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민아카데미 2015 송년회]

이번주 금요일(18일), 송년회 잊지 않으셨지요? 영화 안내 나갑니다.

대전 메가박스(로데오타운)
1)히말라야 19시20분
2)대호 19시30분
3)스타워즈 19시40분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회신 부탁드려요. 사무국에서 한꺼번에 예매하겠습니다.

영화관람 후 아카데미 책방에서 뒷풀이와 `나의 추천도서 선물하기`가 진행됩니다. 회비는 1인 2만원. 추천도서 한 권씩 준비해주시구요, 책방으로 바로 오시는 분은 밤10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자~이제 번호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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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밤

조례부결소식을 타고 든
몇몇 지인들의 눈물과 고함이
밟혀 더 아프다

오랜만에 만나
주장과 고픈말들만 안으니
잔상처럼 어른거려
안타깝다

간만에 통화해
어쩌니저쩌니
답이아니라 할일만
전하니 마음이 저린다

아프고
안타깝고
마음 저린 일들만
비처럼내려 어쩌지 못하는 밤

발. 1. 모임에 직책은 왜 만들어 놓아. 지도를 거꾸로 펼쳐들 듯. 회원은 위 운영위 사무국 장 대표단 아래로 마음이 흘러내리는 것이라면 서로 그 마음을 받들어 모셔. 마음은 병목이 생기지 않게 서로 예민해져. 새로운 생각 누군가 물고오면 화들짝 함께 놀라. 0.5도 따듯해질 순 없을까. 꿈같은 일이지만 사발-통문같은 모임 속을 거닐고 싶다. 사발 속 마음들 구슬처럼 이님저님 꽃맘 전할 수 있게. 늘 미로같은 마음찾다 온 길도 잃기전에.

2. 유성구의회 상임위에 만명 서명을 받은 원자력관련 조례가 새누리의원의 반대 속에 부결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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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공공성

 

아렌트는 파리아’, 즉 공공적 공간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사회의 항쟁은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단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현실적인 존재인가에 있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주고 있는 최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그를 그 자신이 보아도 비실재의 위치로 환원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의심하는 데 있다. ‘사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잉여자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5

 

공사를 나누는 경계선은 담론에 의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담론 이전의 것, 정치 이전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처럼 성별역할분업을 정당화하는 담론에 의해 공공성에서 배제되어왔던 가사노동이나 부양 등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재파악하려는 대항담론의 좋은 예이다. 가정폭력, 성희롱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 사적인 불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겨졋던 많은 일들이 공공적인 부정의로 재파악되었다. 또 가족이 해야 하는 사적인 일로 여겨진 돌봄에 대해서도 불완전하게나마 공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35

 

담론자원 -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 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재파악하는 등, 재해석 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37

 

대항적 공공건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37

 

고독이란 문제를 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결국은 문화 자체의 질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쓸모의 유무에 따른 유용성의 기준이 타당한 공간은 확실히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공간이 터무니없이 팽창하여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삼켜버리고 있는 데 있다. 아렌트는 많은 인간을 끊임없이 잉여자로 만드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침윤을 문제 삼았는데, 그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쓸모없는 자를 즉시 잘라버리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질 정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40

 

하버마스 비판 55-56

 

공공적 공간은 공통세계에 대한 다원적인 관점이 존재할 때에만 그것들이 서로 교환되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관점의 복수성을 잃었을 때, 공공적 공간은 종언을 맞이한다. 세계를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복수성을 파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체주의라기보다도 대중사회 소비사회의 획일주의이다. 거기서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균일화 때문에 복수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것을 둘러싼 판단이 회피되는 냉소주의가 관점의 축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66

 

매우 흔한 현대의 현상, 즉 판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광범한 경향...자신의 범례,자신이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선택하는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 그리고 판단을 통해 타자와 관계하는 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으로부터 진정한 걸림돌이 발생한다....이 점에서 공포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이 존재한다.” 67

 

아렌트가 보는 한, 근대사회의 인간에게 근본 경험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소외가 아니라 세계소외이다. 즉 신앙을 잃은 결과,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 과정으로 내던져졌다는 경험이다. 이 생명 과정은 나의 내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도 있다. 즉 근대 인간이 세계에 대한 배려의 상실을 대신해 손에 넣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만인에게 동일한 생명에 대한 배려이다. 67

 

어떤 사람의 의견이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 상실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공공적 공간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세계가 빈약해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이렇게 보인다가 복수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69

 

푸코와 아렌트

프랑스혁명은 -정치의 역사적 개막을 의미하지만, 아렌트가 보는 한, 그것은 필연성=빈궁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절박성때문에 자유의 창설에 대한 관심을 격퇴해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75 조에, 비오스

 

