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들은 아닌가

-‘민주주의자본주의란 물을 다시 삼키다

 

 

물고기는 물밖으로 튕겨나온 뒤에야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패인 수레바퀴 자국의 남은 물기로 온몸을 버둥거린다. 하루하루 일상은 어김없이 다시 온다. 왜 사느냐는 물음도 사치이고, 힘겹게 견디는 나날이 버겁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건조해지기만 한다. 그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할 수 있을까? 삶이 목전에 위협을 느껴서야 다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삶들을 비틀면서 감싸고 있는 물기축축한 사회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해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인처럼 패여있는 수레바퀴 안,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물고기들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그렇게 외치고 불렀건만 과연 무엇이 나아졌으며 우리는 국민이기나 한 것일까? 선거때만 돌아오는 주권은 있기나 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민의와 사회의 돌아가는 시스템 사이의 간극, 차이, 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것은 아닌가?

 

거시적인 안목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만 잘먹고 잘살고, 우리가족 밥벌이 하기도 힘든데 왜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들어야하는가? ‘지금여기300여년의 호흡으로 조금 떨어져서 다시 본다고 나아지는 것은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 분노의 나날을 지내는 것보다는 생산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포화 속에 저자들은 이 질문과 박제화된 삶들을 분별해내게 할 수 있을까?

 

두 저자의 목소리는 남다른 데가 있다. 고병권 저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되삼키고 있다. 또 한 저자는 항아리 속에선 항아리를 볼 수 없다라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고 경고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지는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여러 공국의 정치가로 조언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 단일한 국가를 만들면서 법위에 존재하는 주권을 그려내고, 단체별로 조합별로 각각 힘이 다른 집단의 단결을 금지하면서 동등한 인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보댕, 홉스, 루소는 토지와 마을에 귀속되는 개인이 아니라 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법적으로 분리된 개인화가 되는 과정을 발명해내고 균질한 통일된 인민을 셀 수 있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 사상을 토대로 근대국가가 발견되었다. 그 한가운데 외톨이가 된 개인은 사회계약이나 맹약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권리를 양도하는 상상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단결할 수도 없는 개인의 존재임과 동시에 국가의 인민이 되어가는 과정과 연결된 것이다. 그 과정은 동시에 국민이 되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크고 힘센 짐승같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의제인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여기 민주주의의 속성과 같은 시작이며 아무런 해결도 할 수 없는 현재 민주주의의 봉착점이기도 하다고 한다. 봉건주의, 절대군주시대와 달리 법위의 힘인 주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균질화된 인민이 법적인 힘을 갖고 대표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는 것, 주권=인민=대표체계는 대의민주주의제의 출발이면서 자본주의의 탄탄한 지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그물망에서 난민은 국가도 없고 주권도 없고 국민도 아니면서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도 없는 존재이다. 살아있으되 아무런 주권도 법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추방되는 이주노동자도, 선거권도 없는 청소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도, 선거때면 선거하지 않는 유권자는 결코 대의될 수 없는 것이 보고 있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 그물에 빠져나가는 사이존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현 대의민주주의 그물에서 대표될 수 없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하수구에 빠진 채 민주주의의 밧줄을 잡을 수 없다.

 

발라낸 개인으로 성장한 자본주의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적인 접근으로 그 많은 변화를 헤아릴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수많은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삶밖을 보고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만한 시각이 없던 것이다. 위험한 자본주의라는 책은 저자가 맑스의 자본론을 40여년간 연구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여 대학생들에게 쉽게 강연한 것이다. 그 사유와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세계화하면서 국지적으로 구도를 바꾸고 있는지 보여준다. 최근 TPP의 경제협력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공적연금의 민간보험화와 대학교육의 세계적인 균질화와 시장화에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틀내에 어떻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력들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두권의 책을 통해서 독자가 작은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300여년 움직여온 자본주의를 얼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경계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선 좋은 삶도 함께하는 삶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후배 고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 그중에서도 너를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리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해라. 부탁한다.”

