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photo by Reuters



 말문을 연 아이의 단어만큼이나 많은 수식어, 한여름의 폭염과 비만큼 상반된 생각을 여럿에게서 불러오는 작가. 이름이 브랜드 처럼 여겨지는 작가. 작품만큼이나 이름 하나로 주목받는 작가. 그의 단어, 문장, 이야기를 이제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작가. 




 평일 낮 대형매장에 독자들이 줄 서서 새로 나온 이 책을 받아들고 돌아갔다. 그보다 먼저 일본에서는 많은 이들이 발매 당일 자정에도 서점에서 직접 책을 사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간 전, 제목만 알려졌을 뿐 내용 포함해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고 출간 즉시 밤새 책을 읽고 쓴 리뷰가 속속 올라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읽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하루에 5700만 부 판매 돌파.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말하는 전작의 세 배에 달하는 예약 판매량. 이런 수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 작품이 보인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와 태엽 감는 새. 각각 한국과 영미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전자는 한국에서, 후자는 영미권에서. 그런데 작가 연보를 찾아보면, 상실의 시대는 1987년, 태엽 감는 새는 1994년 각각 출간되었다. 상실의 시대의 한국 발매 시기는 1989년인데 10만 부 돌파는 1994년이었다. 베토벤과 니체를 알아가며 밀란 쿤데라를 읽고, 운동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버린 세대에서 재즈와 싱글 몰트 위스키,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어딘가 층계참에 걸쳐 앉은 세대로 책 읽는 가장 큰 독자층이 바뀌었다는 의미.





 기록. 전언. 집계. 

 무성한 소문에 비해 간결한 이야기, 단단한 뼈대, 인물의 단순한 반응. 

 하루키에 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기록과 숫자가 있는데, 정작 하루키 작품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져 펼쳐보게 된 책의 뼈대가 꽤 단단했다. 책을 펴자 작가의 이름 뒤에 있던 작품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유롭고 스타일리쉬한, 쿨한 싱글의 일상', 곧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다른 방향에서 본 그의 단어들은 내게는 조금 달랐다. 




 쓰쿠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끌어앉은 채 침대를 벗어나 파자마 차림으로 부엌에 갔다. 하이다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에 의식을 집중하고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쓰쿠루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책을 덮은 후 밝은 미소를 떠올리고, 부엌에서 커피와 오믈렛과 토스트를 만들었다. 신선한 커피향이 풍겼다. 밤과 낮을 가르는 향기이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낮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하이다는 평소처럼 짙게 구운 토스트에 꿀을 살짝 발라 먹었다. -책속에서




 질감. 양감. 촉감. 사람의 손끝과 코끝에서 빚어지는 숨소리. 하루키는 정밀한 시계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름표, 감정과 사건에 가장 간단하게 써서 박음질한 그의 표식. 

 낱말 카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그 '무엇'에 관한 묘사와 설명은 실제로 해보면 예상보다 어려운 것인데 하루키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에 저러한 양감을 불어넣는다. 주인공 쓰쿠루가 무척 친한 친구들에게서 버려진 다음, 쓰쿠루에 관해서는 이러한 묘사를 한다.




 죽음의 문턱을 헤매던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쓰쿠루는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비교적 통통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마른 탓에 가느다란 체형이 되고 말았다. 허리띠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바지를 작은 사이즈로 새로 사야 했다. 벌거벗고 서면 갈비뼈가 불거져 나와 싸구려 새장처럼 보였다. 자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고,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살이 빠진 두 다리는 가느다란 물새 다리 같았다.-책속에서




 그러니까 쓰쿠루를 독자인 내가 바라볼 때의 인상은 '싸구려 새장'이되 '죽음의 문턱을 헤맨 뒤의 남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만나는 여자 사라에 관한 묘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초반 사라의 얼굴 묘사-광대뼈와 입에 관한 부분을 지나면 나타나는 부분. 사라가 기분 좋게 돈을 치렀음직한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운 옷. 그녀가 쓰쿠루에게 건네주는 싱가폴 면세점에서 산 입생 로랑의 넥타이. 자신이 하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사라가 준 새 넥타이를 하며 쓰쿠루는 자신이 하던 넥타이가 생각보다 허름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매일 반복하는 부적절한 습관처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물, 상표, 묘사는 하루키의 작품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쓰쿠루도, 사라도 알 수 없다. 다루고자 하는 실존적 본질은 인물마다 각각 다른 테마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다른 이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곧 그 자신의 관점을 철저히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전부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아주 다른 생김에 관해 일러주는 단어. 그것이 다르다 하여 판에 박혔다든지 생동감이 덜하지는 않다. 인물에 따라 부여되는 생동감은 각각 다른 테마와 종류의 것이니까. 쓰루쿠에 관해 갈비뼈까지 묘사하는 빼기, 사라에 관해 옷자락을 묘사하는 더하기. 그러므로 하루키가 인물에게 다가가는 지점은 그 특정 낱말들까지이다. 마치 이정표와도 같이.


 


 그렇다면 왜 그는 굳이 이런 이정표를 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하루키가 이 작품 속에서 만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즉, 세계에 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한 작업이다. 

 

 

 

 신비함. 수수께끼. 알 수 없는 것. 장르 소설이 아님에도 추리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미스터리를 그의 스토리텔링에 사용한다. 하루키가 바라본 세계는 의문이 제기되고 그에 따른 행동이 있는 세계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의 특징이 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성실하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으나 인간과 인간의 유대에 관심과 공감을 갖고 있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것은 성장 이야기인데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처도 크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계에서 오는 기대와 배반. 절망과 상처.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소설 첫 문장




 상태 후 드러나는 정황. 그 뒤 그가 죽음만을 생각하게 된 계기.

 그러나 그 뒤 도사린 더 큰 궁금증.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 네 명이 다자키 쓰쿠루와 절교하는데 이유를 모르는 상황.

