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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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다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1.


  『필경사 바틀비』는 내가 가진 전형성을 발견하고 충격받은 책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읽었던 때의 감정이 기억나 여전히 그 상태일까 다시 들쳐보는데 주저하게 된다. 고작 몇 년 사이 특별히 달라질리 없을 것이기에 이 책은 감동적인 책 카테고리가 아니라 미련이 남는 카테고리에 담겨있다. 그때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걸까, 작가의 의도나 평론가의 평과는 다른 내 느낌이 마치 정답을 비껴간 것 같아서일까, 생각하곤 한다.

  최근 문득문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하기 싫어’라는 농담조의 말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로 이 말을 거듭 떠올리는 요즘엔 바틀비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의 나는 화자의 감정에 더 이입했다. 화자인 변호사에 감정이입된 나는 당혹과 화가 온몸을 휘감을 때 알았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관습에 빗겨가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생각했음에도 바틀비가 행하는 저항에 이의와 의문을 가진 그런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다.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성을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책을 읽은 순간의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부분에서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틀비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틀비가 아니니 바틀비를 대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성실함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가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다. 바틀비에 대한, 바틀비가 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 말이다.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이다. 화자인 ‘나’는 “야망없는 변호사 축에 속하며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하며” 신뢰있는 인물의 평을 빌려 자신을 “신중함과 체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바틀비는 어떤 사람인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온통 하얀 건물만이 가득한 월 스트리트 또한 필사하는 바틀비-묵묵하고 창백하고 기계적인-처럼 보인다. 바틀비 역시 동화되어 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틀비는 출근 사흘째에 필경사가 행하는 필사 검증업무를 거부한다. 필경사는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며 서로 검증을 돕기도 하는데 이 업무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나’의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필사 검증을 거부하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요구에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할 뿐이다. 바틀비는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하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무단 점거·기거하며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바틀비에게 ‘나’는 기묘함과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결국은 ‘니’가 자신의 사무실-바틀비가 기거하는, 바틀비는 두고-을 옮겨 이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바틀비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 표현했고 그래서인지 ‘저항’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가 많다. 그러면 바틀비는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그건 ‘저항’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었다. ‘저항’이라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 외침의 그 어정쩡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함. 의지와 의미를 품고서 하는 말인지 모를 태도에 마침내 택한 ‘아무것도’라는 것은 선택인가. 바틀비는 무언가를 선택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고용주의 필사 검증은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이자 “계약”에 의한 요구다. 필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필사 업무 종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나도 마찬가지로- 바틀비에게 왜 그러느냐 묻게 된다. 왜? 그에 대한 답없이 바틀비는 필사만을 할 뿐이면서 기거할 명분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구치소로 연행된다. 구치소에 연행되어 갈 때 바틀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생기도 없고 동요도 없는 그 특유의 태도로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고 한다.

  저항은 전투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의미를 품고서 행하지 않은 것은 저항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전투적으로 나서 주는 사람을 원하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바틀비의 행동이 ‘저항’이려면 바틀비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동료가 벌이는 크고 작은 투쟁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의 일이 나의 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해와 지지가 형성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땅히 원하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 또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바틀비는 저항의 인물이기보다는 패배한 인간으로 보였다. 삭막한 자본주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일만하다 병든 모습, 생각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고 피폐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틀비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역시 1800년대의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월가나 지금이나 사회시스템은 그대로인 채 사람만이 병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겐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그러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멸해가고 싶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틀비의 “선택하지 않음”에 더 집중하며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했건만 바틀비의 경우로 사례가 달라지자 생각했던 것이 흐릿해졌다. “계약”과 “규율”에 따른 행동질서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 속에 그 계약의 성립이 공정했는가를 잊어먹었다. 더 나아가 저항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시하기까지 된다.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바틀비의 외침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이야기했다면 바틀비의 편에서 지지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도 심적으로도 온전한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바틀비를 억압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게 익숙했던 그리고 성취하고팠던 다양한 가치들이 상충한다. 이해의 순간과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떠오른다. 다른 말은 없이 저 말만 남은 바틀비의 외침을 반복되이 떠올리다보니 고용주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함에 좀더 기울어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냥 스러져가는 한 인간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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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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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2019.


