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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현악 4중주 전곡 [대푸가 포함 8 for 3]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베그 사중주단 (Vegh Quart / NAIVE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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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All time is unredeemable.
What might have been is an abstraction
Remaining a perpetual possibility
Only in a world of speculation.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Footfalls echo in the memory
Down the passage which we did not take
Towards the door we never opened
Into the rose-garden. My words echo
Thus, in your mind.


-T.S.Eliot, from Four quartets.(부분발췌)


 




 야론 질버맨의 영화 '마지막 사중주'의 첫머리를 여는 T.S.Elliot의 시, four quartets. 

 마지막 다음 처음, 처음 다음의 마지막. 시간은 지나가면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와 맞물린다. 존재의 그 극단에서, 그렇다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공간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간 구하기 어려웠다는, 헝가리 출신 베그 쿼텟의 70년대 녹음을 듣는다. 베토벤 푸가 전곡을 품고 있는데 오래전 녹음이라 음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음반의 경우에는 그런 아쉬움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20세기 들어 재평가된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 그중에서도 '대푸가'를 듣는다. 




 우연과 필연, 육체와 영혼, 있음과 없음. 한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정언명령.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져온 베토벤의 메모, '그래야만 하는가?-그래야만 한다'. 이 유명한 메모는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인 Grosse Fuge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낱말과 소리, 공기와 바람이 눈앞에서 잠시 빙긋 웃고 지나가는 느낌. 고개를 돌리면 우연히 지나가는 어울리지 않는 음이 바람을 타고 살며시 귀에 닿는 듯하다. 




 귓가에 스치는 음악을 진행하는 단위로 존재하는 시간. 

 먼저 하나의 시간 단위로서 우리 앞에 놓인 무엇. 

 놓여있다가 지나가고 모여서 만드는 단위.

 반복이 모여 이루는 특정한 박자.

 그러는 동안 말 거는 조성.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목소리가 음역과 음색을 달리하여 조성을 이룬다. 그 음은 서로 부딪히거나 스치면서 시간을 이루고 바꾸기도 한다. 

 현악기의 얇은 선과 탄력을 지닌 진동으로서 드러나는 음정. 하나의 음이 다음의 음을 예고하거나 전환을 암시하는 음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조성. 이때 음이 하나씩만 울리지 않고 동시에 함께 울리는 것을 화음이라고 한다면, 협화음은 무엇이고 불협화음은 무엇일까? 잠시 호토가 엮은 헤겔의 음악 강의를 참조해 본다. 





...울림이 다를 뿐 아니라 상충되기까지 하는 음이 첨가되기 때문에, 협화와 통일성을 직접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통해서 차이점이 드러나고, 상충되어 부디지기까지 한다. 본질적으로 상충되면서 날카로움과 파괴 같은 것을 꺼리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인해 심오한 음악이 형성된다. 그 이유는 서로 잘 어울리는 음의 조합에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음의 조합이 맞섬으로써 참된 통일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논리학에서 어떤 개념을 주관성으로 전개시킬 때의 예를 보면, 본래의 순수한 주관성은 그에 대립되는 객관성의 존재로 인하여 한층 더 높은 개념으로 격상된다. 

 본시 주관성이란 오로지 이념 그 자체로 보면 단순히 객관성 에 대립되는 것, 즉 객관성에 맞서는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성이 객성과 대립하는 가운데, 그 내부로 잠입하여 객관성을 극복하고 해체시킬 때 참된 주과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대립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 그리고 이겨낼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숭고한 본질인 것이다. 음악은음악 자체의 내부적인 형식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내용 속의 주관적인 느낌까지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이 그의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이 실재하는 겉모습, 주관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 작가의 표현하고 느끼는 방법과 감상자의 감상을 뜻했던 것을 돌이켜 본 다음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사중주 대푸가를 들어본다.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주관과 객관이 맞서는 시간의 세계. 주제는 계속 그 모습을 달리하며 변주하고, 이 하나의 대푸가에 변주곡, 소나타, 푸가가 함께 담겨있다. 

 예고 없이 중단되거나 튀어나오는 대립하는 음. 신호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4개 악기가 동시에 맞부딪히기도 한다. 그 불협과 대립의 맞항을 거친 다음 정교하고 경쾌한 끝맺음이 나타난다. 음반 속지의 마지막 악장에 관한 설명을 읽노라면 베토벤의 음악에 관한 고민이 드러난다. 



 

 The last movement is the one tat includes the most gloss. At the top Beethoven wrote :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the difficult decision) and beneath this title included on a star the double musical motif for a question and answer, accompanied by these words Muss es seine?-Es muss seine(Must it be?-It must be). The finale is built upon this double motif. The question and more especially the answer were part of those familiar expressions of Beethoven in which his letters and conversation books abound. In April 1826, a few months before the composition of this Quartet, he had even by way of an avenging jest, composed a canon on Es muss seine to compel a musical amateur to pay up a few pence. It was the theme of that canon that he uses again in the finale, perhaps renewing the jest's original intention, although the development afford to the motif confers upon it much greater significance.

