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글을 아껴쓰고 있는데 날라가버렸다. 이전글이 이후글을 덮어버렸다. 창이 두 개가 열려있었고, 하나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DC. 정말 더블클릭이 문제다. 이 친구. 아 정말~~~


 -2


 아마 이렇게 시작했지. 친절한 금짜씨, 아니 친절한 라투르씨!! 정말 준비를 다 해두셨더군요. 두꺼운 벽돌책을 구입하자 벌써 요령부릴 궁리부터 한다. 서언과 목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몇 군데 굵직한 장 몇 개를 앞뒤로 읽으면 되겠다 싶다. 어라 그런데 술술 읽히는 건 어찌된 영문인가. 놓치지 않게 되고 심지어 리듬감도 생긴다. 웬 일이람. 


그래도 겹친 일들이 많아 틈틈이 마음도 쉬고 책도 쉬어가야 한다. 절반을 넘고 오고가는 길. 마음 속에선 내내 읽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내달리지 못한다. 드뎌 마무리 지점까지 온다. 일주일 남짓이다. 마지막 피벗테이블과 작품각주까지.


-1


이 책은 쉽다. 몇 가지만 짚고 넘나든다면 말이다. x,y,z 축의 한점. 한 사물. 물건 하나. 그 걸 발명한 이의 시선을 거둔다면 어떨까? 정신과 육체란 동전의 양면을 둘로 나누기 시작한 이의 관점을 거둬들인다면 어떨까? 주사현미경 보다 더 가까이 양자측정기들이 더 가까워지는 순간 옹기종기 있던 이들은 사라지고 찰랑찰랑하던 이들이 곤두선다. 춤춘다. 넘나든다.


0


사물도 만물도 타자다. 모두가 타자다. 모두가 존재자다. 근대인들이 헤메이던 정치, 법, 기술, 종교, 조직, 도덕, 제도, 픽션 들 같은 깊거나 낡아버린 폐광같은 곳을 민속학자라는 이에게 숨통하나 지게 하고 들여보낸다. 등엔 한 가닥의 실을 드리운다. 미노소궁 같은 근대인이란 자만과 자충의 폐허를 돌아다녀본다. 


1


숨관이란 실끈은 끊어질 듯 위태롭다. 끊어지기 직전, 또 다른 희망이란 끈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렇게 매듭지어진 곳에 또 다른 홑눈이 생긴다. 또 다른 겹눈도 나타난다. 주객이 전도되거나 주와 객 사이의 심연이라는 것이 조명아래 살펴보니 허구라거나 붙어있어야 할 곳이 저 평면 아래였다거나 시선들이 좁혀지니 조금씩 질서 정연해보인다.  사과밭이 무성하고 빽빽한 줄만 알았는데 옮겨보니 열과 행이 잘 맞는다. 잠깐 놓치지 말아야 돼. 이 시선은 말야. 조금 가파르고 높은 곳을 올라서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2


그렇게 하나 하나 애써 짚어보인다. 잘 보세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구.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꼬리에 꼬리를 물게한다. 그리고 이제 연습을 많이 했으니 <경제>도 살펴보자 한다. 


3


그래서 어렵다. 주체-객체의 좌표에 변신-재생산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전치사란 하이폰을 거리낌없이 붙여 사유의 물꼬를 터 나간다. 신은 없다란 자만심에 무엇이라도 할 것 같았던 근대인들은 불안하다.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신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쩌다 정치-법-기술-조직의 연결망에 잘못 걸려든 것 같다. 이게 꿈이길, 하지만 이젠 멈출 수 없다. 벗겨진 시야에는 다른 것들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이폰을 잇다보면 그곳이 출렁거리는 욕망의 잔 실뿌리들이 보일 수 밖에 없다.