 죽을 듯 괴로워한 다음 그는 수영장에서 만난 하이다와 무척 친한 친구가 된다. 어느 밤, 하이다는 그의 부친이 겪은 의문을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 쓰쿠루의 인생에서 사라진다.  쓰쿠루가 마침내는 역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사라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사라는 마침 그에게 묻는다. '왜' 그 네 명이 그렇게 했는지를.

 

 

 



photo by Curtis Brown-literary and talent agency-http://www.curtisbrown.co.uk


 

 

 

 

  매듭 없이는 끈을 묶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 수수께끼는 풀려야 하므로 수수께끼이다.  마침내 쓰루쿠는 그들을 만나 대답을 듣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소설 속에는 수수께끼가 그대로 있다. 그가 얻은 것은 대답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바람 소리. 




 쓰쿠루의 친구들은 저마다 색채를 띤 사람들이다. 일본어 이름의 한자 속에 깃든 색채. 

 유일하게 이름 속 색채가 아닌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쓰쿠루가 집중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해나가는 일은 얼핏 보면 나아가는 일 같지만 실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수영, 역 설계, 사라를 만나는 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쓰쿠루가 만드는 것이 역이라는 점이다. 도착했다 떠나고 만났다 헤어지는 공간. 더하기와 빼기가 이루어지는 공간.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어떤 계단 한 칸에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막 성장하려는 쓰쿠루는 이유를 모르고 단념하였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게 된 쓰쿠루는 의외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답을 찾아내고 더해야 할 것과 빼야 할 것을 나눔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아마도 이 소설이 많은 독자에게 밝은, 희망 비슷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면 아마 그것은 이 층계참에서 하루키가 슬쩍 독자에게 쥐어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앞서 말한 이 미스터리의 여운은 뜻밖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운다. 뒤돌아 보면 안 된다고, 뒤돌아 보면 소금 기둥이나 돌이 된다고 신화와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돌아 보아야 한다.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 끈을 묶고 스스로 정직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럼에도 미스터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소설의 풀밭 곳곳에 있는 잔디와 엉겅퀴는 쓰쿠오의 알 수 없는 꿈으로, 하이다의 부친이 남긴 이야기로, 시로가 남긴 사건과 알 수 없는 결과로 여전히 그대로 있다. 질문과 답, 행위와 결과. 이것이 늘 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간결해질까? 신비롭기까지 한 사람의 시간은 인과와 논리의 뒷걸음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관계와 세계에 관한 조명을 하루키가 시도했는데, 그의 유명세와 인세, 몇몇 작품에 관한 프리즘으로만 이 작품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행위, 결정, 모험, 연결. 이런 것이야말로 소설의 핵심 중 몇몇 부분일 것이다. 저마다 연결되어 소설을 구성하는 일부. 작품 속 하루키의 자아가 쓰쿠오라면, 그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끝까지 탐구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따돌려지는 상황을 감내하려다 보다 쉽게 섞이는 것으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좀 더 쉽게 섞이는 도취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이 작품 속 어느 누구도 강렬한 도취를 체험하지는 않지만 다자키 쓰쿠오만은, 현실이 아닌 그의 꿈속에서 강렬한 성행위로 도취를 맛본다.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맹렬한 질투를 경험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 질투가 작동하는 것은 작가가 숨겨둔 은밀한 꼬리표 같다. 이 꼬리표를 손에 쥐고, 다음 역을 찾아가는 일이 이제 남았다.



 다자키 쓰쿠오의 순례를 함께하는 독자에게 다자키 쓰쿠오는 곧 천천히 읽어야 할 글귀와도 같다. 다자키 쓰쿠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입하고 그가 생각하는 땅콩이나 칵테일을 떠올리며 그와 함께 어느 바에 들어갔다가 마침내는 핀란드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 다음 그가 연어와 허브를 오븐에 함께 구워 레몬을 뿌리고 포테이토 샐러드를 핀란드에서 먹는 부분에서는 마침내 독자 자신의 마음과 쓰쿠오의 상태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확인에 이른다.

 쓰쿠오가 직접 옛친구들을 만나 들은 답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까지는 활용할 수는 있는 정보이다. 하루키는 답을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그 점이 미스터리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 나가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루키의 힘일 것이다. 

 

 



 그의 힘은 자신이 사용하는 일상의 단어, 여전히 불확실하여 가려진 완전하지 않은 답으로 존재하는 결말에 있다. 세간의 평가처럼, 반하거나 변하는 감성, 혹은 감각적이거나 깔끔해 보이는 특정 사물로 드러나는, 또는 특수 연령층에 어필한다고들 하는 어떤 표현에 관한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질문으로 드러난 그의 태도를 들여다본다. 

 

 



 소설 속, 나타났던 모든 미스터리에 관한 답이 1:1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어떨까요? 난 모르죠. 그렇지만 아마도 그때 아버지에게는 믿느냐 안 믿느냐 문제가 아니었을 거에요(118 페이지)."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304 페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새벽 4시고 새도 아직 눈을 뜨지 않았어. 내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앞으로 사흘만 기다려 줄래?(407 페이지)"  




 하루키는 모든 것이 기계처럼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설정한 알레고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어려운 것을 쉬운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의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특정한 일에 익숙해져 마침내 일상으로 자리 잡곤 하는 부분에서 슬며시 드러난다. 

 

 



 일상의 정밀함 위에 드러나는 단순한 낱말들. 

 그 말 틈을 비집고 흘려보내는 작은 바람. 