 -Brigitte Massin



 


 이러한 베토벤의 고민을 마주할 때, 연주자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술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부속물이 아니다. 연주자는 작품에 충실히 원작이 의도하는 바를 읽는 것과 동시에 작곡가의 감정을 읽어내고 자신의 개성을 덧붙이기를 꿈꿀 것이다. 헤겔은 훌륭한 연주자라면 작곡가의 정신세계의 수준까지 도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남겼다. 깊이를 불어넣고 텍스트처럼 눈앞에 놓은 음표에 생명을 주는 일.  




 하나의 음이 등장하고 여럿이서 반복하고 증폭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 지점을 바릴리 쿼텟이 차분하고 풍성하게 펼쳐냈다면 베그 쿼텟은 그 깊이를 좀 더 온건하게 강조하는 느낌이다. 어느 한 부분을 너무 날카롭게 날을 세우거나 건조하게 하지 않고 자만에 빠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주. 원하는 빠르기를 유지하되 느린 부분에 가서는 비브라토로 하여금 재량을 발휘한다.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는 긴장감. 산도르 베그의 개성이 느껴지는 표현은 베그 쿼텟이 어떻게 음색의 밸런스를 유지하는지를 편안하게 느끼게 한다. 바릴리, 린지, 부다페스트 등 많은 이가 권하는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중요한 한 부분을 만난 날. 쉼표가 아닌 느낌표로 남는 어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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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브루노 발터 에디션 [39CD LP 사이즈, 독일반]
드보르작 (Antonin Dvorak) 외 작곡, 발터 (Bruno Walter) 지휘 / SONY CLASSICAL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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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때의 반가움. 브루노 발터는 그런 종류의 따뜻함이 보이는 지휘자다. 그 따스함을 아주 오랜 시간 모르고 살았다. 이것은, 내게 브루노 발터를 소개해준 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작은 고마움. 아직 다 모를 높다란 천정의 빛깔이 따스하다.








박스 속 부클릿의 인덱스에는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 전곡, 말러의 1,2,4,5,9번과 대지의 노래, 슈베르트의 일부가 있다. 말러와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브루노 발터를 추천하는 이들이 많은데, 어떤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 지휘자와 작곡가의 특성이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고전 음악을 듣노라면 필연적으로 같은 곡을 여러 지휘자와 악단의 연주로 듣게 되는데, 어느 한 지휘자의 방법이 단 하나의 길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같지 않을 다양한 해석을 더 잘 느끼고 감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곡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 곡의 충실한 해설자, 전달자로 존재하는 지휘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 박스셋의 부클릿은 브루노 발터에 관한 꽤 상세한 정보를 지루하지 않게 전달한다.


그의 생애, 포디움에서의 경력,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게 된 일, 스튜디오 녹음이 부클릿에 상세히 실려있다. 수입반이라 한글은 없지만 영어와 독일어로 실린 이 글은 모두 삼십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쉬엄쉬엄 드문드문 읽어도 꽤 유용할 것 같다. 글 사이를 비집고 참조할 음반 번호가 함께 있어 음반을 한 장씩 꺼내어 들으며 읽으면 더 유용한 글. 잠시 그 안을 보면, 왼쪽부터 브루토 발터, 토스카니니, 클라이버, 클렘페러, 푸르트뱅글러가 함께 찍은 단체 사진, 맨하탄 센터에서의 레코딩 작업 등이 흑백으로 실려있다. 천천히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포디움에서 불빛의 강하고 약함을 조절하듯 음을 고르는 그의 손길이 들릴 것 같다.










같은 지휘자라도 어느 악단과 함께 연주하는가, 혹은 그 지휘자의 어느 시기에 지휘한 것인가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온다. 이 부클릿에서도 그리 전하듯 브루노 발터 역시 그런 변화를 거친 듯하다. 잠시, 부클릿과 이 박스셋 밖으로 눈을 돌려 다른 이의 말을 들어보자. 전 <객석>편집장 류태형의 글을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음반으로 발터의 지휘를 접한 이들은 대부분 발터 최만년의 스테레오 녹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건강이 쇠퇴하고 있을 때의 기록이며,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스테레오 음반들은 발터 전성기의 예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온화한 측면이 너무 부각되고, 청장년 발터의 미덕이기도 했던 경쾌하고 맹렬하며 원기왕성한 특징은 결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만년의 레코딩은 모차르트에서 말러에 걸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발터는 젊은시절 동시대 음악(말러를 포함해서)을 자주 지휘했다. 발터는 말러와 조수이자 제자로서 가까운 거리에서 공동작업을 했다. 말러는 자신의 [대지의 노래]나 [교향곡 9번]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미망인인 알마 말러는 발터에게 두 곡 모두 초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발터는 1911년 [대지의 노래]를 뮌헨에서 1912년 [교향곡 9번]을 빈에서 빈 필과 초연했다. 그 뒤 발터와 빈 필(말러의 매부인 아르놀트 로제가 여전히 악장을 맡고 있었다)은 1936년 [대지의 노래]의 최초 레코딩을 녹음했고 1938년 [교향곡 9번]을 녹음했다. 둘 다 실황이었으며, [교향곡 9번] 녹음 두 달 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해 발터와 로제는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

