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저를 책 읽기의 짜릿한 엑스터시로 끌고 갔던 것들만 골랐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2018년엔 권 수로 219권, 편 수로는 192편을 읽었습니다. 가장 긴 책은 홍성원의 <남과 북> 여섯 권 짜리고, 다음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네 권 짜리였습니다. 이 가운데 먼저 약 50편을 골랐습니다. 내역은 글 아래에 따로 첨부했습니다. 선별한 책 중에서 또 골라 열 권을 선택했고,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오늘까지 바뀌지 않았고요. 소개는 읽은 날짜 순서로 하겠습니다. 이 열 권과 특별한 한 권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1.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불>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만엔 원년, 그의 전작 <익사>에서 보다시피 1860년의 농민 반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 당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였던 종조부를 둔 한 청년이 68세대로 성장, 반미운동의 전초적 투쟁을 벌이다가, 갑자기 변절, 이후 의식의 혼란을 초래한다. 미국에서의 실종을 거쳐 만엔 원년에 종조부가 투쟁을 벌였던 고향으로 돌아온 다카시. 그가 지역 실권자 조선인 백승기와 벌이는 한 판 풋볼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하우스 키핑>을 선택했으나 사실 같은 이유로 <홈>도 추천한다. 가족 구성원이 떠나가고, 상처받고, 돌아오고, 기다리고, 다시 떠나는 일, 그 쓸쓸함. 기관차를 전속력으로 몰다가 선로를 이탈해 깊은 호수에 빠져 시신도 못찾은 남편. 친구 차를 빌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고는 역시 전속력으로 호수를 향해 돌진해 실종돼버린 딸. 이제 남은 가족들은 그들이 죽었음을 알지만, 어느 날 문득, 남편이나 딸이 슬며시 웃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여는 날이 있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기다림. 서늘한 아픔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고등학교 생물교사가 이런 책을 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통의 프랑스 시민들은 복종과 순응으로 시간을 버텨냈을 뿐이지만, 타국에 의한 피통치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가 독일 군인들에게 당한 고통보다 백 배 이상 더 악랄한 살상과 살육을 벌였다는 지적. 프랑스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결코 피부색을 달리하는 왜소한 아시아 인들을 향하지 않고 오직 갈리아 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을, 생물교사 알렉시 제니는 정식으로 드러낸다.



4,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폐퀴셰>

 플로베르의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우울한 명상형 은둔자 플로베르가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쓴 것 같은 작품. 세상을 살고 이제 갈 때가 되어 돌아보니 별 거 없이 사는 거 자체가 한 판의 코미디. 그리하여 플로베르는, 위대한 작가가 가끔 그러하듯, 마지막 작품으로 희극을 선택한다. 희극의 진정성은 희극 자체에 진정한 비극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 두 필경사 부바르와 폐퀴셰가 뜻과 돈을 모아 쓴 사과 브랜디와 이름이 같은 칼바도스로 낙향,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맛보는 장면을 읽으며, 그래 인생 자체가 칼바도스 맛이야, 희극 속의 쓴 비극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



5.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본 영화 때문에 이 책을 멀리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읽게 된 <쿠오 바디스>는, 영화가 원작의 재미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 깜짝 놀랐다. 폴란드의 자랑 시엔키에비츠의 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재기발랄하기도 하고, 심지어 깊은 사색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TV 때문에 직접 독서의 매력을 놓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것 다 빼고, 책 표지에 나신의 여성이 부여잡고 키스를 퍼붓는 대리석상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의 현명한 언행을 감상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작품은 명작이다.



6.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칼루스와 루카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두 쌍동이 형제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형제는 절대로 울지 않고, 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잔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며, 한 편으로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을 그치지 않는다. 착한 악마들. 완전하게 건조한 문장으로 블랙 유머와 엽기적 내용을 서슴없이 서술하는 크리스토프. 이 쌍동이 형제가 정말 쌍동이일까? 의식의 분리, 선악, 호오, 이런 두 양식이 상호 교차되는 것의 상징 코드 아닐까? 그건 독자 마음이다.



