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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과 어둠만이 남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전율하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오직 정신만이 경청하는, 비탄하는 목소리였던, 그 마지막 음조차 이제 사멸했다. 그 음은 자신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ㅇㅣ제 한 떨기 빛처럼 어둠 속에 머문다.

자아‘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낯선 논리를 증명하고 자신의 감미로운 방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희망하는 과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의 탄생을 매순간마다 대비하는 과정이고 설령 우리의 생존기간에 아무것도 탄생하지 않더라도 체념하지 않는 과정이다”고 쓴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희망소멸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그런 상태는 절망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너무 높게 오르지 않는 ㅅㅏ람들은 추락할 수 없다고 ㄱㅏ르친다.


1장 낙관주의의 진부함


실ㅈㅔ로 낙관주의는 지배계급 이념들의 전형적 구성요소이다. 만약 정부가 시민들에게 ‘음지에서 배회하며 대재앙을 예언하는 끔직한 종말론 같은 것의 존재‘를 믿으라고 널리 공보하지 않는다면, 그런 까닭들 중 하나는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순진한 시민은 차라리 정치적 불만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2

벤야민은 초현실주의를 다룬 유명한 에세이에서 일부 좌파들의 경솔한 낙관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목적들에 부응하도록 비관주의를 “조직화해야”할 긴급한 필요성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필요한 것은 “시종일관하는 비관주의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문학의 숙명을 불신하고, ㅈㅏ유의 숙명을 불신하며, 유럽 인류의 숙명을 불신하되, ㄱㅖ급들의 모든 화해와 국가들의 모든 화해와 개인들의 모든 화해를 세 배나 더 강하게 불신하자. 그리하여 오직 이게 파르벤만을 무한히 믿고 공군의 평화스러운 완벽성만을 무한히 믿자” 25

자본주의의 초년기에 인간은 찬란한 미래를 ㅇㅖ견할 수 있었으므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동일한 자본주의체계의 ㅊㅚ근단계에 존재하는 지극히 미미한 ㄱㅣ대는 ‘미래는 현재의 반복일 것이다.‘는 가설에 함유된 것이다. 주변에는 흐ㅣ망이 별로 없다. 그러나 ㅇㅣ런 사실자체가 희망적인 징후이다. 왜냐면 그것은 복원되어야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2

소비주의적 자아는 생산주의적 자아와 달리 워낙 변덕스럽고 산만해서 지성적 진화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미래는 소비주의적 자아에게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중대하게 보이는 희망은 뒷방늙은이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세계역사적 중대사건이 재발할 가능성도 사라진다. 왜냐면 그런 ㅅㅏ건이 ㅂㅏㄹ생할 만한 공간은 분쇄되어 먼지가 되어 ㅂㅓ렸기 때문이다. 미래는 끝없이 확장되는 현재에 불과해질 것이다. 32

합ㄹㅣ적 낙관주의자는 물질풍요가 인류복지의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체로 간좌하면서 ‘자존심을 지닌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도 질리게 만들 조잡한 기술공학결정론‘에 함몰되는 ㄱㅕㅇ우가 드물지 않다. 42


리들리는 현대를 ‘자신은 빈민가를 벗어나 일약 자수성가했으되 여전히 빈민들은 잔존한다는 사실 때문에 폄훼당하는 졸부의 성공담‘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마르크스는 현대를 의기양양한 성공담 겸 끔찍한 실패담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이런 성공담과 실패담을 단단히 얽히고설킨 하나의 이야기로도 간주한다. 43

리드ㄹ리는 대규모 진보를 믿지 소규모 진보를 믿지 않는다...리들리의 저서대로라면, 인류는 집단지성을 진화시켜왔고, 그런 지성 덕택에 서로의 생각들을 교류하여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류의 여건들도 ㄱㅐ선할 수 있었다. 그런 협력이 신체고문과 전투도 유발했다는 ㅅㅏ실은 리들리의 저서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교모하게 간과된다. 60

기독교경전 신약전서에 언급되는 종말 혹은 미래의 신국은 역사전체의 완결판으로 오해되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런 종말이나 신국은 꾸준하게 등반하여 고지를 점령한 승리의 결과로 이해되기 보다는 오히려 인류서사 속으로 과격하고 예측불허하게 난입하여 인류서사논리를 전복해버리고 인류서사진행순서를 무시해버리며 인류서사에 담긴 지혜의 어리석은 본질을 폭로해버리는 돌발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메시아(구세주)는 역사라는 곡조의 최고음을 노래하기보다는 오히력 그 곡조를 느닷없이 끊어버린다. 64