자기의 욕구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든가, 대화 장소로 이동할 자유 혹은 시간이 없다든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든가,자기의 말을 들어줄 타자가 주변에없다든가, 오랜 동안 심각한 곤경에 처해져 있었기 때문에 희망을 품는 것조차 기피한다든가(‘적응적 선호 형성’)하는 등등, 새로운 욕구 해석의 제기는 새로운 자원의 배분을 청구한다. 81

 

존 롤스,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정은 모든 평등한 시민은 서로 비교할 수 없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참으로 다양한 선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구상이란 자기의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도적인 가치에 관하여 개개인이 가지는 해석들이다. 그것은 가치가 상쟁하는 신들의 투쟁의 시대에는 각인각양이어서 거기에서 공약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약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어떠한 선의 구상을 가지고 있건, 어떠한 삶의 계획을 추구하건, 누구나가 축소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확대되기를 바라는 가치이다. 존 롤스는 그러한 가치를 기본재=기본적인 선이라고 부른다. ”기본재는 시민이 가진 욕구가 무엇인가를 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 그 견해를 추구해가는 경우,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실히 간주되는 것이다.“ 정의는 이러한 기본재(자유, 기회, 소득과 부, 자존의 기초)를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우선순위로 분배하는가에 관한 기본원리이다. 85

 

공공적 가치를 입장에 다라 나뉘는데 센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으로 해석한다. ‘잠재능력이란 어떤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삶의 폭’,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의미한다. 센이 공공적 가치를 기본재로 정의하는 롤스의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은 기본재가 주어졌다고해도 건강상태, 연령, 장애의 유무 등의 차이에 의해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어는 정도 이상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재화를 사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어떠한 상태에 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욕구를 재화의 필요가 아니라 행위와 존재에 대한 필요로 재정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이는 삶의 폭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을 보조하는 직업...동성애자는 공공시설 숙박이 거부되는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놀 기회를 박탈당하는가...센이 잠재능력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적절한 영양을 얻는 것, 병에 걸리지 않는 것, 요절하지 않는 것,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커뮤니티에서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86-7

 

센의 접근법에 따르면 빈곤이라고 일컬러온 사태는 재화의 결여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로 파악되어야한다. 박탈이라는 척도는 제3세게의 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실제로 공헌해왔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척도를 이용하면 소위 선진국에서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박탈되어 있는지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느긋하게 휴양할 수 있는 것, 오염되지 않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소음에 고통받지 않는 것, 자통차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이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가지는 것 등등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장기간에 걸친 고독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의 하나로 꼽아야 할 것이다. 87-8

 

사회국가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보험의 성립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회국가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에 걸쳐 탄생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국가는 자본제 경제의 진전을 조건으로 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다양한 부정적 산물에 대한 대응으로서 성립되었음을우선 지적하고자한다. 사회보험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노동재해나 실업과 같은 폐해에 대응해, 위험을 개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합화함으로써 대처하는 제도로서 만들어졌다. 88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명하게 이반되기 시작한 결과 사회적=국민적 연대에 심한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력한 균형책을 취하지 않는 한, ‘하나의 국민이란 표상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렵게 되어 오히려 두 개의국민, 두 종류의 시민이라는 이미지가 조성된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이고 복지에 의존하는 부문의 두 개로 나뉘어 양자 사이에는 원한의 정치’(강자가 약자에 품는)가 항상 잠재하게 된다. 시민의 대부분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국가는 다수의 지지를 잃어간다. 사회국가는 국민의 통합이 아니라 역으로 그 분단을 야기해온 것이 아닌가하는 관점이 지배적이 된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의심, 단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92

 

이를 보완하고자 한 OECD의 능동적 사회로 변화되면 공적부조를 받음으로써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 통치 능력이 결여된, 혹은 그런 의욕이 없는 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잉여자로서만이 아니라사회의 질서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반영속적이고 준범죄적인 사회층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의 대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규율의 대상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의 안전에 위협을 주지 않도록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일괄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95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로 인종 종족에 의한 거주지의 분리는 실제로 심각한 문제인데 사회적 공간의 분리를 어떻게 막는가는 정치적인 삶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인터넷 상의 공공성이 현실적 공간의 틈을 중개할 가능성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조건을 살아가는 타자가 현실에 접할 기회를 잃어간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이는 편협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97

 

최근 사회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사회적 연대의 공동화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적 분리이다.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적 연대의 자원은 눈에 띄게 부족해지고 있다. 우리는 운명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라고 하는 롤스의 말이 빈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서로 차단된 공간을 살아가게 된 현상황에서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기민으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생명 보장의 방법을 구상해야 할 것인가? 98 답은 99-101

 

친밀권

 

공공권과 친밀권을 분석적으로 구별하는 적절한 기준은, 공공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하는 데 반해, 친밀권은 구체적인 타자의 삶/생명에 대한 배려 관심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안면 없는 일반적인 타자,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 친밀권의 관계는 간-인격적이어서, 그러한 인칭성을 결여한 공간은 친밀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둘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신체를 갖춘 타자이다. 친밀권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타자의 생명 신체에 대한 배려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체이다. 거기에서 비오스라는 삶의 위상은 조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106

