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 동안 간직한 내 재능은 뭘까


 열정과 기질 

지성인들의 삶에서 밝혀낸 창조성의 조건 Creating Minds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감역, 임재서 옮김, 북스넛, 2004.


  열정과 기질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조성’에 관한 이야기를 7명의 인물을 다루며 풀어 가고 있다. 저자는 일단 우리시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인물 7명을 찾아낸다. 저자는 이들 7명에게서 창조 행위에 담긴 여러 특성을 이해하며 그들의 창조적 업적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이해함으로써 창조성의 유형을 찾는 형식으로 글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 7명이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지적능력과 성품과 더불어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에서의 그들이 성취한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둘째, 창조적 행위의 본질에 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정한 성품과 조건이 20세기 창조적 인물들의 일반적 특징이며 어느 정도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셋째, 현대 시대에 대한 저자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아래 저자는 제1부에서 창조성이 어떻게 길러지는가라는 제목 하에 책의 목표와 구성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요 내용이 되는 제2부에서는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그레이엄, 간디 7명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의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이루어낸 작업을 살펴본다. 특히 프로이트에서는 그가 고독한 탐구자로 출발하여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아가 새로 탄생한 분야에 소속된 구성원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 변화의 궤적을 풀어내는 것이 중점이다. 아인슈타인에 관해서는 그가 유년기의 개념 세계로의 회귀에서 그의 이론을 도출하였다는 관점을 견지하며 그에 관해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피카소에 대해선 유년기의 비상한 재능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에 관해서는 그의 음악적인 창조활동과 관련하여 그가 예술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고 그 성과를 비평가들이 검토하는 과정에 스며 있는 정치적 요소를 중점을 두고 살펴보고 있다. 엘리엇은 현대의 창조적 인물이 지니는 경계성을 고려하며 살펴보고 있다. 그레이엄은 남성 위주의 창조 세계에서 활약한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 자신이 철저히 미국인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점을 중점으로 살펴보고 있다. 간디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인간관계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제3부는 창저성의 조건으로 연구자들의 사례를 통해 도출한 창조적 도약의 특징을 설명하고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뛰어넘어 한 시대에도 유용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쟁점에 관해 다루고 있다.


 에드가 바레즈가 했다는 말.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 나지만, 대부분은 겨우 몇 분 동안만 그 재능을 간직한다.”

 마사 그레이엄의 이야기 중에 나오는 부분이다. 깊이 와 꽂히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인물평이나 인물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리를 하고 있어 감동적이었다는 느낌보다는 이 사람이 이랬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일도 있었군 하면서 각 인물들의 생애를 곱씹는 맛이 좋았다. 내용의 전개가 전반적으로 비슷했기에 어떤 특정한 부분을 고른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특정 인물의 생애에 대한 연민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할 뿐이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이들 창조적인 인물들의 파우스트적 거래 이야기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저자가 결론내리는 창조성의 조건들은 재미있는 견해라고 생각들었다. 물론 공감되는 부분도 적잖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통상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다른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냈다는 것이 아마도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긴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왜 열정과 기질일까. 창조성은 열정과 기질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처음 시작할 때 무심히 넘어갔던 제목을 다시 되짚어 보면서 제목이 본문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열정과 기질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굳이 끌어다 붙이면 되겠다 싶었지만 원저가 CREATIVE MIND (창조적 마인드)임을 확인하고 나의 공허한 노력에 헛웃음이 났다.

  열정과 기질이 번역과정에서 출판사의 입장에서 바뀐 제목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정과 기질이란 제목이 더욱 책이 판매에는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저자가 원래 지은 제목과의 매치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의 생각은 그렇다. 아예 처음부터 Creative Mind(알았어야 했다. 이것을 놓친 것은 나의 책임이다. 사실 읽으면서 무심히 넘겼다는 것이 맞다.)라는 제목이었다면 나의 생각은 보다 그에 맞는 입장으로 책을 읽어나갔을 것으로 본다. 각 인물들의 창조성의 조건과 특질들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이 바로 각 인물들의 열정과 기질에서 기인한다라고 말한다면~할말은 없다. 그러나 열정과 기질이란 좀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기질이 무엇인가라는 개념정의부터 말이다. 기질의 종류는 무엇이며 기질이란 것이 인간에게 함의하는 것은 무언가라든가.