파시즘의 희생자로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우리의 후예들에게 우리의 승리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시해달라고 요청하기보다는 우리의 패배들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기억은 위안 – 앞으로 위로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희망을 일절 품지 못할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유일한 위한 -이다....벤야민은 어쨌든 역사는 고통의 영속적 현실이다. 그런 고통은 역사를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궁극적으로 희극적인 역사관을 비극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용어들로써 ㄱㅐ작한다. 68

벤ㅇㅑ민이 추구하는 것은 비진보주의적 형식을 띠는 희망이다. 그의 역사관은 패배주의와 승리주의를 똑같이 문제시한다. 그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니체의 역사관과 매우 가깝다. 왜냐면 니체도 ㅊㅏㅁ담한 과거를 구원해줄 ㅁㅣ래 – 아니면 차라리 폭발하기 수ㅣ운 “지금 당장”인 현재로 사납게 들이닥쳐 현재의 겉치레용 안정을 파괴해벌릴 벤야민의 역사의 처ㄴ사같은 미래 -를 창조할 ㅍㅣㄹ요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70 니체의 관점에서는 ㅁㅣ래가 승리로 충ㅁㅏㄴ하게 보이는 영웅전설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벤야민의 관점에서는 모든 ㅇㅕㄱ사적 시간이 ㅁㅔ시아의 출현과 비교되면 헛된 시간들로 보인다...그러나 ㄱㅣ묘하게도 이 두가지 ㅁㅣ래관은 낙관될 수 있는 동시에 만족스러운 것들로 간주될 수 있다. 71

메시아가 기대와 만족 ㅅㅏ이, 그러니까 ‘현재순간의 공백‘과 ‘그 공백은 언제라도 너ㅁ치도록 가ㅡㄱ 채워지리라고 여기는 기대‘사이에 일정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한다. 그런 ㅂㅏㄴ면에 진보이념의 고ㅏㄴ저에서는 모든 ㅅㅜㄴ간 하나하나가 ㅁㅣ래로 이어지는 디딤돌에 불과하다는 사시ㄹ때문에 현재가 저평가된다. 71

우리는 과거를 종결시키지 않은 채로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ㅎㅏ고, 종결된 듯이 보이는 과거의 겉모습을 과거의 결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려고 노력해야 ㅎㅏ며, 과거의 명백한 숙명을 자유의 징후로 보이도록 고쳐 써서 과거의 출입문을 재개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73

벤야민이 믿다시피, 우리는 현재 우리를 ㅈㅣ배하는 자들의 권위에 ㄷㅗ전함으로써 ‘그들의 ㅈㅓ임자들이 지녔던 합법성‘을 훼손하는 데도 일조한다.이런 ㅇㅢ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타격함으로써 그들의 폭정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추도한다. 74

메시아 신앙의 시대는 진보주의와 불화하는 시대이다. 실제로 메시아 신앙은 세속역사에 내재된 희망 같은 것은 아예 찾지 않는다. 자체의 고유한 욕망에 충실한 세속역사는 ㄷㅏㄴ지 새로운 전쟁들, ㅅㅐ로운 재앙들, 새로운 야만주의의 위협들만 유발할 것이다. 요컨대, 벤야민은 희망의 역사적 내재성을 믿는 신념을 숙명주의 및 승리주의와 너무나 성급하게 동일시해버린다...희망을 품을 수 이ㅆ는 능력조차도...사랑과 ㅈㅓㅇ의 번영을 보증해줄 ㄱㅏ능성은 전혀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75-76

어떤 순수 정치적인 해결책으로도 결코 치유해주지 못할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비극들은 어떻게 ㅎㅐ야하는가? 인상적인 사실은 ‘심지어 가장 눈부시게 해방된 미래조차 이런 슬픔의 영웅전설보다도 ㄷㅓ 중대할 수 있느냐 여부‘를 자문해온 듯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리고 ㅇㅣ런 ㅅㅏ실 때문에 마르크스 ㅇㅣ론이, 비록 그의 ㅇㅢ도와 ㄷㅏ를지언정, ㅌㅏ당하게도, ‘비극적 ㅇㅣ론‘으로 지칭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80