4


유령의 집합인 사회와 문화, 이분의 잣대가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 곳들을 다른 잣대로 세밀하게 재측정해야 한다. 이렇게 퍼즐은 다시 맞춰질 수 있다. 그제서야 근대인의 헛점투성이를 메우게 되고 행동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한 매듭 맺힌 곳들은 다시 살펴볼 수 있다면 좀더 나은 변신들이 채울 수 있다면 그 폐광이 폐허가 소생하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


볕뉘.


라투르씨 그리 애간장을 끓이지 않아도 될 듯요. 충분해요. 잘 만들었다고, 각주는 정말 예술이었다는 말도 전하고 싶군요. 멋지네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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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산에 오르는 이들은 지도앱(지도)를 들고 수시로 확인하며 오르내린다. 자칫 길을 놓치거나 할 수 있으나 이정표가 되는 큰바위나 폭포들은 어김없이 작은 실수들을 보완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을 오르내린다. 거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레퍼런스(지시)와 리프러덕션(재생산)만 있다. 아무도 등산을 문제삼지 않는다. 


-1


묵힌 책을 여기저기 오가면서 기차 안에서 읽다. 발췌읽기를 할까 싶었는데 줄줄 읽힌다. 굵은 줄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과학은 이제 산꼭대기에 머무를 수 없다. 이제 내려와야 한다. 내려와 저자거리의 종교와 법, 신화와 사귀어야 한다. 적과의 동침도 부끄럽지 않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일관되게 외교관의 자세를 말한다. 그리고 이십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바탕으로 삼는다. 면밀하게 살펴보고 돌아보고 규정짓는 일이 바닥을 확인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것을 밑절미로 삼아 다른 가능성과 양식들을 살핀다.  



0.1


발췌읽기를 했던 아래 책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뒷부분과 앞부분을 다시 읽다보니 요점에만 선명한 밑줄과 날개접힘만 남고, 배경기억은 흔들려 사라진 듯싶다. 부제로 달고 있지만 <의지, 책임, 행위, 선택의 고고학>이란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어설픈 소개보다는 그대로 남기는 것이 좋을 듯하며 읽기쉽게 밑줄을 수정하여 정리해둔다.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길 수 있겠다싶다. 라투르 책도.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적당히 안전한 거리라는 것을 잘 모른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인간관계의 정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래도 된다. 하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전부 알고싶다는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요구하거나, 가볍게 물어도 집주소부터 이메일까지 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제법 있다. 거기에 덧붙여보면, 조금 친해지면 나 이외에는 보지 않고, 말도 섞지 말았으며 싶은 부류들 말이다. 10p


1.


 어쩌면 이 프롤로그의 이 요약밑줄은 정작 본 줄거리와 큰 상관이 없다. 서두에 모아두는 것은 우리들의 관계 역시, 모 아니면 도 아닐까 싶은 노파심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효과로서 의지는 남는다; 태양의 빛과 인간 신체가 만났을 때 태양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표상한다. (물론 가까이 있지 않은데도) 의지도 마찬가지 효과를 낸다. 우리의 정신은 사건이나 사물의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과인 의지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런 메커지즘을 알아도 "우리가 의지의 나타남을 느끼기 이전에 뇌는 활동을 개시하는 거다." 39p


2. 


- "중동태는 주어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동사의 행위에 연루되거나 혹은 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태를 나타낸다."(길더슬리브, 1900년)

- "동사가 주어의 영역 내에 자신의 현장을 갖고 있고 주어 전체가 이 동사에 관여된 것으로 나타난다."(부르크만, 1900년)

- "능동의 경우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의 밖에서 완수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대립하는 태인 중동의 경우 동사는 ㅈ어가 그 장소가 되는 그런 과정을 표현한다. 즉,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벤베니스트, 1966년)

- "인도-이란어나 그리스어에서 중동의 굴절 어미는 주어가 개인적인 방식으로 과정에 관심(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메이에, 1937년)

- "중동이(능동과 대립되었을 때) 함의하는 바는, '행위' 또는 '상태'가 동사의 주어 또는 그 주어의 이해 관심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리용, 1969년) 97-98p



