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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클레르 - 필립스 협주곡 녹음 [3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쿠로 (Marcel Co / Decca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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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시간.

 사라진 공간.

 묻는다. 기억을. 

 답한다. 들림을.

 쉼표와, 마침표.

 진동과 흔들림.




 레코딩 음질이 더 좋아지고 연주자들의 기법이 향상되는 요즘 문득 한 시대를 생각한다. 

개성이 더 또렷하고 국경이 높았던 때. 서방 연주자들이 러시아 연주자들을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며 경청하던 때. 

 어떤 연주자의 기법은 더 섬세하고 가녀렸던 때. 

 음질은 지금보다 열악하고 종종 마이너 레이블에서 녹음하여 지금은 찾기 어려운 음반의 소리가 무지개처럼 펼쳐지던 때.



  지금은 희미해졌으나 듣는 순간 귀를 섬세하게 잡아채는 가느다란 우아함의 미셸 오클레르.

 1960년대와 1950년대의 오래된 음악 소리에 귀를 빼앗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공간의 연주자 소개를 들추어 본다.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1924년 11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나 롤라 보베스코, 미쉘 슈발베, 앙리 테미앙카, 크리스티앙 페라스 등의 명인을 길러낸 쥘 부셰리를 사사하고 1943년 롱-티보 콩쿠르와 1946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탄탄한 기교를 바탕으로 정열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연주해 "바이올린의 가수"로 불렸으나, 전성기에 접어든 1960년대 중반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손을 다치면서 독주자 활동을 접고 후학양성에 힘써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고, 200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음악이나 책이나, 무언가를 접하는 우리는 진공 속에서 숨 쉬지 않는다. 즉, 진공 상태에서 무언가를 듣지 않는 이상 이러한 연결고리가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 이제는 유쾌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듣는 이에 따라 이런 고리는 조금씩 헐겁거나 조밀하게 들어차서 어느 순간 거대한 지도를 머릿속에 접었다 펼쳤다 하게 되리라. 나에게는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이름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카라얀 60 박스, 그 오십 번째 음반을 오늘 다시 집어들고 듣노라면 뭐랄까, 그 섬세한 감성과 낭만적인 표정의 고리, 쥘 부셰리. 그리하여 연결하는 미셀 오클레르.



 쥘 부셰리는 미셸 오클레르의 파리 음악원 시절의 스승. 자크 티보 보베스코, 슈발베, 페라스 등의 연주자를 길러냈는데 미셸 오클레르의 연주를 듣노라면 내게는 우아하고 선이 가느다란, 지금은 점차 멀어져 가는 지나간 시간의 어떤 페이지를 돌아보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활이 지배할 수 있을 만큼의 가녀림, 감상에 빠지지 않는 우아함, 때로 들려오는 예상 밖의 직설적인 활 놀림을 이번 에디션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에서 들을 수 있다. 이 곡에 관한 하인츠 베커의 설명을 옮겨본다.



초기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솔로 부분이 유독 연주하기 어려워 쉽게 공연되지 못했다. 제네바 호수 근처 클라랑에서 협주곡을 쓰던 중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코텍의 제안을 수용해 제 1악장을 다시 썼으며 완전히 새로운 안단테 악장으로 교체해서 나중에 따로 출판했다. 하지만 에밀 소레처럼 요제프 코텍 역시 이 작품을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레오폴드 본 아우어 역시 기술적인 부담을 느끼고 동료 연주자들에게도 이 곡의 "무시무시함"을 경고했다. 결국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브로드스키가 1879년 빈에서 초연을 하는데 동의했다. 이 협주곡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기존 형식에 메이지 않고 고전적인 협주곡 양식에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제1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튜티에서 전개되어 솔로의 등장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보통 제1악장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카덴차는 주축이 되어 말 그대로 작품의 중심에서 생동감의 요소가 된다. 제2악장에서 마지막 악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부분은 차이코프스키의 서로 다른 성격의 악장을 한데 엮는 뛰어난 즉흥성을 보여준다. 피날레의 주요 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이어지며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전개부 느낌의 진행은 마지막 악장의 완전한 주제가 등장하기에 최상의 기초가 된다. 
-하인츠 베커
 


 능숙하고 객관적이며 정서적으로 숭고한 브람스의 흐름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감정의 폭발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듯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작곡가의 다양한 개성이 느껴지는 비등점을 느끼게 하는데, 이번 미셸 오클레르의 필립스 레코딩의 첫 장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세 번째 장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사이좋게 함께 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에서는 악단과의 긴장이 팽팽한 직설적인 연주를, 브람스에 가서는 단아하고 조용한 울림을 들려준다. 



 연주자가 활용하는 악기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다양한 음색과 깊이를 개성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속도의 지점이 지적하는 비등점을 그 개성에 덧붙이고 싶다. 곡에는 메이저, 혹은 마이너로 표기한 조성이 있다. 흔히들 처음 클래식을 접하는 이들이 어려워하는 긴 제목에 곧장 나타난 이정표. 또한, 곡 앞에는 알레그로 몰토, 안단테, 알레그레토 논 트로포 등의 작품 성격을 설명하는 단어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속도란 무엇인가? 명랑한 알레그로와 느린 아다지오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느리고 빠른, 명랑하고 슬픈 것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작곡가가 뜻했던 정확한 속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곡 자체에서 자신이 알아낸 자신의 해석을 연주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 연주자의 음악성을, 개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이 정답 없는 흐름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를 들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아닐까.