희망은 존재하되 풋내기 낙관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82


2장 희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대체로 특정한 대상을 바라는 반면에 희망의 목표는 대체로 어떤 상황이다. 102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희망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희망의 ㄷㅐ상은 획득되기 어려운 것이 틀림없다는 의미에서 희망은 근면한 것이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쿠ㅣ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얻기 어려운 선한 것을 얻으려는 욕구의 운동이나 연장”이다.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희망할 수 없다...이런 견지에서 희망은 절망의 적이요 나태한 유토피아주의의 적이다. 107

희망은 욕망보다 더 진취적인 성질을 띤다. 욕망은 결핍의 의미를 중심으로 선회하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희망은 이런 욕망의 불안에 일정한 긴장된 기대감을 혼합한다. 아퀴나스의 견해대로라면 희망은 욕망을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것을 지녔다. 왜냐면 흐ㅣ망은 희망대상을 ㅇㅏ직 확보하지 못했는데도 희망목적과 접촉하려고 열망하면서 욕망의 불안을 부추기기 ㄸㅐ문이다. 흐ㅣ망은 선을 ㅂㅏ라는 열망일 뿐 ㅇㅏ니라 선을 ㅎㅑㅇ해 나아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112

본능적으로 타고난 동정심은 도덕적 선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아무리 많이 지녔어도 어디까지나 ㅅㅓㅇ취된 것은 아니므로 도덕적 공덕이 아니다. 희망은 실습과 자기수양으로써 함양될 수 있으므로 공덕의 문제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마땅하게도 흐ㅣ망은 학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희망을 덕목으로 지칭하는 ㅎㅐㅇ위는 ‘희망은 ㄷㅏ른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인간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행위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희망은 희망을 품어야 ㅎㅏㄹ 우리의 ㅈㅏ아실현에 속하므로 ㅇㅜ리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ㅍㅜㅁ을 ㅎㅏㅂ당한 이유를 조금이라도 ㄱㅏ진다면 희망을 품어야 ㅎㅏㄴ다. 122

희망은 인내, 신뢰, 용기, 근면, ㅂㅏㄱ력, 관용, 끈기, 지구력 등을 포함하여 동등하게 신용될 만한 성정들의 다발을 수반하는 덕목에 속한다는 ㅅㅏ실은 주목될 만한다. 마르틴 루터는 흐ㅣ망을 “영적 용기”fㅗ 정의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희망을 가장 먼저 인내와 고집에 관련시켜서 “근면의 원리, 끈기의 원리”로 간주한다. 그런 희망은 “충심에 충실한 충심”의 형식이지만, ㄱㅣ질적 낙관주의는 희망과 특유하게 결부되는 덕목들의 대부분을 아예 무시해버린다. 123
희망을 결여한 이성은 만개할 수 없고 이성을 ㄱㅕㄹ여한 희망은 번영할 수 없다. 126 그람시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127

로렌스의 관점에서 ‘자아‘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낯선 논리를 증명하고 자신의 감미로운 방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138

에리히 프롬은 “희망하는 과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의 탄생을 매순간마다 대비하는 과정이고 설령 우리의 생존기간에 아무것도 탄생하지 않더라도 체념하지 않는 과정이다”고 쓴다. 138

윌ㄹㅣ엄스도 ‘희망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향하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는 희망이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141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에 “희망하기, 희망하고 오직 희망하여, 희망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희망이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희망하기”라고 쓴다....인간존재의 근본편견 또는 근저성향에 속하는 그런 희망은 오직 모든 현실적 열망의 허울들이 벗겨질 때에만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146

‘ㅅㅔ계는 파편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다‘는 사실은 희망의 원천이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중요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 타인의 존재를 돋보이게 만드는 단순한 배경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는 사연을 인정하면서 아이러니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유리한 희망의 원천이다. 실행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예방할 수 있다. 희망의 반대는 절앙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체념정신일 수 있다. 171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희망소멸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그런 상태는 절망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너무 높게 오르지 않는 ㅅㅏ람들은 추락할 수 없다고 ㄱㅏ르친다. 170