 

자조그룹은 정보나 의견의 교환을 통하여 직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외부를 향하여 문제를 제기해가는 공공권의 측면을 가지기도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로의 삶의 구체적인 곤란에 주의를 기울이는 측면은 역시나 불가결하다. 이것보다도 좀 더 느슨한 연결, 즉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방문하는 친구들 사이의 관계나 의논 잡담을 즐기기 위한 살롱적인 관계도 친밀권에 포함된다. 타자의 구체적인 삶/생명에 일정한 배려나 관심을 갖는 것이 친밀권의 최소 조건이다. 108

 

새롭게 창출되는 공공권의 대부분은 친밀권이 전환되어 생겨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90년대 후반부터 각지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주민 사이의 대화의 친밀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민투표가 쟁점으로 삼아온 것은 원자력발전소, 산업폐기물처리장, 군사기지, 토목건설 공공사업 등이다. 그것은 위험을 주변에 강요하고, 생태게를 파손하고, 부정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주는 사업을 감행하는 문화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가치 판단을 공공적 공간에 던지는 문제제기는, 다수와는 다른 가치관(생명관,자연관,인간관)을 유지 재형성해온 친밀권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많다. 미나마타병 환자와 교류한 경험도 이의 하나이다. 109

 

새로운 가치의 제기가 담론의 정치라는 형태를 곧바로 취한다고 할 수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타자에 대하여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언어를 가지고 마주하기보다도 오히려 다른 식의 작품 제시라는 스타일, 다른 식의 행동양식의 제시, 다른 식의 삶의 방식 제시라는 스타일을 취한다. 그러한 다른 식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에 의해 담론의 차원으로 번역되거나 그것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의 실천을 촉발해간다. 110

 

친밀권의 감정의 기제는 양의적이다. 지지하는 것과 잡아매는 것, 배려하는 것과 집어삼키는 것, 주목하는 것과 감시하는 것...요약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과 상대적으로 위험한 것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친밀권이 동화와 억압의 공간으로 전환할 위험성은 항상 잠재해 있으므로,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자유는 제도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묵살되지 않는 사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존감에 있어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행위나 말로 공공적 공간에 현상하는 용기를 정치적 덕성으로서 중시하는데, 부인이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덕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을 배경으로 가질 터이다. 112

 

아렌트는 주체 내부에 있는 복수의 가치 사이의 대화를 사고라고 부른다. 이 시각에서 보면 주체에게 위기는 다양한 가치를 질서 짓는 어떤 중심적 지배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음(정체성의 위기)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주체를 지배하는 정체성이라는 위기이다. 복수성은 공공성에서 정치적인 삶의 조건임과 동시에, 주체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타자를 잃는다는 것은 응답받을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상실을, 언어를 가진 동물로서의 정치적인 존재자에게 죽음을 초래한다. 114

 

복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인 로마인의 언어에는 살다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 또는 죽다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 ‘사이의 상실 115

 

공공성은 생명의 보장이나 공통 세계의 정의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원은 개별적 삶의 공약 불가능한 위상에 대응한다. 이 차원에서 공공성은 사람들이 소유활 수 없는 세계의 제시(언어나 행위에서의 현상’)를 보고 듣고, 향수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차원에서 정치는 이미 공약 가능한 가치의 정의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가치나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윤리로서의 정치라고 할 만한 요소도 포함할 것이다. 117

 

푸코 - 내게는 이러한 문제 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존재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성의역사2:쾌락의 활용 117-118

 

아렌트는 그 윤리를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존재하라 Be as you would wish to appear to others” 이것은 다름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게 현상하라 Appear to yourself as you wish to appear to others" 118

 

 

볕뉘.  한나아렌트, 하버마스, 비롤리, 롤스, 필립페팃 등 공공성 최신 논의를 끌어내면서도 그에 대한 아마티아센, 너스바움 등 최근 학자들의 연구흐름들을 감안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론적 인 탐색뿐만 아니라 공공선의 변화에 대한 개념(친밀권의 공공성 탐색)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유를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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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민주주의란

 

플라톤은 폴리스는 5,0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2만 내지 3만으로도 전원 출석하여 민회를 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선거로 뽑는 500명의 평의회에서 민회에 올린 안건을 심의하고, 거기를 통과한 중요문제에 대해 아테네의 신전 앞 광장에서 민회를 열었다. 재판은 6,000명의 민중법정 형태로 이루어졌다. 66

 

전문가만으로 이루어지거나 투표율 100%라고 모두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이 고조되며, ‘모두가 어우러져 결정했다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모두가 어우러져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어우러져 행하지 않으며, 모두에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 활성화된다는 것은 모두혹은 우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이다. 74

 