 

 

 

 하루키의 소설 속 이정표와 이름표를 따르다 보면 일상 속의 이야기가 보인다. 그 사이 크고 작은 풀리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은 상처가 드러난다. 잠시 작가에 관한 세간의 평가와 열기, 뜨겁거나 차가운 무엇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리고 태연하게 순례에 동참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순례 끝에 되돌아갈 곳은 스스로 얻는 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것은 터널일 수도, 역일 수도, 생각지도 못한 어느 먼 이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이 오거나 겨울이 오니까. 우리는 몇 번의 겪지 못한 여름과 이미 겪은 겨울을 먼 미래처럼 바라보고 오래된 과거처럼 잊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을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책 속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 - 일러스트레이터와의 대화
박선주 지음 / 지콜론북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비둘기떼, 빗소리 자국, 거리, 꽃, 안개, 숲, 텅 빈 어느 곳. 희거나 검은 형체, 바삭한 질감, 구둣굽 소리, 색깔, 냄새, 습기와 건조함. 상상한 그 어떤 것은 내가 보았다고 믿었거나 볼 것으로  생각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도 했다. 기억한 이것이 맞고 틀림을 떠나 머릿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순간이 있다. 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by Jon McNaught




 일러스트에 관해 말하면 어떨까? 안네 프랑크의 집에 관해서. 버스 정류장의 모습을, 아프로디테상을, 공중전화부스를, 크리스마스 산타의 행렬과 안네 프랑크의 펜 끝을 드러낸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해서.





 귀를 기울이면 안네 프랑크가 썼던 일기장을 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눈으로 덮인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가 만져질 것 같다. 책장을 넘기는 바람 소리가 들려 내 눈이 저절로 저 먼 곳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내린 거리, 가로등은 빛을 수줍게 밝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 적이 있었다. 눈길이 있었고 손끝에 닿던 머플러의 감촉이 차가웠다. 길가 비둘기가 뭔가를 부리로 쪼고 있었고 노점상은 주름진 손으로 신문이며 과일을 바구니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 비둘기떼가 기다렸다는 듯 낙엽처럼 하늘로 오른다. 불빛에 비친 먼지가 함께 하늘거린다. 이것을 놓치며 살아가는데, 이것을 붙드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은 이 시각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손끝이 찌르르해지는 책이다.







by Allessandro Sann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잠시 들여다본다. 어떤 특정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드로잉을 포함한 일체의 시각화 작업,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우리가 줄여 부르는 일러스트라 일컫는 영역.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 인쇄매체의 영역을 벗어나 이미지를 통한 내용 전달.

 시각 예술 내에서 사진이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보여주어 신뢰감을 심어준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사진은 현장에서 일어난 무언가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로모와 DSLR, 노출과 조리개가 바로 사진 일부이다. 기기의 발전과 함께하는 현장성, 기록성 등의 영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사진과 경쟁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음으로 하여 스스로 한계를 벗어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생각한 것을 마법처럼 보여준다. 재크와 콩나무의 콩나무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올라갈 때, 일러스트레이터는 아마 작은 환성을 지를 것 같다. 그 최초 발생을 동굴벽화라고 해도 될까? 아니, 이집트인의 진흙, 석회석으로 그린 그림, 파라오의 수호자 호루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도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러다 우리가 지금 흔히 생각하는 단어를 뒤틀어 구름을 잡고 이미지를 끌고 내려와 붉은 풍선을 만들어내는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징은 18세기 초, 정치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이 제작되면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제는 디자인과 광고의 영역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by Heidi Goennel





 알레산드로 산나,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 이성표, 이케르 스포지오, 세르주 블로크, 블랑카 고메즈, 칼레프 브라운, 마사코 쿠보, 숀 탠, 두르가바이 브얌, 제시 티스, 레아 던컨, 존 맥노트, 조란 퓬게차르, 아오이 후버 코노, 크리스토프 니만, 하이디 고넬, 해리엇 러셀, 사라 파넬리. 





 이 책을 열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질문을 던지고 책을 엮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개한다. '그림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 손아귀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을 끌었으되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들. 내가 무심히 스쳤으되 심방과 심실 어딘가에 남아있던 것들. 내가 가진 풍경의 일부, 내가 겪었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풍경을 풀어내고 상황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그것이 그들의 일부가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을 아무 것도 없는 공백에 펼쳐나간 이들의 대답과 필치. 





 이들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림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낸다. 현재 이탈리아 만투아에서 작업 중이라는 알레산드로 산나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테크닉보다 먼저라는 말을 하며 색은 별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백이었고 붓 자국이었다.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그에게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나가서 주변 세상을 보기도 하고, 손이 지쳐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리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뉴요커의 커버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장 자끄 상뻬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 그리기도 했다는 점은, 일억 시간 이상을 바쳐도 모자랄 그들의 일러스트레이션에의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월이 흘러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인가요?

:감정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전해야 합니다. 보는 이가 생각하도록 만들거나, 적어도 보는 이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합니다. 제 이미지들이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아주 간단한 이미지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정신과 마음이 어린이의 것이라면 더 좋을 것입니다.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살펴보면, 다른 책,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가 쓴 'art & fear'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텅 빈 캔버스에 가해지는 처음 몇 번의 붓질은 수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최후 몇 차례의 붓질은 오로지 그 그림에만 맞는 것으로, 더이상 다른 그림이 존재할 자리는 없게 된다. 상상 속의 자굼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현실로 바꾸며, 매 단계는 미래의 선택들을줄여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에 가서 그 작품은 다른 작품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이 바로 작품의 완성이다.-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

 


 

 결국, 이것은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이 자기 목소리와 손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 뜻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이되, 보는 이를 세심히 고려한 작업의 결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짧은 흥밋거리로, 잠깐의 재미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산나가 그린 '안네 프랑크의 펜'을 볼 때 어떻게 한 소녀의 갇힌 마음과 그 소녀가 꿈꾸었으나 가보지 못한 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의 철로 위에 있는 집,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군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어떻게 전쟁과 전투에서는 누구도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가졌음을,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세르주 블로크의 연말연시 런던 투어 관련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유쾌한 빼기의 법칙을, 블랑카 고메즈의 심플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단순함이란, 명백한 것을 빼고 의미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다."라는 존 마에다의 말과 일치하는 지점을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by Gürbüz Dogan Eksioglu


 



 '다른 무엇', '새로운 무엇'에의 감동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 같다.