3장 희망철학자

인간이 품는 희망은 구체적으로 실감되는 근거들의 뒷받침을 받는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블로흐에게 희망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에 - 인류역사에도, 그리고 실제로는, 정연한 우주자체에도 – 내재된 객관적 원동력으로 보인다. 블로흐는 자신은 무엇보다 공산주의우주론을 산출하는 작업에 열중한다고 강조한다. 189

우리의 내면존재를 실현하는 과정은 일련의 외부장벽들을 황홀하게 돌파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할 뿐 ㅇㅏ니라 우리 스스로에 갇힌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훨씬 더 정밀한 작업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ㅇㅜ리의 욕망들을 외부로 자유롭게 방면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재교육해야 ㅎㅏㄴ다. 200

블로흐는 “오직 마르크스주의가 대기실과 같은 과거의 지평선과 함께 점령하는 미래의 지평선만이 현실에 현실의 차원을 부여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현존하는 ㅅㅔ계는 “진정한 것이 아니다”고 그는 논평한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주장도 진정한 것이 ㅇㅏ니다. 204

새로운 삶은 오직 공허를 직면하는 경우에만 출현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가장 ㄱㅕㅁ손하게 대하려는 마르크스의 인간성이 자신의 형ㅈㅔ들을 ㄱㅣ본적으로 존중하려고 ㄱㅕㅁ손을 내포함으로써 ㄱㅕㄹ국 ‘자신의 ㅎㅕㅇ제들 대다수는 ㄱㅣ본적으로 전혀 겸손하지 ㅁㅗ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qㅏㅇ식을 ㄱㅣ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프롤레타리아 ㄱㅖ급이 지금 재현하는 극한 적 소외의 영점은 마침내 변증법적 변동지점이 된다. ㅇㅙ냐면 ㅁㅏ르크스는 ‘ㅇㅜ리의 모든 ㄱㅓㅅ은 ㅈㅓㅇ확하게 이 여ㅇ점의 ㅎㅓ무에서 발견된다‘고 ㅇㅜ리에게 ㄱㅏ르치기 ㄸㅐ문이다. 211


4장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은 불가피하게 현재의 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의 기존 지식을 능가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223

역리적이게도, 희망을 예증하는 것이 바로 비극이다. 적어도 비극에 포함되는 희망은 총체적 파국에서 생존하려고 애쓰는 모든 것의 문제이다. 225

비참한 자들이 느끼는 것을 그대들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들이 소유한 것들의 여분을 빈민에게 나눠줄 수 있을 테니. 더욱 공정해진 하늘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231

리어왕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아서 그 몸의 어떤 부위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부서지고 개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해체개조과정을 겪는 인물이 온전히 살아남을 기회를 전혀 보장받지 못한다는 ㅅㅏ실도 그런 과정의 가치를 말소하지 않는다. 236

브레이트- 선명한 발음들을 사용하거나 더 조용하게 발음되는 낱말들을 사용하는 언어는 ‘괴로운 사람이 무언가를 생산하기 ㅅㅣ작했다는 ㅅㅏ실‘을 의미하므로 막대한 해방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타격들에 관한 설명‘과 ‘ㅈㅏ신의 슬픔‘을 이미 혼합하고 있다. 그는 완전히 파괴적인 것들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ㅇㅣ미 만들고 있다. 관찰은 이미 시작되었다. 238

카뮈 – 만약 절망이 발언이나 추론을 유발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망이 집필로 귀착한다면, 우애단체가 설립되고 자연물들이 정당해지며 사랑이 태어날 것이다. 절망문학은 용어상 모순이다. 240

발터 벤야민의 견해대로라면, 행위를 개시했으되 결과들을 달성하기전에 행위를 중단하고 유보하는 사람은 역사의 연속체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사건을 무산시켜서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죽음에 도달하는 시점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행위 결과들이, 적어도 그 사람 ㅈㅏ신에게는,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 ㅅㅣ작하는 ㅅㅜㄴ간‘인 동시에 그 ㅅㅏ람의 ㅎㅐㅇ위들이 ㅎㅐㅇ윌ㄹ 우ㅣ한 행위들로서 실행될 수 있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ㅎㅏ다...‘세상을 아에 무시하듯이 사ㅇ대하는‘사람들...‘모든 것을 ㄷㅐ속구원의 관점에서 ㄴㅏ타날 ㅁㅏㄴ한 것들로 ㄱㅣ대하여 ㄱㅘㄴ조하려는 시도‘ 256-257