폴리스=도시국가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폴리스는 정치를 행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곧 제의이기도 하며, 신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검을 지닌 남자들이 모인다. 폴리스는 폴리틱, 즉 정치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편 오이코스란 집의 영역이다. 그곳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일하며, 아이를 낳고 기른다. 오이코스는 오이코노미코스(미코스는 관리)형태를 취해 오늘날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의 어원이 된다. 그러나 이를 정치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근대적인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는 자유와 항상의 영역’, 오이코스는 필연과 무상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77

 

무연의 영역, 자유의 영역, 공의 영역은 아무나 들어와도 되는 퍼블릭의 영역이다. ‘이것은 퍼블릭 하다라고 쓰여 있을 경우, 유럽에서는 누구나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인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목욕탕에서는 누구나 나체가 되어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아질이라 하여, 무연의 영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85

 

의석비율에 민의가 드러나지 않고 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런 문제를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타 진영간의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민회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든 사람들 가운데에 플라톤이 있었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인 제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진리를 부르짖는 스승을 사형에 처한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폐해를 그대로 담아둔채로는 기대를 걸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생각해낸 것이 철인왕통치이다. 98

 

플라톤은 국가(그래봤자 수만 명이었지만)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타락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이에 들어맞는, 지혜의 덕을 체현한 왕이 이끌어가는 왕정이 있다. 그러나 통치하는 중에 용기를 덕으로 삼는 전사들이 끼어 들어오면, 복수의 인간에 의한 명예정(귀족정)으로 옮겨간다. 그런 복수통치에 부유층이 참여하면 과두정이 된다. 과두정은 빈부의 격차를 초래하므로 빈자가 부자를 무찔러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정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정은 참주정으로 이행한다. 106

 

미국에서도 상원은 인구수에 비례한 것은 아니다. 상원이라는 말도 Senate인데 원뜻이 원로원이다. 민중의 대표인 하원과 귀족(미국에는 귀족이 없다)의 대표인 상원이 의회를 구성하고, 하원은 민중의 소리를, 상원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취지이다. 하원은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좋으므로 특권화되지 않도록 임기가 짧고, 상원은 임기가 길어 차분히 오래도록 지혜를 쌓아나가라는 제도이다. 112

 

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홉스는 물체론, 그리고 인간론, 마지막으로 정치론을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퓨리턴 혁명 등의 정변에 휘말려 정치론만을 우선적으로 완성했다. ..데카르트가 왕에게 이성이 있지만 농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뉴턴은 형태나 감촉 따위는 무시해도 좋으며, 질량이라는 본질만으로 환원하면 법칙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홉스는 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신분이라든가 성별은 무시해도 좋으며, 그렇게 하면 인간 세계의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홉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은 모두 물체의 운행과 원인 결과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정치체제도 그 생각 아래 논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왜 국가가 필요한 것인가?’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옛날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국가란 가족과 같은 것이니까’, 혹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으므로등의 말로 마감하고 사고지점을 멈춰버린다. 하지만 이 점을 파고든 사람이 홉스였다 홉스는 우선 자연상태라는 것을 설정한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정치나 국가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자연권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감각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간주한다.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플라톤의 선과는 다름)’으로 간주하며, 선을 추구하기 위해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심신능력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다...이것이 농민이 철로로 기사를 때려눕히는 전란과 혁명의 시대에 태어난 홉스가 갖게된 의문이자 답이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싸움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은 그러한 경험에서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로 그렇게 된 시점에서 전원이 일단 자연권을 방기하고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연권, 즉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인공적인 권력을 만드는 계약을 체결한다. 138-141

 

홉스가 생각한 정치체제는 어디까지나 인공적 산물로서,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계약해제도 가능하다. 또한 전원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애국심을 가졌다든지 마음의 고향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어는 코먼웰스 commonwealth'이므로, 말하자면 공공의 복지라든가 공공재이다. ’공통의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고 할만한 뉘앙스를 품고 있고, 라틴어의 공공체 res puplica, 즉 공화국 republic에 가까운 의미이다. 141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을 우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수단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홉스나 로크가 말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르다. 홉스나 로크는 자연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어서, 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나 루소의 경우는 계약할 때 일체의 자연권, 즉 몸도 마음도 재산도 전부 공동체에 양도하여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집단 출가와도 같은 것이다 개인 소유의 물건은 모두 놔두고 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되면, 공동체로서 공통자아가 생겨난다. 그것이 일반의지를 가진다고 설파했다. 일반의지라는 것은 구성원의 의지의 단순총합인 전체의지와는 다르다. 뒤르켐의 사회가 개인의 집합을 초월한 실재인 것처럼, 일반의지 또한 개인 의지의 집합을 넘는 사물이다. 뒤르켐은 사회를 사물 chose'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루소 또한 일반의지를 사물chose’로 비유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합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합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저 집합체에 지나지 않을 때에는, 자신과 타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제대로 이루어지면 개별적인 목소리가 녹아들어,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일반의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146-7

 

