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도 보이콧해야 하는 곳일 텐데 

(그러지 못하고) 비공개 블로그에 매일 쓰면서 받는 "콩"이 있어서 

콩 기부를 한다. 오늘 가보니 북한 고아원 아이들 후원도 있는데, 밥 먹고 있는 저 아이 늠 귀엽지 않나. 

볼빨간. 저 나이 때 찍은 사진 속의 나와 거의 똑같. 나 보는 줄......  (나도 귀여웠다는 건 아닙니다). ;; 


조국은 하나다. 심정 됨. 

평소 북조선에 아무, 아무아무아무아무 심하게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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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1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너무 귀엽군요. 전 볼이 빨간 사람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아이구야, 혹시 동상에 걸린 것 아니겠죠 ?

몰리 2016-11-19 14:45   좋아요 0 | URL
머리도 귀여워요. 자동 가운데 가리마. 무심한 듯 시크하게.
숟가락 지긋이 누르는 엄지 손가락도 예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뉴욕타임즈 서평 팟캐스트에 엘리노어 루스벨트 3부작 전기의 3부를 

(1부가 92년 출간) 올해 출간했다는 Blanche Wiesen Cook이 출연.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 보다 보면 호감을 넘어 존경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 다큐멘터리들 출전. 그리고 Entitled Opinions에서 여자들의 우정을 주제로 마릴린 얄롬이 얘기하면서 그녀가 해준 

엘리노어 루스벨트와 그녀 친구들 이야기 정도. 이런 출전들에 따르면, "세계의 퍼스트레이디"라 불릴 만했던 사람.


전기작가 블랑쉬 위센 쿡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그녀는 정말 "위인"이었다. 미화나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있다 해도, 남을 사실들만으로도 위대한 인물일 것 같고 잘 알고 싶어진다. 쿡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품었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전의 진지한 재고가 필요한 때." 

그녀를 알았던 이들에게 엘리노어는, 두려움처럼 용기도 전염된다는 걸 알게 했던 사람. 용기를 옮기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이 유명한 말이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했던 말이란 말인가. 정말. 

그녀는 어떤 유명한 말을 했는가, 검색해 보니 위의 이미지도 나온다. 

그런데 여기, 정말 중요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저 세 줄 아래에 한 줄 띄우고 


"Greater minds discuss all three at once." 이렇게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진정 일류는, 사람의 논의도 사건의 논의도 아이디어의 논의가 되게 하는 사람. 

혹은, 아이디어의 논의를 위해 언제나 사람과 사건도 논의하는 사람. 


사람의 논의만으로 

혹은 사건의 논의만으로 그치는 논의는 

우릴 (우리 정신을) 고양하지 못하는 것 같고, 적지 않은 경우 degrading, cheapening. 

그렇다는 생각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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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창. 트럼프 당선 직후의 업로드 다음

문학 팟캐스트 Other People에서 업로드한 에피소드가 제이드 창 출연이었다. 

한국계 작가인가 해서 검색해 보니 위키에는 아직 엔트리가 없고 그녀의 데뷔작이라는 위 소설로 보면 

중국계인 듯. Other People도, Entitled Opinions 정도는 아니지만 진행자의 긴 모놀로그 다음에 대화가 시작한다. 

진행자가 이러저러, 주절주절한 다음... 그럼 자자 게스트 소개합니다. 이 에피 모놀로그에선, 선거결과에 대한 앞으로의 

발언예정(?)에 대해 짧게 말하고


매월 후원자들이 많아진다면 주 2회 방송, 그리고 진행자가 작가들을 직접 찾아가기 등 Other People을 

더 모험적인 방향으로 만들어볼 수 있겠다면서 후원을 부탁한다. 


나는 이미 작년에 8불인가 일시 후원을 한 적이 있다. 매월 후원을 할 정도는 (내 재산이...) 아니고

그렇긴 한데, Other People 진행하는 브래드 리스티가 "내가 라디오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말하던 인터뷰 기억이 

나고 라디오를 아주 사랑한 사람답게 하고 있는 그의 팟캐스트, 그 팟캐스트가 거리로 나간다면, '로드트립'을 한다면 

얼마나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질까, 잠시 상상하게 되긴 했었다. 


라디오. 나도 조금은 라디오 세대에 속하긴 하는데 

(아닌가? 내가 듣던 때는 이미 '라디오'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 더 정확했나? 하지만 75년생인 브래드 리스티도 '라디오'로 부르고 있었으니만큼) 이 세대는 심지어 바슐라르와도 직접 연결되는 세대라, 유튜브에 있는 바슐라르 인터뷰를 보면 "딸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주었는데 그걸로 아침에 8시부터 10시까지 뉴스를 들어요. 세계가 나를 감싸고 팽팽 도는 느낌을 받아요" 이런 말 한다. 






(제이드 창도, 좋은 얼굴. 뭐 어쨌든, 약하더라도, 영감을 주는 얼굴....) 