  「일의 기쁨과 슬픔」이 신인상 수상작으로 SNS에 오르내릴 때 내가 떠올린 건 알랭 드 보통이었다. 보통 책을 다시 읽어 볼까.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집중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이 이 소설에 대해선 잠깐의 호기심 후 뒤로 물러났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에 기대었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은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소설 하나를 읽게 되었는데 첫 느낌은 ‘이건 SF인가?’였다.

  당황한 건 이 소설에 대한 댓글 반응이었다. 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영역이라지만 지극히 ‘소설’로 본 나에 비해 댓글은 현실적인 공감 반응이 많았다. 웹에서 읽은 터라 댓글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같은 경험을 했다는 글을 보았을 때, 나는 내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이 소설이 웹상에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일 수 있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 테크노벨리 스타트업 회사가 배경이다. 중고 마켓 회사 사원 김안나는 우수 이용객인 아이디 거북이알이 매번 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꺼림칙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거북이알을 만나게 된다. 거북이알은 인근 카드사 회사원으로 회장에게 찍혀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고 있었다. 거북이알의 생존법은 포인트로 물건을 구매해 다시 현금화하는 것이었다. 이게 소설의 줄거리인데 4차 산업혁명의 산업 현장에서 실제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니 이 미치도록 리얼한 소설을 어찌 나는 SF쯤으로 생각하였나 싶다. 나는 이 공간이 낯설었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거북이알이 포인트로 월급을 받고 굴욕감에 밤을 지새운 것처럼 미칠 것 같이 잊고 싶은 현실감, 미세하게 구질구질한 속내들을 이 소설집은 담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외에 8편이 담겨 있는데 하나같이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머릿속으로 드러내며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 같은 것이 펼쳐져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소설같다기보다 일상을 기록한 녹취록 같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나 내면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닌 채 공간에 머물러 있는 어떤 불편한 심기들을 잘 뽑아내었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네 번째 아주머니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저희 집은 설거지 안 하셔도 돼요. 식기세척기가 있어서”라고 하자마다 대뜸 내 팔뚝을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새댁, 설거지는 손으로 뽀드득하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기계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 「도움의 손길」


  4차를 지나 5차, 6차 끝없이 N차의 산업혁명이 이야기되는 시대. 인간의 패턴의 묘하게 다른 지점들. 그럼에도 직장인이라 이름 붙였을 때는 여전히 고수되는 기류. 이 미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현실의 지점들이 잘 녹아 있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 「잘 살겠습니다」


  이제 현재의 삶은 이런 형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묘하게 다른 공간의 질서다. 거시적 세계보다는 미시적 세계의 일들에 대한 포착, 그것을 더욱 중시하는 듯이 아니 그 무엇에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 이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마냥 쭈구려 있지 않고 반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해야 할까. 잘 살기 위한 세상의 이치는 가게 주인의 마음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특 에비동에 맞는 현금을 지급할 때에야 새우 몇 개를 더 먹는 것처럼 그런 사실을 깨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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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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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곧 오월이다. 며칠째 차고 강한 바람이 분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참말로 잔인토록 바람만 분다. 꽃이 핀 것도 진 것도 모르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다. 멈춰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세상도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변해야 하는데 나는 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래로 돌아온’ 것도 아니니, 도대체 이건 뭔가.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디디하면 어느 소설 주인공이 떠오른다. dd하면 45도로 몸을 비튼 채 들어 올려 흔드는 양손 엄지손가락이 떠오른다. 나는 이 간극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데 왜 디디인지 왜 d이고 dd인지, 이런 이름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자꾸 선점해버린 디디가 생각나서, 그와 평행하게 dd에선 엄지 척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버스 밖으로 튕겨 나가버린 dd임에도 엄지 척,이라니. 이건 너무 어이없게 슬프지 않나.

