가 없으니 기증해줄 고양이(과연 그런 고양이가 있기나 하다면)를 구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정 중 항생제를 다량 투여해야 하는데 2 킬로그램 좀 더 넘는 열 살 넘은 스노트가 이걸 다 견뎌내기에는 무리였다. 의사는 수술보다는 항생제를 조금씩 써서 상황을 늦추는 쪽으로는 할 수 있다고, 자기 고양이였다면 안락사를 생각해 보았겠지만 고양이의 경우 살겠다는 의지라든지 성향이 중요하니 내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항생제를 택했다. 오늘은 아니야. 내일도 아니겠지. 그럼 괜찮아. 이건 명백히 더 데이 애프터 투머로우였다. 내일은 아니야. 당장의 이별이 아닌 언젠가의 예정된 이별. 나는 죽고 싶을 것이다. 나였다면 스스로의 안락사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스노트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었다. 숨지 않고 장난을 치고 기운도 왕성해서 살도 더 쪘다. 


자만했었다. 내가 잘 돌보고 있다고, 몇 달이 걸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기존 삼남매와 합사도 잘 되었고 스노트는 아직 잘 버티고 있다고. 만약에 힘들어지면 그땐 보내주겠지만 잘 있다고. 삼남매와 스노트는 아침마다 서로 냄새를 맡고 함께 산책도 했다. 12월, 스노트는 잘 뛰고(내가 잠에서 깨면 늘 나를 쫓아다닌다), 잘 먹고(캔 하나를 한 번에 다 먹는다), 잘 자고, 화장실도 잘 갔다. 나는 스노트가 올해를 나와 함께 보낸다고 확신했다. 그날도 그랬다. 스노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쫓아다녔다. 산책을 나와서 햇빛을 한참 쬐고 바람냄새를 맡더니 팔랑거리는 셜록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 또 햇빛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스노트는 고개를 가누지 못했다. 


조언을 구해보니 곡기를 끊으면 이삼일에서 일주일 내에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고 했는데 스노트는 아침도 먹었으니 아직은 시간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새벽 두 시까지 몸을 주물러주고, 수건에 물을 적셔 입을 축여주고 세수도 시켰다. 새벽 한 시 즈음엔 내가 자장가를 부르자 이삼초간 골골거렸다. 우리의 일과. 자장가와 골골송을 기억하는구나 스노트. 눈물이 났지만 내가 울면 스노트가 제대로 앓지도 못할까봐 일부러 아무일 없는척 했다. 그저 계속 이야기하고 몸 주물러 주고. 지금 가려면 그 안락사 종용 병원밖에 선택이 없으니까 내일 아침 가던 곳 가야지. 수액이라도 맞게 하면 그래도 가는 길이 편안할거야. 그리고는 스노트에게 인사후 새벽 다섯시 반까지 눈을 붙였다.


우리 용감한 스노트. 내일 아침 또 같이 산책도 나가고 우리 재미있게 놀자.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다섯 시 반, 스노트가 똑같이 누웠는데 뭔가 이상해서 손을 대어보니 몸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런데 숨을 쉬지 않았다. 다시 귀를 대보아도 심장도 뛰지 않았다. 혹시나 사람처럼 청신경이 살아있을까 싶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우리 용감한 고양이 스노트, 그렇게 귀여운 꼬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당당한 걸음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첫째날은 눈물만 계속 났고 둘째날은 그리웠고 셋째날은 스노트를 아는 사람들의 인사에 스노트를 묻어주었다. 지금은 없는 용감한 고양이. 나는 누구에게나 스노트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나와 아무리 친해도 반려동물의 의미를 모를 이에게는 일상적으로 대하고 있다. 스노트의 죽음은 오로지 스노트를 처음부터 애틋하게 보아주고, 스노트를 잘 아는 이에게만 말했다. 그리고 여기 내 내밀한 서재에 이제 마지막을 정리를 한다. 나는 이제야 내 가장 고마운 고양이가 떠났음을 깨닫는다. 