홉스, 로크, 스미스, 벤담, - 이들의 사상을 꿰맞추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럼에 투쟁이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사회는 풍요로워져 공존공영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은 수량화할 수 잇고, 그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시장의 화폐 거래량, 정치 영역에서는 득표수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정권을 차지 않다. 이렇게 다수결로 법률과 정책이 결정되는 제도를 만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 다만 정치는 가급적 민간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소수의견의 존중은 필요하다. 대체로 이런 정도일 것이다. 159

 

미국은 우선 타운이 있고, 타운이 연합하여 스테이트가 형성되고, 스테이트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연합함으로써 유나이티드 스테이트가 된 나라이다. 토크빌이 주목한 것은 이 타운십에서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 참가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권력의 분권화가 이루어져 스테이트와 타운에서 자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않아도 원활히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또 타운십의 성원들이 돌려가며 맡는 공무가 대단히 많다. 정부가 경찰이나 법원을 만들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교대제로 이루어진 보안관과 배심원을 맡는다. 타운십에는 행정을 실시하는 행정위원,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위원 외에 징세관, 회계관, 경찰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민회에서 선발되어 돌려가며 맡는다. 이러한 공무원에게 고정된 보수는 없고, 봉사행위를 한 정도에 따라 보수가 지불된다. 공무를 고의적으로 맡지 않는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163

 

하지만 지금은 토크빌이 생각하는 미국과 달리 스타트 지점부터 재력과 지위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지역사회에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허다한 역사적 연고가 얽혀 있고, 이념적인 결속도 잘 안 되는 사회라면 과연 어떨까? 그런 사회는 귀족이나 명문가, 아니면 사장이나 노조위원장 같은 중심적 인물이 우리의 대표라고 여겨지는 동안만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할 뿐이다. 165

 

근본적으로 대의제는 봉건제의 산물이다.....자유주의와 대의제와 민주주의, 이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인류 역사상 특정한 사회조건 아래에서 100년 정도 그렇게 유지되는 시대가 있었을 따름이다...점점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이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란 일종의 혼합정체이다. 투표를 통한 대의제란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은 개입하지 말라.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국정 따위는 내 알바 아니다. 좋은 왕이 치안과 외교만을 담당하라는 사고방식이다.....대의제 자유민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대의제가 봉건제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데모나 국민투표는 봉건주의의 파괴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는 할 수 없다. 165-7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도 20세기 들어 그 현황과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원래 종교적인 구제 목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싹텄지만, 지금은 그런 목적합리성이 상실되고, 영혼이 사라진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미 마련된 제도와 절차를 지키면 된다는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베버는, 사람들이 일단 납득은 하지만 본래의 정신은 상실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전통적 보수주의자나 전체주의자도 전통이나 공동체가 지닌 덕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똑 같은 한표라는 제도로 중우정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전체주의자는 유태인을 비롯한 자본가가 민족의 정신, 정수를 파괴하려 든다고 했다. 168

 

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불확정성의 원리 - 주체가 객체를 관측한다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온도계를 써서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180

 

일단 나와 너가 있고, 그것이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개체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에 비해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상대방과 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계론이라 부르도록 하자. 인간은 좀처럼 개체론적인 발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역시 네가 나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살펴본 바를 헤아려가며 따진다. 그럴 때 잠깐 일단 머릿 속을 비워보자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럿이 곧 에포케인데, 흔히 판단정지라고 번역된다. 이런 생각을 후설은 1차 세계대전 전부터 주장해왔지만, 전후가 되어서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전쟁이 경험, 과학의 변화, 독일 사회의 동요 등이 겹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감각이 퍼졌던 것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0

 

센카쿠 열도 문제라고하면 흔히 일본과 중국의 문제인 것처럼 언급되지만, 일본과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며, 일본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중국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을 중일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편견을 가지고 구축된 인식이다. 이러한 문제를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우익단체가 끌어들이고, 매스컴이 끌어들이고,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정치가가 국익이라고 의식하게끔 되었는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국익이 구축되어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식 위에서면 문제의 해결방법이 달라진다. 195

 

이 관계를 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변증법이다. 헤겔이 주창하고 마르크스가 이어받았다. 변증법리라고 옮겨지는 독일어 dialektik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의 독일어역이고, 영어의 대화 dialogue와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 특히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혼자서는 진리에 좀처럼 도달할 수 없다.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이게 진리야, 네 생각을 바꿔!”라고 말한댔자 반발이나 살 뿐이다. 게다가 자신도 사실 진리에 도달해 있다는 보증이 없다. 그래서상대방의 주장에 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질문을 던져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하면 처음부터 설교에 마주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모순에 눈을 뜨며 내면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질문을던지면, 마찬가지로 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상호 간에 발전을 이루며 진리에 도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에 도달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가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198-9

 

