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참 무심히도 가고 있다. 정말 무심히도. 올해는 더더욱 무심하게 가는 것 같다. 어쩜 이리 무심할 수가. 무심해서 환장하겠군. 나는 유심한데 세상은 유독 무심해 보인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안좋은 일이 많았다. 요즘 그나마 황우석 교수님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 정황이야 어찌 되었든 그 동안 일궈온 게 있는데 얼마나 면 팔리고 속상하고 답답할까.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구나. 그 분에겐 참 안됐고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잠깐이나마 그 고통을 빌려 썼다. 쏘리.

2005년 9월 이후로는 온통 아팠던 기억 뿐이다. 분명히 여름방학 때 까지는 나름 운전면허도 따고 해서 발랄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계절이 초가을로 진입할 무렵, 말하기도 남부끄러운 불의의 안전사고로(출장 다녀오는 길에 버스에서 졸다가 내리면서 떼구르르 길바닥으로 추락) 목발 신세로 전락했다. 약 석달 간 깁스를 하고 목발을 낀 채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양 쪽으로 갈라서는 모세의 기적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 몸뚱이로 연구학교 발표 때 공개수업을 했으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푸욱 쉬어주었어야 하는건데 뭔가 알았을 땐 늦어버린 다음이었다. 매일 밤마다 쑤신 발목을 쳐다보며 스스로 내 자신을 바부팅이라고 구박했다. 주변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도움을 못 준다는 표정으로 나를 외면했고 나는 나의 불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간혹 내 앞에서 더욱 바쁜 척을 할 때는 나도 아파 뒈지겠는데 할 수 없이 앉아서라도 일을 하고 있다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어줬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배려했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과 집단의 체면을 위한답시고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대개 멋 모르고 지내며 웃고 까불던 나는 그 이후 사회의 속성을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한다.   