 노란색을 좋아해서 노란색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할 수도 있다. 더 선명하고 진짜같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것을 좀 더 다르게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보는 것, 생각한 것, 또는 느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해바라기밭이 있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사물이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보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의 주체인 '나'의 안팎에서 벌이는 사건도 없을 것이며, 다양한 긴장과 높낮이도 사라질 것이다. 새로움, 다채로운 색감, 의외의 선, 생각지 못한 형태가 일러스트레이터의 눈을 통해 드러난다. 일평생 단 하나의 사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 속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노라면 하나의 사과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상과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은 그 속성을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어려운 일. 머리 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경 속에서 밖으로 선명하고 밝은 빨간 풍선이 살짝, 하늘로 날아오르면 아마도 재크와 콩나무가 있었던 구름 위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의 핵심을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






by Harrier Russell

 




 인터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아 앞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려 하거나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말 대신, 나는 이 책이 문장부호가 알맞게 쓰인 풍경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전반적인 형태와 개성이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그 모든 특성은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기는 세상의 풍경에 자리를 양보하기에. 그리고 여기에는 가벼운 깨달음이 뒤따른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결국, 이 틀 안에 담긴 아이디어는 우리가 지나친 것들의 합산이라는 점. 최초에 공백과 여백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제자리에 필요한 순간 있는 여백으로 있는 크리스토프 니만의 쉼표,

 무채색 거리에 점을 하나 찍듯 붉게 타오르는 알레산드로 산나의 마침표. 

 매력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아낸 숀 탠의 느낌표!

 존 맥노트의 버스 정류장에는 통행 허가증 없는 줄임표가 통행 허가증 없이 가지런히......

 사진과 페인팅을 전공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이는 하이디 고넬의 일러스트레이션에는 큰따옴표가,

 블랑카 고메즈의 산뜻하고 경쾌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작은 따옴표를 노래한다.




 이들의 일러스트는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공기가 산뜻하여 새롭다. 마치 유월의 마지막 날이 춤을 추듯. 




 

 


by Blanca Gómez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3-07-0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씀에 동감해요.
Gürbüz Dogan Eksioglu의 나무가 통째로 하늘을 나는 그림, 여러개의 달 그림, 빨간 주전자 등은 금방 보고 지나치지 못하게 눈길을 붙드네요.
알렉산드로 산나처럼 '아이디어와 콘셉이 테크닉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더라고요 ㅠㅠ

Jeanne_Hebuterne 2013-07-04 08:10   좋아요 0 | URL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아마 명필이 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붓을 써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답니다.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실력은 기본, 장식은 옵션'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 의기소침해진 적도요.


최근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은 책을 두어 권 접했는데, 이 책의 경우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인터뷰가 실려 있어 보편성을 띠는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인 장맛비가 내린답니다. 하늘에서 일억 개의 물방울이 쏟아질 텐데, hnine님의 장마용 음악과 함께 주말을 보내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7-0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접수하시는 테른님^^*
풍경처럼 깨달음처럼 또는 배경이거나 물결인 것철럼
님의 안내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 살짝 들여다 봅니다.
후텁지근하네요. 어서 여름이 지나가길요^^*

Jeanne_Hebuterne 2013-07-19 09:42   좋아요 0 | URL



성실한 접수계 직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댓글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도, 사람이 만든 그 무엇도 의심하는 늙은이의 고까운 자세로 대하곤 하는데 종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작품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낮, 나무 아래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으면 여기는 캘리포니아라고 우겨도 속아 넘어갈 날씨입니다. 어느 곳은 홍콩 같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더운 여름, 더워서 좋은 여름, 그래서 여름. 잘 보내요! :)

 
[수입] 브루노 발터 에디션 [39CD LP 사이즈, 독일반]
드보르작 (Antonin Dvorak) 외 작곡, 발터 (Bruno Walter) 지휘 / SONY CLASSICAL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때의 반가움. 브루노 발터는 그런 종류의 따뜻함이 보이는 지휘자다. 그 따스함을 아주 오랜 시간 모르고 살았다. 이것은, 내게 브루노 발터를 소개해준 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작은 고마움. 아직 다 모를 높다란 천정의 빛깔이 따스하다.








박스 속 부클릿의 인덱스에는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 전곡, 말러의 1,2,4,5,9번과 대지의 노래, 슈베르트의 일부가 있다. 말러와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브루노 발터를 추천하는 이들이 많은데, 어떤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 지휘자와 작곡가의 특성이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고전 음악을 듣노라면 필연적으로 같은 곡을 여러 지휘자와 악단의 연주로 듣게 되는데, 어느 한 지휘자의 방법이 단 하나의 길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같지 않을 다양한 해석을 더 잘 느끼고 감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곡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 곡의 충실한 해설자, 전달자로 존재하는 지휘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 박스셋의 부클릿은 브루노 발터에 관한 꽤 상세한 정보를 지루하지 않게 전달한다.


그의 생애, 포디움에서의 경력,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게 된 일, 스튜디오 녹음이 부클릿에 상세히 실려있다. 수입반이라 한글은 없지만 영어와 독일어로 실린 이 글은 모두 삼십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쉬엄쉬엄 드문드문 읽어도 꽤 유용할 것 같다. 글 사이를 비집고 참조할 음반 번호가 함께 있어 음반을 한 장씩 꺼내어 들으며 읽으면 더 유용한 글. 잠시 그 안을 보면, 왼쪽부터 브루토 발터, 토스카니니, 클라이버, 클렘페러, 푸르트뱅글러가 함께 찍은 단체 사진, 맨하탄 센터에서의 레코딩 작업 등이 흑백으로 실려있다. 천천히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포디움에서 불빛의 강하고 약함을 조절하듯 음을 고르는 그의 손길이 들릴 것 같다.