 

비교적 얇고 서술하는대로 읽어나가면 금방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대 독서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도 이 시선들로 인해 조금이라도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자들의 무등에 타고 잠깐이라도 멀리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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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하나의 형식이며, 이 형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살아 있는 동안 예행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38

 

자유낙하라는 소설은 추락이 인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곤궁과 착취하고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추락은 우리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인 이유는 창조력과 파괴력이 똑같은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언어를 쓰는 동물은 신적인 창조 능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창조의 강력한 원천이 대부분 그렇듯 이 능력은 근본적으로 위험하다. 언어를 지닌 동물은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다가 한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무화시킬 위험에 늘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45

 

인간의 의미화 능력에는 엉뚱한 길로 빠질 끊임없는 가능성이 탑재돼 있다. 옆길로 샐 가능성이 없는 이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자유에 파멸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48

 

악을 인간 조건의 바뀌지 않는 존재론적 특성으로 여기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유혹에 빠지는 일은 인간이 악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공존해야 한다....질병도 연속성이 있지만, 의사들은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명론적 체념에 빠져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54

 

악은 자기가 완전히 독립적이며 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고 믿지만, 사실 악은 혼자 생겨나지 않았다. 악 이전에는 늘 무엇인가 먼저 존재했다. 이것이 악이 영원히 비참한 이유 중 하나다. 82

 

파시즘은 타도해야 마땅하지만,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파시즘 타도라는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있을까? 결국 자유주의도 고매한 이론처럼 허약한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인류의 사악함을 교양 철철 넘치게 혐오하며 외면하는 자유주의나 휴머니즘 따위의 신념으로 어떻게 파시즘을 쳐부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이열치열, 곧 악을 포용함으로써 격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모더니즘은 둘 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보다 위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파시즘 만한 깊이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89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모두 원시와 진보를 통합하려 한다. 정교함과 자연스러운 충동, 문명과 대자연, 지식층과 민중의 통합이 목적이다. 현대 기술의 추진력은 전근대의 야만적본능에게서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합리주의적 사회 질서를 내던져버리고 야만의 자연스러움에 깃든 뭔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새 미개함이 옛 야만하고 다른 점은 바로 자의식이다. 92

 

악은 인과율을 거부한다. 목적을 고려해야 하는 악은 자아 분열에 빠지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처지에 안 맞게 너무 앞서가는 꼴이 된다. 그러나 무는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무가 시간 속에 있을 수 없는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시간은 차이의 문제인 반면 악은 지루할 만큼 영원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108

 

오셀로는 수수께끼의 핵심을 뽑아내자는 생각에 빠져 애초에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15

 

악은 순수한 도착이다. 악은 일종의 장대한 우주적 심술이다. 악은 불의를 숭앙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려고 기성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겠다는 주장을 하지만, 정작 자기는 도덕적 가치나 업적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악이 은폐하던 비밀이다. 119

 

대개 누군가를 대량 학살로 치닫게 하는 부류의 타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기의 자아 심층부에 자리한 끔찍한 공허를 드러나게 하는 자들이다. 이 경우 그자는 이 고통스러운 부재를 물신, 도덕적 관념, 순수성이라는 환상, 광적 의지, 절대 국가, 총통의 남근 이미지로 채우려 한다. 이런 면에서 나치즘은 다양한 부류의 근본주의를 닮았다. 타자를 제거하는 도착적 쾌락은 자기의 건재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정체성 중심부의 공허는 죽음의 전조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려면 당신의 자아에 이런 투라우마를 구현하는 자들을 일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심지어 이론상의 정복도 불가능한 죽음이라는유일한 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26-127

 

지구상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나치에게 매혹적인 계획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이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파괴라는 관념에는 악마적 환희가 있다. 결함과 미진한 결말과 조잡한 근사치 따위는 악이 못 견뎌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관료주의와 태생적으로 친밀한 이유다. 반면 선은 사물의 얼룩덜룩함과 미완의 성질을 사랑한다. 128

 

악은 삶에는 어차피 아무 가치도 없지 않느냐고 귓가에 속삭임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 늘 그렇듯이 악의 적은 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잘 알고 있던 대로, 악이 선의 면전에 침을 뱉는 이유는 선이야말로 단연코 가장 충만하면서도 가장 깊이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134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사악함을 기뻐하는 자들을 파괴적 기쁨과 비참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라 묘사한다. 이것은 이른바 현대식 용어로 도착적 쾌락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139

 

알코올 의존자는 절망한다. 그 사람은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갈망과 자기혐오의 영원한 회로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지옥에 살고 있는 셈이다. 143

 

절망에 빠진 자들은 자멸적일 뿐 아니라 오만하다. ...절망의 증거야 말로 이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이자들이 자기이기를 바라는 이유, 고통에 빠진 자기가 되려는 이유다. 145

 