 
 미셸 오클레르는 큰 낙차를 지니지도, 거대한 스케일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내는 무지개의 노랑에서 초록으로 흐르는 연두와 노랑의 얇은 끝처리는 흡사 지금 다가오는 봄처럼 가늘지만 분명하게 맥박한다. 음표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읽었던 그대로 명쾌하게 만드는 단정함이, 긴장과 완급을 나직하게 조율하는 그녀의 바이올린. 듣고 있으면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종종 그리워하는 '그 시대'가 궁금해진다. 지네트 느뵈, 아르튀르 그뤼미오, 크리스티앙 페라스, 피에르 아모얄, 오귀스탱 뒤메이로 이어지는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그 시대. 지금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난 세기에는 더욱 또렷했을 당시의 국경의 밤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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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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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를 기다리는 신경다발이다. 그것은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이고, 춤이고, 시간이고 또 얽힌 공간이다. 그래, 그래, 그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결말처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어떤 유명인의 초상. 그의 그림자. 지나간 세기의 시선. 35밀리 라이카 카메라. 매그넘 창시자. 포토저널리즘. 카르티에 브레송 가문. 포로생활, 아시아와 서방세계. 간디와 샤넬, 트루먼 카포티와 자코메티. 때로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필치를 작품으로 남긴다. 그들의 유명세는 벽이 되거나 성곽이 되어 길게 뻗어나가는데, 종종 그 그림자는 때로는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의 뇌리에까지 박혀있다. 2004년, 그의 사망 이후 지금에야 그의 종적을 더듬는 것은 너무 늦거나 빠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가 니엡스, 다게르로부터 1800년대 초반에 대중에게 공개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재빠른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남자가 물웅덩이를 건너기 위해 뛰는 순간. 자전거가 계단 아래 길을 지나는 순간, 조지 6세의 대관식을 바라보던 영국 국민의 모습. 멕시코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아이. 창문 너머로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 서독의 사람들. 필시 전쟁에서 다리를 잃었을 남자의 걸음, 레닌그라드의 아이와 아버지. 샤넬의 담배피는 모습. 마티스의 스케치, 포크너의 시선. 자코메티의 걸음과 마르셀 뒤샹의 손길. 스트라빈스키의 얼굴 앞에 원근처럼 어우러진 손. 뉴욕의 거리, 케이프 커내버럴의 사람들. 뉴욕의 사무직 노동자의 순간, 국회의사당의 한 사람. 중국의 노동자, 인도의 간디.


이 책에는 브레송의 모든 초기 사진, 시기별로 분류된 사진, 단행본, 논문, 에세이, 사진집과 그의 데생까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선이 담겨있다.



전설처럼 굳어진 어떤 위인을 살펴볼 때에는 살짝 시선이 굳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평가를 내리기에는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남기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일에 게을러선 안될 거란 생각에 이 사진집을 살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주치게 되는 그의 시선. 신화적 인물의 등 뒤, 전설의 얼굴, 권위와 고전의 시선. 그 유명한 생 라자르 역의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남자를 찍은 모습을 보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렬하고 솔직하다. 그의 사진에 풍경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생에 대한 찬가를 그가 부르고 싶었을 거란 생각도. 삶에 대한 환희와 경이가 구도와 형식의 완벽함을 타고 전해져 온다. 브레송의 손 안에 꼭 쥐어진 라이카로 표현된 황금의 수는 그가 이십대 초반 머릿속에 소중히 새겨둔 초현실주의, 데생의 섬세함, 로트의 가르침을 따른 구도의 순수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는 유명인만큼이나 일반인의 얼굴이 더 다양하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라이카를 들고 시장과 골목,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만든 온갖 행동이 담겨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물들고 생생함과 움직임이 보인다. 워커 에반스의 말처럼,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는 우리가 이제껏 탐험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있다.' 에반스에게 그러했듯 브레송에게도 사진은 데생 대신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라이카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어느 사회나 중심부튼 관습에 장악당한 반면, 참모습은 주변부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철학을 고수한 그의 사진은 어쩌면 처음부터 늘 주변에 관심을 두는 그의 반순응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현장을 지키되 그 현장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시선. 그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드러난 사회는 늘 뜻밖의 얼굴을 보여준다.
만리장성이 없는 중국, 피라미드가 없는 이집트, 빅벤이 없는 영국,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가 그의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대신 그의 사진에는 거리, 카페, 상점,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엇갈린 시선으로 다른 곳을 향하는 전직 군인과 현직 군인의 모습을 담는다. 그 마법같은 구도를 잡기 위해 그가 생 라자르 역에서만 하루를 보내며 기다렸다는 일화가 생생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의도치 않은 순간 삶이 뜻밖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법같은 황금율이다.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나타나고 예기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우연이 만나고 필연적인 스침이 생겨난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담는 시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가 찍은 미국은 빠르게 모든 것이 연소되는 마천루의 도시. 거대함과 폭력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난다.





언젠가 보나르가 브레송에게 '왜 바로 그 순간 셔터를 눌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브레송이 보나르의 미완성 작품 중 하나를 가리키며 '왜 여기를 노란색으로 칠하셨나요?'라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재치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사진도 예술일까? 사진도 회화와 같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브레송은 피사체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삶 속에 들어가서 삶을 함께 숨쉬고 겪은 다음 다시 존재를 잊고 환경에 녹아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브레송의 사진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잰슨의 말에 다르면,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작품이 '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판명된다.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주제, 양식은 사진을 찍는 이가 속한 세계의 안팎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곤 한다. 탐구와 모색, 관찰과 이해. 실현과 평가. 이 모든 것을 한 장에 담으려면 피에르 아술린의 말처럼 송어의 민첩성과 궁수의 부동심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 것이다. 회화와 소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진의 영역을 바라보노라면,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별함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그넘이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이 로버트 카파, 다비드 스치민, 조지 로저, 일리엄 밴디버트와 함께 창설했다며 말년에는 비아냥거리는 편지를 보냄으로 자신의 마침표를 찍었던 매그넘. 존재하는 이야기, 우연이 아닌 필연, 전쟁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의 의문에 답할 세계의 눈. 그와 동시에 브레송은 이제 전문 사진가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대를 증언하되 증언에만 그치지 않는 사진, 초현실주의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는 일. 그 묘한 역설을 활용하려는 태도는 브레송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은 차이점들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작은 차이점들을 찬양했던 스탕달 만세! 1밀리미터가 바로 차이를 만들어낸다. 증거만을 얻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수평 공간 안에, 직각자로 잰 듯 완벽한 수직선을 이루는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부동자세로 멍한 시선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밥그릇을 쳐다보면서 먹고 있다. ... 왼편 구석의 검은 그림자와 오른편이 문이 호응을 한다. 문 위쪽으로 상감된 두번째 사각형이 최면효과를 자아낸다. 왼편 문 너머로 텅 빈 어둠이 들여다보이는데, 열린 공간은 역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멍한 시선의 중국인 사내와 대비를 이루면서 테두리를 형성한다. 사내의 부동자세와 앉아서 먹느라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사내가 호응을 한다. 앉아있는 사내는 정확하게 황금비례가 형성되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한다. 사내는 밥공기를 손에 쥐고 있다. 이는 바닥에 놓인 또다른 밥공기와 대조를 이룬다. 테 없는 검은 모자가 바로 두 밥공기 가운데서 경계를 형성한다. 조각난 그림자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장면의 평온한 수평을 깨뜨린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아비그도르 아리카, 화가.