안녕, 우리 용감한 고양이 스노트. 못해준 게 많아서 미안해. 사랑하는 스노트, 안녕.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2017년 12월 15일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반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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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12-22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경험을 하셨네요.
보내고 잊는 일까지도 모두 관계 속에 포함되는 일 같아요 피할 수 없는.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좋았던 추억들로 위안을 삼으셨으면 좋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7-12-23 03:25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제가 스노트를 많이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스노트가 가고 나니 제가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제성 없이 스스로 내게 와서 떠날 때까지 극진한 사랑을 주었던 스노트. 죽음이 관계의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관계의 일부일 것이라는 생각을 어슴프레 해봅니다.

아무개 2017-12-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트는 쟌님의 자장가와 따뜻한 보살핌 그리고 사랑만 안고 떠났을꺼라 믿어요.

아이들 떠나보내고 나면 자책하는 마음이 떠나질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과 자책감이 조금씩 얕아지는것뿐
사라지지는 않더라구요.

보호자가 너무 슬퍼하면 아이가 편히 못떠난다는 말 역시 사람을 위해 만든 말이겠지만, 지금 제가 해드릴수 있는 말이 그것 밖에는 없네요. . .


Jeanne_Hebuterne 2017-12-23 03:27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정말 그래요. 내가 너무 슬퍼하고 울면, 스노트가 마음껏 앓지도 못할까, 안그래도 아픈데 나까지 신경쓰이게 하지 말자. 든든하게 아파할 수 있게 내가 울지 말자, 생각하고 스노트 가기 전까지는 꾹 참았는데 첫날은 정말 하루종일 울기만 한 것 같아요.
보내고 나서 혹시나 그랬다면, 혹시나 저랬다면, 이게 부족했던 건 아닐까. 저게 부족했었나. 왜 그렇게 급하게 떠났나..그저 용감한 스노트가, 명랑하고 장난스런 그 걸음걸이가 너무 보고싶었습니다.

sijifs 2017-12-2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I.P. 이제 괜찮기를 바랍니다. 모두.

Jeanne_Hebuterne 2017-12-23 03:28   좋아요 0 | URL
고양이별에서는 아프지 말고 장난도 많이 치고, 많이 놀고..그랬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포스트잇 2017-12-2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고 먼저 떠나보내고.. 동물과 사람 사이에서 아무래도 남은 사람이 겪어야 할 슬픔이네요.
제 세 냥이들 중 하나가 병에 걸렸습니다. 곡기를 끊은지 이틀째인데 완강히 거부하는 그 애 앞에서 어째야 할 줄 모르고 있네요..
... 긴 겨울이 될 것 같아요..


Jeanne_Hebuterne 2017-12-23 03:32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님, 강제급여라도 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너무 하기 싫다는 마음과, 아이가 그래도 살고싶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이 떠올라서 포스트잇 님의 무서운 마음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요. 나아질지도 몰라요, 괜찮을지도 몰라요. 아마 괜찮아질거에요. 저는 마지막까지 스노트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기도해달라고, 그저 하늘에 대고서라도 빌어 달라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그저 무서웠거든요. 모쪼록 괜찮다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포스트잇 2017-12-25 16:57   좋아요 0 | URL
지금 제곁엔 냥이 두마리만 있네요.. 떠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모든게 후회뿐이네요. 내보내달라고 보챌때 그러지말걸, 밖에 볼일만 보고 돌아올줄만 알았는데 그 아인 멀리가면서 부르는 저를 빤히 보기만할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냥이에게 치명적이라는 전염성복막염이었어요. 예방약도, 치료약도 아직없는. 두 아이도 조심해야죠. 항체유무 검사도 해야하는데 아직도 한아이완 가까스로 가끔 기분좋을때 만지게 허락받은 사이라 병원에가서 각종 검사며 접종을 잘마칠 수 있을지.., 저 아이들에게 또 얼마나 큰 스트레스가 될지.. 걱정하면서 연휴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환청처럼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거같아 가만히 귀기울이다가.. 가슴이 아프네요...두 아이도 틈만나면 나가려해서 이렇게 데리고있는게 아닌건가 싶기도하고..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 좋은 소식 못드려서 가슴 아픕니다..