다리가 채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또 급성장염에 걸려 주는 센스!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던 저녁, 학교 체육샘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근처 호프집에 원어민 샘과 같이 있으니 얼렁 나오라는 것. 술기운이 헬렐레 돌기 직전인 샘은 교직원 배구대회에서의 승전보를 전하며 우승을 하기까지 크나큰 역할을 해 준 꺽다리 원어민 샘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나보고 중간에서 통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호프집 이름을 들어보니 중앙 통로 이층에 자리한 무지개라는 곳이었다. 헉... 무지개... 이층. 일층이어도 힘든 판국에. 이러저러하여 곤란하겠다고 둘러댔으나 술이 돌기 시작한 샘은 나를 업고 가네 매고 가네 하시다가는 내가 보다 완강하게 거부하자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전화를 할테니 전화로 통역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그러세요, 그럼~ 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불판에서 삼겹살이 익는 둥 마는 둥 하는 찰나 전화가 오고 저 편에서는 체육샘과 원어민 샘이 수화기를 바꿔가며 자신들의 의견을 과다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아, 네네 서로 사랑하신다구요? Oh, he told you 어쩌구 저쩌구. 나는 삼겹살을 씹다가 물을 마시다가 꺼억꺼억 영어로, 우리말로 정신 없는 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렇듯 지옥같은 저녁이 지나고 고통은 밤부터 시작되었으니 사포로 뱃속을 사악사악 문지르는 듯한 통증이 장장 새벽까지 꼬박 진행되면서 급기야 실신, 응급실에 누워 수액을 맞으며 아침을 맞게 된다. 아,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픈 것인지. 미련한 것. 다리 때문에 독한 정형외과 약을 지어먹고 있는데다 기름기 많은 삼겹살을 먹었으니 탈이 날만도 했다. 거기다 보태어, 울리는 전화벨에 긴장한 채 혀꼬부라진 말로 무지개와 불판을 왔다갔다 했으니 뱃속에서 얼씨구나 화를 낼만도 했다. 아무튼 이후 물과 죽으로 간신히 연명해 가며 난생 처음으로 체중이 줄어 지방흡입술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된 사이 나와 남자친구는 서로 간에 딴딴한 벽을 쌓고 있었다. 나는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에 부쳤고 남자친구는 나름대로 장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가 겉으로는 인상을 쓰고 심술을 부리고 있을지언정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를 꼭 붙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에 쥐면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나와 멀어져갔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우리는 그렇게 먼 거리를 둔 채 홀로 지쳐가고 있었고 서로에게 웃음을 주고 위안을 주는 시간보다 다투고 침묵하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그가 더욱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주길 바랬으나 그는 나를 아픈 말등에 호되게 채찍만 가하는 가혹한 마부처럼 여겼던 것 같다. 이렇듯 우리의 언어는 점점 더 어긋나기 시작했고 항상 먼저 웃음을 건네고 말을 건네던 나는 기어이 그에게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다.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그가 다가와서 말을 걸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민감했던 그는 길어진 나의 침묵을 이별의 의미로 받아들인듯 했고 어느 날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글을 남긴 채 멀어져갔다. 헤어짐을 생각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식의 헤어짐은 상상하지 못했고 너를 위해 떠나주는 게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배려라는 듯한 그의 글이 당혹스럽고도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은 끝이 났고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동안 복잡한 감정 때문에 힘에 부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마웠던 그에게 여러가지 심한 말들로 상처를 줬다. 그것은 내가 몸이 아팠다고 해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겨울로 접어들면서 오른쪽 어금니 뒷편에 사랑니가 얼씨구나 드러눕기 시작했고 나의 고통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학 병원에 수술 예약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요즘 음력으로 날짜를 헤아려봤다. 구래구래, 구정이 지나야 진짜 2006년인 거니까 올해의 액운은 요 사랑니로 마감일꺼샤. 나름의 위안을 해 본다. 두 번째 어금니처럼 튼튼하게 생겨주신 의사샘께서 나의 사랑니를 아작 내고 들어냄과 동시에 모든 아픔의 찌꺼기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음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쉬우면 어디 인생 한 번 살아볼만 하겠다마는. 하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이제는 나도 다시 행복해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다시 건강해졌고 더욱 성숙된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있다. 지난날의 고통은 아마 앞으로 다가올 행복을 더욱 달고 맛있게 느끼게 해 줄 당의정이 될 것이다. 아듀- 2005. 그만하면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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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0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엔 좋은 일이 가득하길 빕니다...

깐따삐야 2006-01-0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아프락사스님도 Happy New Year~ ^^
 

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신 엄마가 빈둥대며 이것저것 투덜대는 내게 말씀하셨다.

"아무개 씨가 너 중신 해준다 어쩐다 하더라."

"옹? 그래서 뭐랬어?"

"됐다고 했지."

"왜?"

"만나봐서 서로 좋으면 상관 없는데 괜히 한 쪽에서 마음에 안 들거나 그래봐. 이 좁아터진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소문이 빤하게 퍼지겠냐. 괜히 흠만 잡히지. 이 동네는 한 집 건너 한 집이면 죄다 육촌에 팔촌에 그렇더만."

"글킨 그러타... 근데 어떤 사람인데?"

"공무원이라더만. 허이구, 그래도 시집은 간다고 하는 거 보면 내 웃겨서."

"왜에~~~? 쳇, 내가 어때서."

"몰라서 묻냐. 내 딸이지만 참... 너같은 철딱서니를 누구한테 맡길 지 한 걱정이다. 내가."

"나보다 어린 쌤들도 여기저기 막 소개팅하고 선보고 그러더라 뭐."

"그 사람들이 뭐 다 시집 가려고 그러는 줄 아냐. 사람들 만나면서 다 자기 값이 얼마나 나가나 매겨보고 연애하다 잘 맞는다 싶으면 결혼도 하는거고 그럴려고 하는거지."

"참 할 일도 음따. 귀찮게스리... 그러고 다니면 귀찮지 않나. 연애가 얼마나 힘든 건데."

"네년이 힘든 연애만 골라서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하여간 다 너보다는 똑똑해. 알았냐?"

"몰라. 쳇!"