악은 재치도 임기응변의 수완도 전혀 없기 때문에 큰 슬픔이나 환희나 격정을 마주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악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음을 가질 만큼 충만한 내면의 삶을 갖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추한 것들의 현장이 아니다. 지옥이 그런 곳이라면 차라리 들어가겠다고 자원할 가치가 있으리라. 154

 

아퀴나스는 악을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이라 여긴다. 아퀴나스에게 악이란 결핍이며, 부정이고, 결함이며, 상실이다. 악은 일종의 기능 부전이자 존재 심층부의 결함이다....고통이란 삶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다. 155

 

악은 물질이나 세력이 아니다. 악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포 영화처럼 악을 물신화하는 짓이다. 악은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이지 우리 너머의 어떤 외계 세력에게서 솟아나오는 무엇이 아니다. 또한 악이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이유는 악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존재로 더 충만한 것이 존재가 결핍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다. 이런 면에서 악은 일종의 영적 슬럼화다. 156

 

악한은 삶의 기술이 결여된 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삶이란 색소폰 연주하고 같아서 끝없는 연습을 거쳐 능숙해져야만 한다. 악한 자들에게 삶이란 요령부득의 문제다....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이런저런 면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장 난 존재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삶의 기술에 엄청나게 무지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의 수준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158-159

 

악은 몇몇 악의 실행자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만큼 엘리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이 천지에 만연해 있다는 식으로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 금전 이득을 얻으려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할 채비를하는 따위의 평범한 악이 순수한 악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악은 잠 못 이루고 애태워 걱정해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다. 160-161

 

신이 악을 허용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 짓은 신을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존재로 여기는 처사인데 신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은 외계인이 삼각형 초록색 눈을 가지고 유황을 들이마시는 격이다....이런 식의 묘사는 빈약한 인간의 상상력만 부각시킬 뿐이다...기껏해야 신을 인간의 형상을 본떠 왜소하게 만들려는 맹목적 계몽주의 관점일 뿐이다. 신은 인간 논리의 범위 안에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76

 

많은 악은 나태와 두려움과 탐욕과 집착 등 고요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딱히 남부끄러울 것도 없는 동기에 따라 야기된다. 178

 

역사

 

헤겔은 역사를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지혜와 개인의 미덕이 희생되는 도살장이라 봤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 속 행복의 시대는 텅 빈 페이지들이다. 또한 헤겔은 악과 부정과 인간 정신이 창조한 가장 번영한 제국의 몰락’, 그리고 인간 존재의 형언하지 못할 불행에 관해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서의 행간에서 눈물과 아우성과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대중의 비명과서로 죽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인간사의 영원한 불행에 관해 쓴 테오도르 아도르노 또한 견해가 똑같았다. ...인간 문명은 대부분 약탈과 탐욕과 착취의 역사였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183

 

인간은 윤리적으로 모호하고 선악이 뒤섞여 있는 잡종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왜 선이 정치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빈도가 그렇게 낮을까? 분명 사회사와 정치사의 성격, 곧 구조와 제도와 권력 절차의 특징 때문이다. 184

 

많은 부도덕한 행동이 물적 제도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인간만의 잘못이 아니듯 그 행동이 전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는 원죄 교리를 유물론식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 셈이다. 행위란 행위자가 사악하지 않아도 사악할 수 있다. 선도 마찬가지다. 악당도 이따금씩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분명 선인보다 중요하다. 188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놓고 신뢰할 만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절망적일만큼 일그러진 조건 속이 아니면 인간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조건이 달랐다면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조건을 겪어보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않는가....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따분할 정도로 끈질긴 착취라는 주제의 이런저런 변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종들을 돌파해 진정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가 어떤 윤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존재인지 알아낼 기회를 갖게 된다. 분명 입맛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마땅히 인간은 결국 내내 괴물이었다는 사실만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원을 향한 끝없는 투쟁이나 잔인한 권력의 강제에 따른 시각의 왜곡 없이 자기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는 서게 될 것이다. 190-191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정치 개혁에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요소는 악몽 같은 역사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무분별한 진보주의다. 193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9.11 테러는 이라기보다는 부정이며, 이런 구분은 궤변을 훨씬 뛰어넘는 논거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로 인류의 안정과 생존은 악과 부정 사이를 구별하는 데 달려 있다고 판명될 것이다. 악한 자들의 파괴 행동은 설득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이 하는 짓에는 합리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악한자들은 사람들이 사안을 보는 데 쓰려 하는 합리성 자체를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반면 합리적이거나 심지어 훌륭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뻔뻔스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들하고는 이론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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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20-21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채무의 탕감도, 보상도 모두 타자를 전제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유대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의 위기와 채무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31-32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이 동의어다. 41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43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을 제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47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48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다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50-51