3 '하느냐 당하느냐'가 아니라 '안이냐 밖이냐"


이상의 대조를 통해 충분히 명백하게 본래의 의미에서 언어적인 하나의 구별, 주어와 과정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구별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능동에서 동사가,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대립하는 태인 중동태에서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가 되는 그러한 과정을 나타낸다. 요컨대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 105p


주어(주체)는 주어 안에서 성취되는 어떤 일(태어나다, 자다, 자고 있다, 상상하다, 성장하다 등)을 성취한다. 그리고 그 주어는 바로 자신이 그 동작주 agent인 과정의 내부에 있다. 107p


'있다(존재하다)'는 인도-유럽어에서 '가다'나 '흐르다'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관여가 필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과정인 것이다. 108p


4.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은 '하다'와 '당하다'의 대립으로서, 의지 개념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중동태 개념을 들임으로써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데, 능동태와 중동태의 대립은 의지가 전경화되지 않는 다른 위상을 갖는다. 다음은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가능태를 전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암암리에 미래를 진정한 시제로 삼기를 부정하고 있다. 즉, 미래는 과거의 귀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기억이 과거를 위한  기관인 형국이어서 미래를 위한 기관으로 삼는 사고, 즉 의지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의지의 실재를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우리가 '행동의 원동력'으로 간주하는 의지에 대한 '단어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15p


5.


장피에르 베르낭: "그리스어나 고대 인도-유럽어로 표현되는 사상에는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의 원천리라고 하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베르낭 자신의 강조점은 '그리스에는 의지라는 범주가 없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후의 서양 세계에서 '의지'나 '책임', '인간 주체' 같은 개념이 창조되어왔다는 사실 쪽에 있다. 122p


언어가 사고를 규정하는 게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가능성을 규정한다. 즉,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해보면 언어는 사고의 가능성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32p 이 점은 언어가 사고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장의 설정을 요청한다. 현실의 사회와 역사야말로 바로 그러한 장이다. 145p


프로아이레시스(선택)는 시작을 담당할 능력이 아니다. 시작이기는커녕 이성과 욕망의 상호작용하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프로아이레시스 혹은 일반적으로 선택이란 그러한 것일 터이다. 선택은 과거로부터의 귀결로 존재한다. 이래는 과거에 존재하고 있던 것의 귀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54p

이러한 선택과 구별되어야 할 의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로부터 귀결로 존재하는 '선택' 곁에 돌연 출현하여 억지로 그것을 과거로부터 분리해버리고자 하는 개념이다. 게다가 이 개념은 자연스레 거기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출된다. 157p


5.1


실제로 권력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관계가 타자에게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행위에 작용하는 행위 양태라고 하는 점이다. 즉, 권력 관계란 행위에 대한 행위이고, 이루어질 수 있거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혹은 현재의 행위에 대한 작용인 것이다. 그에 반해 폭력 관계는 신체나 물체에 작용한다. 그것은 강제하고 굴복시키며, 박살내고 파괴하고 온갖 가능성을 죄다 닫아버린다. 그런 까닭에 폭력 관계의 바탕에는 수동성의 극밖에 남겨지지 않는다. 172-173p 권력이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모든 일이 다 능동과 수동의 대립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권력의 양태가 특수하게 보인다. 능동-수동의 대립이 아니라 위상이 다른 능동-중동으로 살펴보기 바란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권력에 의해 상대에게 행위를 하게 하므로 행위 절차의 바깥에 있다. 이는 중동성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능동성에 해당한다. 권력에 의해 행위당하는 자는 행위의 절차 안에 있으므로 중동적이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청소를 당하는 자는 자신이 그것을 함과 동시에 억지로 당하고 있기도 하다. 이때 그는 단지 행위의 절차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하다. 타율과 자율의 구분하면서 분분했던 논의가 정리된다. 178-179p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워지면 출현하는데 폭력을 행사되도록 그대로 두면 마지막에는 권력을 소거해버린다. 대립하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비폭력적 권력이라는 것은 언어의 중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어도 권력을 창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182p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싶지만, 친구가 국수로 하자해서 어쩔 수 없이 든다."

