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청년논객이라 불린 저자 한윤형은 박가분과 함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시끄러웠다. 자숙한다며 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글을 접겠다고 했는데, 당분간인지 완전히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의 글을 안 읽었는데 꼭 그것이 영향이 아니라, 어차피 읽을 책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예전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 그냥 생각났을 뿐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도 없고,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고, 여성을 위한 나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도 없고....요즘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아,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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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사상가,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잡지 연재, 강연, 의회 의사 진행 발언을 모은 100년 전 글을 읽는다. 활자화 된 년도를 보고서도 1917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람시가 현재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먹는다. 이탈리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 속의 이야긴 이탈리아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20년 동안 이 위험한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저런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그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검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고 사법부는 20년 4개월하고도 5일의 형을 확정했다. 유치하고 치졸하다기보다 글만으로도 그람시에 대한 파시스트 정권의 공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람시의 두뇌는 옥중에서도 잘 작동되었고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칫하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지 모를 ‘증오’란 단어가 들어간 책제목을 보면서 역시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과격해’라는 피상적인 도식을 적용하며 공격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관심’은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정물이며 그것이 활용되는 방식에 의해 무관심의 가치와 위치가 정해진다. 분명 그람시는 이 무관심을 활용하는 ‘사람’에 대해 증오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기에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나는 많이 지쳐 증오할 힘마저도 잃어버렸다. 한때는 무관심이 가장 문제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점점 무관심에 종속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길, 무관심하지 않다가 활동과는 무관한 ‘눈팅’인 것 역시 무관심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4~5년에 한번 있는 투표활동만으로 나, 무관심하지 않소라고 하기엔 턱없어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늘 따라 다니지만 무엇을 하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람시의 “진보라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정의로운 행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새기면 무관심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사상가들이 늘 강조하는 말들이 이것임을 반복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100년 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발현하고 더욱 더 공고히 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 독재정권에 맞서 열렬히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무관심하지 않은 이들이 바꾼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무관심한 이들이 다시 바꿔 놓았다. 그람시가 정의한 ‘무책임하며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일들은 ‘따로 누군가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길들여 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 속에 속하지 않기 위해 머리로는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아 뭘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또 어떤 날은 끝없는 한숨 속에 놓인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아 버린 지가 오래되어서일까.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이탈리아에는 마피아, 한국에는 조폭

  이탈리아에는 파시즘, 한국에는 유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 한국에는.......

  이탈리아의 무관심, 한국의 무관심


  철학자 크로체는 ‘역사’가 항상 ‘동시대적’이라고 했다. 100년 전의 이탈리아의 역사가 대한민국에서 재생되고 있다.


‘독재’라는 단어를 못 쓰도록 하며, 다시는 쓰지 못하여 저절로 사라지게 하려고 한다. 독재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 예를 들면 ‘불가피함’이나 우국, 애국 등의 ‘민감한’ 단어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독재자이다. p121


   민중이 이룩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무기력하고 기생적이며 비겁한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일이라고 그람시는 말한다. 그러니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내가 가해자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며 그람시의 증오를 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에서 벗어날 방법을 힘껏 찾아야 할 시기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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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소용돌이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계급투쟁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한 세기를 풍미했고 여전한 지속성이 있는 계급투쟁. 지금 다시, 계급투쟁에 대한 지젝의 선언은 어디서, 무엇에서 출발한 것일까. 무엇이 새로운 계급투쟁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가. 모두가 눈에 본 사건은 유럽 사회에 발생한 테러와 난민 행렬이다. 지속적인 이슬람 테러 위협과 난민 증가라는 문제에 쌓인 유럽은 이 위기상황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지젝이 보기에 원인은 분명하다. 이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징후이며 문제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 책에서 구체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중소도시에서 일어난 최근의 경제적 변화는 이민자 전체가 미친 영향보다 더 크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p24

 

우리는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첫 단계는 당연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과 군사개입 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이 시대의 민낯인 ‘신 세계질서’의 지속적 혼란이 난민 발생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p53

 

   아프리카의 경우 전쟁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공권력이 붕괴한 때문이며 이것은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자 서구 자본주의가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서구사회가 난민 발생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난민은 전쟁을 피해 보다 잘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제 나라를 떠나지만 서구사회는 이들의 유입에 위협을 느끼며 난민을 극렬히 거부하거나 또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모두가 희망하건대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전혀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과 고통과 위험과 같은 힘든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있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곳일까를 찾으러 다니기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여기에 지젝이 제시하는 해답이 있다. 현실을 바꾸자고. 이 모든 불운한 상황을 빚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대항할 필요가 있다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계급투쟁이며 연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결국 실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p103

 