 

오늘날 우리는 주인과 노예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노예 주인 혹은 주인 노예일 뿐,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질 때, 우리가 주인도 노예도 아니고, 주인 노예도, 노예 주인도 아닐 때 비로소 종언을 고할 것이다. 54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아니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그 곁에 머물러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정신은 극단적인 데까지, 극도의 부정성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들어가 이를 자기 안에 끌어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완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56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58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60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저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0-61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저 단순한 포르노로 전진해감에 다라, 그만큼 더 강력하게 비밀과 수수께끼는 위축된다...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70

 

욕망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이 주체는 철저하게 선택을 통한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타인에 관하여 무엇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소망할 만한 기준인지 숙고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상상이 고조됨에 다라 남성과 여성이 파트너에 대해 가지는 바람도, 함께하는 삶의 전망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고 상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사람들은 환멸도 더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환멸이란 상상의 악명 놓은 하녀일 뿐이다. 73

 

근대적 자아는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한다. 그의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74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80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다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도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83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것 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84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건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새로운, 완전히 다른 존재방식을 도입한다.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킨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된다. 85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계산하는 사고 활동에는 아토피아의 부정성이 없다. 계산하는 사고는 긍정적인 것에 대한 노동이다. 어떤 부정성도 그것을 불안에 빠뜨리지 못한다. 89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 91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소에 기여한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사물들의 흐름을 일정한 형태로 빚어내고, 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어준다. 오늘날 정보의 더미는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92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정보의 더미,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 투명사회,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이다. 하지만 부정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오직 동일자뿐이다.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94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다.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이다.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른다. 94-95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아토피아의 부정성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아포리아로 귀착되지 않는다. 96

 

볕뉘. 상가에 가고 오는 길 읽다.  장정일이 한병철에 대해 쓰는 컬럼을 보면 질투가 내장된 듯하다.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사랑보다 더 강렬한 것이 질투다. 질투는 그 상황을 선명히 찍어내고 돌려내어 있는 것보다 사실적으로 기억해낸다. 질투의 정신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대하라고 한다. 묘한 긴장에 대해 애써 판단하지 않으려한다. 긴장 역시 더 치밀하게 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묘한 라이벌?로의 의식이라 비평하는 비평가들은 없지만...조금 더 깊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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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찬 룸이다. 일행과 다른 곳에 가겠다고 하는데도 아니란다. 주춤거리는 아는 얼굴이 섞인 일행들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나는 일터밉상을 온 힘을 다해 가해하고 있다. 다른 이가 거든다. 헤드락한 채로 말이다. 때릴 기운도 풀려버리자 다시 룸 한켠의 빈공간에 맞은 이와 서있다. 그 자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인다. 술값을 다 치룰거라고 하니 냉큼 자리를 잡는다. 머뭇거리던 안면 있는 이들도 쑥 같이 들어간다. 문 밖에서 멀어지는 나는 어느새 허름한 구멍가게 빈방같은 곳. 술상에 꽉찬 안면은 있는 이들. 그들에게 룸에 들어간 이들이 훌륭한 이들이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다 허름한 술을 한잔 받다. 그리고 깨었다. 손에는 사람을 패버린 기억이 그대로 전해졌다. ` - 꿈 밖이다. 잠시의 후련함도 잠깐이다. 원망을 샌드백처럼 다루었다. 미안했다. 꿈이라도.

발1 「악」, 테리이글턴을 읽고 있는 연유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른 잠. 꿈결에 시들거리다. 이젠 꿈들도 행간을 읽혀 어쩌지 못한다. 일상들이 원이 없다면 괜찮을텐데 바램과 현실이 교직하며 불만들이다.

발2. 현금을 찾아 직원들에게 김장지원금을 봉투에 넣어드렸다. 한분의 결혼축의금을 챙긴다. 그 끝에 가까운 부고를 듣다.

발3. 악의 적은 선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이 걸린다. 악이 싫어하는 것이 삶이라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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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오후에 비가 내려 그치기를 기다리다 지근 거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찾다. 한적하리라 기대했건만 출사를 나온 사진전문가들로 가득하다. 단풍을 조금 더 찾다가 돌아온다. 조금 더 기다려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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