"아이가 떼를 쓰고 졸라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사준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근무한다."

"총을 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금고를 연다." 185p


6.


일만 년 이상의 역사 중 한 측면을 '사건을 묘사하는 언어'에서 '행위자를 확정하는 언어'로 이행해온 역사로 그려낼 수 있다. 명사적 구문의 시대에 동작은 단순한 사건으로 그려진다. 거기에서 생겨난 동사도 당초에는 비인칭 형태여서 동작의 행위자가 아니라 사건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훗날 동사는 인칭을 획득하였고 동사가 표현하는 행위나 상태를 주어에 결부시키는 발상의 기초가 탄생했다. 208-209p


행위자를 확정한다 함은 어떠한 일일까? 능동과 수동을 대립시키는 언어는, 행위에 관한 복수의 요소들의 공유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오로지 나의 행위로, 즉 나에 귀속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조금 과장스레 말하자면 사건을 사유화한다. '하느냐', '당하느냐'로 사고하는 언어, 능동태와 수동태를 대립시키는 언어는 단지 '이 행위는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는다. 209p 


그리고 그 귀속처로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의지란 행위의 귀속처이다. 아감벤은 의지란 행동이나 기술을 어떤 주체에게 소속시킬 수 있게 해주는 장치라고 말한다. 선택(프로아이레시스 또는 리베룸 아르비트리움)과 구별되는 한에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의지라는 능력이,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문제가 되면 돌연 근거로 내세워지는 것이다. 210p


능동태는 동작이 갑에서 나와 을로 향하여 그 을을 처분하는 것을 나타낸다. 주어(갑)으로부터 발원한 동작이 주어와 다른 객체(을)에 작용하여 주어 밖에서 그 영향력이 완결된다는 것이다.

중동태는 동작이 행위자를 떠나지 않고 그 영향이 모종의 형식에 있어서 행위자 자신에게 되비치는 성질의 것을 나타낸다. 주어로부터 발원한 동작의 영향력이 그 어떤 방식에 의해 행위자게 머무른다는 것이다. 214p


능동-수동의 대립은 본래 큰 차이가 없는 표현인데, 행위자에 귀속시키는 순간 대립하기를 강요받는다. 동일한 사태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들어냈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의해 드러남을 강제당했는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모습을 나타낸다. 나는 나타나고 내 모습이 나타내어진다. 이 상황에서 언어는 '너의 의지는?'이라고 심문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심문하는 언어이다. 216p


주어를 무대로 진행되는 과정을 표시하는 중동태는, 아마도 그 과정을 실현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특징지어지는 스펙트럼을 가질 것이다. 담백하다면 단순한 자동사 표현이 담당할 수 있다. 대단히 강하지만 천천히 발휘되는 경우는 자발의 의미로 이해된다. 과정에 있어 힘과 주체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발견되면 수동태로 표현할 수 있다. 222p


<일리아스>는 중동태의 소산이고 <사쿤탈라>는 중동태의 하사품이다.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의 노래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중동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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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나리 삼겹살이 나오는 계절이다. 부들부들, 야들야들 씹히는 향은 입안에 가득 고인다. 살짝 익힌 미나리 위에 고기 한 점, 구운 마늘, 쌈장에 절인 매콤한 고추를 올리고 한 입 가득 넣고 오물오물 해본다.


-4


볼 일이 있어 책방에 들르고 캔 커피 셔틀을 하려던 참, 작업실로 향하는 차의 타이어압 표시등이 깜박거린다. 이크 큰 일인 걸. 작업실 입구 아주머니가 하는 카센터가 떠오른다. 어떡하죠 하니 앞으로 뒤로, 핸들 돌리시고, 여걸이신 아주머니는 거품스프레이로 확인하고, 몇 분이 더 붙어서도 잡아내질 못한다. 공기압을 올려주시더니 이상 없는 것 같다고 콜하신다. 


