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좋은 책의 조건이 뭐냐고 물으면 역시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 대답은 내가 입사면접 때 한 말이기도 하다. 딱히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좋은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당연히 용서할 수 없는 책은 재미없는 책이다.
그런데, 서점에 읽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을 사지 않는다. 재미있는 책은 '빌려서 읽거나 서점에서 서서 읽고' 좋다고 여겨지는 책을 산다. 사실, 그렇게 산 책들의 운명은 뻔하다. 사서 펼쳐볼 확률 반, 끝까지 읽을 확율은 그 반, 재미있을 확률은 그 반, 그 책을 다시 읽을 확률은 그 반이다.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내 이야기다.
그리고 두고두고 기억나고, 어느 날 문득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책 혹은 도서관이나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없다. 금방 품절되거나 절판이 되니까 말이다. 이른바 명작은 절대로 절판될 걱정 안해도 된다. 그런 책들은 메이저 출판사들에서 주구장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 나올 테니...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스티브 킹 때문이다. 소시적에 이런 대중 소설이라면서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았는데, 지금 땅을 치고 후회한다. 그때 살걸. 번역이 엉망이든 책 편집이 조잡하던, 아니면 대중소설을 내 책꽂이에 꽂아두든(아, 어린 시절의 나는 얼마나 허영과 과식욕에 넘치는 존재였던가)그밖에도 많다. 수없이 절판된 만화들... 이제는 대여점에서 폐기처분된 그 만화를 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샀던 책들은 지금도 대부분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이다. 게다가 개정판까지 줄줄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때 안샀던 책들은 지금는 대부분 절판 상태고 다시 나올 확율도 낮은 상태다. ㅠ.ㅠ
그렇게 보면 내 책꽂이는 내 허영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그 허영은 내게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 허영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고전의 맛을 몰랐을 거다. 사서삼경, 도덕경, 한비자, 셰익스피어니 초서니, 그리스 로마 신화, 실러, 괴테, 도스토예프스키..아.. 솔직히 고백해 처음에는 너무 재미없었다. 지적 욕구만큼이나 더 무서운 것은 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내 허영의 욕구였다. 그 결과 나는 고전을 이제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전공까지 고전을 하게됐고...^^;;
요즘 책을 정리하다 보면 정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책'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아, 왜 나는 솔직하지 못했던가. 지금은 재미있는 책도 사고, 그럴듯한 책도 산다. 언젠가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은 현재를 위해서도 사야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도 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