 

아빠라는 남자를 처음 만나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이따금씩 마치 연애와 결혼의 달인처럼 내게 면박을 주곤 한다. 일평생 한 남자랑만 연애하고(들은 야그라서 확신할 수 엄씀) 한 남자랑만 살아봤으면서도(이건 확신할 수 있씀) 내 앞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감 넘치고 파워 넘치는 자태로 연애와 결혼에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시곤 한다. 이러한 엄마 앞에서 나는 대체로 깨갱~ 하고 나가 떨어지기 일쑤인데,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엄마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각에도 참 바보 찌질이같은 연애만 했고 옷 보는 안목부터 시작해서 남자 보는 안목도 더럽게 없다. 엄마의 평가에 따르자면 남자를 보는 나의 안목은 단순의 극치를 넘어서 흡사 백치에 가깝다. 착한 남자가 좋더라 하면 정말 말 없고 순한 거 하나만 보고, 똑똑한 남자가 좋더라 하면 정말 박학다식한 거 하나만 보고, 그래도 나이 많은 남자가 이해심도 넓고 좋더라 하면 정말 나이 많은 거 하나만 본다. 착하긴 한데 무능하고, 똑똑하긴 한데 성격 지랄갖고, 나이는 많은데 느끼한 다중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시야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처음에 이런 나를 발견하고 누가 말려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누가 미처 발견 못한 사이 일단 한 번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람을 반쪽만 알고 사귀었다는 것도 모른 채 고단한 연애에 올인한다. 이럴 때는 누가 와서 말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의 측근들은 알고 있다. 이런 나를 말리면 말릴수록 귀를 닫아버리고 더욱 더 연애에 투신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것마저 알고 있다. 결국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내비두며 간간히 삐져 나오는 푸념들을 받아주다보면 연애에 지친 내가 가족들을 비롯한 측근들의 품으로 컴백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럴 수 있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도리질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면 나의 측근들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올 것이 온 것 뿐이라고 얘기한다. 에라이, 똘추야. 그걸 이제 알았냐? 근데 그 사람도 너와 잘 안 되길 잘했어. 너도 쉬운 애는 아니걸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지금 나는 또 다시 그 쥑일놈의 사랑에 빠져보길 기대하는 것이다. 중매 시장에 뛰어들어 차는 있으세요? 연봉은 얼마나? 혹시 장남이신가요? 주말마다 그런 지루한 질문들을 던져가며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것이다. 손바닥만한 지역사회 내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오로지 십대와 육십대의 남자 밖에는 보이질 않지만, 혹시 아는 얼라의 외삼촌이나 사촌 형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하고 소개팅 한 번 못하고 있지만, 만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언제 어디서고 뿅~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뽀샵 처리된 슬로우 모션으로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운명같은 게 어딨어, 말하고 다니지만 내심 정말 운명의 상대가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어울리는 100%의 남자가 어딘가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 어쩌나, 이런 택도 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망상으로 그치고 말든 정말 현실화 되든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남들 말맞다나 똘추인 나는 아마 앞으로 누구를 또 만나더라도 너는 내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두려움 없이 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100%의 남자를 만났다고 하하호호 좋아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래서 엄마가 내가 연애 어쩌네 하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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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05-12-2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ㅡㅡ;
 

오랜만에 학교 근처에 가고 방학이 되니 Y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겨울이었을거다. 자취방으로 놀러간 나에게 마른 김가루를 얹은 뜨겁고 고소한 라면을 끓여줬던 것이. 한 쪽 벽면을 그득히 채우고 있던 책들과 목욕탕의 비누 냄새가 기억날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Y를 볼 수 없다. 졸업을 한 뒤로 생활에 쫓겨 Y와의 연락을 잊고 지냈고 언제든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고. 예전에 쓰던 다이어리나 일기장의 귀퉁이에는 Y의 흔적이 남아있다. 색감이나 재질이 독특한 종이에 비스듬히 써 내려간 메모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넌 나보다 더 했지.