-3


작업실에 들러 작품 사이즈를 다시 잰다. 정말 편집-디자인 빼곤 마지막 일이다. 맞아. 라떼 셔틀. 음성전화 주문을 하고 가려던 참인데 타이어 압력이 떨어지는 수치가 보인다. 펑크네, 펑크야. 이런...


-2


단골 카센터 추사장님은 압을 높이더니 단 번에 잡아내신다. 이런 노련함이란, 이건 못이라기보다 패인 듯싶다고, 본드발이를 해주신다. 대기대기. 


-1


 

책을 재독, 삼독하면서 기록을 남기는데, 저자가 이 책도 썼다는 걸 눈치챈다. 그치 꽤 인상깊게 읽었는데, 원제는 중동태의 세계가 아니라, '의지와 책임'의 고고학이다. '의지'라니 그런 건 없다고 지웠는데....뒤돌아서자마자 의지라니.....


예전의 기록을 찾아보니 능동/수동의 구조, 삼분, 삼표, 변증의 길을 여기서도 발견한 것 같아 기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흥분한 기억. 하지만 잊히고 말 무렵, 저자의 책들을 다시 접할 수 있어 고맙다. 곁의 책도 같이 본 흔적이 있다.  아침에 이 책들을 찾으려 눈검색을 하니 쉬이 잡히지 않는다. 같이 있는데, 같이 있어야하는데 어디에 둔 거지. 몇 차례 분류를 하다보니 기억과 다르게 다른 곳에 점핑해둔 것이다. 간신히 찾아 에코백에 넣는다. 출근이다. 아아 챙겨야지.


0


능동과 수동이란 이분법은 행위자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 능동태, 중동태. 엊그제 이분법의 사례들을 장황하게 알고 싶어, 검색 찬스를 써보았다. 그러다 걸린 것이 문학과 사회 2018년판이던가....


중동태는 행위를 하는지 당하는지 여부로 주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에 따라 나눴다고 하는 고대의 문법 개념이다. 중동태의 사유에서 '나'는 자주 바뀐다. 상황과 장소, 시대와 분위기에 따라 나의 판단과 행동은 일관적일 수가 없다. 능동/수동의 이분법에 가려져 '바뀌는 나'가 여지껏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는 주체를, 특히 광장의 주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대목이 걸려 따로 남겨두자 이 책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1


몇 주전 '서울의 봄'이야기가 나와서 한 마디 하였는데, 천만 영화가 수십번, 억명이 영화를 봤는데도 세상은 조금도 바뀐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불필요한 사설을 상가집에서 나누었다. 상주의 정신없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언제가부터 영화라는 독법이, 소설이라는 장르가, 문학이 너머서지 않고 있음을 느끼지만, 뾰족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빌미를 삼는다. 책날개가 접힌 걸 보니 다 읽지는 않은 듯싶다.


2




3


 주체가 없는 묘사...세잔의 대목이 다시 떠오른다. 정녕 다른 길들은 없는가. 갇히 문학과 영화가 열어제치는 다른 결들은 여기저기 있겠지. 살피지 못하는 건, 기존의 시야, 눈은 아닐까.....비가 툭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이다.



4. 



볕뉘.


막 뒷부분을 완독한다. 얘기꺼리가 무척 많다. 잇기로 한다.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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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왓! 콰과광!! 인적이 드문 주유소로 향한 것이 화근이다. 인도와 차도와 경계가 무딘 한적한 읍내를 라이딩하던 참이다. 배유구라고 할까 기름이 흘러넘치면 빠져나가게끔 만든 길쭉한 홈사이 미니벨로 앞바퀴가 끼는 사이, 이런 끝장을 봤구나 싶다.  아얏! 아이쿠~~!! 내동댕이 쳐지자 시큰거린다. 한참 일어나지 못하고 정황이 시선을 끈다. 체인은 벗겨졌는지? 끊어져버린 것인지? 찰과상인 건지? 뭐가 잘못된 것이야. 