  <디디의 우산>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디디가 있고 분위기가 겹쳐 떠오르고 ‘혁명’도 기여한다. dd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놀라고 재밌어 했다. 그러나 혁명을 행하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혁명을 말하며 행하며 웃지 않는다. 우리가 거쳐 온 세계는 좌절과 환멸 또한 가득 뿌려놓아서 혁명을 말하며 웃음짓기란 쉽지 않다. 혁명을 말할 때 생각할 때 웃음지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dd를 잃어버린 후의 d는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웃지 않는 모든 주인공의 재연 같다. d를 도려내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보내버리면 그 시대와 분위기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러나 d는 <디디의 우산>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dd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 dd를 기억해야 한다. dd는 운동권도 아니고 단지 혁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을 보며 혁명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며 dd를 기억하는 d에겐 모든 혁명의 현장이 dd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기제가 된다. 소설은 절여진 배추처럼 곰삭아 있는 d가 다시 소금기를 털어 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까. 그것은 ‘여소녀’를 통해 제 주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다. 하찮음에 하찮음에.


  d가 이렇게 광장에서 공명한 소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으로 이어져 좀더 구체화된다.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저항하는 것,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는 그나 그녀로 또는 익명으로 d나 dd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형태가 등장한다. 이름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물들로 말이다. 이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에 대해 책과 영화 등을 빌려 생각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그저 관념으로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유가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이들 걸음 방향은 광장으로 향해 있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나…. ‘혁명’속에 갇힌 것, 외면하는 것이 있음을 소설은 또한 보여주고 있다. 올바름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 침묵하거나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혁명’이란 나를 우리를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모든 이야기 끝에 남은 것 역시 이야기.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있다”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산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섭도록 패배한 분위기와 운동권의 교조적인 문체가 후일담 문학이 가지는 특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은 건가, 살아있음이 죄인듯 더 가라앉은 모습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것이더라도 나를 미워하는 것만으로 있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디디의 우산>은 과거에 이어 현재 진행이고 어쩜 황정은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사유하는 방식에서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내리꽂히는 연설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의 갈래 속에서 확실한 나의 신념을 세워가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올바름을 지기기 위해 행했던 ‘혁명’과 그 과정은 ‘혁명’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지우므로 어렵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여러 사건을 통해 혁명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묵자(墨字)의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묵자의 세계관을 지닌 이들에게 세상에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명이 도래했다.” 언제나 말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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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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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숟가락 세상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엘리, 2016.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억에 남는 묘사는 두 곳에 긴 숟가락이 있다는 이야기다. 입에 닿지 않는 숟가락 때문에 굶주리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떠먹여 준 곳은 천국이, 여전히 제 입에만 떠 넣으려고 아우성치는 곳은 지옥이 되었다는. 손가락으로 먹으면 안되나, 생각했지만. 이게 중요점은 아니었을 테니.

  「지옥은 신의 부재」역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이 있다는 것부터 증명해, 라고 하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세트급인 천사, 천국, 지옥 역시 존재한다. 소설에서 지옥은 지상과 큰 차이가 나지 않고 단지 살아 있었을 때 충분히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회오가 큰 벌이 될 뿐인 곳이다. 영원하며 건강한 육체로 회복되기까지 한다. 그러니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닐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아무 상관없으며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닐이 어떻게 신을 믿게 되었는가.