브레송의 사진은 그가 말한 여섯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르포, 주제, 구도, 색채, 테크닉, 고객.
브레송이 낸 자신의 사진집 서문을 읽어보노라면 사진에 임하는 그의 시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르포르타주란 문제를 표현하고 사건이나 인상을 고정할 목적으로 머리와 눈, 그리고 마음이 동시에 점진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나에게 사진이란,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대상의 의미와 또 이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형태들의 엄정한 조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 주제란 사실들을 그저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들 그 자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들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고, 사실의 진면목을 심오한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사진에서는 아주 작은 대상도 커다란 주제가 될 수 있고, 사소한 인간적 디테일도 라이트모티프가 될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서문.





그의 사진 속에는 아시아를 신비롭게만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이 없다. 이를테면 상하이의 동맹은행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렸다.



"상하이, 1948년 12월. 골드러시. 동맹은행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되어서 이웃 거리로까지 뻗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밀고 당기는 소동이 벌어져서 십여 명이 사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인당 금 40그램씩만 바꿔주기로 정했었다. 지폐를 바꿀 요량으로 24시간 이상 줄을 선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의 경찰은 15년 전부터 중국 땅에 눈독 들이던 잡다한 군대에서 차출된 인원들인 만큼, 치안은 허술했다."






삶을 담되 한박자 늦출 것. 있는 그대로를 담을 것. 황금의 수 안에서 미래주의의 역동성과 다다의 개념까지 활용할 것.

굳이 브레송이 이러한 원칙 아래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닐테지만 그의 사진 속에는 늘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암시적이고 은근하다. 현실의 모습을 다루되 그의 사진의 경이로움은 그가 언제나 되새김질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삶에 관해 진실함을 표명했다면 브레송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명했으리라. 동작과 의미, 구성과 항금의 비례. 앗제와 만 레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1920년대 후반 입체주의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은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예술가의 시선은 한 가지 성향만으로 대표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형식주의자의 시선은 이런 것이었다.






세월은 어림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제목은 브레송의 사진집 제목 결정적 순간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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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봐도 좋네요. ^^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보셨군요!
브레송의 사진에는 늘 사람이 있어요. 참 좋지요?
dreamout님이 잘 보고 가셨다니 제가 다 기뻐요 :)



dreamout 2013-08-28 22:50   좋아요 0 | URL
정면 사진들이 많죠.

저는 남의 뒷통수 찍기를 좋아하는데..
그러고보면, 옛 사진가들은 참 잘 훔쳤어요. ㅎㅎ

oren 2013-08-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페이퍼에 올려주신 글로도 브레송의 사진들을 훌륭하게 감상할 수 있군요. 수많은 사진들을 손수 찍고 편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덕분에 좋은 사진, 좋은 글 잘 감상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올해가 로버트 카파 100주년이라면서 1년 전부터 '전시회' 준비에 골몰해 오던 친구 녀석('ㄱ신문 사진부 기자)이 '전시회 개관일에 꼭 오라'고 했던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네요. 개관일에 공짜로 볼 기회는 놓쳤지만, 그래도 전시회 마감 전까지는 꼭 가보겠노라 약속을 했건만 여태 꾸물거리고 있네요.ㅠㅠ
* * *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2013년 8월2일~10월2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사진전을 '널리 알려달라'는 제 친구의 요청 때문에 여기에 '불법광고' 남겼음을 용서하세요..)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7   좋아요 0 | URL



oren님, 브레송이 찍은 사진을 저야 뭐 가장 단순작업만 하여 올렸을 뿐인걸요, 뭘.
오히려 사진이 하나같이 다 좋아 선별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습니다. 좋은 사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카파 전시회라니, 사진에 관해 여전히 잘 모르는 저도 솔깃해집니다. 갑자기 저도 가고싶어지는걸요! 사진을 좋아하시는, 카파를 좋아하시는 많은 분들이 가셔서 잘 보셨음 좋겠습니다 :)


그나저나 뭐하십니까! 얼른 가신 다음 후기 남기시지 않고!!!



adsl 2013-09-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래간만에 브레송 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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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오후, 생브누아 거리


Y.A. 당신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어요?

M.D.뒤라스라고.

Y.A.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어요?

Y.A.알 수 없다고.




(서울=연합)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3일 파리 자택에서 82년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소설, 영화, 연극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알콜중독으로 일찍부터 여러차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들어선 바 있으며 특히 88년 이후에는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작가도 물론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 이미 문학적 유서라 할 수 있는 작품 '이게 다예요'를 최근 내놓은 바 있다. 이 작품은 뒤라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35세 연하의 동성연애자 얀 앙드레아를 위해 94년 11월부터 95년 8월 초까지 쓴 일기를 묶은 것이다. (후략)

-연합뉴스 발췌.






http://www.vuededuras.com/marguerite-duras.html




1996년의 이 기사가 떠돌기 전 나는 '스카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육 년이 더 흘러 히로시마 내 사랑을 스크린으로 보았고 뒤늦게 애도했다. 그 전에 카뮈의 페스트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이 모든 것을 내 십대에 읽었고 이 모든 것을 내 이십대에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림자는 너무 짧았고 석양은 너무 빨리 찾아왔으며 눈동자는 너무 자주 깜박였던 때였고 나는 이 공백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아는 것이 없다.






 그 이십대, 낯선 거리에서 길을 찾노라면 손에 지도를 들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자주 지도를 접어두었다. 대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려는데요, 라고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는데 그때에 특별히 친절하거나 선량해 보이는 사람을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가 있었던 내게 그들은 그저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 길잡이가 되었다. 명백한 이유가 없는 우연의 일이었다. 그 책방이 직원할인이 된다는 이유로 나를 그곳에 데려간 어머니가 지금도 내 어머니라는 것도, 그 책방에서 은근슬쩍 뒤라스와 쥐스킨트를 문제집 사이에 끼워넣은 것도 우연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이럴 때면 구름 사이 지나가는 달을 보고 싶어진다. 혹은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을 보고 싶어진다. 있었던 어떤 것과 사라진 어떤 것. 기억에 남은 어떤 것. 그러면서 작게 눈 흘기고 싶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부모를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공산당원이었던 적 있었지만 1950년에는 제명되었다. 법대를 다녔으며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퇴직 후 자유로운 글쓰기를 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에 쓴 그녀의 소설을 누보로망에 넣기도 하지만 실제 그녀의 글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워 어떤 장르에 넣기는 약간 어렵다. 특성이 있다면 단 하나, 뒤라스적이라는 것. 리듬을 다르게 하고 이펙터를 쓰거나 편집을 하여도 뒤라스는 뒤라스다. 