캐슬린 페리어, 줄리어스 파착, 빈 필과 함께한 유명한 데카반 [대지의 노래]는 1952년 5월 녹음됐다. 그리고 발터는 1960년 뉴욕필과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재녹음했다. 1957년 뉴욕 필을 지휘해 말러 [교향곡 2번] 스테레오 레코딩을 만들었던 그는 1961년 말러 [교향곡 9번]을 스테레오로 녹음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LP로 발매된 이 음반들은 나중에 소니에서 CD로 발매됐다. [교향곡 9번]과 [대지의 노래]는 말러가 연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발터의 말러 연주는 독보적이다. 발터는 스승 말러 생전의 연주를 똑똑히 목격한 제자이기 때문이다. 말러 이외에 발터 하면 떠오르는 연주는 모차르트, 브람스를 꼽겠다.
-출처:네이버 캐스트 [클래식 ABC]








박스셋의 녹음은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한 것인데, 녹음을 듣노라면 그 현장에서 그가 원했을지도 모를 어떤 목표 지점을 직접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의 녹음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여 음반에 담긴 음악의 어떤 자취를 따르는 것이 내 일이건만,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어서 음반에 담긴 레코딩은 현장의 그 미묘한 공기를 다 잡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29번의 경우 어쩌면 카라얀의 레코딩이 브루노 발터와 비교했을 때, 깔끔하고 명확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르다는 것은 스테레오와 모노의 차이, 시기의 차이, 녹음 당시 여러 정황의 차이, 그리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어느 지점에서 오는 것일지도. 이 무수한 차이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어느 것 단 하나가 절대적인 정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해본다.








브루노 발터가 거쳐간 곳을 잠시 살펴보자. 1896년 브레슬라우 오페라, 왕립 바이에른 오페라, 뮌헨,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 독일의 전역을 그가 떠나게 된 계기는 히틀러 집권이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좋아했으며 '히틀러 독일군을 보내기 음악을 먼저 보낸다'라는 말이 유럽에 떠돌 정도로 자신이 생각한 '독일인의, 독일적인 정통 음악'을 만들기에 집중했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오히려 수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혹은 아예 유럽을 떠나야 했던 것은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브루노 발터의 원래 이름은 브루노 슐레징어. 슐레지엔의 사람이란 뜻이 담긴 그 이름 개명 전까지는 이 이름을 계속 쓰다가 개명 후 브루노 발터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그 훗날엔 미국으로까지 이주한 다음 그가 선 포디움은 콜롬비아 심포니. 나치를 피해 온 그들의 음악이 서른아홉 장 중 절반을 차지한다. 베토벤과 슈만, 멘델스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부클릿을 들여다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shellac records, mono long-playing records, stereo LP 등 다양한 종류의 녹음작업을 하였는데 지금 브루노 발터의 음악을 듣는 내게 말을 건네듯, 말러의 교향곡 녹음에 관하여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We must not forget that mono records can only reproduce the extreme contrasts in dynamics characteristics of Mahler's scores to a limited extent. Even on compact disc, a on hundred piece symphony orchestra cannot be transferred into a private living room as one would wish.
-Götz Thieme








그의 따스한 모차르트, 여운을 남기는 브람스, 역사적인 말러를 듣는다. 생전에 그는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모차르트를 자신이 관심을 둔 작곡가로 꼽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모차르트의 작품을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부클릿에서 브루노 발터가 언급하는 모차르트는 섬세한 그의 이해 끝에 구축된 세계였다.