Jeanne_Hebuterne 2017-12-26 08:07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님
저는 스노트가 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씩 이름을 평소처럼 불러보곤 해요. 제 머릿속에서만 꺄응?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겅중겅중 걸음이 보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마음의 준비 같은 건 가상세계인가봐요. 이제 점점 스노트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아직 제 시계는 스노트가 떠난 12월 15일이에요.
참 얄궂은 게, 고양이와 함께 지내면 결정은 내가 하고 감당은 그들이 하는 것이었어요. 집사들은 마음의 묵직함을 늘 어느정도는 안고 가는 것 같아요. 언젠가 너 때문에 많이 힘들 거란 걸 알아. 하지만 그것도 다 감당할거야. 하는 마음이요. 무지개다리 건넌 포스트잇 님 고양이는 지금 즈음이면 스노트와 만났겠어요. 두 녀석 다, 그곳에선 안아프고 잘 놀았으면 합니다.
냥이가 아플수록 집사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말 하는 저도 스노트 보내기 전에 안울려고 혼났다는 ㅠㅠ 모쪼록 식사 잘 챙기시고, 감기 조심하셔요.

Forgettable. 2017-12-2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제가 다 눈물이 나서 ㅠㅠ 그래도 마지막 6개월을 잘먹고 잘 놀며 보내서 다행이랄까, 기특하달까. 마음이 애틋해지네요.

Jeanne_Hebuterne 2017-12-23 03:35   좋아요 0 | URL
하루는 스노트와 놀다가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스노트가 절 열심히 따라와서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안된다고 하고는 문을 닫아야 했어요. 문밖에서 ‘응? 왜 안돼요? 나 안데려가요? 뭐지?? 왜 그래요??’ 이런 눈빛으로 계속 바라본 적이 있었어요. 어리석게도 그 죄책감을 갚았다고 생각했어요.

스노트! 스노트 스노트! 스노트 스노트! 부르면 늘 자다가도 겅중겅중 나타나 골골댔었어요. 눈빛만 마주쳐도 골골골골..

그저 그 하늘빛 눈, 겅중대던 걸음걸이, 오토바이 소리같이 우렁차던 골골송. 그저 그 고양이 하나가 너무너무 보고싶었어요.

하이드 2017-12-2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그저 고양이를 구했을 뿐인데, 왜 고맙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지 않았는데, 고맙다는 마음만 가득하네요. 등떠밀지 않아줘서, 마지막 시간 사랑 받고 고양이 걸음으로 갈 수 있게해줘서 집에 들여 가족이 되어줘서 감사해요. 아이에게 평온하고 안전한 마지막을 선사해주는 댓가가 인간의 상실감과 마음 아픔이라면, 그쯤은 견딜 수 있겠지요. 견딜 수 있겠지요. 이름도 너무 예쁘네요ㅡ 스노트, 스노트.

Jeanne_Hebuterne 2017-12-26 08:00   좋아요 1 | URL
하이드님
이 조그만 고양이가 혼자 아플 때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도 나서주지 않다가, 정작 아픈 것이 발각되고 나니까 왜 다들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싶었어요. 분명히 사람들은 제게 ‘아픈 동물이 있다면 상황 닿는 데 까지 치료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인도적으로 안락사해야한다’고들 하던데, 그리고 그것이 미국 수의학계의 기본 원칙이라던데 전 그들에게 묻고 싶었어요. 당신들이 이 고양이에게 직접 물어봤냐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그게 저 자신이었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것 같지만, 이 고양이는 또 저와 다른 존재니까, 조금은 지켜보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생에의 의지가 강한 고양이,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고양이라는 것이 분명한 고양이였어요.

