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이 이곳 바이마르에 와 있다. 괴테는 헤겔 철학에서 나온 몇 가지 성과에 대해 그렇게 특별나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괴테는 헤겔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저녁 다과회를 열었다. 첼터도 참석했으나 오늘 밤 내로 다시 떠날 계획이었다.
하만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주로 헤겔이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저 비범한 지성에 대해 아주 정교하고 치밀한 견해를 전개시켰는데, 대상을 아주 진지하고 양심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그런 견해였다.
그러고 나서 화제는 변증법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넘어갔다. 헤겔이 말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있는 모순의 정신을 법칙화하고 방법론적으로 형태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거짓으로부터 참을 구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괴테가 끼어들어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기술과 민첩함이 오용되지 않고, 또 거짓을 참으로, 참을 거짓으로 만드는 데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정말 다행이겠지요."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요." 하고 헤겔이 대답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만이 그렇게 할 뿐입니다."
- 『괴테와의 대화 2』, 226.
*헤겔이 위와 같이 인용되는 <괴테와의 대화>.
아도르노가 이 대목을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인용한다. 45번 단장. 번역은
예전에 영어판에서 내가 했던 번역.
변증법적 사유는 개별 사물을 고립과 단절 속에서 파악(긍정)하기를 거부하는 데서도 물화에 저항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정확히 이 고립을 보편의 산물로 규정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사유는, 광적인 고착 그리고 망상증적 정신의 저항없고 공허한 표류 -- 절대적 판단의 대가로 문제(사안, 사태)의 경험을 희생하는 -- , 둘 다의 교정자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변증법이, 영국의 헤겔 학파에게서 그것이 되어버린 무엇, 그리고 더 완전하게는 듀이의 완고한 실용주의에서 되어버린 무엇 -- 일종의 균형 감각, 사물들을 올바른 관점(시야) 속에 놓고 보기, 소박하지만 고집센 상식 -- 이 아니다.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의 플라톤주의에 맞서 자신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대립(저항, 모순)의 정신, (다시 말해)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는데서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누구든 가졌으며 누구든 체계적으로 계발하는 재능에 다름아니다"는 말로 자기 철학을 옹호했을 때, 헤겔 자신 이런 관점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의뭉스런,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재능의 칭송은, 동시에 "상식 common sense"을 규탄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본성이, 정확히 상식의 지도를 받지 않겠다는 거부에, 상식을 향한 저항에, 있기 때문이다. 상식, 상황의 정확한 판단(평가), 시장이라는 학교를 다닌 세속적인 눈은 교조로부터의, 옹졸한(편협한) 정신과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변증법과 공유한다. 상식의 냉정함은 비판적 사고를 위해 불가결한 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열정적 헌신, (망상이라해도 좋을 고집),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상식은 비판적 사고의 적이기도 하다. 의견이라는 것은 그 일반성에서, 곧바로 사회의 의견인 것으로 수용되며, 필연적으로 '합의'를 그 구체적 내용으로 갖는다. 19세기 동안 고루한 교조주의 -- 계몽 사상에 의해 양심의 가책을 겪어야 했던 -- 가 상식에 호소했던 건 우연이 아니며, 그리하여 골수 실증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같은 인물이 상식을 향해 독설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균형 감각이라는 것은, 삶의 확립된(기성의) 가치 체계와 척도를 기준으로 생각하라는 전면적 의무와 함께 한다. 뼛속깊이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인물이 "그야 전혀 중요하지 않지"라고 말하는 걸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아니면 부르주아가 과장이라거나, 히스테리, 어리석음 등을 언제 운위하는지 주목했다면, 이성을 향한 호소가 예외없이, 비-이성의 변론을 해야 할 때 즉각 동원된다는 걸 안다. 헤겔이 모순(대립)의 건강한 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에는, 수세기에 걸쳐 막강한 봉건 영주의 핍박을 견뎌야 했던 농부의 옹고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봉건 영주의 뒤를 이은 권력 브로커들이 세계 행정의 불변성과 관련하여 갖고 있는 건전한 견해들에 충격을 안기고(견해들을 조롱하고, 때려 눕히고), 그들의 "균형"이라는 것에서, 과도하게 확대된 불균형의 충실한 축소판을 해독해 내는 것이 변증법의(철학의) 과제다. 지배적 이성에 대항할 때, 변증법적 이성은 비이성이다. 이 비이성을 자기 안에서 지양할 때 변증법적 이성은 (비로소) 이성적이 된다. 작동 중인 교환 사회의 한복판에서, 노동자가 노동에 투입한 전체 시간과 노동자의 삶의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 사이의 구분, 이 구분을 고집함은 얼마나 독선적이며 탈무드적(율법의 강요처럼?)으로 보이는가? 니체는 말 앞에 수레를 끌어다놓고는, 말을 향해 자기 공격을 퍼붓지 않았나? 칼 크라우스, 카프카, 그리고 심지어 프루스트도, 거짓과 편견을 떨치기 위해, 세계의 이미지를 그들 각자의 편견에 찬 방식으로 왜곡하지 않았던가? 변증법은 건강과 병이라는 개념 앞에서 멈출 수 없으며, 아니 이들의 형제 개념인 이성과 비이성 앞에서도 멈추어선 안된다. 지배적 보편 질서와 그것이 말하는 균형이 병들었음을 -- 그리고 가장 축어적인 의미에서 망상증, '감정적/병적 투사'를 특징으로 가짐을 -- 인식한 다음, 변증법적 이성은 지배질서의 기준을 따를 때 병들고 기이하며 망상증적인 것으로 -- 진정 "미친" 것으로 -- 나타나는 것들에서만 치유의 세포를 찾을 수 있다. 중세에 그랬듯이 오늘도, 바보들만이 권력을 (그들의 주인을) 향해 진실을 말한다. 변증법론자의 의무는 따라서, 바보들의 이 진리가 그것이 갖고 있는 이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보들의 진리가 자신의 이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침없이 강제되는 건강한 상식의 병, 그 심연 앞에서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 Minima Moralia, 45, "How sickly seem all growing things, 자라는 모든 것은 얼마나 병들어 보이는가"
독자를 숨막히게 하는 (breath-taking이 아니라 stifling)
아도르노만 쓰는 것 같은 빽빽한 (빼액빼액한, 빽빽빽빽빽한) 문장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면 정말 기가 막힌 표현들이 즐비하고 기가 막힌 통찰들도 즐비하고, 최고다.
이 정도면 경전으로 섬겨도 된다고 지금 보면서 생각했다. the worldly eye schooled by the market. 이런 표현.
그러니까 니체의 경우엔 "왜 니체처럼 쓰면 안되나요?"라고 철학과 대학원생이 항의하는 걸 상상할 수 있지만, 아도르노는 "왜 아도르노처럼 쓰면 안되나요?" 항의하기 어렵겠지.
<괴테와의 대화>에서 헤겔도, 그 헤겔을 인용하는 위의 아도르노도
놓고 몇날며칠을 얘기해도 끝이 없겠다. 그래서 이 포스트에선 그냥 인용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