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스는 나보코프의 광팬이고 나보코프 주제로 많이 썼다.
The rub of time에도 나보코프에 관한 여러 글들이 있다. 나보코프의 전기에 관한 글도 있고
헨리 필즈던가 이름이? 나보코프 생전에 나보코프 부부와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전기를 쓴 전기작가, 이 작가와
그가 쓴 전기를 가혹하게 평가한다. 이 작가에게, 왜 나보코프는 나보코프이고 나는 나인가(나따위에 불과한가), 이것이 영원히 고통을 안기는 진정한 문제였다 -- 이런 투다, 그 가혹함은. "나도 천재적 작가일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나는 내가 아닌 천재적 작가의 전기를 쓰고 있어야 해?" 억하심정이 그의 문장들에 스며있다.... 고 전한다.
어찌 감히, 꿈엔들, 나보코프와 너를 동급으로 놓아 봄?
나도 작가인데 왜 나는 나보코프의 전기를 쓰고 있는가. 이게 그에게 괴로운 질문일 수 있었다는 게 자체로 그가 주제파악을 전혀 하지 못함을 알게 한다..... : 에이미스는 이런 입장이고 이 입장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 왜 그가 어떤 이들에게 격한 적개심을 자극하나 알 거 같기도 했다.
미미한 존재가 위대한 존재와 자기를 동급으로 놓아보는 것도 여러 방식이 있겠지.
나보코프는 <롤리타>가 흥행하기 전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에이미스의 표현으로는 "50대까지 극빈 속에 (in penury)" 살았다. 코넬 대학 교수였는데 "극빈"일 수는 없다고 하고 싶지만. 나보코프의 돈 없이 늙어가던 시절과 자신의 그런 처지를 누가 비교한다면, 그것도 감히 미미함이 위대함과 자신을 동일시함인가? <롤리타>의 흥행 같은 건 자기 삶에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은가. 동급으로 놓아봄의 어처구니없음(꼴갑스러움)을 알면서도 동급으로 놓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아이러니가 열일하게. 그리고 그 꼴갑스러움을 질타하는 것도 여러 방식이 있을 것이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아이러니가 작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에이미스는 그러지 않는다. 아이러니 대신 사고의 통제, 사고의 검열, 차단. 이 욕망이 작동한다. 그의 "보수" 성향은 무엇보다 이런 면모에서 보이는 거라 해도.
그런가 하면, 이 전기작가 때문에 말년의 나보코프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낭비와 훼손 waste and violation"으로 말하던 대목은 적지 않게 공감하면서 조금 오래 보게 되기도 했다. 그와 같이 한 시간, 해야 했던 대화가 모두 "낭비와 훼손"이었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인간이 형성하는 삶의 풍토를 낭비와 훼손, 이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 거 같다. 어떤 낭비와 훼손이 거기서 일어나는가, 조장되는가, 방치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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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 끝내고 다른 하나를 보니 안해도 되는 일이었다!
아직 집안도 복잡하고 머리 속도 복잡한데, 일요일 오늘은 적어도 몇 시간은 멍때리고 있어도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