Y를 처음 본 것은 새내기 시절 교양국어 시간이었다. 작가를 하나씩 정해서 조별로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교육학과 대표로 눈에 띄게 작은 여자 아이가 교단에 섰다. 까만 단발머리에 느릿느릿 정감 있는 경상도 사투리,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독특했다. 어디서 봤던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한 편, 세상에 저런 케릭터를 가진 여자아이도 드물거야 싶은 독특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일견 평범한듯 하면서도 특이했고 특이한듯 하면서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후로 우리는 같은 단과대학 내에서 생활했기에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눴고 같은 기숙사 내에서 생활했기에 밥을 먹다가, 기숙사를 오가다가 간혹 마주치면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새내기 시절엔 대개 그렇듯, 본격적으로 말을 건네기엔 뭔가로 둘 다 분주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우리가 결정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학기가 되어 동아리 생활을 시작한 나는 괴물같은 선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동아리 생활의 열혈분자가 되어 있었다. 그 날도 어김 없이 동아리방에서 네눔을 쥑이네, 네년을 살리네 하고 있던 중 동아리 문이 빠꼼히 열리면서 익숙한 표정의 쬐그만 여자 아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Y잖아?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고 서로가 모르는 사이 똑같이 2학기부터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부터 Y와 나의 활약상은 바야흐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늘상 칙칙+암울+꾸리꾸리+사막사막 했던 동아리는 Y와 나, 그리고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는 자칭, 빨강 머리 앤 H의 합작으로 완죤 개그 동아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한 터프했던 총무 언니는 계속 그런 식이면 술을 잔뜩 먹여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도 했으나 우리는 몰라요~ 좋아라~ 하면서 겁나 놀고 겁나 까불고 겁나 웃었다. 우울한 자태로 쇼파에 파묻혀 있던 선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Y가 췄던 창밖을 보라, 안무는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적시면 생각나곤 한다. 몹시도 그립게.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킥킥킥, 웃음이 삐져나오던 호시절 중의 호시절이었다.

그렇듯 철모르게 즐겁기만 했던 우리도 2학년이 되고 슬슬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껴가는 시기가 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조차 창문에 모래알 비벼대는 소리처럼 짜증났던 시기,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아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언제든 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던 선배에게 건방진 눈으로 왜요? 라고 물었던 나는 나중에 동아리에 대한 향수병까지 앓게 되지만 당시에는 어느 곳에든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버겁고 귀찮고 신경질 나기만 했다. 나는 혼자서 무한히 자유롭고 싶었다. 뒤늦게 시작된 사춘기였다. 한편 나의 탈퇴로 잠시 갈등하던 Y는 그녀가 열망하던 것이 있었기에 계속 남기로 했고 동아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변하고 그녀도 변하고 있었지만 그건 각자의 변화일 뿐 우리의 관계에 변화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돌연 휴학을 결심한 내가 복학을 해서 학교로 돌아왔을 때 Y는 마치 멸종 위기에 놓인 새처럼 수줍고 두렵게 변해 있었다. 사람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었고 자취방에 혼자 틀어박혀선 밥도 해먹지 않고 과자만 사다먹으며 단편소설들을 쓰고 있었다. 복학을 한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덮어둔 채 열심히 학과 공부에 매진했고 간혹 신변에 생긴 얘깃거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Y를 방문하곤 했다. 그녀도 가끔 써모은 단편소설들과 먹을거리를 사들고 내가 사는 자취방을 방문해서 밤이 늦도록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다 가곤 했었다. 밥을 잘 안해먹는 그녀를 위해, 마치 밥을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취를 하던 나는 반찬을 만들어서 주었고 그녀는 반찬이 있으면 뭐해, 밥을 안해먹는데, 라면서 번번히 거절하곤 했다. 안쓰러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을 그냥 가끔만 만나는 것이었고 그녀의 소설들을 읽고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그냥 두었다. 나처럼 시험을 준비하고 평범하게 살길 바랬으나 Y의 고집은 그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랬다. 너도 시간이 좀더 지나면 우리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될거야. 사는 거 별거 있더냐.