같은 지휘자라도 어느 악단과 함께 연주하는가, 혹은 그 지휘자의 어느 시기에 지휘한 것인가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온다. 이 부클릿에서도 그리 전하듯 브루노 발터 역시 그런 변화를 거친 듯하다. 잠시, 부클릿과 이 박스셋 밖으로 눈을 돌려 다른 이의 말을 들어보자. 전 <객석>편집장 류태형의 글을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음반으로 발터의 지휘를 접한 이들은 대부분 발터 최만년의 스테레오 녹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건강이 쇠퇴하고 있을 때의 기록이며,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스테레오 음반들은 발터 전성기의 예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온화한 측면이 너무 부각되고, 청장년 발터의 미덕이기도 했던 경쾌하고 맹렬하며 원기왕성한 특징은 결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만년의 레코딩은 모차르트에서 말러에 걸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발터는 젊은시절 동시대 음악(말러를 포함해서)을 자주 지휘했다. 발터는 말러와 조수이자 제자로서 가까운 거리에서 공동작업을 했다. 말러는 자신의 [대지의 노래]나 [교향곡 9번]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미망인인 알마 말러는 발터에게 두 곡 모두 초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발터는 1911년 [대지의 노래]를 뮌헨에서 1912년 [교향곡 9번]을 빈에서 빈 필과 초연했다. 그 뒤 발터와 빈 필(말러의 매부인 아르놀트 로제가 여전히 악장을 맡고 있었다)은 1936년 [대지의 노래]의 최초 레코딩을 녹음했고 1938년 [교향곡 9번]을 녹음했다. 둘 다 실황이었으며, [교향곡 9번] 녹음 두 달 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해 발터와 로제는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

캐슬린 페리어, 줄리어스 파착, 빈 필과 함께한 유명한 데카반 [대지의 노래]는 1952년 5월 녹음됐다. 그리고 발터는 1960년 뉴욕필과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재녹음했다. 1957년 뉴욕 필을 지휘해 말러 [교향곡 2번] 스테레오 레코딩을 만들었던 그는 1961년 말러 [교향곡 9번]을 스테레오로 녹음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LP로 발매된 이 음반들은 나중에 소니에서 CD로 발매됐다. [교향곡 9번]과 [대지의 노래]는 말러가 연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발터의 말러 연주는 독보적이다. 발터는 스승 말러 생전의 연주를 똑똑히 목격한 제자이기 때문이다. 말러 이외에 발터 하면 떠오르는 연주는 모차르트, 브람스를 꼽겠다.
-출처:네이버 캐스트 [클래식 ABC]








박스셋의 녹음은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한 것인데, 녹음을 듣노라면 그 현장에서 그가 원했을지도 모를 어떤 목표 지점을 직접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의 녹음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여 음반에 담긴 음악의 어떤 자취를 따르는 것이 내 일이건만,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어서 음반에 담긴 레코딩은 현장의 그 미묘한 공기를 다 잡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29번의 경우 어쩌면 카라얀의 레코딩이 브루노 발터와 비교했을 때, 깔끔하고 명확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르다는 것은 스테레오와 모노의 차이, 시기의 차이, 녹음 당시 여러 정황의 차이, 그리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어느 지점에서 오는 것일지도. 이 무수한 차이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어느 것 단 하나가 절대적인 정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해본다.








브루노 발터가 거쳐간 곳을 잠시 살펴보자. 1896년 브레슬라우 오페라, 왕립 바이에른 오페라, 뮌헨,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 독일의 전역을 그가 떠나게 된 계기는 히틀러 집권이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좋아했으며 '히틀러 독일군을 보내기 음악을 먼저 보낸다'라는 말이 유럽에 떠돌 정도로 자신이 생각한 '독일인의, 독일적인 정통 음악'을 만들기에 집중했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오히려 수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혹은 아예 유럽을 떠나야 했던 것은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브루노 발터의 원래 이름은 브루노 슐레징어. 슐레지엔의 사람이란 뜻이 담긴 그 이름 개명 전까지는 이 이름을 계속 쓰다가 개명 후 브루노 발터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그 훗날엔 미국으로까지 이주한 다음 그가 선 포디움은 콜롬비아 심포니. 나치를 피해 온 그들의 음악이 서른아홉 장 중 절반을 차지한다. 베토벤과 슈만, 멘델스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부클릿을 들여다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shellac records, mono long-playing records, stereo LP 등 다양한 종류의 녹음작업을 하였는데 지금 브루노 발터의 음악을 듣는 내게 말을 건네듯, 말러의 교향곡 녹음에 관하여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We must not forget that mono records can only reproduce the extreme contrasts in dynamics characteristics of Mahler's scores to a limited extent. Even on compact disc, a on hundred piece symphony orchestra cannot be transferred into a private living room as one would wish.
-Götz Thieme








그의 따스한 모차르트, 여운을 남기는 브람스, 역사적인 말러를 듣는다. 생전에 그는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모차르트를 자신이 관심을 둔 작곡가로 꼽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모차르트의 작품을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부클릿에서 브루노 발터가 언급하는 모차르트는 섬세한 그의 이해 끝에 구축된 세계였다.