  어쩌면 이러한 제목에 대한 트집은 글에 대한 보완점을 찾을 길 없는 나의 하릴없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창조성에 대하여 글을 쓰겠다 하고 7명을 통해 그것을 추론해 내는 저자의 논리나 전반적인 부분에 딱히 반박할 수 없다. 인물들에 대해 내가 정통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 대핸 피상적 이해로 인해 저자가 주장하는 사례를 통해 아, 그런가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인물이 왜 이들 7명을 다루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려고 해도 서문에서 저자는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놓음으로써 나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창조적 마인드를 쓰기 위해 기본적 개념을 생각하고 이 7명을 선택한 것인지, 정말로 7명을 선택하고 난 이후에야 창조적인 특질들을 찾아낸 것인지가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다른 인물들을 찾아내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간다면 창조성의 특질은 달라질 것인가? 나는 그 의문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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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혐오가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었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임옥희·희진·시우·루인·나라, 현실문화, 2015.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이 여성혐오다. 그럴 만하기 때문에 여성을 혐오한다는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만하다는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의 여성들-혐오 언어의 대표적인 김치녀-이 이기적이고 남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보라는 그것은 비난과 혐오의 이유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여성의 유형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남성도 이기적이고 여성을 이용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성별 구분없이 비난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는 유형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특정한 유형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의 언어를 자랑스러이 떠벌이는 것일까?


1960~1970년대 유명 잡지들은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두고 ’결혼 전 즐겁게 놀기 위한 자금과 친구를 얻기 위한 것‘, ’사치와 낭비, 퇴폐로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비난했다. 언뜻 보기에 사치와 낭비는 미혼 여성의 직장 생활을 비난하는 이유로 비춰지지만, 진짜 이유는 “사회가 여성들의 경제사회적 활동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사치하고 낭비하기 위해 일터에 놀러 나온 미혼 직장 여성‘이라는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예를 보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남성의 군가산점제도 폐지 이후로 여성의 혐오가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역시도 경쟁사회에서 기득권처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의 두려움의 표현인 걸까. 이에 대해 윤보라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높은 청년 실업률이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의한 남성의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은 섣부른 단정이다.라고 함으로써 최근의 여성혐오에 또다른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혐오를 만들어내는가?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판본을 만들어내고 각 사회 주체들을 배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첨예한 젠더 정치가 된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나쁜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p16


 일단, 여성혐오는 이처럼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금, 도대체 어떤 필요가 그들로 하여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는가. 안타깝게도 여성혐오는 유머와 드립으로 그것을 포장하며 방패막이로 삼고 있기에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미러링’이라는 형태의 여성혐오에 대한 반대 담론의 장으로서의 남성 혐오가 등장했을 것이다. 미러링은 새로운 담론이라 하겠지만 도저히 답이 없는 것에 대한 지침의 한 형태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 이상 그 어떤 도덕과 올바른 개념으로서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벽에 대한 답답함. 그래서 결과적으로 계속 혐오의 언어만을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윤보라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고 했다. 왜 웃음으로 포장한 채로 혐오할 여성을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하려는지. 그래서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혐오의 언어를 계속하고자 하는 것은 임옥희의 말처럼 그들이 연대가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마사 너스바움의 표현처럼 그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미담에도 설득되지만, ’그 인간 왜 그래‘로 시작하는 험담과 뒷담화로 연대한다. p54


혐오 발언 안에는 주목을 통해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정받으려는 '주체화의 열정'이 들어 있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혐오는 격렬한 열정 중 하나다. p56


  임옥희는 이러한 혐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결국은 사회적 ‘평등’과 분배적 ‘정의’라고 주장하며 폭력과 혐오를 줄여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성은 육체로, 남성은 정신으로 구별 짓고 자기 안의 타자를 억압한 흔적을 젠더 무의식이라고 하는데 젠더 무의식을 활용하는 가부장적 정치체를 함께 변혁시키지 않는 한 혐오 주체들은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성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도 수시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그렇다고 여성 혐오에 기죽지 말자고 말한다. 왜냐, 혐오는 깊은 공포와 매혹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으니까.