근대화와 전통은 자본가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동전이 양면과 같다. 그렇게 때문에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전통이 이겨 근대화를 멈추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근대화가진행되어 전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다. 아무리 옛날 생활방식이 사라져도,아니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흔적과 역사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이어진다. 근대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전통이 강고해질수록 근대화 욕구 또한 깊어진다. 근대화와 전통은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202

 

나와 사회와 관계가 없다든가 내가 나서도 사회가 바뀌지않는다라는 것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며, 단순히 불가능이다.자신이 존재하면서 걷거나 일하거나 말하거나 하면,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를 바꾸게 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나도 너도 관계의 일시적인 현상 형태에 불과하고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활동가도 태어나면서부터 활동가였던 것은 아니며, 보통사람 또한 영원불변하며 보통 사람인 채 지내는 것도 아니다.....변증법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독일 사상가들이 주창했는데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독일은 유럽의 후진국으로서, 영국이나 프랑스 사상을 배운 상층부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가매우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권위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그런 괴리 현상을 강화시킬 따름이었다. 이는 실로 불행한 의식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여오는 설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바뀌어가는 변증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203-205 물화, 현상학, 변증법의 유용성

 

재귀적인 근대화(선택의 증대) -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둘 낳는다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왜 직장을 그만둬야 해’‘가사는 왜 내가 맡아야 하지’‘왜 아이를 나아야 하나’‘이런 남편과 이이와 함께 살아야하지라는 선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선택지가 늘었다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보아야한다. 사회가 크게 바뀐 것이다. 208-210

 

여러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재귀성이 증대한 사회에서 인기를 누린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양한 주장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각국에서 내놓은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발상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자신의 돈,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속한 민족뿐인 것처럼 보인다. 221

 

볕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되짚으며,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서 여러 현대철학의 장점들을 결합하려하고 있다.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어 여러 예로 말하기 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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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자유, 자치 그리고 적극적 시민

 

공화국은 인민의 일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결합해 있는 사람들의 집단 모두가 인민인 것은 아니다. 인민이란 법과 권리에 대한 공통의 합의에 의해 그리고 상호 이익이 되는 것에 참여하려는 갈망에 의해 결합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_ 키케로

 

기독교가 수많은 공동체 위에 강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사 속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인간을 끌어당긴 가치나 열망 등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결코 세계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그토록 중시했던 여러 이상들에 대한 관심을 기독교가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예컨대 정치적 평등의 이상은 기독교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비록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삽입되었지만 말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최저 생존 수준 또는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경제적 잉여의 수준이 극히 낮았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에서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어느 누구도 도덕적·정치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평등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나마 평등을 꿈꾸는 것이 최소한 좀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68

 

세속적 지배의 영역과 여적 지배의 영역 간의 구분은 아퀴나스에 의해 재검토되었다. 아퀴나스는,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수세기 동안 서구에는 잊혀 있다가 13세기 중반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을 기독교의핵심 교의와 통합하고자 했다. 아퀴나스의 저술에는 혼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군주제가 최선의 통치 형태이지만 무제한적 권위를 부여받아서는 안 되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지배는 자연법-, 인간의 이성에 드러나는 신법의 일부’-을 군주가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국가는 종교적 교의를 해석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통치자에 대해 심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나아가 통치자가 자연법을 계속해서 침해한다면 그에 대한 반란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제한 정부 사상은 아퀴나스에 의해 일찍이 제시되었던 셈이다. 비록 그의 궁극적 관심은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이었지만 말이다. 69

 

중세, 기독교적 만국사회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사회는 분쟁과 갈등을 해결할 권위를 신에게서 찾았으며, 종교적 교의가 일차적인 정치적 준거점이었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가정이 기독교적 만국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등장과 종교개혁이 야기한 갈등에 의해 서구 기독교 왕국이 도전에 직면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정치적 통제 형태가 전반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반이 형성되고 근대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70

 

11세기 말 공화주의는 어느 정도 부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집정관’, 즉 황제와 교황의 법적 통제권 주장에 맞서 자신들의 재판 업무를 관장할 행정관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집정관 체제는 새로운 정부 형태로 대체되었다. 사법 및 집행 업무에서 최고권을 행사하는 포데스타라는 행정관을 장으로 하는 통치 평의회를 갖춘 정부 형태가 그것이다. 그런 평의회는 피렌체, 파도바, 피사, 밀라노, 시에나 등에 존재했으며, 이에 바탕해 12세기 말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도시국가 또는 몇몇 논평가들이 선호하는 개념인 도시 공화정이 되었다. 더욱이 포데스타는 선출직이었고 임기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평의회에 책임을 졌다. 71

 

고전적 아테네 민주주의 시기의 정치 참여의 범위와 깊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은 그다지 특별하거나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장들과 권력들이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봉건 유럽의 권위 구조에 비추어 볼 경우, 그런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통치 조직이란 신이 부여한 권력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지배적 가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전제적 절대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이 영감이 원천이 되어 왔던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3