우리를 괴롭히는 원흉들의 대부분이 체계에 내재할 수 있다는 ㅅㅏ실은 ㅇㅜ리를 얼마간 ㅇㅢ기소침하게 만든다. 왜냐면 체계들이 변하기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ㄴ 어려움이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ㅁㅏㄴ약 이런 체계들의 제도들이 변한다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눈부시게 변할지 우리는 모른다. 266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과 어둠만이 남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전율하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오직 정신만이 경청하는, 비탄하는 목소리였던, 그 마지막 음조차 이제 사멸했다. 그 음은 자신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ㅇㅣ제 한 떨기 빛처럼 어둠 속에 머문다. 268


볕뉘.

0. 서두의 문구는 발췌한 문구들 가운데 몇몇 구절들이다. 어쩌면 희망과 절망의 비평학이라고도 볼 수 있고, 절망을 씹어삼키는 희망의 비평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절망할 수 있다면, 아무 소리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서야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와, 아라고 하거나 어라고 말과 같은 것들이 생긴다면,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보는 빛이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루쉰이 아니라 테리이글턴이라.....되뇌이는 절망을 이리 듣다니....

1. 이 책에서는 희망원칙이라 번역된 희망의 원리는 절판이 되었다. 책 속에서도 말하듯이 너무나 두꺼워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이 곳 도서관을 수소문해보니 유일하게 한 곳에만 있다. 중고책이라도 사려고 하면 30만원 가까이 한다. 알맞게 번역되면 좋겠지만, 3장에 희망의 철학자로 명명하며 마르크스와 대비하면서 살펴보아 개요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신학을 넘나들며 차용하듯이, 블로흐의 명성은 가장 암울한 시대, 시기를 살아내며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희망의 책을 만들어 냈다는 점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언젠가 내 눈으로 그 숲을, 그 바다를 읽어내고 말아야겠다 싶다. 이는 희망이 아니라 대체로 욕망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말이다.

2. 중간중간 아퀴나스의 말을 빌리지만 희망은 신념에 가깝다. 또는 인디안 크로우족의 예로 들듯이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다. 이반 일리히가 말하듯 역사는 여러가지 색깔과 여러가지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다. 어떤 색깔의 줄기를 이을 것인지, 도화선 가닥들을 어떻게 이을지는 미래를 보는 안목과 지금이 혼재되어있다. 불꽃을 일으킬지 아닐는지...희망은 신념에 가까운면서도 동정심같은 본성이 아니라 학습해야될 무엇이다. 희망이 절망을 살피고 느껴야 하듯이, 현실의 배후의 말못할 소리와 배제를 느껴야 한다. 루쉰의 절망에 가깝다. 세상은 고통에 짓이겨지는 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지난 과거만 반추할 뿐이지 지금을 느끼고 보살피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절망했다. 루쉰을 그렇게 읽는 이들 역시 드물다.

3. 어쩌면 욕망과 그럴 것이다라는 예측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것이 희망에 가깝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 속에서 유추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 희망에 더 가깝다.역사라는 것이 백년 이백년 삼백년, 절망할 줄 아는 희망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더 희망찬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는 우리의 인식 밖의 인식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제대로 절망할 줄도, 절망해본 적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4. 문학과 신학을 많이 넘나들어 어려웠다. 차라리 3장 희망철학자들로부터, 4장에서 거꾸로 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 한번 ㅇㅇ해보시라.

5. ˝악˝이란 저자의 책도 악은 물질이나 세력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이라하며, 악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인 영적슬럼화라고 한다. 같이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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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문화가 어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거나,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류 세력 내에 누구 하나가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줘야 한다. 마이너리티들의 힘만으로는 주류로 들어가는 그 장벽을 돌파할 수 없다. 혁명을 꿈끈다면 직접 혁명가가 되지 않고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트로이의 목마가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후원을 ㅎㅏ거나, 권력을 잡아 힘으로 지원해주면 된다. 인디밴드 문화를 살리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다면 돈이나 권력을 얻은 후 인디밴드의 공연을 마음껏 후원해주면 된다. 물론 돈이나 권력만으로는 안된다.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덧붙여져야 한다. 56

리듬앤블루스는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도 하위문화였다. 이 하위문화는 절대 공식화될 수 없는 문화로, 티브이에 나오지도 않았고 어디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철저히 흑인 거주 지역 안에서의 문화였고, 심지어 이름조차 없었다. ㅇㅣ 리듬앤블루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1949년 빌보드 차트였다. 68