 살아있는 사람, 죽은 사람, 나무가 없는 곳에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울듯이 맞는 남자, 너무 행복해 입술을 깨무는 순간,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의 정적, 신에게 봉헌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옆을 바라볼 수 없다고 되내이며 똑바로 길을 걸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드러났고 연인에서 그녀의 늙음이 예고되었다면, '이게 다예요'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있다. 가쁜 숨, 한숨, 웃음, 몰아쉬는 숨, 속삭이는 숨, 거친 숨, 그리고 그 사이의 주름과 그늘, 모든 것이 그저 조용히 '이게 다예요'라고 말한다. 발걸음이 멈춘 조용한 거리, 그 너머 이어지는 실내의 고즈넉한 미온의 침실.







Y.A.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겠어요?

M.D. 내가 누군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나는 내 애인과 함께 있지. 

       그 이름은 몰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마치 애인과 함께 있듯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지. 애인과 함께 있는 것 말이야.





불가능을 떠올리는 꿈. 가능성을 탐하는 희망. 

늙음에의 고단함과 매끈함이 사라지고 공백을 채우는 주름. 

뒤라스는 힘들다고도, 슬프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불안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름표를 붙이는 낱말은 늘 지도의 표시 같았다. 그 단어 사이를 헤매다 보면 저 위에 방위표가 보인다. 등고선이 보이고 높고 낮은 곳이 드러난다. 그늘의 적막함, 무너뜨리고 다시 만드는 열망.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라는 어느 오후, 그녀가 남긴 기록을 따라간다.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어느 날 저 나뭇잎도 바람에 떨어지고 시들겠지. 하나하나 떨어졌다가 나는 것은 결국, 새로운 나뭇잎이겠지. 얀 앙드레아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짧은 글을 보노라면 그 공백과 그림자가 잔향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걸로 살 수 있어. 웃고 뒤이어 우는 걸로.'라고 그녀가 말할 때엔 한밤중 발작하듯 울며 그의 어린 애인 이름을 부르는 늙은 울음이 들린다. 목적을 향해 차근차근 걸어가는 어린 여자아이 대신 한 번에 담요 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노인이 보인다. '나는 땅에서 솟아나는 시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녀가 말하면 이제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이미 지나치게 어릴 때 확 늙어버린 것처럼, 그녀는 지금도 다시 시시포스처럼 간을 떼어먹히려 내어놓는 것이다.






4월 19일, 15시, 생브누아 거리


우연히 내겐 천재가 있었지.

나는 거기에 이제 익숙해져 있어.


침묵, 그러고 나서


난 하얀 목재 토막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요.

다른 빛깔의.






 어떤 작가는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닌 앞으로 가고 싶은 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뒤라스에게는 공간이 겹쳐지고 시간은 중첩된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은 아마 중력과 탄성을 거부하고 높은 곳으로 도약했을 것이다. 나는 하얀 목재 토막이며 당신도 그래. 그런데 당신은 다른 빛깔이야. 얼굴이 희기만 한 사람들이 나오는 지루한 모범을 벗어난 정말 자유로운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L’homme assis dans le couloir, a play from Marguerite Duras

directed by Razerka Lavant

 22.8.2011.

 http://www.act-design.com/





 글쓰기와 삶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에게도 삶이 어려웠을 것이다. '당신의 글은 왜 이리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럼 삶은 쉬운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삶은 가볍거나 무거워야 했다. 전체가 몰락했다가 그 다음을 숨죽이고 기다리듯, 백 년을 단위로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히 앉은 옆자리의 먼지에 얼마나 쉽게 마음 아파하거나 옷장의 좀벌레에 격렬하게 짜증을 내거나 미쳐버리곤 하는가. 그 모든 화르륵 하는 손쉬운 불길 사이를 가라앉혀 우연과 필연을 오가는 회로 사이, 다른 빛깔을 읽는 그녀는 며칠 뒤 일기에 쓴다.





6월 11일


당신은 당신 됨됨이 그대로예요, 난 그게 기뻐요.






 나는 여기서 누구에게나 있는 나의 지난 사랑을 토로할 생각이 없다. 모두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던 지리멸렬한 폭우와 찬란한 태양, 풍랑과 격투, 파도를 가르는 마음, 방파제에 부딪히는 절망에 관해서도 입을 다물 것이다. 케케묵은 연애사, 우연을 필연이라고 소중히 메모하거나 애인의 편지를 간직하는 그런 짓은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대신 나는 저 짧은 문장이 세상의 모든 것이구나, 느낄 뿐. 꼭꼭 삼켜야 하는 목소리.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가 슬픕니다. 느껴지세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는데 그 짧고 당연한 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던 것처럼 이 짧은 메모에서도 더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의 깊게 듣는다 하여 그것이 진실하다는 착각은 그만. 허용한다 하여 깊다는 오해도 그만. 격렬하다 하여 열정적이라는 허구도 그만. 지나갈 것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굴절도 그만. 

 이 모든 그만인 것들을 지나고 나서 숨 쉬듯 흘러나오는 저 목소리 앞에 얼어붙지 않을 자, 누구인가.






시간. 침묵, 그러고 나서


당신이 뭔가를 할 시간인 듯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는 없어요. 아마도 쓰는 것이겠죠.


침묵,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좀더 살기 위해서. 또 좀더 살기 위해서.

이게 다야.

그건 내가 아니야. 더는 알지 못하는 그 누구일 뿐.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사랑과 죽음이라고 애인을 불렀던 뒤라스는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역치가 마주치는 순간을 글로 남긴다.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손에 힘이 풀릴 그 직전에도 아마도 당신은 쓸 것, 이라고 말하는 얀 앙드레아에게 자신의 시간을 토로하는 나이 든 손이 보인다. 이게 다라고 말할 때, 그 음성은 앞선 것과 달랐을 것이다. 거울 속 모습이 낯설 때, 사람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알지 못하던 누군가 불쑥 옆구리를 찌를 때. 끝났다. 페이지를 닫아야 한다. 이제 가야 할 것이다.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고 우연이 모여 이유가 될 때. 그녀는 끝까지 썼을 것이다. 





침묵


나는 광기로 얼어 있어요.


Y.A. 뭔가를 덧붙이고 싶나요?

