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태학 위기

1.

[ ] ‘다른 사람에게 선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미미하고 상세한 일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일반적인 선은 깡패, 위선자, 아첨꾼들의 변명이다.‘ 일반적인 선이란 자라는 세대에겐 위선의 냄새를 풍긴다. 712

[ ] 인식론의 병리:

[ ] 우리 마음은 시차가 심도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학적 계산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거나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을 위한 많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마음은 결단이나 여러분의 의식 없이 이런 묘기를 수행한다. 여러분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이 예를 내가 말하려는 오류의 패러다임으로 사용학 싶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론적 오류의 만질 수 없는 성결과 인식론적 습관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예증한다. 721 일상적인 사고 속에 나는 여러분을 본다.....정신이상은 이를 너머서는 정신 요법이나 어떤 커다란 새로운 경험으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721

[ ] 마음이란: 1. 시스템은 차이들을 가지고, 차이들을 근거로 작동할 것이다. 2. 시스템은 차이나 차이의 변형이 전달되는 통로의 닫힌 고리 또는 네트워크로 구성될 것이다.(뉴런에 전달되는 것은 충동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소식이다.) 3. 시스템 내의 많은 사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의 충격보다는 반응하는 부분에 의해 활성화될 것이다. 4. 시스템은 항상성을 향하거나 폭주하는 방향으로 자기-교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자기-교정은 시행착오를 내포한다. 724

[ ] 이제 컴퓨터가 생각을 하느냐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더하기 컴퓨터 더하기 환경이다. 그리고 인간과 컴퓨터와 환경 사이의 선은 순전히 인위적인 가상의 선이다. 그 선은 사고하는 시스템의 경계가 아니다. 생각하는 것은 시행착오에 참여하는 전체 시스템이며, 그것은 인간 더하기 환경이다. 723

[ ] 이제 우리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들의 일부를 보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일반적인 사고 풍토에 따라 다윈은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이론에서 생존 단위는 가계, 종, 하부 종, 또는 그와 비슷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실제 생물학적 세계에서의 생존 단위가 아니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생존 단위는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만약 이제 우리가 다윈의 생존 단위를 수정해서 환경과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면, 아주 이상하고 놀라운 동일성이 출현할 것이다. 진화의 생존 단위는 마음의 단위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725

[ ] 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의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한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728

[ ] 권력은 타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난센스다. 사실은 권력에 대한 관념이 타락하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을 믿는 사람을 가장 빨리 타락시키며, 권력을 가장 원하는 것도 이런 자들이다. 분명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권력을 갈망하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피할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 만약 권력을 믿고 원하는 자들을 타락시킨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이다. 아마 일방적인 권력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권력의 신화는 물론 매우 막강한 신화이며, 아마 이 세상 모든사람들이 많든 적든 그 신화를 믿을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만큼 신화는 자기-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식론적으로 정신이상이며, 필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재앙으로 나아간다. 729, 730


2.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


[ ]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재의 많은 위협들은 모두 세 가지 근본 원인에 기인한다. 1. 기술의 진보 2. 인구 증가 3. 서구 문화의 사고방식과 태도에서의 어떤 오류들, 우리의 ‘가치들‘이 잘못되어 있다. 736 우리는 이 세 가지 근본 요소 모두가 우리의 세계를 파괴하는 필요조건들이라고 믿는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중 하나를 교정하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믿고 있다. 736

[ ]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형태로 우리의 문명을 지배하는 생각들은 산업 혁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환경에 적대적인 우리 2. 다른 사람과 적대적인 우리 3.문제는 개인 또는 개별회사나 개별국가다. 4. 우리는 환경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 통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5. 우리는 무핞히 팽차하는 ‘개척지‘ 속에 살고 있다. 6. 경제 결정론은 상식이다. 7. 기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난 150년 동안의 우리 과학 기술의 위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위업에 의해 잘못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이런 생각들은 현대 생태학 이론하에서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환경과 싸워서 승리하는 피조물은 자신을 파괴한다. 739


3.