저는 제가 지금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구나, 싶습니다. 많이 보고싶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하이드님 말씀처럼 용감한 스노트가 우리와 보낸 행복한 시간을 생각하면 전 아무래도 다 괜찮아요. 하이드님 글이 큰 위로와 애도가 되었어요. 이렇게 스노트 가는 길을 함께 밝혀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김칼리다. 태어난 곳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얀 울타리 옆 풀숲. 누군가가 나를 핥아주는 가운데 시커먼 괴물체가 옆에 들러붙어서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새댁을 꼭 닮은 딸이오! 새댁, 애썼소!˝
우리동네 산파 까미 할머니였다. 앞이 흐릿했고 냄새도 잘 맡을 수 없었지만 배가 고팠다.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는데 아까 그 시커먼 것들이 앞을 가로막아서 땅에 뭐 떨어진 건 없나 찾아야 했다. 나중에 눈을 뜨고야 알게 되었지만 그 시커먼 것들은 언니와 오빠였다. 나와는 1도 닮지 않았다. 울엄마 붕어빵은 나 김칼리다. 언니는 나보다도 작았고 힘이 좀 없었다. 오빠는 통나무같이 우람하다. 엄마 젖을 먹으려고 내가 앙증맞게 고개를 돌렸는데 그 커다란 왕발로 나를 밀치는 통에 욕을 안하려다 했더니 체통이 절로 무너진다. 

˝엄마, 우리는 왜 이렇게 달라요? 아빠는 어떤 고양이였어요? 왜 언니는 나보다 작죠?˝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이는 멋진 고양이였지. 네 오빠가 그이를 쏙 빼닮았구나.˝
아빠 이야기를 할 때 엄마 눈은 늘 먼 곳을 바라본다.
˝태평스런 성격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거기다 언제나 당당했어. 어둠속에서 먹잇감을 낚아챌 땐 여우같았어. 그 목털 하며..˝
˝하지만 엄마, 여우는 개과이고 우리는 고양이인데..˝
날 흘겨보는 엄마의 눈빛이 위기감을 조성했기에 난 모험을 떠나야겠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산책을 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언니와 오빠도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기에 나갈 이유는 충분했다. 

˝너는 누구냐˝
태어나서 한번도 보지 못한 빛깔의 요상한 고양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저는 그냥 고양이인데요. 당신은 누구셔요?‘
˝후훗 인간과 살지 않는 아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삐져서 나오면 좋지 않단다. 얼른 들어가렴.˝
˝어머나,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시죠?˝
˝이렇게 어린 아기를 산책하러 보내는 인간은 없지. 게다가 넌 지금 그루밍도 반쪽만 되어 있잖니? 엄마가 그루밍해주다가 뭔가 못마땅해서 그만뒀다는 뜻이지. 즉, 너는 엄마한테 뭔가로 빈축을 산 게로구나. 너희 엄마는 열심히 일해서 너희를 먹여 살리는데 그러면 못써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는 인간에게 의탁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단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만나는 게 호강의 지름길이긴 한데..˝
요상한 빛깔 고양이가 말이 너무 길어져서 나는 자못 궁금한 척 다시 물어보았다. 내가 고객센터 직원도 아닌데 왜 자기 말만 한단 말인가.
˝그런데 당신은 누구셔요? 어쩌면 그렇게 뱃살이 참치처럼 두둑하셔요?˝
˝나는 저 초록색 지붕 집에 사는 앤이라고 해. 그린 게이블스의 앤이라는 책도 내 전생에 나왔지.˝
요상한 고양이는 내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자기처럼 위풍당당한 풍채의 고양이를 일컬어 뚱냥이라고 한다는 것과, 세상에는 캐리어 캣과 집 캣이 있다는 것 하며, 본인은 멀리 러시아에서 건너온 러시안 블루라는 것, 그리고 나는 고등어 태비라는 것. 이 대목에서 그 고양이는 갑자기 고등어가 먹고 싶다며 뒤뚱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등어 태비..고등어..언젠가는 나도 바다를 볼 수 있을까? 그러면 고등어처럼 헤엄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때가 속편한 순진한 시절이었다. 