7. 홍성원, <남과 북>

 

 전쟁을 치룬 나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보다 전쟁 전반을 조망하는 문학작품이 없는 국가도 없다. 무승부로 끝난 전쟁 이후 남쪽과 북쪽 모두 전쟁의 위험을 강조하며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남쪽은 국방군이, 북쪽은 인민군이 절대 선이었어야 했을 것이리라. <남과 북>은 70년대에 발표했다가, 박정희가 죽자마자 곧바로 개작을 해서 전쟁 발발 바로 전부터 종전 바로 후까지 전선과 후방에서 각각 전쟁의 비참함을 당한 모든 국민의 모습을 담은 역작. 진정한 전쟁문학이 없던 우리나라에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



8.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처럼 기본적으로 가치, 즉 품질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사고와, 나아가 모든 물질과 재화의 가치, 품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등 뒤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여행을 하며, 한 편으로 여정에서 생긴 조그마한 일과 특히 모터사이클을 매개로 가치, 질에 관한 탐구로 사고를 확장하게 된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학문을 통섭한 수재로 철학, 수사학, 수학과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기계공학 등에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 그리하여 사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을 타도하기 위해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모터사이클의 뒷자리에 앉은 아들 크리스는 여행 도중 아빠 등짝 밖에 보지 못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9. 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이토록 장려하고, 화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독후감을 썼다. 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는 내내 화려한 문장의 매력 때문에 행복했다. 서로가 숨막히게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두 연인을 질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 나는 그걸 안다.



10.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1918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서둘러 서유럽으로 망명한 것과 달리 혁명과 동시에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조모를 망명시키고 자신은 러시아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혁명 정부에 의하여 현재 자신이 묵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의 유폐형을 선고받고, 스위트룸에서 지붕밑 <라 보엠>의 미미가 살던 꼭대기 방으로 옮기게 된다. 귀족으로 태어나 인간 자체가 신사인 백작은 책상다리 안쪽 비밀 책상 속에 든 예카테리나 금화로 일 하지 않고도 고급호텔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특별하게 관계를 맺는 몇 명의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게 된다. 나는 쉽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이건, 명작이다.




2018년 최고의 한 권.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는 삶이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한 보편성 역시 확보해야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아랫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 남은 삶을 보내야 했던 김태정. 가난하고 병마에 고통을 받지만 결코 궁상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는 단단한 중심의 시인. 인생의 곤고함을 이 시인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에 관해서는 말을 길게 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법. 나 역시 조심스럽게 이 책의 일독을 모든 분께 권한다.




* 참 아쉽게 위의 열한 편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책을 꼽는다.




2018년에 읽은 매력적인 작품 목록.

도서명출판사/제작사저 자,  역 자
사서 빠뜨재미마주즈느비에브 빠뜨, 최내경
화이트 노이즈창비돈 드릴로, 강미숙
루시 골트 이야기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문학동네이반 부닌, 이항재 
호르두발지만지카렐 차페크, 권재일
운명민음사임레 케르테스, 유진일
더 컬러 퍼플한빛문화사앨리스 워커, 안정효
플라톤의 반란자작나무(송학)피터 애크로이드, 한기찬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줄리언 반스, 송은주
마농의 샘펭귄클래식마르셀 파뇰 | 조은경
싱글 맨창비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조동섭
만엔 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오에 겐자부로 | 박유하
의식동아시아레슬리 마몬 실코, 강자모
하우스키핑마로니에북스메릴린 로빈슨 | 유향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민음사모신 하미드, 왕은철
여름의 끝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민은영
프랑스식 전쟁술문학과지성사알렉시 제니, 유치정
부바르와 페퀴셰책세상귀스타브 플로베르, 진인혜
쿠오 바디스민음사헨릭 시엔키에비츠 | 최성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민음사제임스 M. 케인, 이만식
절망문학동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최종술
노변의 피크닉현대문학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보석
미국은 섹스를 한다자작나무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까치아고타 크리스토프 | 용경식
칠레의 밤열린책들로베르토 볼라뇨, 우석균, 
천국은 다른 곳에새물결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김현철
고슴도치의 우아함아르테뮈리엘 바르베리, 김관오
아메리카나민음사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황가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김태정 지음
그랜드 호텔문학과지성사비키 바움, 박광자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학고재사바하틴 알리, 이난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리온 포이히트방거, 문광훈
남과 북문학과지성사홍성원
비 온 뒤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 정영목
윌리엄 트레버현대문학윌리엄 트레버, 이선혜
아무도 없어요최측의농간박서원 지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조너선 사프란 포어, 송은주
랜덤하우스코리아메릴린 로빈슨, 유향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칠드런 액트한겨레출판이언 매큐언 | 민은영
달콤한 노래arte(아르테)레일라 슬리마니, 방미경
사촌 퐁스을유문화사오노레 드 발자크, 정예영
우리 시대의 아이문예출판사외된 폰 호르바트, 조경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서커스조르지 아마두, 안정효
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연극과인간김성희 지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문학과지성사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장경렬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민음사에벌린 워, 백지민
주군의 여인창비알베르 코엔, 윤진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에이모 토울스, 서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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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2-31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주군의 여인>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폴스타프 님 새해에도 소주와 책과 함께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