그러나 Y는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쿵닥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가 어느 날 Y를 떠올렸고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을 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학과에 전화를 했을 땐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예전에 살던 자취방 주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메일을 보내면 반송되어 돌아왔다. 전화번호도 바뀌고 그녀가 보냈던 편지 겉봉에는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일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간간히 이야기했던 그 곳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Y는 아무런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서울에 가고 싶다 했으니 남동생을 돌봐주면서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라도 다니고 있을런지 기대도 해보지만 혹, 어디로 시집 가서 조용히 살고 있는지 소설을 쓰러 먼 곳으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문득문득 Y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나를 기억해 줄 지 모르겠다. 이렇게 뻔한 생활인으로 변해 있는 나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라진 것이 많이 놀랍다거나 원망스럽지는 않다.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숨어 있길 좋아하는 그녀였으니까. 나는 예외가 되리란 생각은 오해였던 것 같다. 누구나 혼자이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것은 짧을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Y가 어딘가에서 건강히 잘 살아가고 있길 빈다. 그녀와 함께 했던 기쁨들, 슬픔들, 실수와 몽상으로 점철된 시간들, 우리는 왜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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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사랑니가 속을 썩이고 있다. 그것도 누워서 배 째라는 식으로 올라오는 중이라서 대학병원까지 방문해야했다. 내 몸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쓸데없는 막니 하나가 아주 매트릭스를 찍고 앉았다. 05년 후반기는 참 고단하기도 하다. 튼튼한 것으로 보자면 이십세기 마지막 히로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건강을 자랑하고 다니던 내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신세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차츰 모든 것이 좋아질 무렵 방학을 즐겨볼까 했더니만 기어이 사랑니가 경종을 울리는구나. 어쨌거나 마지막 경종을 울리다, 가 되었음 좋겠는데.

한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도착한 대학병원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병원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은 아들의 네 번 째 다리 수술의 예약을 확인하러 온 것 같았는데 병원 측에서는 예약이 빠진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럴리가 없다고 의사 샘과 전화 연결을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참 안쓰러웠다. 네 번 째 수술이라니. 세상에 그걸 빠뜨리면 어쩌자는 건데. 접수원들의 기계적인 손놀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불안해졌다. 파바방 도장 찍고 드르륵 카드 긁고 찍찍 영수증 구분선 뜯어내고 눈이 오락가락했다. 엄마는 대학병원 특유의 복잡다단한 진료 절차를 밟으면서 내 돈 내고 이렇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일도 드물다면서 다 때려치고 식구 중에 하나를 의사 만들던지 해야지 불편해서 못 살겠다 하셨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는데 기왕 하는 거 아주 오지게 열심히 해서 의사나 될 걸 그랬나, 에혀. 암튼 산골에서 줄창 미끄러져가며 여기까지 왔다는 엄마의 기지가 없었다면 아마 어둑어둑해진 지금쯤에나 간신히 집에 도착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니 발치는 실패했다. 오늘 확 빼버리고 왔음 좋았을텐데 염증이 있어서 가라앉힌 다음 뽑아야 한단다. 그것도 열흘 뒤에나. 어쨌거나 열흘 동안 이 쥑일놈의 사랑니와 한 몸 한 뜻으로 동고동락 해야 하는 것이다. 네모난 마스크를 쓴 얼굴이 네모난 의사 샘은 차분차분한 말투의 여자 샘이었고 뭐 그런 얼굴이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내 느낌 상 이를 잘 뽑게 생기신 것 같았다. 마치 영구치 중의 하나인 두 번 째 어금니처럼 억세고 튼튼하게 생기셨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랑니 뽑기 전에 이틀 정도 학교에 나가서 근무를 해야 하고 입시 때문에 아이들도 봐야 될 것도 같다. 만나려고 했던 친구들을 만나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고. 어차피 맛난 것도 못 먹고 볼이나 싸매고 앉았을텐데 귀찮아서 얼른 집에 보내려고 들겠지. 이 쥑일놈의 사랑니, 방학을 아주 통째로 잡아먹을 심산이구나. 켁! 샘들은 지금쯤 제주도 앞 푸른 바다를 내다 보면서 싱싱한 바다회를 먹으며 간만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겠구나. 사랑니를 마지막 액땜으로 다가오는 2006년엔 본래의 건강하고 발랄했던 내 모습을 찾고 싶다. 아프면 다 소용 없다. 정말루.