초록지붕 앤 뚱냥이가 어디론가 뒤뚱뒤뚱 가버린 다음 얌전히 풀밭에 앉아 명상을 하려는데 어디선가 흰 나비가 보였다. 그래! 맹수로 태어났으니 실력을 갈고닦아 보자! 모차르트는 내 나이 무렵 바이엘도 떼고 교향곡 작곡도 시작했을것 같기도 한데 ‘여전사 김칼리‘로 이름을 날려 비단옷을 입고 엄마와 언니 오빠에게 돌아가면, 날 노려보았던 것을 후회할거야! 
흰 날개가 팔랑팔랑 내 눈도 팔랑팔랑 조그만 것이 뭐가 저렇게 날렵하단 말인가 간절하면 하늘이 응답한다는데 몸을 날려서 잡아야지!!!

너무 힘차게 날렸나보다. 

공포영화를 보면 놀랄 때 꺄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던데 너무 놀라니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려고 했는데 몸이 붕 뜨더니 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런데 옆구리는 왜 이렇게 아프고 왜 이렇게 어지럽지..뭔가 허리와 얼마 있지도 않은 내 뱃살을 바짝 조여왔다. 점점 파고들면서 누군가 나를 꽉 움켜잡는 것이......아프고 아득하다. 이렇게 아득한건 처음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땅이 내게로 다가왔다. 사뿐하고 가뿐하게 몸이 가벼워지더니 커다란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커다란 두 눈. 갈고리같은 강단있는 주둥이. 눈이 너무 날카로워서 쳐다만 봐도 화장실이 막 가고싶었다. 
˝다..당신은 누구세요? 저는 칼리라고 하는데요......˝
˝헙!!!!!!˝
내가 ‘헙‘의 뜻을 열심히 생각하려는데 커다란 생명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더니 푸드덕 소리를 냈다.
˝저는 고양이에요. 그냥 고양이요.˝
˝세상에, 커다란 쥐새끼라고 생각했는데 넌 아깽이였구나. 배가 고파서 대충 봤더니..˝
˝당신은 누구세요? 처음 뵙는데요......˝
˝나는 *메이블이라고 해. 아직 어린 참매란다. 저기 멀리 내 매잡이가 기다리고 있어. 사냥하다가 너를 쥐새끼라고 생각하고 잡으려 했는데 하긴 고양이도 저녁으로 나쁘지는 않지...˝
쥐새끼.
쥐.
쥐새끼.
˝으갸갸갸갹 $**())_$@!&*()!!!!!!!˝
너무 화를 냈더니 머리가 띵해지면서 피가 어디론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칼슘이 다량으로 빠져나가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님도 한때 이가 다 빠지셨다는데 이 매새끼 때문에 내 이가 빠져나가면 내 임플란트는 누가 해주며, 그 고통은 어찌한단 말인가. 순간 이성을 잃었더니 육두문자가 검열도 없이 튀어나와버렸고,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누군가 폴-짝! 하고 다가왔다. 동네 고양이들을 다 모은 게 틀림없다. 창피하게...나는 공쥬님인데......
˝무슨 일이냐.˝
**목소리는 페르시아산 고양이처럼 노란빛이 도는 엷은 회색에 옻칠을 한 듯한 점이 박힌 미남 고양이였다. 그 옆에는 뱃살이 도둑하고 덩치가 우람한 고양이도 함께였다.
˝나는 서생 집에 사는 고양이. 이쪽은 인력거꾼네 집에 사는 쥐를 여러마리 잡으신 고양이님이시다.˝
˝저는 칼리라고 해요! 세상에 이 참매 이름이 매이...어쨌든 이 매가 나더러 쥐새끼랬어요!!!!!!˝
메이블은 난처해하며 ‘누구부터 먹을까‘ 하는 눈빛으로 우리 셋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고, 나머지 두 고양이는 낮잠을 방해받아 짜증난다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쥐새끼라는 말에 역시 격분하여 메이블을 노려보았다.
˝쥐새끼라니! 이 아깽이가 무슨 자금을 은닉하고 난세를 일으켰다고 그런 심한 욕을 한단 말인가 매 양반!˝
˝보아하니 우리 고양이 족속을 무시하는 것 같은데 이 아깽이를 욕하는 건 인력거꾼을 욕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내가 족제비의 방귀에도 굴하지 않고 족제비도 잡은 고양이인데!˝
논리가 개판이지만 참자.
˝......살려면 누구나 먹어야 하는데 생과 사가 쥐와 고양이를 가린단 말인가? 나는 피를 보면 흥분하고 일순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사냥본능으로 이 쥐새, 아니 아깽이를 잡았을 뿐이야.˝
˝ 또 쥐새끼!!!!!!˝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참는다지만 이건 너무하다. 그러나 인력거꾼네 고양이가 나를 말렸다.
˝배고프면 내가 쥐잡이의 명수이니 나만 믿고 따라와보쇼.˝
듣자하니 인력거꾼네 고양이는 쥐를 정말 잘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잡는 족족 집사놈이 관청으로 쥐꼬리를 들고 가 돈으로 가로챘다는 것이 아닌가. 인력거꾼네 고양이와 메이블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서생네 고양이와 나, 둘만 남았다. 서생네 고양이는 자신이 집에서 푸대접, 자기 동네 흰둥이님이 낳으신 아기를 모조리 강물에 빠뜨려 죽여버린 몹쓸 인간 이야기 등을 늘어놓다가 눈물을 짓기도 했다.
˝고양이로 사는 건 참으로 복되고도 험하단다. 그 중에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조심해야 할 것은......˝
서생네 고양이라니 뭔가 대단한 묘생의 지혜를 들려줄 것만 같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뭘까!!!!
˝떡이다.˝
떡!
˝그것이 찰싹 입에 달라붙으면 꼬리를 휘휘 내저어도, 앞발을 입에 갖다대어 문질러대도, 심지어 뒷발로만 일어서 이족보행을 해도 수가 없지. 내 경우엔 심술궂은 하녀가 인정사정없이 떼어줘서 살아났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 뭐냐.˝
서생네 고양이라 해서 영리하지는 않구나......
˝왜 한숨을 쉬느냐잉?˝
인력거꾼네 고양이와 메이블이 돌아와서 나를 보고 묻길래 이야기했더니 인력거꾼네 고양이가 코웃음친다. 역시, 체득한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건....
˝어림없는 소리.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족제비의 방귀야. 한번 맡으면 잊을 수 없어!˝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두 고양이가 싸우는데 메이블이 나를 움켜잡았다.
˝족제비라니, 한입거리를 가지고. 가자, 쥐새끼.˝
˝또또또!!!!˝
발톱으로 부리를 할퀴려는데 메이블이 나를 들어올렸다. 몸이 붕 떠올랐다.