"it took me quite a long time to completely abandon my picture of "the composer of the 18th century" or "the Rococo" of "the composer of smiles". in other words, to abandon the image of Mozart as a light-hearted imposer(I would never have had a problem with the 'dry classicist') in order to discover behind the facade of playful charm the unyieling earnest, the sharp characterisation and the creative wealth of Mozart the dramatist. Only when did I finally realise tha Mozart was the Shakespare of opera."-Bruno Walter




수록된 음반 중에는 1956년 3월 녹음한 주피터가 있다. 지금 스테레오를 당연한듯 즐겨듣는 나에게는 오히려 생소했던 모노 녹음인데, 음질 문제는 뒤로 하고 오히려 더 적당한 균형, 감성의 강약이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모습이 드러난다. 중압감을 떨친 자유로움은 이런 것일까? Götz Thieme는 같은 해 녹음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Irmgard Seefried, Jennie Tourel, Léopold Simoneau, William Warfield 등의 훌륭한 솔리이스트들의 모차르트 레퀴엠보다 주피터를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연주로 꼽는다.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는 그러나 이미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때에 이루어졌다는 본인의 고백을 생각한다면, 예술가에게는 어떤 중요한 시기와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지휘를 들으면 악보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핵심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혹자가 말하는 부드러운 멜랑콜리, 따뜻한 여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재자처럼 악단을 장악하지 않고 처음 모인 콜롬비아 심포니 단원들에게 '서로 더 깊이 사귈 수 있는 계기로군요. 좋은 가족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을 건넨 온화한 지휘자. 장악하지 않고 스며드는 조용한 음악을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브루노 발터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괜한 느낌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거장의 지휘를 시간이 흐른 지금 들으며, 이 박스셋 안에 실린 Frantz Werfel의 시를 다시 읽는다. 브루노 발터의 생각 한 자락이 조용히 미소 짓는 것 같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7-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노 발터의 이번 에디션을 볼 때 마다 연이어 생각나는 음반은
알라딘에서 The Klemperer Legacy로 소개하고 있는 오토 클렘페러의 음반 세트입니다.
한정반이니 결정반이니 소개하고 있지만 10개 이상되는 세트로 나누어 발매되다보니
오히려 구매하기가 무척이나 애매하더군요.
그간 낱장으로 소장하면서 언젠가 한방에 몰아 발매하겠지 내심 기다렸는데
많은 클렘페러 연주 애호가들이 기대를 EMI Classics는 나누어 발매하는 것으로 배반(?)한 셈입니다.
브루노 발터하면 오토 클렘페러가 함께 연상되는 것이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상은 Jeanne_Hebuterne 님의 좋은 리뷰를 보며 떠오는 단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순간. 

혹은 '여름을 보내고 나는 우네. 가엾은 내 계절이 사라졌네.' 라고 읊조리는 남자. 열정과 열망 사이 엉거주춤하고 자리 잡은 남자. 평범해서 보편적인 이야기. 오백일의 썸머는 모든 케케묵은 해묵은 악감정을 싱싱한 횟감 건지듯 끌어올리는 영화였다.





 나는 여기서 연애 끝에는 결국 bitch(이 단어는 아예 영화 도입부 나레이션 첫머리에 나온다)가 되는 여자에 관한 이미지라든지 너무 소심한 남자의 표정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안과 밖에서 이야기해서 이미 내가 숟가락을 얹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대신 나는 익숙한 그 집 앞을, 자기연민을, 반성을 생각하고 싶다. 마음이 가난하고 입술이 못생겨 빈집에 사랑을 가두었음을 깨닫는 사람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생각을. 





 그 모든 보편성과 그 모든 특별함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만이 아름답다는 환상, 자신의 사랑은 더없이 빛난다는 착각. 자신은 누구보다도 고운 결을 가졌다는 난데없는 횡포. 이것이 모여 사랑을 만든다면, 진짜 그것은 어디 있을까.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였다. 이것은 폄하나 곡해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뮤지컬 기법, 쇼트 뒤섞기, 그래픽 사용, 음악을 제3의 화자로 빌려 오기 등. 사랑에 들떠(열정) 춤을 추며 거리를 걷는 톰을 보았는데 그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되어 발을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분명 거울 속엔 액션 스타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좀 더 보면 레지나 스펙터의 <히어로>가 나온다. 노래 가사를 적당한 순간에 잘라 대사로 활용하는 기법이야 워낙 많은 영화에 나왔으니 새로울 것도 없으며 뮤지컬은 아예 바즈 루어만의 특기가 아니던가. 사랑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내러티브가 개성 없음이 개성인 평범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주목할 만한 연기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아우라가 강하지 않아 상대 배역의 틀을 구속하지 않고(이를테면 키아누 리브스가 이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백지와도 같아  무엇이든 그 얼굴 표정 위에 쓸 수 있는 배우. 마크 웹 감독은 주이 디샤넬, 조셉 고든 레빗을 투 톱으로 내세우면서 '과연 감독이 원하는 바를 반영할 수 있는 배우란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하는가?'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헐리우드가 지난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찾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지난 시대에서 살아남은 어떤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대조가 더욱 극명하다. '레전드', '아웃사이더'와 같은 청춘물을 찍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청춘스타였으나 지금 유일하게 살아남은 톰 크루즈를 보면 그렇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맷 딜런에 기세가 눌렸으나 지금 누가 그들을 주목한단 말인가? 그 극명한 개성이 그를 살렸으나 지금의 조셉 고든 레빗은 완벽히 다른 예를 보여준다. 크리스 파인, 라이언 고슬링, 채닝 테이텀과 같이 개성 또렷한 배우를 뒤로하고 배트맨, 인셉션, 링컨 등의 필모그라피를 기록하는 조셉 고든 레빗을 바라보면, 아마도 그가 다음 세대의 더스틴 호프먼 같이 변화무쌍한 표정을 선보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이 지루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톰이 썸머를 바라볼 때엔 스미스의 노래가 흐른다. 내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혹은 우리가 어떤 관계냐, 라고 물을 때엔 카롤라 브루니의 'someone told me'가 흐른다. 내러티브의 순차적 구성이라면 클리셰가 되었을 많은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리듬감을 지닌다. 착각과 현실, 꿈과 이상, 시작과 끝. 그 대조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두 사람 각자가 서로가 얼마나 다른가를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작업일 뿐이다. 이 영화가 67회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에 올랐다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마크 웹이 장르의 차용, 사운드트랙의 활용, 장면의 편집과 재배치, 고전 영화 패러디, 화면 분할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테크놀러지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더더군다나 모두나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야기해 더는 새롭기 어려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시작이 어둡다. 급박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분홍빛이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리라 기대하는 순간 시작을 여는 시퀀스는 사랑의 위기. 팬케이크를 먹다가 '우리 이제 그만 보자.'라고 말하는 썸머의 얼굴이 보인다. '네 이야기가 아니야. 이 못돼먹은 엑스' 라는 내용의 자막이 깔릴 때부터 알아보았건만 익숙한 그 공식은 뒤틀린 채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야 사랑의 시작-위기-갈등 해소-행복한 결말이 아니던가. 그 익숙함을 깨뜨릴 때 우리는 건축을 바라보는 듯한 재미까지 느낀다. 극 중 톰이 건축에 관심을 두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썸머의 팔등에 그릴 때 풍겨오던 달달함이 잿빛 도시로 사그라지고, 여름 다음 가을이 올 때 그것을 맞이하는 그가 미소 짓게 되는 것은 마침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시간의 틈이 손끝에 만져져서이지, 그 우연성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 앞으로 올 어떤 일이었다. 