M.D. 난 덧붙일 줄 몰라. 난 다만 창조할 수 있을 뿐이지. 단지 그것 뿐이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말. 쉬운 말이 어려울 때 뒤라스의 기록을 보면 흐렸던 물속이 맑아지는 느낌. 머릿속에서 거대한 우물을 만들었을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저 스스로 숨 쉰다손 치더라도 이 둘을 완전한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여성 작가의 경우 자전적 요소가 더 짙게 깔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쉬운 고백, 스스로 하는 반성. 남성 작가보다 좀 톤 다운된 우울함, 옅은 촉감. 


 


 그러나 뒤라스는 자신의 존재를 얼굴에 내세우는 작가다. 그녀가 생득적으로 가진 모든 조건은 그녀가 이룩한 성취 아래 가려진다. 이 얇은 책에 그 무거운 마음을 눕게 했을 손끝이 서늘하다. 외침과 독백. 드러냄과 숨김.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그 무엇이지.' 이보다 더 서늘하고 뜨거운 속삭임을 내가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자 고종석이 후기에서도 밝히듯, 이것은 작가의 문학적 유서다. 차가워서 뜨거운 김을 허공에 흩어내고 나서 남는 것은 작가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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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3-08-1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조위가 아니라 양가휘요. 저도 이름이 기억 안나서 검색했네요 ㅎㅎ 정말 책에서 상상한것보다 너무 근사하죠. 책에선 유약한 이미지인데 양가휘는 몸이 너무 좋아서 ..ㅎㅎㅎ

Jeanne_Hebuterne 2013-08-18 20:19   좋아요 0 | URL
LAYLA님, 아, 양가휘였군요! 전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뒤라스는 캐스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몸이 너무 좋은 건 어떤 것일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 ^^

다크아이즈 2013-08-1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쿨하게, 담백하게 '쎄 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뒤라스는 멋있게(?!) 산 여인이에요.
대개 보통 사람에겐 일상이 던적스럽고, 구질구질하고, 요즘 같아선 더워서 짜증나고 뭐 그런 거잖아요. 그게 모여 삶이 되는 건데 쿨하게 그게 다야, 라고 말할 수 있으면 누가 뭐래도 인생 잘 산 거죠. 뭐. 저도 연습할래요. - 인생 뭐 별 거 있어? 그래 그게 다야. 그래서 어쨌다구? ~~~

Jeanne_Hebuterne 2013-08-18 20:23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저렇게 간단한 말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팜므느와르님도 그런 생각 하셨군요! 뒤라스처럼 저렇게 확신있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나날들이었어요. 작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보아도 확신이 가득하고 아무에게도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림자가 느껴져서 저 짧은 글모음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구질구질해지고 더 먼 길을 둘러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래서, 그게...... 이런 접속어 사이에서 더 길 잃는 느낌.
오늘따라 제 속에 들어왔다 나가신 건지 왜 이렇게 콕콕 짚어내시는 거에요! 안그래도 던적스럽다 구질구질하다 다 소용없다 더우니까 짜증까지 치솟는데 왜 이모양이냐, 싶웠는데ㅜㅜ

저도 같이 연습할랍니다. 우리 같이 연습해요ㅜㅜ

다락방 2013-08-1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35세 연하의 동성연애자 얀 앙드레아를 위해 94년 11월부터 95년 8월 초까지 쓴 일기를 묶은 것이다.

이 책이 그런 책이었군요. 오늘 류근 산문집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라스의 책은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쉰이 되고 일흔넷이 되어도 여전히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며 그 감정들 속에서 뒤죽박죽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걸까요,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다 간 뒤라스의 일기는 궁금해져요.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8   좋아요 0 | URL
멋지죠. 멋지죠. 전 정말 뒤라스같이 사는 것에 너무나도 큰 감흥을 느껴서(팬이 되면 논리를 잃는다, 정도로 여겨주셔요. 흐흨) 이 책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작품 모두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단상이 모여 그녀의 어떤 부분을 이루는 과정을 볼 수 있었어요.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것도, 쓰러져 갈 때 옆에서 일으켜 세워줄 존재가 있다는 것도. 무엇보다도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일구어냈다는 것이 가장 부러웠는지도 몰라요. 이 책은 사랑에 관한 가장 완벽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타인을 사랑하기 이전에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했기 때문일거란 생각도 했습니다. 얀 앙드레아를 생각하면 뒤라스가 떠오르지만 뒤라스를 생각하면 얀 앙드레아가 생각나지는 않거든요.

전 그래서 지금도 밤중에 홀로 깨어나면, `얀, 얀!' 하고 부르는 와인에 취한 삐걱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제이슨 브룩스의 파리 스케치북
제이슨 브룩스 지음, 이동섭 옮김 / 원더박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날마다 축제인 곳이라고 헤밍웨이가 말하고 모두가 배우가 되는 곳, 누구도 관객으로 남지는 못하는 곳이라고 장 콕토가 말한 곳, 그곳을 오늘 떠올렸습니다. 봄날 집에서 맡는 저녁같은 냄새의 도시. 에펠탑과 보주 광장, 마카롱과 카페 드 플로르, 디올의 부티크, 툴르즈 로트렉과 모딜리아니, 에콜 드 파리, 인상파와 아르 누보, 기마르 헥토르의 메트로폴리탄, 개선문의 도시, 파리.











P,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겪습니다. 그걸 당신은 그저 보여 주곤 해요. 들려주고 보여주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당신은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에는 에펠탑 뒷골목 쓰레기를 가득 안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고다르 감독의 영화에서는 흑백의 봄날 냄새를 풍기기도 해요. 나는 당신의 꽤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카페, 서점, 마카롱, 그곳에 사는 사람의 옷과 향수, 미술품과 생활양식까지. 그리고 당신이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에펠탑까지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도 다시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고 투덜대는 당신의 잔뜩 찌푸린 낮은 구름 표정이 떠오르지만, 오늘 저는 당신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 3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 모습이었습니다. 건축, 거리, 카페, 패션, 쇼핑, 예술, 이동, 밤. 이 챕터로 당신 얼굴이 200여 컷도 넘게 있었어요. 종종 당신은 그 안에서 냉담하거나 서늘했습니다. 이를테면 저 컷이 그랬습니다. 보주 광장인데 그 날은 추웠나 봅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당신에게 이렇게 썼어요.

'보주 광장은 17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나는 건물 회랑 앞에 올곧게 서 있는 잘 손질된 나무들을 그렸는데,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의 삭막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서 길게 이어져 있다.'










