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딜 가든 멍청함은 거의 같다. 

멍청한 사람의 관념과 감정은, 그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인 관념과 감정으로부터 

자신하며 추론해낼 수 있다. 자신의 본성,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의견과 감정이 발원하는 이들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stupidity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라는 위의 말도 볼 수 있다. 

이것 몇 방향으로 확장 가능할 것 같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서 지배적인 관념과 감정은, 그 자체엔 

진실의 계기 같은 것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의 표본이 될 사람들 안에서는 멍청함이 되지 않나? 적어도 멍청함과 

협력하지 않나. 


상투어가 멍청한 이유가 정확히 이것 아닌가. 


여기 보태 적어둘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에선 적어둘 가치 있어 보였던)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와서 저녁 먹고, 비아그라 후속 소식들 찾아보던 중. 아침 지하철에서 관련해 올라오는 "속보" 보면서 현실 웃음 터지던데. 


라고 쓰고나서 할 말이 없어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말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여러 사람들이 반복해 말했나 보다.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출전이 로버트 하인라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기타 모르는 사람들, 아인슈타인까지. "멍청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을, 악의로 설명하지 말 것. 하지만 악의도 배제하진 말 것." 


어떤가. 어떤 진실이 있나. 멍청함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을 악의로 돌리지 말 것. 이건 멍청함이 

무해하거나 우호적인 형태일 (그런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몰라도) 때만 그렇지 않나. 그런 경우 제외하면 

멍청함은 반드시 악(악의)이지 않나. 





그래서 이 쪽이 더 진실이지 않나. 

루이즈 보건이란 분은 처음 보는 이름인데 

그녀의 말로 이것 말고도 구글 이미지에서 찾아지는 것들이 있으니 유명한 분인가 봄. 


어쨌든 그래서 교육의 목표엔 반드시 "지성"(어떻게 정의되든) 이것 들어가야 하지 않나. 

"남자가 없는 여자는 자전거가 없는 물고기 같은 것"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자명함이 자명하지 않을 때. 않은 이 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ntitled Opinions에 사라 처치웰 출연해서 <위대한 개츠비> 얘기하는 에피소드. 

내용도 재미있는데 내용 외적으로도 (형식이?) 아주 흥미로운 에피소드. 처치웰이 정말 빠르고, 그러니 

많이, 그런데다 오래 말을 하는데 그 옆에서 로버트 해리슨이 점점 지쳐가는 게 목소리로 느껴진다. 해리슨이 

질문 한 번 하면 처치웰이 (일반적 말 속도의 2배속은 아니라도 1.5배속은 되고 남을. 전화기에 이 기능이 있으니 일반 속도로 말하는 사람은 가속해서, 그녀는 감속해서 들어보는 것도) 빨리 많이 오래, 전혀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한다. 


마침내 그녀 말이 끝나면, 전보다 확연히 지쳐 있는 로버트 해리슨. 

점점 더 지쳐가는 해리슨. 그래서 점점 더 그의 질문은 맥없는, 마지못하며 거의 무성의한 질문. 

그가 그렇게 변해가든 말든 끝까지 지치지 않고 열정적인 처치웰. "시끄러운" 여자 싫어하는 남자라면 

질색하겠지. 해리슨도 거의 그러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강한" 여자가 좋고 강한 여자를 알고 보고 듣고 싶다면 

그녀도 찾아보아도 좋겠다. 





bbc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짧은 클립이 있다. 

영국에서 (영어, 문해력과 관련한) 국정 교과과정이 이슈. 


"학생들 문해력이 전보다 아주 떨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고, 일상적으로 내가 접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국정 교과과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확대하고 시험에 대비한 

공부가 아니라 과목이 갖고 있는 진정한 목표에 충실하게 그들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끔 지원하는 방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그녀 입장은 이런 것. 


그녀에게 질문하는 영국 남자, 그녀의 토론 상대인 영국 남자. 둘 다가 

그녀를 약간 무서워하는.... 게 느껴진다. 웃기고 좋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회가 인간을 훼손하고 훼손된 인간들이 사회를 만든다. 

훼손된 인간들이 만든 사회가 인간을 더 훼손시킨다. 

이것이 옳지 않지만 우리는 이 망가진 세계를 멈출 수 없다. 



아직 끝나지 않은 채점 하다가 

작문 답안지에서 위와 같은 문장들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가 옮겨 온다. 

작문 주제는 <허클베리 핀>에서 "deformed conscience vs. sound heart" 이 대조에서 출발해 

"사회에 의해 훼손된(일그러진) 양심"에 맞서 "건강한 심장"을 지킨 사례에 대해 쓰기. 


"언어가 상상력의 본진 language is the very seat of the imagination" 이런 말을 바슐라르 한다. 