빌보드는 음반 유통 통계 잡지이기 때문에 누구를 상대로 팔든 팔리는 숫자들을 전국적으로 집계했다. 그 이전까지 흑인 음악은 레이스 뮤직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름을 조금 폼 나게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악기 편성을 보니 재즈였고, 곡은 좀 빨랐다. 그래서 재즈에서 ‘리듬‘을 가져오고, 보컬은 블루스 보컬이므로 ‘리듬앤블루스‘로 이름을 붙여 분류하기 ㅅㅣ작했다. 이 음악을 1950년대 백인 중산층의 10대들이 몰래 사들고 와서 즐겼다. 68

그것은 마치 1992년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을 때 한 달 만에 전국의 10대들이 그들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몰아주었던 것과 같았다. 만약 서태지가 세상을 떠난 신해철처럼 서강대 중퇴만 했었어도 절대로 그렇게 팔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서울북공고 야간 1학년 중퇴자라는 것이 중요했다. 낙오자 ㅇㅏ닌 낙오자였던 10대들이 ㅈㅏ신들의 한 맺힘을 스스로는 능력이 없어서 못 풀었지만 서태지가 자신들 대신 풀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69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권여선 안녕주정뱅이 ‘ㅇㅣ모‘ 가운데서

“나는 점점 비인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때로는 분하고 힘이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여전히 명랑한 주체인 양 거울을 보고 명령합니다. 내 안의 장님이여, 시체여, 진군하라.” 같은 책 ‘역광‘ 가운데서

볕뉘. ‘편의점 인간‘ 이란 소설에서 보통 평균적삶(이미 그런 것은 현실에서 희귀함에도 가족을 이루고,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자의 삶)이 의식하고 뱉어내는 일상이 편의점 알바로 살아가는 (안정적인) 삶과 부딪히는 부분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는 모든 단편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삶에 배여있는 피치 못하는 가혹한 삶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 이모는 맏딸로 가족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이모인데, 돌연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라는 대목처럼 우리들의 사고는 중산층의 평균적인 삶(별반 부러울 것도 없는 삶?)과 사고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당당한 삶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살아내고 있는 삶들에 목소리를 줄 수 없는 것일까?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건강해라 해라 해라체의 무한 강권의 세상의 파열은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까? 많이 받지 않고, 많이 벌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삶들. 그것이 더 당당하고 더 색깔있는 삶들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삶들에 대한 사유까지 차단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위축된 것이 아니라 외려 명절마다 왜 그렇게 삶이 다양하지 못하고 얽매여 사느냐고 핀잔을 받아야 하는 것이 기존 고정관념의 괴롭기 그지없는 국정교과서의 삶이라면, 왜 다른 해석과 ㄷㅏ른 평가를 받아야 하는 ㄷㅏ른 삶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해야 되는가? 국정교과서의 삶이 낳는 숱한 해악을 목도하면서도 우리는 왜 다른 삶들을 목청껏 외치지 못하는 것일까?

삶의 단위를 왜 평생으로만 볼까? 한 5년쯤 먹고사는 ㅅㅏㄹㅁ의 연대나 같ㅇㅣ 따로 사는 삶. 그래 너무 ㄱㅣ획하는 생각일 ㄱㅓㅅ이다. 다음에 더 생각해보기로 ㅎㅏ자. 앞의 글에서 트로이의 목마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보는 안목에 더 끌렸다. 마이너리티가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ㅇㅏ니라 안목들일 것이다. 세상에 끌려가고 지나간 것들을 뒤늦게 혁명이었다고 호명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안목의 혁신들이 ㄷㅓ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러면 재능이라는 것 ㄱㅏ운데 ㅎㅏ나로 살ㅇㅏ가는 천의 결, 만의 삶결이 다 다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착상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되고 싶은 ㅅㅏㄹㅁ이 ㅇㅏ니라 살고 시ㅍ은 사ㄹ아낸 삶들이 서로 만나야 ㅎㅏ는 ㄱㅓㅅ은 아닐까. 안목을 ㄷㅏ르게 키워가야 ㅎㅏ는 것은 ㅇㅏ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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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움 - 얼마나 많은 말들이 새로 만들어져야 우리 일상은 달라질까!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 골목˝이란 주제의 지역잡지를 보다 사진글에 꽂혔다. 홀로임 ㆍ 홀로움. 고독을 잘 다루는 이가 드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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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9년에 한 한국 사회조사에서도 아내가 폭력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보복이 두려워서‘가 19.4%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2위는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서‘(17.5%), 3위는 ‘나아지리라는 희망때문에‘(15.4%), 4위는 ‘구타하는 남편에게 자식을 맡길 수 없어서‘(12.5%) 순이었다. 220