당신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이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라본 당신은 아주 화려한 화장을 벗고 오랜만에 무표정한 무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카페 테이블에서 웃고있는 연인은 얼핏 브라사이의 사진같기도 하고, 도로 뒤편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은 핫젯의 사진처럼 절반 정도만 보인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따뜻한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면, 스스로 헤밍웨이 소설 속 인물이라도 된 듯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파리가 품은 마법과도 같은 매력이다. ... 파리는 세느 강을 기준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그리고 중앙의 1구부터 동쪽의 20구까지 시계 방향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20개의 구로 분할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지역은 각각 고유한 특징과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차들이 오가는 파리 외곽 순환도로 한가운데 서 있자니 파리 자체가 하나의 우주로 느껴졌다.-책 속에서















아마 저 가로등 앞을 지날 때 비가 온다면 당신은 가느다란 은빛 빗살무늬를 만들겠지요.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가듯 거꾸로 보는 그 빗방울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일 거에요. 제이슨 브룩스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 가로등, 각종 현관문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얼굴은 늘 달라요. 그것은 가볍거나 무겁고, 담배 연기 같거나 구름 같고, 두부같은 질감으로 입안에 들어오다가도 마카롱처럼 녹아버려요. 입안에 가만히 당신을 품고 있으면 알 수 없게 녹아버리는데 그 맛을 사람들은 '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잠시 제이슨 브룩스의 눈으로 마카롱을 한 번 볼까요. 똑같은 마카롱인데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마카롱. 먹기 전에 한번쯤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걸까요? 원래 이 과자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과자였다지요. 설탕, 아몬드, 코코넛, 호두 등 분말을 메렝게로 섞고 구워 크림을 바른 과자. 밀가루를 쓰지 않아 쿠키와 질감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 오랜 역사를 가진 과자가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꽤 즐겨 먹는 과자가 되었지요. 그것은 초콜릿 볼케이노의 뒤를 잇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는 마케터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초콜릿 볼케이노,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대충 오지요? 초콜릿 화산 케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득하고 진한 초콜릿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케잌이었습니다. 이 케잌이 파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지요. 스펀지 케잌과 초콜릿 크림, 설탕 시럽, 커피 에센스가 주재료인데 마카롱의 담백한 재료와 꽤 많이 달랐습니다. 이 진한 케잌의 인기가 시들해진 다음 유행한 것이 마카롱이었어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폭발적인 인기 이후 슬그머니 눈을 돌리는 성향이 있나 봅니다. 강력한 엔진의 사륜구동을 팔고 하이브리드를 사듯 강한 맛의 초콜릿 볼케이노 다음에 가벼운 느낌의 마카롱을 찾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당신 얼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세기를 방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면, 당신을 보는 일은 곧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코르셋 다음의 샤넬이 그랬고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가 그랬습니다. 길을 걷다 들어가는 카페 드 플로르의 커피잔에는 헤밍웨이가 보았을 비슷한 디자인의 커피잔에 여전히 카페 드 플로르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의 당신은 참 달라요. 눈, 코, 입이 눈, 코, 잎으로 보인달까요. 자세히 보면 브룩스가 그린 당신의 모습은 꽤 여러 갈래입니다. 샹젤리제 거리의 일방통행로, 몽테뉴 거리의 명품 숍, 엘리제궁에서 시작해 브랜드의 끝장을 보여주는 포브르 생 토노레 거리, 주얼리 샵의 집대성인 방돔 광장까지,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런던 세인트 마틴 에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보그 주관의 Vogue Sotheby’s Cecil Beaton Award에서 패션 일러스트 부문 수상, 영국 보그의 패션 일러스트 담당. 영국왕립예술학교의 일러스트 석사 등의 학력과 경력을 뽐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저네어, 인디펜던트, 엘르를 오간 다음 칸디 음반사의 비주얼 작업,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광고를 맡았다니 이 작가는 필시 자신의 주력 무기를 당신의 가장 화려한 모습에서 찾은 것이 분명합니다. 거리, 미술관, 밤, 카페의 당신은 곧잘 민얼굴에 느슨한 셔츠를 입었지만, 패션 부분에서만큼은 샤넬의 검은색과 방돔 광장에서 구입한 듯한 보석, 빈티지를 적당히 섞기도 했지만 자신의 얼굴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을 드러냈어요. 당신은 오 트 쿠튀르와 기성복, 스파 브랜드와 빈티지를 조화롭게 섞을 줄 알아요. 주목받는 패션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에게 샤넬과 라거펠트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로트렉, 드가, 마티스, 모딜리아니가 있었지요. 지금 이곳에는 당신의 모습 중 인상파의 일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 그 질감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중심을 둔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찰나의 순간을 관찰했고 그 거친 터치와 흐트러진 선이 고흐와 고갱, 쇠라와 세잔의 다른 화풍을 가진 후기 인상파로까지 남았더지요. 무엇인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입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접하는 전체 흐름 속에서 낙숫물처럼 똑똑 떨어지는 그 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당신은 회화에서 특히 잘 보여 주곤 했어요. 크고 도도한 흐름 속, 종종 사람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또한 있겠지요.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작가주의 특성이 아주 강한 화가도 있을 것이고 마티스처럼 또렷한 지점을 드러낸 화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로잉을 “특별한 손재주가 있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속 느낌과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마티스의 작품을 아마도 브룩스도 유심히 본 모양입니다. 마티스는 또한 “비평가들이나 동료들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나를 이해시킬 만큼 내가 분명치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지요. 저는 마티스의 이 말을 실반 바넷의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읽었습니다. 이럴 때의 당신 목소리와 표정은 떨림이 없고 확신에 차 분명하다는 느낌입니다.











위의 사진은 이 책이 아닌 인터넷을 검색하다 얻은 것입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디자인한 화려한 곡선이 제이슨 브룩스의 펜을 거치면서 좀 더 조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소개하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물 평가의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고 합니다.

기능 Utilitas : 목적과 일치, 실용성
견고함 Firmitas : 구조적으로 단단함
아름다움 Venustas : 디자인

또한 존 러스킨은 “모든 건축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고자 하며 단순히 인간의 몸체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지요.