..야!!
...리야!!
...칼리야!!!
엄마?
˝칼리야! 너는 무슨 애가 잠을 이렇게 파닥대며 자는거니! 우리 칼리 키크려나보다!˝
메이블이 나를 들어올렸는데..그 전에 인력거꾼네 고양이..서생..떡..
˝잠꼬대를 일어나서도 하는구나 원! 그루밍 받다가 너무 곤히 자길래 안깨웠더니만! 얼른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옛날 칼리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스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칼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 곧바로 놀라서 보니 칼리가 되어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칼리가 꿈에 쥐새끼가 된 것인가, 아깽이가 꿈에 칼리가 된 것인가? 
칼리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이 묘생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


*헬렌 맥도날드, 메이블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온 고사, 호접지몽
을 멋대로 차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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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치즈버거 꿈을 꾸었다.







수타공법 면을 던지듯 더이상 촌스러울 수 없을 것 같은 현란한 리듬, 오로지 치즈버거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만든 것 같은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펼쳐졌다. 크라제를 시작으로 버거킹으로 끝냈으나 기왕 먹는 거 더 경박하게 먹어보리라! 다짐하며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몬드 밀크를 넘어 이제는 헴프 씨드 밀크, 유기농 아보카도, 텃밭에서 직접 따온 에일리움은 잠시 잊고 기름기로 위장을 적시리라 다짐했다. 그러자 친구 하나가 웃으며 말한다.


 "치즈 버거, 달링. 치이이이즈 버거!"