2.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그가 가진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원할수록 권력을 느끼는데, 이때 여성의 욕망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ㅅㅏ람을 위해 소진되는 것이다. 169

완벽한 아내 역할에 ㄷㅐ한 집착은 폭력당하는 아내들의 공통적인 특성이자 아내가 남편의 폭력 지속에 ‘기여‘하는 가장 큰 역할이다. 구타당하는 ㅇㅏ내들은 사회적으로 부과받았다고 느끼는 완벽주의적 ㄱㅕㅇ향이 있다. 190

아내가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이후 남편이 아내에게 더 쉽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192

‘배려의 화신‘인 폭력당하는 아내는 정작 자신은 배려하는 대상에서 제외한다. 195

상대방과의 관계는 힘의 원리에 좌우되고 있는데 아내들은 사랑의 원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여성 의도와는 반대로 관계는 더 나빠지고 여성은 더욱 상처받는다 197

양상은 다르지만 폭력 남편과 마찬가지로 폭력당하는 아내들도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노력으로 어디까지 가능한 일이고 어디까지 불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 197

부모의 이혼은 아들을 ‘병신‘만드는 것으로 이혼한 집의 자녀는 ‘장애인‘과 같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상/비정상 논리에서 이혼한 집의 자녀는 사회적 장애인이다. ‘누가 이혼한 집 자식과 결혼하겠는가?라는 질문은 신념에 가깝다. 208

폭력당하는 아내가 자신을 아내로서만 정의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녀 문제는 폭력 탈출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211

3.

폭력 당하는 아내의 고통이 남편의 폭력 단 한 가지일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시집 갈등, 외도, 의처증, 알코올 중독, 경제적 무능력, 폭언, 도박 같은 문제가 겹쳐 있다. 211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잃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남편에게 무슨 의미였는가, 왜 폭력을 참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여성은 남ㅈㅏ의 사랑을 잃었을 때 그에게 의존해 왔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213

폭력 남편이라 할지라도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위험하고도 고통스런 과정이다. 특히 ‘누구의 아내‘ 외에는 사회적 지위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일 경우 이러한 상태는 심리적, 정서적으로도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만 당장의 문제는 경제적 곤란이다. 215

여성은 아내의 지위에 매달릴수록 경제 주체로서 사회적 시민이 되기 어렵다. 218

폭력당하는 ㅇㅏ내는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공포를 견디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도망, 신고, 이혼...)을 할 여유가 없다. 221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서 능동성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오랫동안 폭력당한 여성들은 공간 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가장 현격히 발견되는 분야는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이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223

몸에 가해진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다른 종류의 고통과 다르게 대상이 없는 공포이다. 남편의 폭력, 그로 인한 고통과 공포가 몸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 욕망, 특정 ㄷㅐ상에 ㄷㅐ한 공포와 같은 고통은 ‘무엇 무엇에 대한 고통‘으로서 고통의 대상이 몸 밖에 있다. 즉, 고통의 원인이 되는 고통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으로 인한 공포는 대상이 없다. 제거할 수 없는 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인 것이다. 225

남편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내는 ‘이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폭력‘을 행사한다. 230

4.

‘아내 폭력‘은 부부 관계의 극단적, 일탈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 내 남편/아내의 성 역할 규범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건이었다...폭력은 아내의 ‘원인 제공‘에 의해서가 ㅇㅏ니라 남편이 생각하는 ‘아내의 도리‘에서 아내가 벗어날 때 발생한다. 246

폭력당하는 아내가 가정에서 어머니, 아내이기 이전에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 글의 요지는, 모든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당위적 선언이 아니다. ‘아내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려면 ㄱㅏ족을 중심으로 ㅎㅏ는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불가피하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등 남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개인성, 시민성을 획득하는 문제는 곧 가족에 ㄷㅐ한 공격으로 해석되어 왔다. 249


볕뉘.