  그 앞으로 올 일. 복사기 앞에서의 키스, 회식 자리에서의 노래, 서로의 취향을 바라보기, 영화 함께 보기, 썸머의 집에 가서 그녀가 매일 보는 벽과 천장을 보는 일. 

 

 

 이미 지나간 것. 영화 '졸업'을 보고 우는 그녀에게 거절할 만한 제안만 골라서 하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스미스 노래를 틀어주고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기, 자신만의 관심을 그녀에게 투사하기.






 운명과 판타지를 착각하는 일이었으니, 그 모든 실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모든 이미지와 유사성을 지닌 어떤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영화의 시작부터 감독이 원했던 것이 분명해진다. 삐걱대는 문과 덜컹대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살인을 암시하듯 이케아 매장을 구경하는 톰과 썸머의 모습, 복사기 앞에서 우스꽝스런 노래를 부르는 썸머와 그것을 들으며 킥킥대는 톰의 모습 등은 분명 행복한 연인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 뼈대이자 동시에 뒤트는 디스크의 통증과도 같은 조각 모음이다. 장르 영화의 공식, 관습, 도상.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관습, 도상. 즉, 톰과 썸머의 공식, 관습, 도상. 이 세 가지가 500일의 썸머를 겪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처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즉 그 과정을 겪는 한 사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그 감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고백과 토로가 있었다. 그것을 아우르는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오백일의 시간이었다. 연애란 어차피 사람이 맺는 가장 강렬한 대인관계의 일종이다. 아마 복사기 앞에서 키스한 다음 톰의 몸속에서는 도파민, 노레피네프린, 세로토닌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이케아에서 썸머와 함께 가구를 구경할 때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었을 것이다. 온갖 호르몬의 폭발을 겪으며 생각하고, 꿈꾸고, 착각한다.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때가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톰이 썸머를 몰랐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몰랐음에도 마지막까지 몰랐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 줄리언 반즈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왔던 말, '너 끝까지 감을 못잡는구나. 아예 그냥 그렇게 살지그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지는 찰나, 뒤따르는 고백이 있었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목소리.






 관계 대부분은 다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결정이 남지 않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야말로 일생의 로맨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톰의 목소리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흐름에서다. 오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타인이 남지만, 이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자기 자신이 남는다. 










 환상과 착각, 오해와 등 돌림. 생각과 분석, 돌이킴과 목마름. 사랑했던 그 이유로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마침내는 무관심하게 된 다음 어여삐 어루만지게 되는 대상. 기억의 윤색과 보정을 거치면, 사람 마음속에서는 모든 관계가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터널이나 동굴을 통과할 때 뒤돌아보는 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자의 귓가엔 아마 다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어떤 한 시기가 끝나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라는 것은 마침내는 돌아보지 않을 때일 것이다. 모든 것에의 이유가 결국,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누군가를 위한 속이 빈 인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한 다음 스스로 건네는 악수 같은 것이 가능한 순간. 종종 사람은 문을 잘 닫기 위해 문을 열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여태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불안. 고드름. 맨발. 유령. 굴뚝. 꽁꽁.

 행복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때 제목을 통해 시인이 완성한 본문.

 저 시를 읽으면 펄펄 내리는 눈이 떠오른다. 뽀드득, 눈을 밟으면 펑펑 내리지 않고 펄펄 서럽게 내리는 눈 위로 어떤 흡혈귀 소녀의 피가 떨어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일컬은 '피와 눈물의 연금술'. 

 세상 모든 열두 살이 따스하거나 연민이 따스함의 외피를 쓴 것은 아니다.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열두 살 소년 오스카와 열두 살 그 언저리 즈음 되었다고 말하는 흡혈귀 이엘리의 이야기다. 영화 전에 스웨덴 원작 소설 렛 미 인이 있었다. 영화 후에 미국 버전 렛 미 인도 있었고 그 뒷이야기도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른다. 모리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많은 세상의 렛 미 인을 떠올려 본다.






 

LET THE RIGHT ONE SLIP IN-MORRISEY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Let the wrong ones go 
They cannot 
They cannot 
They cannot do what you want them to do
Oh ...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들어가도 되니?






 소설 속 이엘리와 소설 밖 이엘리가 물어볼 때.