 -4



























-3


후다닥 읽을 참이었는데, 시집도 그렇게 빈 틈을 메우는 시간들의 결들이 달라 짤라 읽기다. 도서관도 가고, 책방도 들르고, 식당에서도 읽는데 진도가 나가질 않아. 벨로 뒷짐을 싣고 달린 것이 화근인가. 


-2










책들 모서리를 읽다가 다 읽은 것도 서문에서 감탄하다가 어떻게 한다 고민한 것도 있고, 절반을 씨름하듯 읽어내기도 하고, 어 고진 이사람 연구많이 하셨네. 역시 말년이란 자고로 이래야 하는 법이지 한다. 


 

그러다보니 진도나가야 하는 데 걸린 대목이 아쉽기도 하다. 챗gpt의 헛점도 알게되고, 유투브 영상을 보다나니 대충 감이 오기도 한다.







-1


<정신머리>라는 시집의 첫머리는 시간을 죽이면서 산 인물을 나온다. 먹여줘 재워줘 연금으로 하루하루 대접받고 풍요로운? 삶, 고독사가 아니라 남부러운 죽음까지 산 인물을 그려낸다.  시간을 죽이는 것이 뭐가 어때서. 이렇게 지독한 전제와 가정을 새겨두고 그려나가는 모습이 김수영시인의 패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이세 삼세의 시인들은 뭔가 다르긴 다르다.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선명함. 어쩌면 굳이 세대를 나눈다면 그 쥐어지는 선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분석하거나 사유해내기도 하지만, 선명한 선을 긋고 색다르게 살아내는 이들로 넘쳐나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런 시집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 왜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인가? 진도를 내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쌓여 있는 책들을 보라. 정신머리가 아니라 정신차려라 고 한다.


1


오랜만에 놀멍쉬멍 로씨난데 2 미니벨로 장거리 시승 겸 투어를 했다.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었는지 신년 라이딩 액땜. 덕에 자전거도 나도 가벼운 타박상 정도로 무사하다. 신난다고 신나게 탈 일이 아니다. 


2.


작업에 쓸 요량으로 여기저기를 찍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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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종속하기 위해 싸우는가?


Ⅹ. 무엇을 할 것인가?



(3) 일원론과 이원론

 

푸코가 알아냈다. 두 편성이 갖는 공통원인으로서 권력과 권력과 앎이 협동한다는 것을 말이다. 권력과 앎은 서로 직접 포함한다. 앎을 전제하지 않는 권력관계도 권력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앎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푸코에 있어서 앎과 권력이 이원론적으로 대등한 관계다. 들뢰즈는 여기서 앎에 대한 권력의 우위, 앎의 관계에 대한 권력관계의 우위읽어내려 한다. 들뢰즈는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원론이란 필시 사태의 발생 후의 모습이고, 발생을 묻지 않는 한 전제 가능한 것이다. 푸코는 기존(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베르그송)의 이원론을 뛰어넘었다. 저작에 이원론이 보인다해도 준비적으로 어떤 분할을 전제하고 있다. ‘외관상의 이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1.5원론. 근저에는 일원론적 원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권력이야말로 그 원리이다.