지하철은 당시 꽤 새로운 교통수단이었을 겁니다. 근대의 새로운 탈 것, 사람들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해주는 기구. 새롭고 또 새로워야 했을 겁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선택한 재료는 철과 유리이며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직선 사용을 거부하고 시대 감각을 나타내며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Jugendstill, Style Guimard, Stile Liberty,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Art Nouveau 라고 불렀지요. 저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이 메트로폴리탄을 보며 잠시 곡선으로 짜인 느린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엿보았습니다. 언뜻 보면 느슨한 스케치이지만, 아마 이 일러스트레이터도 그것을 포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잠시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당신의 다른 구석을 떠올려 볼까요. ‘아주 쌩쌩 빠르게’가 아니라 ‘교통체증에 잠시 시달리며 느리게’여도 좋은 것은, 진 세버그가 나왔던 영화 'breathless'가 떠올라서일 겁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축에는 개선문이 보입니다.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 정식 명칭이며 에투알 개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샹젤리제 거리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있지요.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개의 거리가 방사형으로 퍼져 있습니다. 잠시 위키 백과의 설명을 들여다보니,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la place de l' E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다. 그러나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위키 대백과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때 이곳에는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했다는군요. 당신은 당신 신체 곳곳에 얼굴 곳곳에 당신의 역사를 숨겨두었어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의 모습은 얼핏 보면 꽤 단선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이 책은 당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없습니다. 아주 자세한 설명도 없지요. 백과사전파의 지식은 전혀 없고 그림에 관한 글은 간단한 생각이나 느낌 한두 줄이 대신합니다. 14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패션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당신의 여러 측면을 쉬엄쉬엄, 짧은 시간 안에 쉬어가며 간단히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화려하거나 소박하고 똑같은 것은 없으며 개성이 강하면서도 맥락을 이어가고, 다른 무엇에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그 구석구석은 당신, 곧 ‘파리’라는 도시의 느낌을 살려줍니다. 보통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당신의 역사, 문화, 사람들, 사건에 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저보다 조금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이슨 브룩스의 이 책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사실, 혹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당신, 즉 ‘파리’의 일상과 거리, 느낌의 스케치를 보여주는 데 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스치는 시선은 어쩌면 당신을 동경하거나 혹은 당신을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내가 본 이 거리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내지는, ‘나는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이 그림 속 장소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이것이 아마도 일러스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요? 다른 이의 눈을 통해 같은 것을 체험하기. 다른 이의 개성을 필터 삼아 비슷한 감정을 확인하기. 패션 부분을 보면 아주 노련하고 개성 있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의 손끝이 보입니다. 펜으로 한 거리 스케치는 그곳을 사랑하는 이의 애정이 보입니다. 일러스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P, Paris, 당신을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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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쟌님은 포토리뷰도 정말 근사하게 쓰네요.

Jeanne_Hebuterne 2013-06-18 15:16   좋아요 0 | URL


포토 리뷰를 쓰려고 사진을 찍을 때 다시 한 번 그린 이가 파리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관찰했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무언가를 그리는 이의 눈은 그러지 않는 이의 눈과 다르다는 생각도요.

칭찬 고맙습니다. 저도 다락방님의 근사한 리뷰 기대할게요 :)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1 세계문학의 숲 17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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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백한 불빛 아래 점원의 표정은 묘한 활기를 머금어 화사한 블라우스의 빛깔과 어우러졌다. 때로 그들은 손에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케이스 너머 가죽으로 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혹은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을 원하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약간 어둑한 문으로 가로막힌 매장 뒤의 작은 창고에서 요구사항에 최대한 비슷한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손에 지갑을 들고 있으면 나는 종종 내 지갑이 그 공간에서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되듯 제 생명을 새로이 얻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공간은 에밀 졸라가 130여 년 전에 이미 그려낸 곳, 백화점이다.




 그곳, 백화점은 프랑스 파리 봉 마르셰 백화점(1852년)이 시작이었다. 루브르(1855년), 사마리텐(1869년), 갤러리 라파예트(1893년) 등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는 왕정복고 후반부터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의 부티크에는 가격표시가 없었고 상인과의 흥정은 필수였다. 소품종을 취급하며 고객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다. 그러던 차 생겨난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는 현대의 백화점의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난다. 널찍한 상점, 현금 거래, 물건에 붙여진 가격표, 다양한 제품. 클리어런스 세일.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를 응시한다. 고객의 돈. 돈을 내는 자에게 천국이 있고 바라보는 자에게 욕망이 있다. 물건을 사는 것은 환상을 구하는 일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에밀 졸라가 시도한 것은 물론 루공 마카르 총서의 한 핏줄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중심인물은 이 호사스런 백화점의 주인 무레도, 그가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오.'라고 마음을 바치게 되는 드니즈도 아니다. 이 소설의 거대한 움직임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덮은 '무언가를 사고 싶은 욕구', '여자들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지금도 길을 나서면 볼 수 있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쇼핑객과 판매원의 모습은 욕망하는 자와 환상을 창출하는 자를 닮았다. 그 뒤에는 파리의 거대한 백화점과 그와 대조되는 모습의 상점이 있다. 매장의 재고를 정리하며 눈이 침침하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참고 견디는 직원과 목이 말라 음료를 마시며 돈을 쓰는 의문의 여인이 있다. 에밀 졸라가 다룬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당시 봉 마르셰, 루브르, 생조제프 백화점의 매장 책임자, 판매원, 건축가, 변호사 등을 취재 끝에 그 윤곽을 드러냈다. 안팎의 모습, 백화점 안에서의 하루. 계절과 상인들과의 거래가 백화점의 매출과 판매원의 생사까지 쥐락펴락하게 되는 과정, 판매원들의 경쟁과 동맹관계를 통해 쇼핑객의 동선이 드러내는 것은 백화점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당시 새로운 삶의 어떤 방식이었다.