"it took me quite a long time to completely abandon my picture of "the composer of the 18th century" or "the Rococo" of "the composer of smiles". in other words, to abandon the image of Mozart as a light-hearted imposer(I would never have had a problem with the 'dry classicist') in order to discover behind the facade of playful charm the unyieling earnest, the sharp characterisation and the creative wealth of Mozart the dramatist. Only when did I finally realise tha Mozart was the Shakespare of opera."-Bruno Walter




수록된 음반 중에는 1956년 3월 녹음한 주피터가 있다. 지금 스테레오를 당연한듯 즐겨듣는 나에게는 오히려 생소했던 모노 녹음인데, 음질 문제는 뒤로 하고 오히려 더 적당한 균형, 감성의 강약이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모습이 드러난다. 중압감을 떨친 자유로움은 이런 것일까? Götz Thieme는 같은 해 녹음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Irmgard Seefried, Jennie Tourel, Léopold Simoneau, William Warfield 등의 훌륭한 솔리이스트들의 모차르트 레퀴엠보다 주피터를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연주로 꼽는다.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는 그러나 이미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때에 이루어졌다는 본인의 고백을 생각한다면, 예술가에게는 어떤 중요한 시기와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지휘를 들으면 악보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핵심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혹자가 말하는 부드러운 멜랑콜리, 따뜻한 여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재자처럼 악단을 장악하지 않고 처음 모인 콜롬비아 심포니 단원들에게 '서로 더 깊이 사귈 수 있는 계기로군요. 좋은 가족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을 건넨 온화한 지휘자. 장악하지 않고 스며드는 조용한 음악을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브루노 발터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괜한 느낌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거장의 지휘를 시간이 흐른 지금 들으며, 이 박스셋 안에 실린 Frantz Werfel의 시를 다시 읽는다. 브루노 발터의 생각 한 자락이 조용히 미소 짓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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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7-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노 발터의 이번 에디션을 볼 때 마다 연이어 생각나는 음반은
알라딘에서 The Klemperer Legacy로 소개하고 있는 오토 클렘페러의 음반 세트입니다.
한정반이니 결정반이니 소개하고 있지만 10개 이상되는 세트로 나누어 발매되다보니
오히려 구매하기가 무척이나 애매하더군요.
그간 낱장으로 소장하면서 언젠가 한방에 몰아 발매하겠지 내심 기다렸는데
많은 클렘페러 연주 애호가들이 기대를 EMI Classics는 나누어 발매하는 것으로 배반(?)한 셈입니다.
브루노 발터하면 오토 클렘페러가 함께 연상되는 것이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상은 Jeanne_Hebuterne 님의 좋은 리뷰를 보며 떠오는 단상이었습니다.^^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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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 감은 눈을 더듬어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엔진 소리, 구름 밑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 소리, 길을 걷는 사람 목소리,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음악 소리.

 

 

 


 음량, 음정, 음색, 이 세 가지가 소리의 요소라면 음악의 세 가지 요소는 리듬(rhythm), 선율(melody), 화성(harmony)이다. 음과 음이 시작되어 부딪히고, 파생되거나 새로이 생겨난다. 이 때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우리가 듣는 무언가가 음악의 '계'를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는 필시 이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드러나는 은유와 치환, 숨김과 드러냄, 작거나 큰 울림. 이를 만드는 연주자들 중에서도 알프레드 브렌델은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내는 겸손한 피아니스트였다.

 

 

 

 

 


 여든도 넘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는(실제는 현재 체코 소도시인 모라비아 태생이나, 오스트리아로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됨) 2008년 '이제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며 조용히 피아노 앞에서 물러났다. 데카에서 그의 고별 연주회 실황을 출시했으며 최근 나는 그가 짧게, 조용히 갈무리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어림잡아 단상마다 길어도 한 페이지 남짓한 생각 조각. 겸허하고 성실한 전달자.

 

 


 잠시, 브렌델이 평생토록 연주했던 악기인 피아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간의 부분으로 있었던 악기. 반복을 기점으로 기초를 배우고 기교를 조금씩 내 것으로 익히는 재미. 뭔가 다른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마음이 딸꾹질 하던 때. 혼자 쇼팽과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여다 보거나 포기하거나, 이 두 갈래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순간의 음악. 글렌 굴드는 오른손이 왼손에, 손가락 하나는 나머지 아홉 개에, 전체는 그 깊은 곳의 영혼에 답하는 것이 피아노 연주라 칭한 적이 있다. 브렌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고 간결하다. 다른 연주자와 비교하면 조금 그 개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입자가 조밀한 성실한 대화.

 

 

 

 

텍스트에의 충실성


연주란, 과연 뭘까요? 가능한 다 보여 주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능한' 이란 말입니다.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이 지나칠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악을 악보로 옮기거나 악보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요. 우리는 항상 '작곡가가 무엇을 기록하고자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또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필요하지요. 텍스트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은 텍스트, 원전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악보의 엄격한 해석만을 강조하는 원전주의자라든가, 시대 악기만으로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정격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원래 있던 텍스트, 작곡가의 의도 위에 연주자의 지나치도록 강한 개성을 덧입혀 잘못된 엉터리 감동이나 해석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닐까.