  정희진은 한국사회는 여성 혐오, 약자 혐오, 피해자 혐오에 대해 유독 관대하다고 말한다.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며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무지’가 문제다. 인식의 변화는 설득과 대화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권력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들이 알아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거나 혐오 발화를 중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우는 남성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을 분석하며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동성애 혐오와 여성혐오가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루인은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시스플레인의 문제점을 말한다. 맨스플레인이 상대방을 여성으로 만드는 행위며 성역할의 반복이자 재확인이라면 시스플레인은 젠더 규범을 강화하고 단속하고 자연화할 뿐 아니라 성역할 반복을 요구하고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들로 인해 트랜스젠더퀴어는 끊임없는 자기혐오 속에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훈계할 수 있다는 권력감, 그리고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의 진위를 가릴 수 있고 진위를 가려줘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다는 권력 행위가 문제의 핵심이다. 계속해서 타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확인하는 태도, 그리고 이 태도로 구축되고 이 태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논의의 핵심이다. p214


나라는 혐오가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혐오가 이에 해당한다. 성소수자 혐오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사회적 약자 일반을 향한 혐오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성소수자 반대 운동도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복지와 노동조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오늘날 성소수자 혐오는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면서 각개 생존의 미로에 갇히길 바라는 자들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성소수자 운동과 시민사회, 진보 진영은 성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구실과 효과를 이해하고 사회 변화의 전망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 혐오라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단지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또 다른 소수 집단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길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혐오가 파괴하는 누군가의 존엄은 나의 존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질문에 함께 답해야 할 때다. p255


  이 책은 여섯 명의 저자가 여성혐오에 대한 각자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논의의 내용은 다양한 형태이더라도 결국 집중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것이다. 혐오가 어떤 이유로 형태로 야기되었든 그것이 이용되고 있는 방식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권력구조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이 혐오의 언어를, 정말로 혐오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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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다처제,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

소모되는 남자 -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I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서은국.신지은.이화령 옮김, 시그마북스, 2015


  젠더에 관한 논쟁은 항상 성불평등의 해소, 양성평등을 목표로 한다. 그 세부적인 주장의 차이 그 해결방안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성별을 이유로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다. 하지만 성별 논쟁에 관해 승자라 인식되는 남성의 기록은 딱히 없다. 어쩌면 그럴 것이 모든 역사의 기록은 남성의 기록,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탄압과 억압의 역사를 따로 기술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슬프게도 ‘페미니즘’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게다.  슬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슬프기 때문이고, 이 사상에 대한 이름붙임이 성차별이라는 정희진의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라 말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은 마르크, 프로이트, 루소, 푸코 등의 ‘개인’으로 호명하면서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성차별적 발상에 분노한다고.

  나는 페미니스트다.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어랏, 페미니스트시군”이 되어 버린다. 여성이기에 자동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나에겐 ‘사상’ ‘이론’이 아니라 생존과 일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게 만든다. 왜? 타인의 호칭과 명명에 의해서.

  아무튼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오래 기록되고 전수된 페미니즘이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  갈등관계를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차별해소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되고 있다.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것이고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전에 비해 좀 더 ‘나은’ 상황이라며 그만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 그만할 일인가. 차별을 그만한다면 모를까. 물론 최근의 젠더 논쟁은 차이는 인정하며 그 차이를 차별하지 말자라는 주장이 보다 확산되고 있다. 어쨌든 젠더 논의는 이렇듯 보다 억울한 입장의 목소리가 더 많이 있는 까닭에 ‘남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남성의 목소리, 이야기도 필요하나 대다수 젠더 논의에서 비중이 작은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는 살만하다는 반증인 것인지.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얏호!하며 기꺼운 마음이었다. 사실은 그럴 수 없을 지라도 공평각으로서 젠더 문제를 바라보리라 생각하며 책을 읽는데.....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스럽다라고 해야 하나, 논의에 대해 설득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해야 하나. 저자가 주장하는 큰 틀의 이론은 수긍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가 논리적으로도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계속 의문을 갖게 한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이다