   여러 난관은 있다. 지금처럼 이슬람에 대한 혐오적인 반응이나 정치적인 논리로 수를 재는 상황에서는 과연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무조건적인 비판이 가져오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우리 속에 내재한 금기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서구’의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대표적으로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을 만드는 것과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교와 인종으로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난민 문제의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난민의 주원인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를 둘러싼 역학관계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것은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함께 투쟁해야 하는 것임을.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p117

 

   결국 그렇다.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계속 들여다보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와 계급문제다. 교묘하게 피해가고 덮어두기 위해 애를 쓰지만 불쌍하게도 모든 원흉은 자본주의로 귀결되고 마는 것을 보면 그 엄청난 위력을 다시금 실감한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우리는 항상 알고 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원인이 그렇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우리 모두 함께 해 나가야 한다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아니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외쳐왔고 행동해왔다. 스테판 에셀로 분노하고 참여하고 공감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수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은 넘쳐나는데, 왜 문제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는 걸까. 어쩔 땐 이런 책들을 읽으면 힘이 빠지기도 한다. 늘 그러니까. 원인은 아는데 해결방안도 아는데, 문제를 못 풀고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계속 이 소용돌이에 빠진 채 잠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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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메론에 시비걸기 ■


1. 쏙쏙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요컨대 이 이야기를 읽으시는 분들은 나쁜 자극을 주는 것은 피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읽으면 됩니다. 그 때문에 읽는 사람을 그르치지 않도록 이야기 첫머리에 모두 그 내용 전체의 줄거리가 짧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p798


  그러니까 보카치오는 100가지 이야기를 다 읽을 필요 없고 골라 읽으라 한다. 그렇다

면? 했지만 이미 나는 착실히 처음부터 읽은지라 골라 읽지 못했다. 그것은 보카치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두에 저렇게 써 놓았다면 맘이 좀 달라져 골라 읽었을까? 아닐 것이다. 보카치오는 글을 다 쓰고 나서 어떤 심경인지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차례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시 책을 들춰서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아주 세세한 제목까지 목차에 달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형태로 차례가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날의 이야기의 ‘주제’를 목차로 내세웠으면 한다. 왜냐고? 저자의 의도대로 “골라 읽기 쉽게”


2. 성별 구분이 안 가는데?


  굳이 성별구분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 형태로 이루어진 소설들을 볼 때 켄터베리 이야기도 그렇고 변신이야기도 그러했지만 이야기하는 화자에 따라 방식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데카메론의 100가지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 각자는 나름 다른 성격들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러한 구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열 명의 화자는 오로지 한 인물로 느껴졌다. 바로 보카치오 자신의 목소리다. 주제에 따른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방식, 문체, 톤 등을 좀 달리했으면 어땠을까.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열 명의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이 과연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순간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가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좀 더 생동감있는 이야기로 만들려면 열 명의 화자들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어떻게 만들어 낼까? 전체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각각의 특징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어쩌면, 이것은 번역의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특히 완역판이라 소개하는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는 “『데카메론』은 분량이 방대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전반적인 시대 상황이나 영향을 준 작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까닭에”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가 알지 못하는 이탈리아어로의 데카메론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보다 조금 더 ‘야한?’ 느낌이었을까. 


3. 페스트는 왜 등장하는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의 영향으로 씌어진 것이라 한다. 당시의 전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이탈리아에서도 절정이었고 그로 인한 참상을 직접 겪은 보카치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데카메론 이야기는 이러한 페스트가 창궐하던 도시, 보다 건강한 삶과 정신을 위하여 교외로 떠난 1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이 페스트를 피해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페스트를 피한 상황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마지막까지도 그래서 페스트는?이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들 열명이 나누게 된 이야기가 모두 페스트 때문이라 말하지만, 나는 좀더 페스트로 인한 참상이나 생각들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는 하나의 도구이긴 했지만, 그 역할이 나는 왜 미미하게 느껴졌을까.


4. 아리송해


  데카메론이 금서인 적도 있다고 하고 오늘날은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라 하기도 한다. 둘 다에 약간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보카치오는 이랬나보다, 저랬다보다 생각하다 보니 자꾸만 아리송해진다. 그는 중세시대의 가치와 신념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과 욕망을 직시하여 데카메론을 서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선적인 종교인의 행태를 묘사하고 특히 여성의 욕망에 관대한 입장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면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했다가 또 다른 이야기를 보다 보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언뜻 드는 생각은, 온전히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받을 비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 어느 정도는 생각하면서 글을 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카이오가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유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듯이 얘기되는 평이 많은데 그에 대해 3초 동안 의문이 들었다. 진짜인가. 사실, 그 시대에 보다 여성이 주도적으로 성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는 없었던 듯하고,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니까 별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어디서 이야기를 모았다고 했으니 이미 그런 이야기들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화자들이 논평하는 이야기 중 다소 여성의 욕구나 욕망, 여성 자체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듯한 발언도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라고 하지만, 사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들도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던 것을,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간 이야기 아닌가 얼핏 생각하기도 했다.