 혀의 굴림도 윤활유를 바른듯 미끄럽다. 베어나오는 육즙이 느껴지는듯한 길다른 모음에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한다. 모든 걸 다 넣은 이 세상의 치즈버거. 그런 것을 먹을 때엔 햇빛은 바삭바삭해야 하고, 바람은 흥얼거려야 한다. 쌈을 먹을 때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가둔 육즙과 경박한 슬라이스 치즈를 한 번에. 엊그제 넷플릭스에서 본 옥자는 잠깐 잊을거야. 번드르르한 기름이 입술에 묻는 것도 상관 없어. 샷 하나 추가, 얼음 작게, 홀밀크 대신 하프 앤 하프로! 이렇게 주문하던 취향도 없지. 치즈버거 올 더 웨이! 대신 아는 사람이 지나가더라도 그가 적당히 나를 못본 체 해 주었으면 좋겠어.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에 부딪히는 얼음은 서글서글한 소리를 내고, 양상추가 이와 이 사이에서 아삭 소리를 내는 날. 달고 짠 감자튀김과 케첩, 소고기 패티와 슬라이스 양파. 

 노래 가사처럼 육식을 그만두고 자연에 귀화하려 하였으나 해바라기 씨와 당근 주스에 지친 어느 날이라면, 
 치즈버거 앞으로.



천국의 치즈버거.

어니언 슬라이스를 얹으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네.

뭔가 특별한 걸 원하거나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야.

난 그냥 천국의 치즈버거.


천국의 치즈버거

미디움 레어 머스터드 추가

어니언 슬라이스를 얹으면 최고


양상추, 토마토.

하인즈57이랑 감자튀김

커다란 코셔 피클과 차가운 맥주

세상에 뭘 더 바래?

-지미 버펫, 치즈버거 인 파라다이스



세상에 이런 가사와 리듬, 코러스와 메인 보컬이 경박하고 촌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음에 놀랐는데, 듣고 나면 묘하게 치즈버거가 먹고 싶어진다. 무려 70년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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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했던 겨자색 재킷이 사라지고 나서는, 바람 없이 서늘한 그곳의 공기가 사라지고 나서는, 무인 순환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문을 나섰던 그 이후 느꼈던 마음의 소용돌이가 우박처럼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일주일 전 오늘 우리는 필레 미뇽을 굽고 내가 가진 값비싼 포도주를 꺼내 환송회를 벌였다. 웃고 떠들고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잠들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공항에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그는 천천히 사라졌고 나는 천천히 무너졌다. 사람들 그림자가 허깨비 같았고 사방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지독한 환지통이었다.




 햇빛을 한가득 받으며 산책하기.

 그의 것까지 같이 커피를 주문하기. 

 군중 속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LGBT  퍼레이드가 이곳에서는 꽤 대중적인 행사이다) 구경.  

 유람선 타기. 

 집에서 스테이크 구워먹기. 

 아껴둔 와인을 따기. 

 항의편지 쓰기. 

 관광명소 둘러보기. 

 동양사 박물관 가기. 

 등산. 

 지도를 보고 길 찾기. 


 


 그 여름, 이 여름, 


 나는 그를 위한답시고 참 안 하던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나의 소중한 손님이었으니, 그가 보고 싶은 걸 많이 보여주고,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차려주고, 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최대한 편안히 머물렀으면 하고 바랐다. 내 마음이 부담되었는지 그는 내 집에 오고 난 딱 사흘 후부터 일주일간을 앓아누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먹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그를 내 고양이들만 무심한듯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가 기운을 차린 후부터는 어디에 가고 싶으냐, 무엇을 보고 싶으냐,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닦달해댔고 일어난 첫날 그는 육개장이라고 말했다. 쇠고기를 삶아서 알맞게 뜯어 넣고, 얼큰하게 갖은 양념을 하여 끓인 국. 그는 한 숟갈 뜨고 몸을 회복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아스라한 모래바람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서걱서걱 불었다. 예쁜 거리도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즐겨가는 가게의 커피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모두가 다 내 욕심이었던 것들.




 "무슨 술 마실까? 너 맥주 좋아하지?"

 "맥주는 사귀던 걔가 좋아하던 거야."