  일단 저자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은 남녀는 차이는 있으나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문화가 ‘남성을 소모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누가 더 우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우월한 영역이 있으며 문화가 선택한 것이 남성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른 경쟁문화를 능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 시스템의 관점에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소모적 존재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문화가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이용하는 방법들을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남성이 소모적 존재라는 것은 몇 가지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음 세대의 구성원이 될 아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의 남녀 간 차이, 그리고 경쟁 대상인 타 문화를 단순한 수적 우세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관련 있다. 어쨌든 문화의 입장에서는 소수의 남성과 가능한 한 많은 여성이 필요하다.


우리를 인간이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진화하고 적응하고 적응하며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지속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시스템들을 ‘문화’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가 어떤 일들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고, 이런 업무들에 있어서는 통상적으로 남성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보다 의문이 든다. 문화가 쓸모를 이유로 남성을 소모시켜 왔다면 문화는 여성의 쓸모없음을 이유로 여성을 제거시켜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각자의 쓸모를 ‘추출’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를 소모시켜왔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성의 쓸모를 더 확장시키기 위해 여성은 쓸모없음을 강요받아 왔고, 남성의 쓸모를 더욱 소모할 수 있는 여성적 쓸모만으로 남성의 쓸모를 보조하는 역할로 이 세상에 소모되어 왔다. 그것도 저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소수의 남성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이 모든 것을 운영하는데 어떻게 남성이 착취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발생하는 실수는 사회의 꼭대기, 즉 최상위층만 보고 사회 전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상위층의 대부분은 남성들이다. 그런데 만약 사회의 밑바닥, 즉 최하위층을 보면 그곳에서도 여성보다 많은 수의 남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좋지 못한 결과들이라 볼 수 있다.


 비로소 사회가 남성을 선호한다는 착각이 왜 발생하는지 이해된다. 여성이 자신들은 권력구조의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은 남성이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 시스템 전체가 남성에게 혜택을 주고, 남성들을 우월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누군가 남성으로서의 삶이 힘들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남성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불평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성역할을 성취하고 생산하고 다른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하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며 남성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남성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화로부터 이점을 얻으며 남성들은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해석은 주장의 근거가 타당해야 수긍을 하게 될 터인데 저자의 근거들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제법 된다. 적어도 페미니즘의 주장은 전체의 여성의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논의된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 저자의 주장에서 ‘소모되는 남자’란 전체가 아니라 ‘일부’의 남자들이다. 자신도 그렇게 이야기하긴 한다. 일부의, 소수의 남자들이 다 성취하고 있다고. 위의 예를 들며 바닥에 있는 남성도 수두룩하다고 말하는데, 공감이 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노인층에 대한 탄탄한 연금 시스템이나 사회보장제도 혹은 여타 다른 지원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런 책임 명시가 극단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경우 아들을 가지려는 욕구가 반드시 어떤 비합리적이고 편협한 여성 혐오의 흔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나이가 많아 일하기 어려울 때 당신을 부양할 사람이 누가 될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노년기 부양을 회사나 국가 정부에게 기대할 수 없고, 딸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들에게는 강요할 수 있다. 남성은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지는 반면 여성에게는 이런 의무가 면제된다.


 부양의 의무를 경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돈이 일차적인 부양의 핵심사항이라고 여기는 것. 그래서 남자들은 여성을 고용하여 부모를 부양하게 한다. 어떻게 몸을 사용하여. 실질적인 행동으로 수발드는 것은 여성이다. 문화는 여성을 이렇게 이용한다. 문화에 소모되는 남성은 여성을 이렇게 소모한다.


일부다처제는 남성들에게 불리한 제도다


남성이 우월한가. 한번 확인해 보시라. 남녀를 겨루게 하는 TV광고에서는 늘 여성이 이긴다.