 

 

 

 

 객석을 지키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작곡가에 관한 연주자의 의견이 궁금한데, 이 책에서 브렌델은 간결하게나마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등의 음악에 관한 그의 피아니즘을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에 관련하여 브렌델은 오히려 작곡가의 심경을 추측하여 더할 나위 없이 감성적인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는 이 연주자가 원전주의자, 정격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와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단락이 눈에 들어온다.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흔히 순수한 서정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드라마틱한 음악 전개를 보면 이를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방랑자 환상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철저하게 변신합니다.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아닌 작곡가 피아노의 소리, 형식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후기이 소나타들도 오케스트라풍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케스트라처럼 울려야겠지요. 현악 5중주에 가까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사실 피아노 음악에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는 않았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지요. 그의 피아노곡들은 페달을 섬세하게 써야 비로소 제 맛을 살릴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기보는 적힌 그대로만 표현되거나 혹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에게 있어 피아노란, 연주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악기.

 

 

 

 피아니스트는 다른 연주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 자기 자신을 지휘하는 지휘자이자 가수인 셈이다. 그러나 음악 없는 피아노는 그에게는 악기가 아닌 검고 흰 조각이 맞물린 가구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엇갈림으로 드러나는 음악의 조각이 꽤 날카롭다. 자신의 연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연주자가 보인다. 닫혀 있고 보이지 않는데 걸어야 하는 길이 나타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러한 사진을 떠올려 본다. 연관되어 일순 정지하였으나 다시 이어질 찰나의 세계. 그 자락을 들여다보며 브렌델의 글과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란 가장 말이 없는 것, 가장 닫힌 것, 가장 논하기 어려운 분야로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감동이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음악이 있고, 얼마나 많은 갈래 속에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숨은 것일까?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이런 작곡가들이 이룬 작품을 접하며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잠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세상 누군가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감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비틀즈를 들을 수도, 베토벤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만이 정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브렌델이 이야기하는 균형, 조화, 절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난다.


 

 

 

감동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음악가만이 다른 이들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디드로와 부소니는 반대 입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은 배우나 음악가는 스스로 감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자기 자신이 감정에 빠져 버리면 예술적 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책 속에서


 

 

 

 

 


 그의 글을 읽다 고개를 들면, 지금껏 여기까지 오면서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여러 가지 일, 사람, 상황, 사건, 바쁘거나 지치거나 적막한 극단 사이를 시소를 탄 마냥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조용히 바닥에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며 보낸 시간. 지금까지 감동한 부분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쓰고, 만들고, 듣는다. 다양한 연주와 해석, 갈래에 따른 생각과 느낌이 이루는 체계, 작은 오솔길. 크레센도, 레가토, 음향, 해석자, 맥박, 앙상블, 단순, 극단, 감동을 따라가면 어느새 이 연주자의 고요한 숨결이 옆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숨결은 귀를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내 느낌을 조용히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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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6-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 대한
Jeanne_Hebuterne님의 아름다운 리뷰 잘 들었습니다.
마치 브렌델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습니다. 가끔 바흐의 피아노 연주곡도요.
최근에는 브렌델과 레파토리가 많이 겹치는 빌헬름 캠프의 연주를 더 자주 듣지만요.

덧)
그런데 올리신 글 가운데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독일 출신의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에서
길렐스는 아마도 에밀 길렐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의 조국은 러시아 아닌가요.^^

Jeanne_Hebuterne 2013-06-23 00:4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틀린 점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왜 길렐스가 독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재빨리 수정!!)!!

브렌델이 연주한 하이든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댓글을 보니 궁금해집니다.
빌헬름 캠프도! 찾아서 듣도록 해야겠어요 :)
 
카라얀 60 [1960년대 DG 관현악 녹음집- 82CD/320p 해설지 포함] - 1960년대 전성기 녹음, 오리지널 LP 재현! 카라얀 2
모차르트 (Leopold Mozart) 외 작곡, 카라얀 (Herbert Von Karaj / DG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과분한 선물을 받았으니, 바로 카라얀 60 박스셋.
국내 수입사와 도이치 그라모폰 본사 협력으로 만든 박스반인데,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 카라얀의 1960년대 도이치 그라모폰 관현악 전집이다.











박스의 뚜껑을 열었을 때 나오는 319 페이지에 달하는 부클릿. 수록곡 목차, 60년대 카라얀 레코딩에 관한 설명, 카라얀 연표, 오리지널 LP 라이너 노트 등이 있다.














몰랐던 음악. 알아도 몰랐고 몰라도 들었던 음악들. 클래식은 유일하게 오리지널을 복제 생산하면서도 수많은 여러 갈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악단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들린다. 그리고 같은 곡, 같은 지휘자라 하여도 60년대가 다르고 70년대가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듣고 같은 음악도 지휘자나 악단별로 몇 장씩 구입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어떤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한다면, 60년대 베를린필과 카라얀의 대화는 이제 막 친밀해지기 시작하는 시기의 긴장감이 엿보인다. 십여 년이 흐른 1970년대에는 긴장감이 떨어지고, 80년대에는 관계가 악화되는 시기였다고 전한다. 이 박스반의 친절한 안내서에는 이 박스반의 기획자 이일호 씨의 이러한 글이 있다.