도시 문명의 생태학과 융통성


[ ] 생태학자의 목표는 융통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이런 범위 내에서 그는 대부분의 복지 계획 입안자들(법적 통제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보다 덜 전제 군주적인 반면에, 그는 또한 이미 존재하거나 창출될 수 있는 융통성을 보호하기 위한 권위도 행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점(대체할 수 없는 자연 자원의 문제)에서, 그의 권고는 전제 군주적이어야 한다. 사회적 융통성은 석유나 티타늄만큼 귀중한 자원이며, 적절한 방식으로 예산이 짜여야 하며, 필요한 변화를 위해 쓰여야(지방처럼) 한다. 대체로 융통성을 ‘소비‘하는 것은 문명 내의 하부 시스템의 재생(즉 증대) 때문이므로, 결국 이 하부 시스템들이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융통성은 구속받지 않은 변화의 잠재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 우리는 적극적인 요구보다는 금지를 선호하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침해하는 변수들에 대항하는 법률(예컨대 독점금지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하며, 침해하는 권위에 대해 법률적으로 이름뿐인 처벌을 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 한다. 우리는 어떤 침해를 금지하려고 하지만, 자유와 융통성에 대해 알고, 그 자유와 융통성을 좀더 자루 행사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우리 문명에서는, 육체의 변수들을 극한값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육체의 변수들에 많은 융통성을 보유하는 것이 원래 기능인 생리적 육체의 운동조차 ‘관객의 스포츠‘가 되었으며, 사회 규범의 융통성도 똑같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대신하는 경험을 하려고 영화관이나 법정에 간다. 또는 신문을 읽는다. 754

[ ] 성서에서 가장 확실한 말은 바오로가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며, 이 말은 인간과 그의 생태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공해와 착취라는 독특한 죄악이 그저 사소한 것이었을 뿐이라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거나, 최선의 목표를 가지고 저질러진 것이었다고 변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또는 ‘만약 내가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라는 변명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의 과정은 조롱당하지 않는다. 산중의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은 풀이 과도하게 뜯기는 것으로부터 풀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떻게 우리의 생태학적 추론들을 생태학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우리가 영향을 주려는 사람에게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는 생태계 밖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태계의 일부다. 755

볕뉘.

0. 정독할 요량이었지만 메타 이야기를 읽고, 두꺼워 호흡을 조절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6장이 하고자할 마음들을 잘 파악할 듯 싶어 읽다.

1. 이 이야기들은 1966 - 1970년에 발표한 글들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우리들의 관점을 예리하게 헤집고 있다. 물론 저자는 그때 그때 느낀 점들 정리한 것들이 향하는 방향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집약하려고 한 듯싶다.

2. 마음, 기계, 기술에 대한 이야기도 좋은 참조가 되지만, 3절 융통성이란 부분에 대한 그의 강조는 되새겨볼 만하다. 행정이나 법제화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금지를 위주로 하기때문에 사회가 더욱 경직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짚고 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실험예산, 외줄타기의 심정으로 새로운 실험으로서 행정이 반드시 요소요소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줄타기 밑의 안전망, 실패해도 떨어져도 다시 시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한다.

3. 그는 시민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문제를 개선시키려는 행정이나 법제화를 실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관객처럼, 영화나 신문을 소비하면서 해소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짚고있다. 운동은 관람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는 영화를 관전하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듯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을, 풀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위해서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 되묻고 있다.

4. 관계는 나 이전에 있다는 말, 유기체는 환경으로 더해져 있다는 말. 그 차이가 마음이고 거꾸로 우리의 생태를 흔들고 있는 그물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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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01-0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여울 2020-01-09 15:57   좋아요 0 | URL
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거예요^^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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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익숙한 곳에서 몸에 익은 듯 전원을 연결하고 브루투스 자판을 두드린다. 옆에 막 나온 책들은 금방 식기라도 할 듯, 어서 봐달라고 재촉을 한다. 오늘은 금방 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자정은 활처럼 휘어져 한 것 제 몸을 늘리다가 새벽쯤 황급히 시위를 떠나는 화살을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1.

[ ] 사고 과정 전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나는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튜링, 1951 11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2.