 광고에서 여성이 늘 이기는가?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광고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는가. 실제 사례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가가 근거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나? 저자는 이러한 이유가 단지 오랫동안 남성이 우월하다는 시각이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크 트웨인의 이런 말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망할 놈의 거짓말, 그리고 통계치.” 모든 통계치가 여성이 불리하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착각과 현실에 대한 분리가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남성이 문화적으로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주장을 완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도 착취당하고 희생당해 왔다는 것이며 그 사례들이 무수히 많으며 ‘남성’에 의해서 당한 착취와 희생이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남성에게는 ‘문화’가 문제였다면 여성에겐 ‘남성’이 그 자체로 문화였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주장이나 근거가 너무나 지엽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은 소수의 남성들에 희생된 다수의 남성에 대한 부제가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여성들은 위대함을 추구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가졌다. 위대함을 추구하지 않았던 여성들도 추구했던 여성들만큼의 아이들을 가졌다.


  이 얘기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은 무언가. 자신의 유전자를 다른 이에게 남기지 못했기에 남성들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특정 소수의 남성들의 자손만이 후세에 전했다며 꼭대기에 있는 남성들만을 보고 발생한 오류이며 일부다처제의 실제 피해자는 다수의 남성들이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일부다처제가 남성의 소모성을 기반으로 한 제도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대부분의 성공한 남성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문화는 남성들이 가정을 얻고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이용해 그들이 서로 경쟁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몰아붙인다. 하지만 일부다처제는 많은 남성들이 전혀 아내를 맞이할 수 없게 한다. 이 남성들은 단지 시스템의 패배자일 뿐이다. 참 안됐지만 그들은 소모적 존재다.


  책을 읽으며 공감의 요소보다 반감의 요소가 많았다. 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드는 예들이 이토록 와닿지 않을까. 문화적인 차이일까. 이런 혼란과 반감을 아는 것인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에게는 익숙했던 소모적 존재로서의 대우가 여성에게는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문화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편향된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형성되게끔 모의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적인 이유는 여성은 남성과 달리 문화나 큰 기관들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뒤늦게 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문화가 여성들을 충분히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창조한 남성들 전체에 죄를 씌우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여성들은 스스로 문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남성들이 일군 문화를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남성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편도 들고 있지 않는가?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중에서 수긍이 가지 않는 표현은 이거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다.” 적어도 나는 저자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착취당하고 희생양이 되었다. 불운했던 여성들의 삶이 사회로 인해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남성 또한 착취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가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보는 것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점 때문에 여성의 반대편인 남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착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맞다. 그렇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결국 ‘권력’ ‘제도’에 의해 희생되고 착취당해 왔다. 물론, 누가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더 쥐고 있느냐는 예외로 쳐야 되겠지만. 저자의 이 주장을 동의하기 위해선 근거들이 좀더 흥미있고 예리하고 보편적이었으면 한다. 어쩌면 젠더 논쟁은 언제나 소모적인 논쟁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론은 없는 평행성. 늘, 협력을 말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목표로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이 책은 착취당하는 남성들의 얘기를 보여준다는 것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어쩌면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건 아닐까. 오히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소수의 남성과 다수의 남성의 비교가 알맞은 것 같다. 문화가 남성들만의 경쟁을 부추겨 그들을 이용하여 왔기에 소수의 남성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남성들이 얼마나 착취당해 왔는가를 알아달라고 한다면... 저자의 남성들이 소모적으로 이용당해왔다라는 느낌의 이 책도 하나의 사례로 잘 생각하며 더 큰 논의를 확장시키도록 하는 게 논쟁을 위한 논쟁을 중지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긴 할 것이다. 공감하지 못함은 나의 문제이겠지만 두 번은 못 읽겠어서 한번으로 끝낸 이 책의 주장에 좀더 설득력있는 이야기들로 남성들의 착취와 억압을 보여주는 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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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미 2017-09-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다음 페미
니들 꼴페미 도서들도 보통사람이 읽으면 당신이랑 똑같은 감정 느껴.
심지어 과학적 방법론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왜 페미니스트라고 묶이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매번 그렇게 묶이는거야 ㅋㅋㅋㅋ

천칭자리 2021-06-26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댓글 중에 가장 세련된 해석입니다. 찜찜한 점을 정확히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정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13.


  저자, 강준만은 감정독재를 이야기한다.