"내가 카라얀 연주 중 1960년대를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카라얀이라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지휘자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만나서 보냈던 30여 년의 세월 중 가장 서로를 신뢰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에 다른 기간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긴장감과 성실함이다. ... 하나의 예로 10년 마다 한 번씩 녹음했던 베토벤의 교향곡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도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1962년 버전의 9번 교향곡 연주의 긴장감과 열기는 그 후 1975-1977 버전이나 1983 버전에서는 아쉽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들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즐거움을 조금씩 잃어버린 것 같다. 특히 스케르초 악장을 비교해 보면 더 그러할 것이다."
-속지 부분발췌









물론 저런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 어렵고 어지럽게 느껴진다면 내가 걸친 얇은 지식과 나의 감각을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를 모르면 시를 많이 읽어야 할 것이고 인간을 모를 것 같으면 인문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음악을 모른다면 마찬가지로 많이 들어야 하겠으나, 나에게 이 음반을 선물해준 이는 몇 가지 원칙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많이 듣고, 많이 사고, 많이 기록할 것. 듣되 그냥 들어서는 안 되고 사되 그냥 사서도 안 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떤 한 곡이 좋다 하여 그 곡만 십여 장의 음반으로 사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돈 낭비 시간 낭비를 피하려면 먼저 다양한 음악을 듣고, 레파토리를 넓혀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최소한 내가 무엇을 듣는지는 파악해야 하니 음반 부클릿과 자켓을 참조할 것. 특히 이런 박스반의 경우, 다양한 레파토리가 있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 적합할 듯하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 조금씩 순간과 순간을 모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상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때의 친근한 벗은 역시 부클릿일 것이다. 음반을 사면 으레 자켓 속에 들어있는 이 간단한 설명서는 현직 음악 평론가, 음악을 일평생 공부하거나 일로 삼아 단련된 귀를 가진 이들의 친절한 설명이 들어있다. 카라얀 60 역시 마찬가지다.








카라얀의 연주는 무엇이 다른 것들과 그렇게 다른가 생각해보면, 먼저 뇌리에 스치는 것은 카라얀이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카라얀이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객원 연주한 것은 1938년, 물론 푸르트뱅글러의 시대였다. 당시의 카라얀은 30세로, 네덜란드와의 국경에 가까운 아헨시의 음악총감독이라는 포스트에는 있었지만 아직 독일에서의 평가도 확실하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러나 이때 카라얀은 이례적으로 리허설 시간을 요구하여 오케스트라 측을 놀라게 하였고, 파트연습까지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타협을 모르고 무서움을 모르는 완고한 무사였던 것이다.
또한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하자,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후임을 맡았으나,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의 의욕없는 모습에 놀라고는 "너희들의 연주는 패배한 복서 같다"고 오케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표명하고는 기초부터 다시 연습하도록 만들었기에 대단하다.
-속지에 있는 모로시 사치오의 글, 서상희 번역, 부분발췌







푸르트벵글러는 결말 부분의 화음에 리타르단도를 강조해준다. 곡에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효과를 빚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지휘자의 간섭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다. 반대로 카라얀은 같은 부분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가 놓아버린다. 음의 파동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하는 효과를 빚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지휘자의 해석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해서 카라얀의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곡이 가볍고 경쾌하게 들리는 것이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부분발췌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으면서도 그와는 확연히 다른 연주를 선보인 카라얀은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프루트벵글러의 정당한 계승자이다"라고도 말했다는데, 이것은 자신만의 지휘에 관한 철학을 확고히 하여 푸르트벵글러가 다졌던 미학에의 관점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카라얀에게 지휘란 작곡자가 뜻한바, 작품에 명시된 바를 명확히 표현하여 가장 충직한 전달자, 재현자가 하는 미학의 작업이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카라얀의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다른 지휘자, 다른 오케스트라와의 비교가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완전히 틀린 해석도, 완전한 하나의 해석도 없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며 어떤 한 연주만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 또 한 차례 선물을 준 이를 귀찮게 하여 알아낸 방법은(물론 그 전에 여러 차례 친절히 강조해 주었던 사실이었다), 가이드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 펭귄 가이드, 러프 가이드, 그라모폰 가이드 등 고전음악의 신보와 구보를 아우르는 많은 가이드에는 각자의 균형 잡힌 평가가 있다. 물론 어느 한 가이드에서는 명반이라 칭송하는 음반을 다른 한 가이드에서는 그에 못 미치게 다루는 일도 있으니, 가이드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과 각자의 관점이 보이게 되는데, 이를테면 베토벤 교향곡 3번을 펭귄 가이드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Of Karajan's four recorded cycles, the 1961-2 set(DG 463088-2) is the most compelling, combining high polish with a biting sense of urgency and spontaneity. There is one major disappointment, the over-taut reading of the Pastoral, which in addition omits a vital repeat in the Scherzo. Otherwise there are incandescent performances, superbly played. On CD the sound is still excellent.