지금은 라디오보다 스마트폰으로 팟캐스트. 팟캐스트가 정말 늠늠 좋다는 얘길 쓰려던 포스트다. 

그런데 이거 쓰다보니 아주 내밀한 사연인가,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어쨌든, 아래 포스트에 쓴 웨슬리 로우리 같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예전엔 그들로부터 

직접 들을 거라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는 것에 


환호함. ;;;; 아 그래서, 이제 자야지. 채점은 오늘 이만하면 많이 했고 계획대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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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이곳 바이마르에 와 있다. 괴테는 헤겔 철학에서 나온 몇 가지 성과에 대해 그렇게 특별나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괴테는 헤겔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저녁 다과회를 열었다. 첼터도 참석했으나 오늘 밤 내로 다시 떠날 계획이었다.

 

하만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주로 헤겔이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저 비범한 지성에 대해 아주 정교하고 치밀한 견해를 전개시켰는데, 대상을 아주 진지하고 양심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런 견해였다.

 

그러고 나서 화제는 변증법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넘어갔다. 헤겔이 말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있는 모순의 정신을 법칙화하고 방법론적으로 형태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거짓으로부터 참을 구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괴테가 끼어들어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기술과 민첩함이 오용되지 않고, 또 거짓을 참으로, 참을 거짓으로 만드는 데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정말 다행이겠지요."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요." 하고 헤겔이 대답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만이 그렇게 할 뿐입니다."

 

- 『괴테와의 대화 2』, 226.

















*헤겔이 위와 같이 인용되는 <괴테와의 대화>.  

아도르노가 이 대목을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인용한다. 45번 단장. 번역은 

예전에 영어판에서 내가 했던 번역. 


변증법적 사유는 개별 사물을 고립과 단절 속에서 파악(긍정)하기를 거부하는 데서도 물화에 저항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정확히 이 고립을 보편의 산물로 규정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사유는, 광적인 고착 그리고 망상증적 정신의 저항없고 공허한 표류 -- 절대적 판단의 대가로 문제(사안, 사태)의 경험을 희생하는 -- , 둘 다의 교정자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변증법이, 영국의 헤겔 학파에게서 그것이 되어버린 무엇, 그리고 더 완전하게는 듀이의 완고한 실용주의에서 되어버린 무엇 -- 일종의 균형 감각, 사물들을 올바른 관점(시야) 속에 놓고 보기, 소박하지만 고집센 상식 -- 이 아니다.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의 플라톤주의에 맞서 자신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대립(저항, 모순)의 정신, (다시 말해)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는데서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누구든 가졌으며 누구든 체계적으로 계발하는 재능에 다름아니다"는 말로 자기 철학을 옹호했을 때, 헤겔 자신 이런 관점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의뭉스런,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재능의 칭송은, 동시에 "상식 common sense"을 규탄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본성이, 정확히 상식의 지도를 받지 않겠다는 거부에, 상식을 향한 저항에, 있기 때문이다. 상식, 상황의 정확한 판단(평가), 시장이라는 학교를 다닌 세속적인 눈은 교조로부터의, 옹졸한(편협한) 정신과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변증법과 공유한다. 상식의 냉정함은 비판적 사고를 위해 불가결한 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열정적 헌신, (망상이라해도 좋을 고집),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상식은 비판적 사고의 적이기도 하다. 의견이라는 것은 그 일반성에서, 곧바로 사회의 의견인 것으로 수용되며, 필연적으로 '합의'를 그 구체적 내용으로 갖는다. 19세기 동안 고루한 교조주의 -- 계몽 사상에 의해 양심의 가책을 겪어야 했던 -- 가 상식에 호소했던 건 우연이 아니며, 그리하여 골수 실증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같은 인물이 상식을 향해 독설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균형 감각이라는 것은, 삶의 확립된(기성의) 가치 체계와 척도를 기준으로 생각하라는 전면적 의무와 함께 한다. 뼛속깊이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인물이 "그야 전혀 중요하지 않지"라고 말하는 걸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아니면 부르주아가 과장이라거나, 히스테리, 어리석음 등을 언제 운위하는지 주목했다면, 이성을 향한 호소가 예외없이, 비-이성의 변론을 해야 할 때 즉각 동원된다는 걸 안다. 헤겔이 모순(대립)의 건강한 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에는, 수세기에 걸쳐 막강한 봉건 영주의 핍박을 견뎌야 했던 농부의 옹고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봉건 영주의 뒤를 이은 권력 브로커들이 세계 행정의 불변성과 관련하여 갖고 있는 건전한 견해들에 충격을 안기고(견해들을 조롱하고, 때려 눕히고), 그들의 "균형"이라는 것에서, 과도하게 확대된 불균형의 충실한 축소판을 해독해 내는 것이 변증법의(철학의) 과제다. 지배적 이성에 대항할 때, 변증법적 이성은 비이성이다. 이 비이성을 자기 안에서 지양할 때 변증법적 이성은 (비로소) 이성적이 된다. 작동 중인 교환 사회의 한복판에서, 노동자가 노동에 투입한 전체 시간과 노동자의 삶의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 사이의 구분, 이 구분을 고집함은 얼마나 독선적이며 탈무드적(율법의 강요처럼?)으로 보이는가? 니체는 말 앞에 수레를 끌어다놓고는, 말을 향해 자기 공격을 퍼붓지 않았나? 칼 크라우스, 카프카, 그리고 심지어 프루스트도, 거짓과 편견을 떨치기 위해, 세계의 이미지를 그들 각자의 편견에 찬 방식으로 왜곡하지 않았던가? 변증법은 건강과 병이라는 개념 앞에서 멈출 수 없으며, 아니 이들의 형제 개념인 이성과 비이성 앞에서도 멈추어선 안된다. 지배적 보편 질서와 그것이 말하는 균형이 병들었음을 -- 그리고 가장 축어적인 의미에서 망상증, '감정적/병적 투사'를 특징으로 가짐을 -- 인식한 다음, 변증법적 이성은 지배질서의 기준을 따를 때 병들고 기이하며 망상증적인 것으로 -- 진정 "미친" 것으로 -- 나타나는 것들에서만 치유의 세포를 찾을 수 있다. 중세에 그랬듯이 오늘도, 바보들만이 권력을 (그들의 주인을) 향해 진실을 말한다. 변증법론자의 의무는 따라서, 바보들의 이 진리가 그것이 갖고 있는 이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보들의 진리가 자신의 이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침없이 강제되는 건강한 상식의 병, 그 심연 앞에서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 Minima Moralia, 45, "How sickly seem all growing things, 자라는 모든 것은 얼마나 병들어 보이는가"