 글씨가 그것을 읽는 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영상이 그것을 보는 내 눈 밖에서 스프레이처럼 퍼져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씨네 21의 이화정 기자가 쓴 스페셜 기사를 보면 촬영감독은 스프레이 라이트로 이 촉촉한 아날로그를 만들어 냈다 전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풍경은 순간과 영원, 동화와 호러, 혈관 속 피가 흐르는 아이와 피를 마시는 아이 사이 내리는 하얀 눈으로 남아 그곳을 지켰다.












 먹기 위해 죽여야 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는 존재. 여기에 숭고미를 덧입힐 수도, 로맨티시즘을 깔아줄 수도, 호러를 장착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 이미지가 찰나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꽤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 아벨 페라라의 영화, 박찬욱의 박쥐, 앤 라이스의 연작 등, 이 계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이만큼 부옇게 슬프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가장 간단히 답해야 하는 경우의 난처한 표정. 추운 것을 잊어버린 아이와 하얀 입김을 더 하얀 눈 속에 내뿜는 아이의 이야기.





 용기 대신 연민, 동정 대신 동조.






 어떤 엇갈림은 설명을 생략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래서'와 같은 부사를 뺀다. 형용사와 부사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명사와 동사다. 영화의 강점이 그 간결한 압축과 보여주기에 있다면 소설의 강점은 서사를 덮는 깊이의 공간이다. 영화와 소설이 이렇게 만날 때, 종종 글씨와 영상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 고민하는 때도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관한 경우가 '렛 미 인'일 것이다. 같은 나무가 설원에 서 있는데, 그 나뭇가지 끝 맺힌 눈송이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 영화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것을 둘러싼 촉촉한 어둠, 쏟아지는 피에 따라 달라진다. 소설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 아래 먼저 기다리고 있던 쏟아지는 눈빛에 따라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장르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영화를 살펴보자면 이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장르에 취미를 지닌 감독도 아니며 현란한 그래픽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는 듯 하다. 대신 에로티시즘과 장르적 습성을 제거하고 이야기의 핵심인 두 아이를 그저 바라볼 뿐.

 피를 마시지 못해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상한 냄새가 나도 오스카를 앞에 두고 침만 꼴깍 삼키고 스스로를 노려보는 이엘리. '내가 만약 초대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다가도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오스카. 이 두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눈송이가 허공에서 잠시 엇갈리는 것 같다. 







 또렷하게 손끝에 앉았던 눈송이가 몇 년도 지난 지금, 유월의 끝자락에 녹는다. 고드름처럼 자라던 불안은 이제 싹을 틔웠나. 살아있는 아이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아이의 영원은 만나서 '가벼운 키스'라는 모르스부호를 똑똑, 보냈는데 어떤 이의 터널과 어떤 이의 영원은 어떤 생채기를 남겼을까. 삼 초 만에 녹든, 삼 년 만에 녹든,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일 뿐. 영화 올드 보이에서 나온 말과 같이, 모래알이든 돌덩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엘리의 맨발이 밟던 눈송이. 오스카의 언 손이 만지던 루빅 큐브. 

 한 존재의 위장을 채울 피, 한 존재의 혈관을 채울 피.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Oskar: Who are you?

Eli: I'm like you.

Oskar: What do you mean?

Eli: What are you staring at? Well?

Eli: Are you looking at me?

Eli: So scream! Squeal!

Eli: Those were the first words I heard you say.

Oskar: I don't kill people.

Eli: No, but you'd like to. If you could... To get revenge. Right?

Oskar: Yes.

Eli: Oskar, I do it because I have to.

Eli: Be me, for a while.

[pause]

Eli: Please Oskar... Be me, for a little while.






 상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도 너와 같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건 어떤 걸까. 말해주어야 안다는 건, 하루키가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를 통해 들려주었듯이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물안개 같은 빛. 쏟아지는 어둠. 내리는 눈조차 소리를 삼가고 그 동세만 남길 것 같은 눈부신 어둠. 영하 삼십도, 낮은 불과 다섯 시간. 오스카가 지르는 비명은 이상할 만치 괴괴하게 퍼졌다. 세상에 없을 듯한 일과 한계 서로 부딪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색상에 덧입히는 작가와 감독의 무채색이 선명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13-06-24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은 왜 갑자기 렛미인을 다시(?) 보았을까요?

여태천의 크리스마스 - 그 서늘함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고,
제가 좋아하는 님 식 단상 이를테면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뭐, 이런 걸 발견할 때 어쩔 수 없이 전 님이 부럽습니다. ^^*

Jeanne_Hebuterne 2013-06-25 12:27   좋아요 0 | URL



닿아도 다다를 수 없는 관계, 불러도 온전히 부를 수 없는 관계, 한 쪽이 그렇다고 말해도 한쪽이 답할 수 없는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이 작품이 떠올랐어요. 소설과 영화, 양쪽 모두 제가 꽤 흥미롭게 감상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몇 년 전 책 출간 당시 리뷰를 썼는데 지금은 없는 그 리뷰와 제가 지금 다시 응축시키려 노력한 감상이 어떻게 다르게 나올지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무리 춥고 서늘하다 해도 저 두 아이가 내뿜는 하이얀 입김과 눈을 따르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시를 잘 읽지 못했는데 요즘 추천을 받아 읽고 있어요. 잘못 읽거나 옮기지 않았는지 조바심이 나는데, 팜므 느와르 님의 섬세한 감성이 부럽기만 합니다. 제가 은근히 무뚝뚝하고 직선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요. 그 와중에 팜므 느와르 님께서 예쁘게 봐주시는 저런 생각이 비집고 나오는 것은, 이 작품이 워낙 훌륭해서겠지요!


여행 잘 다녀오셨으니 이제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주셔야지요? 그곳의 건조함과 이곳의 습기를 열네 시간 비행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잘 섞어 풀어주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