 

앎의 의지

 

권력은 도처에 있다. 모든 것을 통괄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권력은 소유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가동적인 승부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다른 관계들(경제적 과정, 앎의 관계, 성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재하고 있다. 권력은 밑에서 오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원리에는 지배자/피지배자라는 대립은 없다. 권력관계는 의도는 있지만 비주관적이다. 즉 목적은 갖고 있지만 권력자와 같은 자의 결정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지만, 저항은 권력에 대해 외측에 위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푸코는 권력의 개념을 철저하게 생각해왔다. 모든 행위는 권력의 행위에 의해 유발되는 행위이다. 권력이라는 행위에 대한 행위가 행위라는 것의 전부를 메우고 있다. 어떤 막다른 길처럼 보인다. 권력이 삶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권력에 저항하는 삶을 폭로하고 유발한다. 저항의 횡단적 관계들이 재지층화되고 권력의 여러 매듭들을 만나면 대체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푸코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는 슬그머니 그리스 로마시대의 윤리에 관해 말한다. 그는 분명 권력론을 버리고 윤리학을 지향했다.

 

(4) 욕망과 권력

 

권력론이라는 틀로 사물을 생각하고 있는 한 푸코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론은 우리를 반드시 어떤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욕망과 쾌락- 1977년 들뢰즈가 푸코에게 보낸 편지.

 

미시 장치와 다이어그램의 관계: 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장치(, 가족이나 공장이나 학교나 군대 등), 후자는 그것들이 작동하는 양태를 가리킨다. 다이어그램이란 그 자체로서 결코 알려질 수 없는 권력관계가 실제로 작동할 때의 양태이고 사회적 영역의 총체를 망라하는 추상기계라 할 수 있다. 푸코는 미시 장치에 관해서는 뛰어난 분석을 남겼지만 다이어그램으로서 제시되는 권력관계그 자체의 차원에 관해서는 고찰이 불충분하지 않았는가? 힘의 관계들, 미셸은 이것을 더 밀고나가지 않았다. 다이어그램의 관점은 후퇴하고 -정치라는 조잡한 개념을 등장시켜 미시 분석의 풍부함도 축소시키고, 거시/미시라는 흔한 대립의 한쪽을 맡는 것으로 격하되어버렸다.

 

여기서부터 미셸과 차이로 옮겨가려 한다. 욕망의 배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러 미시 장치들이 권력이라는 용어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잔혹한 처형장면을 보러간다고 해보자. 지금도 그러할까? 이 욕망은 자연적인 결정작용도 자발적인 결정작용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복수의 요소가 조합되고 어떤 특정 욕망의 배치가 이루어져 특정 권력양식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학교의 시험은 그 제도가 있어서 학생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속에 원래 나만 뒤처지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한 욕망의 배치가 널리 사회에 미치고 있을 때에만 이 권력장치는 작동한다.

 

기율형 사회 대신에 통제사회통제는 지배가 아니라 체크를 의미한다. 감시에 의해 사람들에게 행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크포인트를 설치하여, 기준을 만족한 인간만을 앞으로 보내는 것이 통제사회의 작동양식이다. 이처럼 어떤 권력양식이든 일정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권력장치는 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권력장치란 배치의 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권력은 어떻게 욕망될 수 있는가?그것을 물어야만 한다. 권력은 욕망의 변양이다. 권력이 왜 발생하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권력이란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주체가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행위를 하게 된다는 도식을 전제하고 있다. 반드시 어디서부턴가 무언가로 작용한다. 잘 살펴보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실제로 하게끔 되고 있는 것이 권력이란 개념 속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 이 개념으로 보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고 무언가를 하게끔 되고 있는 것만 나타난다. 욕망은 주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내재하는 힘이 여러 요소들과 조합되어 욕망의 배치가 구성된다. 권력의 개념은 욕망 배치의 선단, 즉 결과밖에 다룰 수 없다. 그래서 권력장치 분석은 이차적의미만을 갖는다. “권력에 대한 욕망의 우위라는 시각이 없으면 사회현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이제서야 자기 자신의 억제, 착취나 모욕, 노예상태를 참는, 자기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단지 욕망이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만이 존재하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가가 환자 일반이 아니라 개개의 환자를 대하듯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권력장치,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이어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그 전제에 있는 욕망의 배치를 분석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다시 열린다.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될 수 없는가? 왜 사람은 자유롭게 되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가?


5. 정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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