※ 사랑니가 영어로는 wisdom tooth라는데 지혜를 알 나이에 나기 때문이란다. 처음에 솟아날 때의 아픔이 첫사랑의 고통과도 같다고 해서 사랑니라는 설도 있고. 근사한 이름과 그럴듯한 의미에 비하면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당최 꼴 뵈기 싫어 미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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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랑니가 났는데 안뽑아도 된대요. 저도 모르게 다 났어요.

깐따삐야 2005-12-2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받으셨구랴. 부럽소. 부러워!
 

나에겐 자폐 성향이 다분한 것 같다. 자폐가 자기 안으로 숨어들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오늘도 어느 자리에선가 그 동안 소식을 몰랐던 많은 지인들과 마주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의무만 다 한 채 누가 볼까봐 겁이라도 난다는 듯 그 자리를 총총히 떠나왔다. 바쁜 일이 있었다거나 특별히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냥 얼굴 아는 사람들과 혹시라도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안부를 묻고 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는 사람들 서넛을 만났다. 다들 길을 헤매다가 나를 마주쳐서 길만 묻고,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느그들같은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그냥 일찍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오는 길에 맥반설 달걀을 세 개 사고 호빵을 하나 사고 집에 와서는 된장 기운을 약간 풀어 라면을 끓여먹었다. 아까 어느 오락프로그램에서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것 같은 사람, 이란 타이틀로 순위를 매기더라마는 그것이 그렇게 안되고 딱한 일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오후에 라면 한 대접을 먹고 고구마 찐 것 까지 먹고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 이라는 실용서를 몇 장 읽다가 쿨쿨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방학을 맞이한 나의 뒷치닥거리를 하시느라 기어이 엄마는 몸살이 나셨고 내가 좋아라하는 개고기 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있다. 난 저 된장 기운 섞인 개고기 누린내가 왠지 뿌듯하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인간 관계를 상당히 무시하며 지내온 것 같긴 하다. 주변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대체로 심신이 피곤했고 다시는 그런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됐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만나서 즐거운 적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매우 드문드문 아껴서 만나곤 했다. 이후에 사회에 나온 뒤로도 직장에서 만난 사람은 딱 직장에서의 관계만 유지한다, 는 룰을 지킨 것 같다. 그래도 회식 자리에 가선 열나게 놀고 열나게 분위기 띄우고 그랬지만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 다리를 다치고 난 다음엔 나는 정말 내성적이고 자폐적인 인간이 되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고통의 공유는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사소한 불편이라도 끼친다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게 사람이란 걸 그 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뒷담화나 까고 서로 반목이나 하느니 책이나 주문해서 읽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겉으론 사람 좋은 척 웃는 사람들이 뒤로는 얼마나 깍정이 짓을 하는지 익히 보아왔고, 특히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은 그것이 누워서 침 뱉기라 할 지언정,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기에 물처럼 조화가 될 수 없는 인간형들이 태반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즐겁게 지내면서도 왜 나는 늘 혼자이고 싶어서 안달인걸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벽이 있고 한 때는 그 벽이 무너지는 기분좋은 체험도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나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해도, 불가피한 벽이 있다는 걸 실감한다. 그렇다고 나란 사람이 매일 찡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다니는 건 아니다. 대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밝고 씩씩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면의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어서일수도 있으나, 정말 사람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직업이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내가 사람을 싫어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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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고통의 공유는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사소한 불편이라도 끼친다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게 사람이란 걸" 요 대목 참 좋아요. 저도 자폐성향을 가진 人입니다.

깐따삐야 2005-12-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징징거리는 글에 동감을 표해 주시니 반가울 따름. ^^ 근데 어쩌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더 칭찬 받고 싶고 존경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안달인지도 모르죠~

마늘빵 2005-12-28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