잠시 고개를 돌려 부클릿을 보면, LP Liner note가 친절한 한글 번역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사건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남긴 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다. 그 가운데서도 <에로이카>는 그 자체로 대단히 존경받을 만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의심할 나위 없이 카라얀의 오케스트라다. 1956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한 뒤, 카라얀은 탁월한 감각으로 미국 순회 연주를 이끌었고, 오케스트라는 만장일치로 그를 종신 음악감독에 선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고, 베를린과 세계 도처의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에로이카>오 다른 베토벤의 교향곡이 특히 큰 역할을 했음은 자명하다.



이제 또 눈을 돌려 또 다른 가이드, 러프 가이드를 참조하면 그 구성이 약간 다르지만, 초심자에게 더 적합한 설명이 더 친절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eethoven's Symphony No.3 is better known as the Eroica, a title thoroughly befitting what many people consider the greatest symphony ever written. Completed in the spring of 1804, this amazing score contains the very foundations of Romanticism in its gestures and burgeoning themes, and in its unprecedented scale-the outer movements are enormous structures that virtually ignore the accepted conventions of sonata form.


최대한 많은 음반을 소개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려 한 펭귄 가이드, 음반 발매 당시의 느낌까지 생생히 전달해 주는 박스반 속의 부클릿, 그리고 초심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곡 설명에 무게를 두는 러프 가이드, 이들 각각의 역할은 분명 조금씩 다르며, 모두 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모든 것이 간편해지고 형태가 사라지는 즈음, 클래식 음반을 CD로 사서 듣는다는 것은 좀 거추장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레이저 디스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mp, wav 형태의 음원으로 존재하는 음악을 대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방송이나 매체에서 자주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음반을 구입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음반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질 수 없는 파일보다 음반이 더 좋은 까닭은, 고전음악은 생각보다 그 안에 담긴 정보, 즉 음악을 들을 때 보아야 할 정보가 많기 때문이다. 녹음 시기, 지휘자, 악단 등, 곡 제목만 보아도 얼마나 긴가. 아니,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그저 지나간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음반을 구입하여 듣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제 막 발을 디딘 나의 경우 궁금해져서 음반을 구입하게까지 되는 음반은 방송에 틀어주는 음악도,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잡지나 신문에 나와 추천하는 음반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종종 서재나 동호회의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음악에 대한 사랑이 더 뜨거운 분들의 추천, 알라딘과 같은 곳의 서재, 혹은 음악 관련 칼럼에서 이야기하는 음반이었다. 새롭게 나온 음반도 좋지만 많은 이들이 듣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곤 하는 오래된 음반이 더 궁금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카라얀 60을 듣는다. 만듦새가 훌륭하고 퀄리티도 높으며 가격도 적당한, 소중한 음반을, 내게 과분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자주 열심히, 위에서 들은 원칙을 지켜가며 들어야 겠다.







하기야, 카라얀이 죽던 해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새로움의 추구와 희망도 이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정밀함과 엄격함이라는 미학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이 남긴 필생의 업적을 재발견해서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토론할 때가 말이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에서 부분발췌






THANKS TO.

저돌적이고 패기가 넘친다고 말했던 이 82장의 음반. 잘 들을게요.


직접 그림을 그려 안에 글을 써서 보내주신 고마운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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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8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나네요!

Jeanne_Hebuterne 2013-05-28 09:00   좋아요 0 | URL
:)

레와 2013-05-2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부럽.

Jeanne_Hebuterne 2013-05-28 14:25   좋아요 0 | URL

레와님 :)
제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열심히 들어서 선물해준 이의 정성에 보답하렵니다!

2013-06-14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stminster Legacy - Chamber Music Collection [59CD] [세계 최초 한국 1000조 한정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외 / Westminster / 2012년 9월
절판




1000조 한정 세트. 웨스트민스터의 박스반. 1949년 런던 출신 뉴요커가 설립하여 1950년 첫 발매를 시작으로 1970년대 마지막 발매를 끝으로 더는 나오지 않는 음원이 일본의 MCA에서 낱장 발매되다가 두 달 전, 한국 라이센스, 박스반으로 발매되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초기 녹음들은 대부분 스위스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는 1950년대 '메이저 마이너' 레이블의 선두주자였던 웨스트민스터와 비엔나 콘체르토하우스와의 상관관계 때문이었을 거라는 업계 관련자들의 말이 있다.
피아니스트 Jörg Demus, Paul Badura-Skoda, Nadia Reisenberg, Reine Gianoli and Edith Farnadi, 바이올리니스트 Peter Rybar, Jean Fournier and Walter Barylli, Vienna Konzerthaus Quartet과 지휘자Hermann Scherchen 등이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을 거쳐 갔다.