  원래 인간이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인터넷 등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견고한 감정독재에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장과 함께 감정 독재에 해당되는 50개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며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이에 관한 이론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이론을 연결하여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길을 찾아 진화해왔으며,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 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감정 노동’과 ‘감정 자본주의’가 주요 이슈로 등장한 것도 바로 그런 변화와 무관치 않다. 감정 독재가 심화되면서 자본이 감정을 활용해야 할 ‘감정 식민지화’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감정 독재’와 ‘싸우는 법’은 사실상 ‘타협하는 법’이다. 정면 승부를 해선 결코 이길 수 없으며, 감정과 이성의 와전 분리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정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정열은 감정의 몫이 아닌가. 누구 말마따나 “이성의 적이 아니라 동료로서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타협이 가능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살려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싸우다 불리해지면 “너 몇 살이야?”하는 것은 어떤 것? 이것은 주의전환의 오류.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가 승리하는 것은 만족지연이론. 큰 부탁보다 작은 부탁을 먼저 하는 것이 더 유리한 이유는 문전 걸치기 전략의 유효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감정의 화두를 잘 분석하고 있다. 이론의 틀로 잘 설명하고 있는데 가끔 생각한다. 이론 때문에 행동이 따라가는 건 아닐까. 많은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만들어 그의 심리를 알아보고자 한다지만, 가끔 이론이란 이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분석하여 이론을 만들어낸 것인지 선후가 어느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미 딱지가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러니까 결국엔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하나 분석이 되는 것이라면 참 설명하기 쉬운 인간의 행동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을 텐데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어떤 행동들이 하나의 이론의 틀 안에 갇혀 버리게 되면 그 행동이 강화된다는 점에 있다. 설명이 되고 납득이 되기에 행동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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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감정

 

- 우리는 왜 슬프고 기쁘고 사랑하고 분노하는가

최현석 저, 서해문집, 2011.


  최현석을 인터넷에 검색하니 최근 핫한 사람의 이름이 먼저 올라와 있다. 셰프. 요즘은 먹는 것, 요리하는 프로가 대세다. 인간의 삶에서 먹는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 이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리프로마다 먹는 음식의 맛을 표현하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 역시도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에 대한 책을 이는 요리사가 아닌 의사 최현석이다. 최현석 의사는 내과 전공이며 자신의 직업의 전문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한 분야의 책을 많이 발간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인간 개념어 사전'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 시리즈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총망라한 과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한다. 총망라한 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 분노, 슬픔, 기쁨, 좋음, 싫음, 공감이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과학적인 방법에 입각해 서술하고 있다. 저자가 의사라는 점이 이를 설명하는데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지식의 전달로 그치지 않는다. 감정에 관한 뇌 과학적 연구와 감정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모두 담겨 있다. 인간의 '기본 감정'과 '보편 감정'의 개념, 각 개별 감정들의 원인과 기능, 신경계 메커니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병증 등, 우리의 일상생활 속의 감정들의 모든 모습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감정이란 개개인의 개별적인 경험이지만, 옆 사람들에게 퍼지는 전염성이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웃으면 웃을 만한 이유가 없어도 웃게 되고, 상대방이 화내면 자기도 화가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에서 누군가가 웃거나 즐거운 상황이 아니라 화를 내는, 분노의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영향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분노’가 사회계층의 불평등으로 느껴질 경우에는 집단의 힘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경우엔 이것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혹독한 체험을 통해서 나는 분노를 모아 두는 한 가지 숭고한 교훈을 터득했다. 마치 보존된 열이 에너지를 내놓듯이 우리의 분노도 다스려지기만 한다면 세계를 움직일 힘을 쏟아 낼 수 있다는 교훈이다.”

  감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곁든 책인데 어렵지 않게 서술된다. 서술톤이 조용하고 부드럽다. 다만, 극적인 힘은 약하다. 설명적 서술과 곁들여 감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겪게 되는 감정에 대해 아, 그때 그것이 그런 형태였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이 책이 개념어 사전인 결과이긴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좀더 깊은, 격정적인 감정에 대한 서술의 갈구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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