독자를 숨막히게 하는 (breath-taking이 아니라 stifling) 

아도르노만 쓰는 것 같은 빽빽한 (빼액빼액한, 빽빽빽빽빽한) 문장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면 정말 기가 막힌 표현들이 즐비하고 기가 막힌 통찰들도 즐비하고, 최고다. 

이 정도면 경전으로 섬겨도 된다고 지금 보면서 생각했다. the worldly eye schooled by the market. 이런 표현. 

그러니까 니체의 경우엔 "왜 니체처럼 쓰면 안되나요?"라고 철학과 대학원생이 항의하는 걸 상상할 수 있지만, 아도르노는 "왜 아도르노처럼 쓰면 안되나요?" 항의하기 어렵겠지.  


<괴테와의 대화>에서 헤겔도, 그 헤겔을 인용하는 위의 아도르노도 

놓고 몇날며칠을 얘기해도 끝이 없겠다. 그래서 이 포스트에선 그냥 인용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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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Philosophy Matters 계정이 선정한 

"지금 중요한 여성 철학자들 35인" 명단도 있다. 

링크: https://storify.com/marstrina/35-important-women-in-philosophy-today-1


반쯤만 아는 이름이었는데, 처음 본 분 중 MIT 재직 중이라는 Sally Haslanger (위 이미지). 

잘 생기셨다. 기보다 어쨌든, 좋은 얼굴. 




예일대의 세일라 벤하빕. 50년생, 터키 출신. 

벤하빕은 매기 질렌할 닮지 않았나. 




아닙니까. 


Philosopher's Zone에서 철학자들의 성비 불균형 주제였을 때 

최근 철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여성 철학자도 출연했다. 

그녀가 철학과에서, 특히 그나마 female-friendly하다고 여겨지는 전공(윤리학이 특히 그렇다고. 그리고 일부 

정치철학. 그녀의 말론 'sort of political philosophy but mmmm')을 제외하고 남자들이 여전히 주도하는 전공 

(형이상학과 논리학이 그렇다고)에서 수업 포함 학과의 분위기를 위의 말로 요약했다. 


self-important exercise in intelligence proving. 

'자기 잘난 맛에 하는 지능 증명 경쟁' 이 정도로 말하면 딱 떨어지나. 


남자들은 저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게임을, 게임 자체 혹은 그저 이김을 목적으로 하려 한다. 

여자들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거나 그들이 하는 일에 본원적 가치가 있기를 원한다. : 이런 얘기도 한다. 


분명 "자기 중요한 맛에 하는 지능 증명"은 남자들이 더 많이 하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어쨌든 자기 일에 본원적 가치가 있기를 원하는 남자들도 드물지 않은 것 같고 

"지능 증명" 이걸 여자들도 사실, 안 하는 게 아니고. 하여튼 Philosopher's Zone에서 저 주제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라 이미 여러 번 들었지만 좀 어리둥절. 내가 철학과를 다닌 게 아니니, 철학과 출신이고 지금 철학자인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음... 다시 돌아올 문제입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주말 내내 퀴즈, 중간시험 채점을 해야 한다. 내내. 내내. 밥 먹고 채점. 밥 먹고 채점. 

채점 후 잠. 일어나서 채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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