  지상에 천사가 강림할 때면 행운과 악운을 가져다준다, 고 사람들은 믿는다.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누군가에게는 악운이 닥치지만 그에 관한 건 오로지 신의 뜻일 뿐. 닐의 아내,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라는 천사의 강림 시 사망한다. 어릴 적부터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닐은 신의 뜻―보다 구체적으로는 신의 벌―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고 그런 이유로 다른 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 닐을 사랑해주는 아내가 사라진 고통의 닐에게 장모는 사라의 죽음을 신을 믿지 않는 닐의 탓으로 돌린다. 닐은 “납치범이 아내를 돌려준다는 대가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며 분노를 느끼지만 영원히 사라와 함께 하고픈 닐은 사라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을 믿는 것뿐임을 깨닫는다. 사라는 천국에 있으므로. 이제 신을 믿기 위한 닐의 다각도의 노력이 펼쳐진다.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을 사랑할 수는 없고, 단지 신을 신으로서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의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진정한 신앙심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신을 신으로서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여기서 ‘맹목성’이 ‘폭력성‘이 느껴진다면 난 천국에 가긴 글러먹은 걸까. ’신으로서’라는 절대성, 모든 것은 신의 뜻이요 신의 의지라는 말은 신을 믿기 위해 닐이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도 주된 화두다. 어떤 이는 “신은 모든 사람이 같은 종류의 시련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각자가 스스로의 시련을 겪는 것이야말로 신의 의지”라고 얘기한다. 신의 ‘의지’란 도대체 무언가,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무얼 얻고자 함인지 알듯 애매하다. 어떤 시련을 누구에게 줄지 모를 신의 ‘의지’에 휘둘리는 가련한 신의 어린 양들은 신이 준 시련이 벌인지 소명인지 헷갈려한다. 신의 뜻으로부터 메시지를 읽는 사람들의 행태는 각기 다르다.


타락 천사들의 강림은 드물었고 행운도 악운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 불가능한 자신들만의 일을 수행하면서 인간계를 잠깐 지나갈 뿐이었다. 그들이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질문을 하곤 했다. 당신들은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타락 천사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너희의 일은 너희가 결정하라. 그게 바로 우리가 한 일이다. 너희도 우리처럼 하면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명백한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는지 알 수 없이 모든 것은 신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천국이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신의 뜻이니 슬퍼하거나 서러워할 것 없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말이다. 어떡하든 천국으로 가기를 행운을 얻기를 바라며 그들의 ‘신의 뜻’을 내세우며 하는 행동들은 이해하기 버겁다. 들여다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난 역시 전세계적 전염병 확산 상황에서 벌어지는 종교인들의 결정과 그런 결정으로 이끈 ‘신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이해하기 싫은) 사람일테고 신의 뜻에 영원한 의구심을 품을지언정 그 속에서 행복할 수는 없을 테니.


닐은 자신이 지옥으로 보내진 것이 그가 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고차원의 목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신에 대한 닐의 사랑이 줄어드는 일은 없다.


  천사의 강림을 목격한 닐은 차량전복으로 사망한다. 그 순간 천상의 빛을 보며 진정 신을 믿지만……사라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진정 신의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었건만 신은 닐을 지옥으로 보냈으므로. 천사 강림 시 사형집행중이던 연쇄강간살인범은 천국으로 간 것이 목격된다. 피해자들은 격분하지만 성직자들은 피해자들을 위로하며 말한다. 그건 신의 뜻, 그리고 살인범이 제 인생의 몇 배는 속죄를 했을 거라고….

 「지옥은 신의 부재」는 요즘의 시기에 영화 미드 소마와 같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긴 숟가락이 지배하는 천국과 지옥 세상에서 중요한 건 천국과 지옥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지금, 긴 숟가락이 난무한 이러한 상황에서 여긴 지옥일까 천국일까.

  닐의 지옥에서 신은 없겠지만 닐은 신을 계속 사랑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닐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신이 부재하는 곳이 지옥이 아니라 신이 존재하기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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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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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제의 용도를 알고 있다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2019.


  장담컨대, 표백제가 피 냄새를 감춰 준다는 사실은 다들 몰랐을 거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표백제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 크게 이슈가 된 사건의 범인들이 그렇게(그보다 더한 방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혀 놀랍지 않다. 놀라(야 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동생 아율라의 살인했다는 전화(동생이라고?)에 당연한 듯 달려가 범죄현장을 은닉하는 코레드다. 코레드는 꽤 익숙한 듯 문제를 ‘꼼꼼하게’ 처리한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 누군가는 이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정답. 코레드가 한 것처럼 시체를 처리하고 현장을 치운다. 신고는? 시체를 처리했다는 것이 신고하지 않겠다는 의지 아닌가. 동생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코레드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율라의 범행 동기는 무언가. 아율라에게서 살해된 남자들은 모두 애인이다. ‘모두’라는 말에 범행 전력이 단 한번이 아니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코레드가 한 말을 인용하면 되겠다. 셋부터는 연쇄살인범이 되는 거야!