이 박스반 속 음반들은 하나같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한 장씩 꺼내어 듣노라면 초기 녹음은 닐카롭고 예리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섬세하며 친근하다. 음질에 신경을 쓰는 이들에게도 '친절한 소리'를 들려준달까. 따뜻하고 친절하다.




속지에 등장하는 전 객석 편집장, 류태형의 글. 웨스트민스터의 역사에 대해 17 페이지가량을 할애하여 설명하는데, 이 레이블에 대한 궁금증 해소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더 상세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레코드판의 미니어처 복제품을 만난 듯한 느낌. 모든 것이 똑같다. 두꺼운 종이의 케이스, 음반 보호 비닐, 재생했을 때의 날카롭지 않은 뭉근하고 따뜻한 소리까지. 다른 것은 단 하나, 이 안에 든 것이 CD라는 사실 뿐.

이 겨울,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클라리넷 퀸텟을 레오폴트 블라흐의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 지금보다 지역색이 또렷했던 시절 빈의 느낌.

'빈 필하모닉의 클라리넷 수석을 지낸 전설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레오폴트 블라흐(1902~1956)는 빈 음악원을 나와 1930년부터는 모교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클라리넷은 빈 풍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풍만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절제가 돋보이며 가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박스 속지의 글 부분발췌(54페이지)

추운 겨울, 김이 서린 창문을 바라보며 따뜻한 홍차와 귤을 먹는 느낌. 옛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은 연주자, 지휘자의 지역의 색채와 느낌이 많이 줄었으나 그 당시의 확연했던 또렷한 경계선. 레오폴트 블라흐는 무리하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그것을 펼쳐 보인다.







앨범 넘버링은 표지 앞뒤에는 없고 표지 등을 세우면 드러난다. 이미 그러하지만 아마 컴팩트 디스크도 곧 사라지겠지. 레코드판을 복원하여 날카롭지 않은 옛 소리를 찾는 느낌이 십 년 후만 되어도 다른 대상으로 변할 것이다. 클래식은 현존하는 모든 음향을 불러 모은다.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이미 음이 포화상태여서 새로운 소리는 어렵다는 어느 로커의 전언에만 깃든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LP판을 CD로 복원하여 재생한다. 당연히 CD도 무언가로 대체되겠지만 나는 아직도 연주자의 이름, 레이블, 녹음연도가 찍힌 정보와 해석의 여지를 주는 CD 재킷의 앞뒤를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더 선명한 느낌은 손쉽게 얻을 수 있겠으나, 지금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음의 균형, 단일 마이크로폰을 쓰는 기술. 이를테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손쉽게 보았던 이런 레이블의 마크를 이제는 얻을 수 없어 이렇게 박스반이 나오면 사람들은 집에서 그때의 연주를 들을 것이다.




'외르크 데무스, 프리드리히 굴다와 더불어 빈 삼총사로 불리는 파울 바두라 스코다는 1927년 태어나 빈 국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에트빈 피셔를 사사하고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 등 유명한 지휘자와 협연했다. 섬세하고 낭만적인 연주에서 학구적인 녹음까지 폭넓은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속지 부분발췌(45페이지)

첫 번째 음반의 뒷부분. 웨스트민스터 옆의 1996 MCA Record.




덧붙이기-박스 뒷면에 이런 종이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보너스 디스크는 클라라 하스킬의 스칼라티 피아노 소나타, 다니엘 바렌보임의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월광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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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11-2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보니 꼭 이 음반을 사야 할 것 같아요.

Jeanne_Hebuterne 2012-11-27 09:37   좋아요 0 | URL
blanca님, 이 얼마만이에요!!! 정말 반갑습니다!!!

클래식을 즐겨 듣는 이들은 라이센스반은 구매를 기피하신다든지, 가격도 비교해 보시고 하던데, 이 박스는 사는 것이 좋다는 조언에 힘입어 샀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음반들.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희소성을 생각하면 괜찮아 보였어요. 저 박스반에 든 음반이 장당 삼만 원 가까이(그것도 다 구할 수는 없대요) 일본 레이블에서 팔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옛날 소리가 들려요.

oren 2012-11-27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 그대로 소장용 박스세트네요.
긴긴 겨울밤 곶감 빼먹듯이 하나하나 빼들고 '지나간 네 개의 계절들'을 오롯이 음미하면서 들을 수 있다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Jeanne_Hebuterne 2012-11-28 15:30   좋아요 0 | URL
oren님! 네, 오래오래 갖고 있다가 생각날 때 하나씩 들으면 좋을 듯 합니다. 지나간 네 개의 계절, 하니 사계가 생각나요. 어느덧 또 네 개의 계절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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