이 주제로 (언어와 상상력) 진지하게 오래 연구한 사람들 대상으로 묻는다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지만 그러나 바슐라르 상상력 이론과 시학에서는 한편 중요하게 이해되어야 할 입장. 한편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vast (vaste)" 이 단어의 모음 "a"가 보들레르에게 상상하게 만드는 광막한 공간 : <공간의 시학>에 이에 대한 짧은 대목이 있는데, "오두막 (hut, hutte)"이라는 말 자체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이들에 관한 대목 등등과 함께, "언어가 상상력의 본진"이라는 말의 예가 될 대목들. 


그리고, 현실에서 많은 예들을 체험하지 않나. 

위에 문장 옮겨 온 작문 답안지에선, deform("훼손된" "망가진"으로 번역)이라는 단어가 상상력만이 아니라 생각도 

자극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뭐 그래서 작문 주젤 잘 냈다.........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단어 자체, 자체의 힘으로, 자극되어 실현된 생각이 있다는 생각.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yo 2016-11-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지만, 근래 강의실에서 학생들 분위기는 어떤가요?

몰리 2016-11-22 15:09   좋아요 1 | URL
시국에 대해선 거의 전부가 관심 있고 반정부..... 성향인 걸로 짐작돼요. 다른 학기들엔 반정부적 발언하는 학생이 있으면, 거북해 하는 다른 학생들이 소수라도 있음이 느껴졌는데 이번 학기엔 거의 모두 듣고 생각하는 게 느껴지는 분위기. 기질이나 환경이나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짐작되는 학생들도 (수업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별게 다 감지되죠......) 어쩌면 그런 학생들의 경우 오히려 더, 감당해야 할 짐을 받아든 것 같고. 이런 나라에서 저런 정치인들 난장판 보면서 청소년기, 청년기 보낸다는 건 정말. (정말, 쓰고 뭐라 할 말이... 막연해지네요;;)


syo 2016-11-22 16:11   좋아요 0 | URL
여쭤본 저도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왜 이런걸 갑자기 여쭤봤을까요.....

몰리 2016-11-22 16:38   좋아요 0 | URL
그런데 syo님 대학시절엔 이미 그랬을까 모르겠는데
제 대학시절과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 하나는 페미니즘, 젠더감수성.
90년대 언니들이 지금보다 더 쎘다, 이런 얘기들도 하더라만 그 땐 반여성적 ;; 여학우들
있었고 페미니즘이 분명 좀 급진적이라 여겨졌다 기억하거든요. 쎈 언니들이 하던 얘기가
지금은 삶과 의식의 일부다고 보이는 때 많아요. 남학생들 경우에도, 심지어 1세계 백인남자 페미니스트처럼 말하는 학생들도 (소수긴 하지만) 있고. 그런 남학생은 제 대학시절엔 1인도 없었던 듯.

그러니 이상하지만, 어디선가 분명히 언제나 작더라도 진보는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좋은 질문 주셔서... ! 해보았습니다.

syo 2016-11-22 16:54   좋아요 0 | URL
젠더감수성에 관해서는 저도 몰리님과 비슷한 생각이에요. 저는 전자과였던지라 표본집단이 좀 부적당한 편이긴하지만, 남자의 경우만 놓고 보면 제 주변에도 그런 친구는 1도 없었어요. 오히려 혐오나 비하에 가까운 방식으로 여자를 보는 친구는 드물지 않게 있었지만요.

높은데서는 물이 썩고 있어도 아랫물은 세차게 흐르고 있었네요.
 



엘리노어 루스벨트 사진들 중 이 사진 좋다. 

민소매 원피스 좋지 않나. 끈나시도 좋고. 늙어갈수록 더 노출하자. 다짐하게 만들기도 함. 

무성적 존재가 되어갈수록(그렇게 여겨질수록), just for the hell of it. 언젠가 팔도 쪼글쪼글해지더라도 

끈나시 원피스 입고 다니자. 


pbs의 American Experience처럼 

<한국의 경험>을 생각하면 말 자체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건 

우리에게, 개인 차원에서나 사회 차원에서나 경험이 (경험의 권리가) 부정되기 때문 아닌가. 

<미니마 모랄리아> 어딘가에 ""나"를 말함은 이미 오만(주제넘음)이다" 이런 구절 있다. To say "I" is already impudence. 영어로는 대략 이랬던 문장. 이것, 독일이나 미국에서는 희미하게 징후로나 그랬을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유구하게 생생한 현실로 그렇지 않았나. "나"가 될 권리와 의무가 인정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는 일. 나의 이야기도 남의 관점이 결정하고, 사회의 경험도 공식 버전만이 억압적으로 유통되는 일. 


한국이 연설의 문화가 아닌 것은 한국이 토론의 문화가 아닌 것과 닿아 있는 것 아니냐. 

한 학생이 이런 얘기 어제 수업에서 하는 걸 들으면서, 생각함. 사실 무엇보다, 토론이 가능하려면 

모두에게 "나"가 될 의무와 권리, 인정되고 실천되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한국에서 교육은 유구하게, 

자기의 청산...... 이게 목적이고 부산물이고 그렇지 않았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 내 세대 뇌리에 박힌 이 구절, 얼마나 폭압적인 말인가는 아직도 잘 실감되지 않는 것 같다. 아닌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