 

아테네에서 그랬듯이 시민은 아주 배타적인 남성 집단만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대개 귀족이 포데스타로 지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종 시민들의 불만과 소요를 가져왔고, 배제된 시민 집단은 결집하여 자신들만의 별도의 평의회와 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다시 정치 갈등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폭력과 무정부적 상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터규 가문과 캐풀렛 가문 사이의 전투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화정이 무질서와 허약성을 초래한다고 결론내리고, 강력한 군주정체로 복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고 18세기 말까지 자치적 정체로서 생존한 도시 공화정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73

 

공화정이 전개된 처음 1세기 동안 공화정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13세기 중반에 재등장한 뒤에야 민주주의는 유럽 정치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대로 민주주의란 단어는 경멸적 의미를 띠었고, 사회 하층의 정치와 연관되었다. 즉 공공의 이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통치,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전제적이 되어 모든 사회적 차이나 기득권을 없애 버리고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형태라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공화주의의 몇몇 특징들은 민주정치의 형태라기보다는 귀족주의적 또는 귀족적 공화주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분명히 도시 공화정의 옹호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부르지 않았다. 74

 

그렇지만 도시 공화정이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기독교 군주제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자치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본보기를 제시한 제도적 혁신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며,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 광범한 정치 협정과 텍스트 등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도시 공화정은, 고전 시대 이후의 정치사상에서 자기 결정과 인민주권을 지향하는 논의와 주장이 계발된 최초의 사례로서 기록된다. 75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 생활의 독특한 발전은 정치권력, 인민주권, 시민의 관심사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인식을 촉발시켰다. 많은 도시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념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았다. 하지만 특별히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은 불안정, 내분, 내적 유약함 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로마는, 자유를 덕성뿐만 아니라 시민적 영광 및 군사적 힘과도 연계시킨 통치 모델을 제시했다. 로마는 정치적 참여와 명예와 정복을 결합한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군주제의 주장을 폐퇴시킬 수 있는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공화주의자들에게 자유란 전제군주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공동 관심사를 운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 역시 자유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선을 기꺼이 우위에 두는 영웅적 정신이나 애국주의, 공적 정신 등을 의미했다. 76

 

계발주의사상가들은 시민이 인간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정치 참여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한다. 반면 보호주의 사상가들은 시민들의 목적과 목표, 즉 그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참여의 수단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계발 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전적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리스 폴리스 사상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이다. 특히 폴리스 사상가들이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폴리스와 정치 참여의 본래적 가치에 대해 탐구했던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정치 참여는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화정 로마와 그 역사가들의 영향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보호 공화주의이론은 시민적 덕성의 심각한 취약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민이 귀족이든 군주든 어느 한 주요집단의 정치 참여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시민적 덕성은 부패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보호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시민들의 개인적 자유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79

 

공화주의, 선출제 정부 그리고 인민주권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저작 <<평화의 옹호>> 권력의 충만함을 내세우는 교황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교회를 능가하는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법은 인민의 의사가 총회에서 표출되는 것을 통해, ’모든 인민 또는 인민의 좀 더 중요한 부분에 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책은 당시에 건전한 사람들이 진저리친 책이었다. 교황이나 추기경, 사회질서 유지를 특히 걱정했던 저술가들이 이단자들을 비난할 때면...“저주받은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을 지녔다라고 고발했다.‘ 마르실리우스주의자라는 것은, 수세기 뒤에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붙여진 것과 비슷하게, 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80

 

당시에 거의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르실리우스의 시민권 개념도 정치 참여개념을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소규모 공동체에만 적응될 수 있는 것-도시 공화국의 자치-이었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후대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대규모의 확대된 영토에 대한 공화주의 정부의 적실성에 대해 고찰한 공화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모든 성인을 포괄하는, 현대의 지배적 민주주의 형태인 자유민주주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제도나 절차를 주창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르네상스 공화주의자들은, 인민 정부란 그들의 지역공동체에 대해 확고한(소유권에 기초한)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자율적 통치 형태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들만이 지역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공적 관계와 의무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5-6

 

시민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시민적 영광으로

 

마키아벨리는 선출제 정부와 참여 정치형태를, 시민의 복지와 시민의 영광의 가능성에 연결시켜 주창했다. 이런 연관성은 아마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의 출생지인 피렌체에서 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세계의 정치사상과 새롭게 등장하는 유럽 정치 질서 모두에 굳게 발 딛고서 공화주의적 전통의 논의, 즉 보호 공화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립과 자치와 영광스러운 노력의 조건을 시민의 참여로 찾으려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정치 문화는 이런 여러 관념들을 명료하게 표출해 주었고,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 풍부한 맥락을 제공해 주었다. 87

 