1.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본이다. 일터 손님들과 이른 저녁 겸 술로 자정 쯤에 일어나 새벽을 맞으며 책장을 덮다. 60대 야성이 있는 전직 임원은 하나, 둘인 자식이 야근을 밥먹듯이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딸이 하나인 부모들도 그러하다. 사회의 기본 시스템이 바뀌기를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명시장의 이력을 탐하기도 하고, 안희정의 행정이력을 추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단선적일 수 없다. 잠재된 욕망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책의 남은 부분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다. 환원하거나 단순하게 요점을 잡고자 하는 지적 욕망은 입체감있는 조망을 그르치게 한다. 여성, 어머니의 역할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가족에 포획된 사회적 삶 속으로 빨려든다. 사람들의 권력구조와 인식 구조의 불합리 속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의 판단으로 확정하지 않는다. 잠재적이 사실들을 좀더 넓고, 적확한 인식과 발언에 맞춰 사유를 다시 전개한다. ‘아내 폭력‘은 그 자체로 발라낼 수 없다. 그 뿌리처럼 드리워진 것들을 함께 보지 못한다면, 인식도 실천도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그 암덩어리같은 것을 그대로 들어올린다. 보라....얼마나 천박한 현실인가? 두 눈으로 똑바로 봐라. 이래도 세상이 이해하기 쉬운가? 내 문제가 아니라고...다시 들여다 봐라. 바로 네문제이기도 하다라고....

2. 왕따도 모멸감이나 모욕감, 감정의 순환고리에서 삶을 갉아먹는다. 그 자장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람을 등가로 보지 않는 순간, 받은 수치와 모욕은 또 다른 대상을 찾는다. 수직적인 구조는 필연적으로 악순환의 감정의 응어리를 뱉어놓는다. 그 응어리를 자양분으로 그 생계의 순환구조까지 침범하고, 그 울타리의 생태계를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그 악순환의 고리는 제도적 보완으로만 끊어지지 않는다. 선순환의 또 다른 감정의 고리가 생겨 또 다른 정서를 낳지 않는다면 변환될 수 없다.

3. 감정의 결들을 살필 수 없다면 제대로 알 수 없다. 되먹임되면 흐르는 그 결들을 치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겉알 수밖에 없다. 대안은 생겨나지 않는다. 대안은 새로운 인식과 담론 속에서만 겨우 다른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피상적, 관조적 접근은 사건을 더 악화시킬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전체적, 총체적으로 매개관계를 이어보려는 노력, 변증법적인 인식의 지평이 그나마 무엇인 문제인지, 연루된 문제들을 드러나게 하고, 모두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4. 어느 모임도 어느 집단도 백여일이 지나면, 문제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하려는 자성이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역시 문제를 안고가는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천이지만 해결하려면 좀더 깊숙하고 긴호흡의 사유와 증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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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非體들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가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과 페미니즘을 접합시킨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책날개에 적혀 있다. 읽는 내내 여성이론에 국한 시키기보다는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의 말로 만든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버틀러, 누스바움,알튀세르, 메리필드, 루이스 멈퍼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론들을 횡단하여 잡힐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호평하고 싶다. 동네 건우아빠(건우법 발의)를 가끔 만나면서 나누는 이야기, 아니 전해듣는 이야기가 감정의 결이다. 동감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것이다. 동감은 시혜를 전제로 한다. 좀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책에서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이 아니라 공감을 머리에 세운다.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서로 인정하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고, 변하는 너로 수시로 변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감정의 시선이 공감이라고 한다. 이땅위에는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로 요란하다. 그 소리를 말로 바꾸고, 바뀐 말들을 새로운 담론으로 만들 때 변화의 자장은 길고 오래갈 수 밖에 없다. 주변 학문이라는 것이 없겠지만 이론의 날카로움은 장애이론이나 여성학에서 먼저 구체성 있게 전개된다. 주)에 담겨있는 책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읽고 공부해나간다면 함께 공부할 맛이 나겠다 싶다.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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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2-1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담아갑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할수록 읽고 싶은, 읽어야할 책이 더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분주합니다.

여울 2016-12-13 08:29   좋아요 0 | URL
한 번 쉬어간다 생각하고 읽어보시면, 분주한 마음도 가시지 않을까 싶어요. 감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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