[ ] 만진다는 것은 ‘피부에 닿아서 깨닫는다‘는 촉각의 감각을 말한다. 12 촉각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과 직결되기에 나는 촉각 그 자체로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13 춤, 어떤 형태로 가기 이전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춤은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것은 내면에 깃들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깥으로 밀려 나오면 비로소 형태가 된다 34 세계의 살, 우리, 타자, 세계는 모두 살이라는 존재의 원소를 토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아와 타자는 서로 얽혀 있다. 살은 가역적이기에 본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이고 만지는 것은 만져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몸은 ‘감각되는 감각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봄과 보임, 만짐과 만져짐 사이에 얽힘과 교차가 일어난다. 그는 정신과 몸, 나와 타자의 이분법을 넘어 작동되는 몸을 통해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 37 건축, 촉각이 가지는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애정의 측면이 배제되면 인간은 무관심, 소외감, 외면성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수영하는 사람이 물의 흐름을 자신의 피부로 감지하듯, 이미지의 흐름은 강화된 촉감적 감각으로서 이해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38 접촉 경험에 실패한 아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행동적으로 서툰 인간으로 성장함을 지적하면서 타인과 생애 첫 의사소통을 시작할 때 인간이 촉각으로 통한 탐색으로 첫발을 내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 있다. 만약 촉각적 경험이 부족하다면 기지 tact를 갖춘 존재로 발달하는 데 실패하고 타인의 욕구에 둔감하며 대처하는 데 서툰 존재로 성장한다고 애슐리 몬터규 ashely montagu의 책 <<터칭>>에서 언급한다. 63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 유려한 에서


3.

[ ]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이란 물질적 형태의 사물들 속에 구현된 패턴, 정보, 관념의 생태학리라고 주장했다...마음이라는 것에 자기-교정적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가진 그 무엇임이 분명했다. 마음은 과정과 패턴을 위해 배열된 다수의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물질적 기초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육체에서 마음을 분리하거나 물질에서 마음을 분리하는 전통적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마음은 다수의 유기체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요소들도 포함할 수 있으며, 잠깐뿐만 아니라 장기간 동안 기능할 수도 있으며, 반드시 피부의 외피와 의식 같은 경계에 의해 정의될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유기체보다 그 이상을 포함하는 정신시스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생존의 단위가 언제나 유기체 더하기 환경이라는 주장으로 그레고리를 이끌었다. 14 그레골의 마음의 생태학을 인식론적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주로 물질주의적인 대학의 생태학과 구별시켜준다. 20 개체에 앞서 관계가 있다./오늘날 육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분리되고, 자연과도 분리되어 있는 총체적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신‘이라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런 미신과 함께하는 사고 습관과 사고방식이 아직도 그들의 머릿속에 있으며 아직도 그들 사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을 즉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여러분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관념은 여전히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는 인식론에 지배당하고 있다.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트슨 표지에서

4.

[ ] 좌-우. 근대-전근대.서구-비서구. 3중의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유라시아/사‘의 재구성. 새 길을 내고 싶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공간의 장벽을 허물고, 전통과 근대 사이의 시간적 단층을 돌파해내고 싶었다. 유라시아의 길을 걷고 싶었다. <<유라시아 견문>> , 이병한


-1. 흔적을 남기는 일도 오래된 기억같다. 여러 책들 사이 책갈피에 시선을 모으게 된다. 책들은 읽는 사이, 또 읽을 책들을 낳고 만다.
-2. 일터 일들도 뒷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말미의 불안감. 뭔가 챙겨야 할 일들이 대기하고 있는 기분이다.
-3. 친구가 다녀갔다. 이야기는 자꾸 말을 재촉하는 듯 싶었다. 밀린 이야기들을 했고, 이미 달려가거나 붙어가버린 몸들의 흔적을 물끄러미 봐야할 듯하다.

5. 몇 차례 만남들은 다른 책읽기를 요구한다 싶다. 이미 깊숙하게 읽고 있는 듯싶다. 구석구석을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걷다보면 어디쯤 가 있을 것이다. 숨이 차더라도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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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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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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