 잠시 에밀 졸라의 전체 작품 속 이 소설의 위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에밀 졸라는 총 스무 권짜리 총서, 루공-마카르 총서를 기획했다. 20대 후반부터 구상한 이 총서는 유전의 법칙이 세대와 시간을 거쳐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면서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다룬 작품이다. 전혀 다른 존재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서로 연결된 유기체와도 같은 유전의 법칙이 드러난다. 그가 관심을 둔 환경과 유전의 법칙, 결정론적 관점, 유전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의 발현을 보여주는 이 총서는 당시 제 2 제정시대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의성이 짙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목로주점에 가면 변두리 노동자가 있다. 제르미날에는 셔츠를 풀어헤치고 자신을 쏘라고 외치는 탄광촌의 광부가 있다. 에밀 졸라의 소설에는 무엇보다도 시대를 호흡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그러던 그가 유일하게 낙천성을 가미해 꾸려낸 소설이 바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고단한 판매원과 부유한 백화점 소유주의 감정은 이제는 낡고 구태의연한 것이 되었을지언정 정작 이 소설의 중심부에 있지 않다. 소설의 중심부는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며 분량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소설의 중심부는 오히려 다양해서 그 모습을 제각각 다르게 선보이는 인간 군상이 차지하고 있다. 어느 순간 등장한 자본가, 매장의 감시 직원, 상품을 어루만지며 거의 에로티시즘을 느끼는 여인. 이들을 엮는 일련의 감정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닌 여자와 욕망의 관계이다. 화려함의 격류, 두려운 속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더이상의 염세주의는 없다. 삶이 어리석고 우울한 것이라고 결론내리지 말자. 그 반대로,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강력하고도 즐거운 것을 탄생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하자. 한마디로, 행동과 정복 그리고 노력의 시대와 함께하면서 이 시대를 표현하도록 하자. 그런 다음, 그 결과로써 행위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을 보여주도록 하자. -에밀 졸라



 


 

 에밀 졸라가 그리고자 한 것은 새로운 힘이었다. 그 중심에 백화점의 소유주, 최고 경영자, 옥타브 무레가 있다. 루공-마카르 총서 중 루공 가의 운명, 플라상의 정복에 등장하는 마르트 루공. 그리고 같은 책에 등장하는 프랑수아 무레. 이 둘의 아들인 옥타브 무레의 이름은 이 작품 말고도 앞서 언급한 두 작품과 무레 신부의 과오, 살림, 삶의 기쁨, 작품, 파스칼 박사 등에도 등장한다. 총서의 열번째 작품 '살림'에서는 옥타브 무레의 이전 삶이 펼쳐지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는 그 이후의 옥타브 무레가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인물이다. 변화에 강하며 자신이 누릴 즐거움을 당연한 것으로 취하며, 인간의 권력과 야심을 드러내되 현명한 여인 드니즈의 충고를 받아들여 번영을 이끌어낼 줄 아는 인물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욕심을 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는 이러한 인물로 그려진다.




 옥타브 무레가 이끄는 백화점과 그 안에서 일하는 드니즈의 삶은 생명체처럼 함께 호흡한다. 에밀 졸라는 에로티시즘을 제거한 이 두 남녀의 관계와 백화점의 공기를 통해 그가 만든 이상형의 인간을 선보인다. 흠 없는 남자와 이상적인 여인이다. 큰 키, 하얀 피부, 부드러운 눈빛, 압도적인 야심,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 차분하고 조용조용하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여자, 한 번 바라보기만 하면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매력, 바라는 것이 소박하고 이성적이며 자애로운 면모, 이것이 옥타브 무레와 드니즈 보뒤의 모습이다. 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것은 기쁨을 누리려는 의지, 척박한 삶이라도 그것을 일구어나가려는 애착,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밝음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에서 삭제된 듯한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 증폭되어, 백화점 곳곳을 물신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로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에밀 졸라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물신주의, 황금 만능주의 그 자체가 아닌 그것 때문에 뻥 뚫린 듯한 도넛의 구멍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백색 대전시회가 성황을 이룬다. 실제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는 연간 최대 비수기 2월에 백색 직물로 제작된 상품, 즉, 시트, 식탁보, 린넨, 속옷, 셔츠 등을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판매했다. 무레는 그 속에서 대주교를 초청할 꿈을 꾼다. 이 역시 실제 프렝탕 백화점 개장일에 마들렌 성당의 신부가 그곳을 축복하는 의식을 거행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다. 종교와 세속은 이렇게 이상한 발걸음을 함께 했다. 백색 대전시회의 백색의 물결과 제비꽃, 응접실의 여성과 백화점의 여성, 감추어진 듯 드러나고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불타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백색으로 에밀 졸라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편의 욕망의 시의성, 물신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기슭에 선 인간군상의 다양함으로 직조된 세속화였다. 지극히 세속적인 로맨스, 백화점을 무대로 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 그 속에서 오가는 불타오르는 형형색색의 욕망, 고단한 노동과 돈으로 이루어진 소비 활동, 욕망을 욕심내고 환상을 사들이고 팔고 싶은 것을 팔지만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르면서 돈을 쓰는 쇼핑객. 





  삶은 계속 움직이고 그 속에는 때로는 강력하고 즐거운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에밀 졸라가 행동, 정복, 노력으로 바라본 '새로운 시대'는 이제 다른 세기를 맞아 더욱 현란해 졌다. 결과로 존재하는 행위의 즐거움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덩치를 키워 에밀 졸라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 되어 인간의 삶을 지배할까 두렵다. 화폐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백색의 실크를 매만지고 새로운 시대의 발걸음을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에밀 졸라가 자연주의 작가로서 지켜온 원칙에 관하여 굳이 반칙해가며까지 그려낸 무레와 드니즈였다. 이제 그 속에 잠식당할 듯 백화점의 에로티시즘에 압사당하기 직전인 '지금의 새로운 존재'를 꿈꾸어야 할 때다. 혹은 이 거대한 공간에서 종잇장이 되더라도 그곳에 압사당하지 않고 군집 명사로 존재하는 이들을 종종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숙제가 아닌 독자의 삶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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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5-14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티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백화점 소유주와 판매원의 진부한 러브 스토리가 이미 졸라에게서 예고되었다는 것도요. <제르미날>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쟌느님의 리뷰로 다시 복기하니 너무 좋네요

Jeanne_Hebuterne 2013-05-15 18:34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종종 우리 생활 속 가장 흔한 비유, 은유를 살펴보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처음에는 놀라운 표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마찬가지로 지금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이야기도 처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비록 요즘에는 가장 간단한 부의 재분배가 이런 백화점 소유주와 판매원, 자본가와 노동자의 결혼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흔한 것이 되었지만 말이에요. 에밀 졸라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러브 스토리에 치중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힘찬 발걸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로티시즘을 살짝 재배치한 것을 보면 그래요. 두 남녀의 눈빛보다는 부채, 실크, 가방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한숨 같은 눈빛이 더욱 농밀했으니까요! 제르미날은 영화로도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프랑스인들에게는 이 작가의 작품이 우리에게보다 더 친근한 것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 책을 집어들면서 블랑카 님의 페이퍼를 떠올렸는데, 이럴 때의 좋은 작품은 꽤 괜찮은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듯해서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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