  코레드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짧은 호흡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후다닥 살인을 하고 빠르게 그 시신을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생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흔들리는 지점이 온다. 살인현장을 치우는 코레드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살인을 저지른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지켜왔던 그 마음이.

  아율라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작은 몸집, 긴 속눈썹, 도톰한 입술을 가진 인형”이다. 코레드도 아율라가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동생과는 달리 코레드는 몸이 크고 아름답지 않다. 간호사 코레드가 마음을 준 직장 동료 의사 타데는 다른 이들과 달리 코레드에 친절하고 자상하다. 코레드는 타데에 대한 연모로 가득하지만 타데는 아율라에게 반하고 만다. 코레드는 동생에 대한 질투와 타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아율라는 남자친구, 그녀의 애인이 조금만 성가시게 해도 그렇게 해버리고 마니까. 사람들은 아율라가 착하고 천사같고 여리다고 생각한다. 


“걔가 예뻐서 그래요. 그게 다예요. 남자들은 다른 건 신경도 쓰지 않아요. 그 애한텐 모든 게 무사통과죠. 말이 되냐고요, 내가 동생을 지지하지 않는다니,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니…타데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건 동생이에요. 동생이 그렇게 말했겠죠. 그 모든 일을 함께 겪고도….”


  이제 소설은 아율라의 아름다움과 코레드의 아름답지 않음을 대비하며 둘의 연대가 깨어질 것을 암시한다. 아율라와 코레드는 타데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코레드는 이성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타데가 다른 남자들처럼 아율라의 미모에 무력해지는 것을 보기 힘들다. 살인자인 아율라는 그에 대한 걱정도 고민도 없이 일상을 즐기는데 코레드는 죄책감과 불안에 떨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코레드에겐 버겁고 불편하며 아율라에 대한 반감이 증가한다. 자, 이제 코레드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작가를 천재적 능력이라 칭하며 '현 시점을 대변하는 이상적인 소설'이란 칭송을 받고 있다는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에 대한 찬사가 소설에 대한 매력을 반감시킨다. 매력적인 외모의 싸이코 연쇄살인마에게 그렇게 열광적일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아율라의 살인을 묵인하는 코레드의 행동에 어떤 반전이 있어야 한다. 납득할 만한 서사가.  

  아율라가 너무도 당당해서인지 코레드에게 외치게 된다. 너 왜 그랬니? 이제 그만해. 아율라의 살인을 부추긴 것은 너라고.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신을 처리해 줄 것이 아니라 신고를 했어야 한다고. 늘 문제해결사로 달려가 주니 아율라가 계속 살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이렇게 코레드를 몰아붙이면 이또한 아율라의 외모에 넘어간 반응인 걸까. 하지만 소설이라는 한계로(즉 아율라의 외모를 볼 수 없기에) 눈이 아득해지는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어찌해도 현실이란 생각을 하면 용서가 될 리 없다. 더구나 아율라를 코레드를 고유정으로 대치시키면 이야기가 갖는 느낌은 달라진다. 고유정은 살인의 이유를 성폭력이라 주장했다. 다만 고유정은 살인도 범죄현장 처리도 완벽히 홀로 처리했다. 전화를 해서 현장을 치워줄 코레드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외모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코레드의 분노가 아율라에게로 향하면 소설은 강력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여성의 질투를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유정이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살인의 이유와 같이 두 자매가 연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함께 겪은 폭력의 경험이라면 자매의 연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지켜온 두 자매의 연대는 타데로 인해 흔들리는 시점, 코레드의 연대는 지켜질까, 아닐까. 두 자매의 비밀을 아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코레드는 이제 아율라의 살인현장을 처리하는 것에서 직접 살인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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