그 이전의 마르실리우스나 그 이후의 홉스나 로크 등과 달리,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표방하고 지켜야 할, 조직체의 어떤 주어진 원칙(예컨대 국가를 개인의 선한 생활이나 자연권을 촉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고정된 관점)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정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는 어떤 자연스러운 틀이나 신이 부여한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에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권력을 획득하고 이용하고 보유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생활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그가 염두에 둔 것은 시민적 영광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마음, 즉 덕성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가이다. 89-90

 

마키아벨리는 역사 연구를 통해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혼합정체만이 덕성의 기반이 될 문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논리 역시 이론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개별 정체의 결점을 보완하도록 조직된 혼합정체는 경쟁적 사회집단 특히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의 균현을 잡아주는 데 가장 뛰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후대의 주장 - 국가 내의 권력분립이나 정당 경쟁에 기초한 대의 정부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자와 빈자가 모두 통치 과정 안으로 끌어들여진다면, 그리고 그들 간의 공직 배분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 표출될 정당한 통로가 마련된다면, 그들은 일정한 형태의 상호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당시 지배했던 전통적 사고와 달리, 적대적인 사회 세력과 이견의 존재가 선하고 효율적인 법률의 가능성을 침식시키기는커녕 그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나 자치적 정치체제만이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으 이익을 촉진하고 방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갈등과 불일치 역시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1

 

파벌의 특수이익을 억누르기 위해 혼합정체가 필수적이지만, 경재 국가들의 도전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안은 자신이 봥쇄당하기 전에 그들을 봉쇄하는 것이다. 팽창정책은 한 집단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힘의 이용은 자유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92

 

부자나 귀족만 공적 업무에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맥락에서 정치 참여를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인과 소상인을 포함하는 통치 과정을 원했다. ‘인민또는 시민이란, 공공 업무에 실질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생각되는 자립의 수단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노예, ‘부양가족등은 그런 이해관계를 가진 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94

 

공화국과 일반의사

루소는 18세기의 마키아벨리로 묘사된다. 루소는 공공 영역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체제를 공화정이라 불렀다. ‘공화죽의 적절한 형태에 대한 루소의 언급은 분명 그 이전의 선배 공화주의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처럼 루소는 민주주의 개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고전 아테네에 연결지었는데, 루소가 보기에 아테네만으로는 정치적 이상이 되기에 불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입법 기능과 집행 기능의 명백한 분리를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리하여 불안정과 파멸적 내분, 위기 시의 우유부단함 등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96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존경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당대의 실제 공화국의 권력 구조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루소는 최소한 이상적 정부에 대한 이론적 저술 작업에서 그와 같은 타협을 일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정한 형태의 공화국에 대한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97

 

루소는 개인을, 자신의 삶을 규율하는 법을 직접 제정하는 데 원칙적으로 관여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개념을 주장했다. 모든 시민은 무엇이 공동체에 최선인지를 결정하고 적절한 법을 제정하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치자는 통치자여야 한다. 루소에게 자치의 이상은 그 자체 목적으로 설정된다. 공적 업무를 살펴 처리하느 데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정치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지 국가만으로는 안 되고 어떤 유형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의 업무가 일반 시민의 업무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그것이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으며, 같은 이유에서 양도될 수 없다.....인민의 대리인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민의 대행인을 뿐이며, 아무 것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인민이 자기 스스로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다. 그것은 전혀 법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에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98

 

루소는 어떤 시민도 타인을 살 만큼 부유하지 않고, 자신을 파아야만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도 없는상태를 바랐다. 주요한 이익 다툼이 조직적 파벌 분쟁 - 일반 의사 형성의기반을 절망적으로 붕괴시킬- 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의 전반적 유사성밖에 없다. 그는 절대적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평등을 권력과 부의 정도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이 폭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법과 권위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101

 

모델 2.2에 요약되어 있는 루소의 공화 정부 개념은 , 여러 면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통틀어 자유와 참여를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더구나 정당한 정부의 원리와 집합적 이익을 위한 자치의 원리를 연계시킨 것은 그 당시 정체(특히 구체제)의 정치적 원리에 대한 도전이었을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원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자치 정부 개념은 가장 급진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일부 핵심 가정 - 특히, 민주주의란 시민에게 이따금씩만 책임지는 특정한 유형의 국가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생각 -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102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화주의 사상사는 여성성과 여성을 기분 나쁘게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성 풍조에 맞선 인물이 울스턴크래프트(1759-97)이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및 18세기 말 유럽 전역에 확산된 급진주의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면서, 루소 저작의 여러 부분에 대해 경탄했다. 그런 사건들과 루소가 제기한 쟁점 등에 고무되어 사회 정치 이론에서 가장 놀라운 팸플릿의 하나인 <<여권의 옹호>>1791년 저술했다. 이 책은 그녀가 참여한 급진 서클-고드윈이나 페인도 일원이었다-내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볕뉘.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정치사상과 사상가를 역사적인 배경과 인물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시각을 폭넓고 깊게 인식하게 만든 책이다. 꼼꼼하면서도 비교의 관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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