 "너는 걔 이야기 빼면 남는 게 뭐야?"

 "없는 것 같아."

 



 나는 이럴 때 잘 스미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을 뿐.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고양이 봐라! 너무 예쁘지 않냐? 나날이 귀여움을 갱신한다! 이런 나의 말에 지청구처럼 '같이 가자! 불출산!' 이라고 말해주는 그의 재주가 부러웠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말에 난 머리까지 텅 빈 것 같다는 답을 했다.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 어리고 여리던, 교복을 입고 같은 반 교실 책상에 앉아있었던 너와 내가 이렇게 한 달을 같이 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당시에도, 지금에도 스미는 재주는 없는 사람인 채로 남았을 뿐, 동동 뜨다 보니 여기까지 떠밀려 와버렸다고 서로 보며 웃었다. 





 산책, 커피 주문. 비용 대 효율 따져보기. 헤어진 사람 이야기 하기.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집 안에만 일주일 있었는데 핏빛을 찬 손목과 비교해보니 이렇게 살갗이 탔어." 


 "네가 주문해 볼래? 외국 나오면 이런 게 기억에 남더라."

 "그건 너 같은 인간이나 해당하는 말이고, 난 이 나라 말 못해. 네가 주문해."

 "사이즈는? 얼음 양은? 샷은 몇 개? 우유는 무슨 종류로 해?"

 "나한테 왜 그런 걸 다 물어보냐! 저기 메뉴판에 있는 대로 할래! 난 서브웨이 주문도 귀찮아."


 "저기 바다 건너 내가 구경해 보고 싶은 데가 있어!"

 "가볼래? 기왕 왔으니까."

 "입장권이 생각보다 비싸. 그 돈 주고 왜 거기에 가냐!"

 "가보고 싶었다면서!"

 "입장권 가격 알기 전 이야기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 너와 하는 일들, 좋은 고기를 사와서 집에서 구워 먹기, 좋은 와인을 곁들이기, 함께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기는 전부 다 헤어진 걔와 하고 싶었던 것들이야."

 

 나는 그에게 이런 답을 한 적이 있다.


 "너와 나는 좋아하는 것도, 취향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나는 네가 하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어. 아마 너도 그렇겠지."



  

  그가 내 집에 머무는 동안의 중간 즈음, 우리는 숲을 산책했다. 등산이라고 하기도, 산책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무엇을 함께 했다. 산장 초입에서 방문객 틈에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주문한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 내가 말했다.

 "나도 이런 데서 커피 내리고 싶어."

 산장, 사람들이 한 번 왔다가는 곳.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서늘한 곳. 어쩌면 곰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곳.

 그러자 그가 깊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여기서 커피 내리고 싶다. 물 반 고기 반이네."




 산에 가면 사람이 착해진다는데 몇 년에 한 번꼴로 산에 왔으니 착하지 않은 날이 태반일 것이다. 고소공포로 손에 땀이 축축해진 내 손을 잡아주고, 아래를 보지 말고 자기 얼굴을 보라고 말해주고, 부지런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를 보다 생각했다. 아마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높은 산중에서 '저 앞에 먼저 가던 사람 중 하나 당뇨 걸렸나보다.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은 어디라는데....' 하던 그의 말이 쓸데없이 떠오를 것 같다고. 

 꼭,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에서 교통사고의 순간에 '자, 이제 딸꾹질을 해 봐'라고 말하던 남자처럼. 그래서 그 순간이 왔을 때, 이상하게 남은 것은 그가 남긴 낱말 몇 조각, 경쾌한 억양,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이, 집사가 왜 이렇게 늦었나?'하며 고양이 셜록의 앞발을 잡고 있던 그의 모습 같은 것. 나이가 들면서 이별이 자주 다가온다. 오늘 헤어지면서도 겉으로 인사하지 않고 마음이 물러나곤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가 떠난 다음, 그는 내 방에 물건 하나 남겨두지 않고 흡사 여기 다녀가지 않은 듯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다가 세면대의 가그린 병 하나를 보고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제목은 김행숙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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