 다시 3초간 지나간 생각, 데카메론에 대해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같은 맥락으로 여성에 대한 비판과 고발로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머리말을 읽어 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가 사랑에 대한 우울증을 위로하고자 썼다고 했다. 그가 사랑이 깨지고 나서 위로 받은 친구들에게 은혜받은 바를 돌려주고자 이 책을 썼다는 글을 보자, 나는 정말로 3초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위로한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괜찮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여성에게 차였지만 이제 여성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으니라며 담담하게 여성을 저렇듯 묘사한 것은 아닐까. 특히나 처음과 마지막 에피소드를 대비하여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원체 데카메론에 대한 다양한 평들이 많으니 그것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며 재밌네, 대단하네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진짜 그런 거야?라며 생각하다 보니 평론가들이 얘기한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되었던 듯도 하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어쨌든 긴 책을 쉽게 읽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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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헤라자드가 이 얘기를 했다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조반니 보카치오, 한형곤 옮김, 동서문화사



  


  단테의 신곡과 견주어 인곡이라 칭할 정도로 데카메론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많은 작가들이 여러 작품에서 데카메론을 모방했고 그 모방작가 중에는 제프리 초서, 셰익스피어도 포함된다고 전한다. 또한 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문으로 된 최고의 문체를 구사한 소설이라 한다.

  데카메론은 Principe Galeotto이란 부제를 달고 있으며 데카메론은 열흘 동안의 이야기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것이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열 명의 사람들이 열흘 동안 나눈 이야기들을 모은 소설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액자형태로 구성된 당시 떠돌던 많은 전설과 설화를 담고 보카치오 자신의 창작도 실려 있는 소설이다.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는 페스트가 성행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보카치오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작품을 창작했다. 페스트를 피해 어느 시골로 피난을 가게 된 7명의 여자와 3명의 남성이 2주 동안 하루에 나눈 열 편의 이야기를가 실려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일인 금요일, 토요일에는 휴식하기로 하고 열흘간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를 마친 밤이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다. 그리하여 총 100편의 이야기인 단편 소설과 10발라드인 10편의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일 밤 나누는 이야기는 개인이 이야기하는 형태로 되어 있기에 이야기가 독립적이지만 실제로 매일 밤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정해져 있기에 하루마다 나열되는 열편씩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담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데카메론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의 이야기라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제가 어떤 상황에서 전략과 술수를 사용하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다른 날들의 이야기에 비해 더욱 재미있게 여겨지지 않은가 싶다.

  내게 있어 기억나는 부분은 책을 덮고 나의 화를 돋우는 이야기들이다. 가장 마지막에 있었기에 책을 덮을 때까지도 남아 있던 이야기는 열흘째 마지막 이야기이다. 자신의 아내의 덕을 시험하고자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다고 하여 이른바 아내를 길들이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이 어이없는 인간 때문에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아주 지리지리하게 긴 내용이었던 학자의 복수이야기도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여덟째날 일곱 번째 이야기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미망인에게 복수하는 학자의 모습이 정말, 학자스럽다는 느낌이 들며 학자가 하는 말은 옳은 면이 있는데도 통쾌하다는 느낌보다 참, 구질하다는 느낌이 오히려 들었다.

 여섯째날 일곱째 이야기는 필리파 부인이 나온다. 나는 이 여자, 말 잘하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라는 추임새가 나왔다.

 둘째 날 일곱 번째 이야기도 화가 나는 이야기다. 공주가 피치 못할 상황에 휘말려 4년 동안 여러 풍파를 거치고 여러 명의 남자들과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보카치오는 이 이야기를 여성이 자신이 가진 재주인 미모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는 피치못할 상황에 빠진 불운한 공주의 처지와 상황에 기가 막힌데 어찌 이것이 공주의 자의로 행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자발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쟁취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 날 첫 번째 이야기도 참 황당하고 우스운 이야기였다. 나는 이 이야기는 어떡하든 그것의 진실과 마음과는 상관없이 표면적인 신앙에 집착하는 모습들과 관련하여 생각되면서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전반적으로 데카메론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수도사나 수녀, 수도하는 이들의 탐욕스러운 행동들 말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만약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가 데카메론 속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주었다면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세헤라자드는 살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확답하진 못하겠다. 천일야화 속 이야기의 부분 부분도 데카메론 속 이야기의 몇몇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으니까. 이 시대엔 정말로 이러한 식의 이야기들에 열광했던 걸까. 그래서 요즘의 시선으로 이 책을 보기에, 이 책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찾지 못해 그 이전의 시선으로 보려 해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데카메론의 매력에 빠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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