Falstaff 2018-12-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내년엔 책은 그만두고, 돈 왕창 버시고요, 하시고 싶은 거 맘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데 세계일주 같은 거요.
<주군의 여인>이 좀, 아니 많이 장황합니다. 읽다가 자빠질 수도 있는 책이라서 선뜻 권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뭐 그런 거 다 팔자니까, 알아서 하시기를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3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의 책들은 우직 묵직 견고합니다 무게가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Falstaff 2018-12-31 23:06   좋아요 1 | URL
내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께 늘 좋은 일만 생기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6월 17일 토머스 페인의 <상식>으로 시작해서 백민석의 <공포의 세기>까지 백 일 넘게 읽은 책 가운데 (당연히)제 기준으로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즐겁게 읽은 책들을 골라 짧은 소감을 첨부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덩달아 몇 권을 골라 감상하신 후의 느낌은 제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별거 없는 소감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책 선택에 조금 도움이 된다면 기분이 조금 좋아질 거 같습니다. (원래 알라딘 서재에 독후감 올리는 것이 다 저 좋아 하는 지랄이거든요.) 순서는 책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모히칸 족의 최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개척자들>의 전편. <개척자들>이 솔직히 말해 읽기 지겨운 면이 있지만 이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초기 미국 동부의 광활한 원시림에서 펼쳐지는 모히칸 족 최후의 왕자와 명사수 네티 범포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죽음의 이야기.



2. 오노레 드 발자크, <13인당 이야기>

 

 인간살이에 있어 제일 재미난 이야기는? 애정. 그 중에서도 치정 이야기. 맞지? 거기다가 지금 기준으로는 소프트한 잔혹극까지 섞여 있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냐? 빚을 갚기 위해 하루 열네 시간씩 소설을 썼다는데 이 수준이면 발자크, 이 영감, 진짜 천재 아냐?



3. 에밀 졸라, <쟁탈전>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돈>이 <쟁탈전>의 후속이니까 당연히 이 책을 먼저 읽어야할 것. 졸라가 만든 주인공들의 혈관 속에 든 편집증과 극도의 몰입이 이 책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데 이번엔 주식과 사업에 쏠려있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사기행각의 저 먼 꼭지점.



4.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누군들 가슴 속에 쓸쓸한 나뭇잎 하나 휘날리지 않을까. 그러나 진짜 쓸쓸함을 만져보고, 맛보고, 바라보기 위해선 이 시집의 일독이 필요하다. 마흔여덟에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앞 작은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인의 소박한 꽃바구니. 그게 시인의 삶이었으리라.



5. 서머싯 모옴, <인생의 베일>

 

 자칭 최고의 2류 소설가가 중국을 무대로 쓴 작품. 이렇게 간단히 얘기하니 별 거 없이 보이시지? 천만에.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가끔 스스로 최고의 인격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는 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천박한 짐승 같은 작자인 거, 이런 거, 모옴이 정말 잘 그려낸다.



6. 비키 바움, <그랜드 호텔>

 

 모든 일이 벌어지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곳. 바로 그랜드 호텔. 들어올 때는 회전문을 통해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회전문 또는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곳. 오직 돈에 의하여 사람의 등급을 측정하는 속물들의 파노라마. 신신애 말씀이, “인생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7. 사바하틴 알리,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최고의 신파. 역시 재미에 관한 한 신파가 제일이다. 지금은 왕창 찌그러진, 첫사랑에 실패한 한때 부유했던 남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왕년에 실연 한 번 안 당해본 사람 없을 터, 당신이 그 ‘왕년에 실연 한 번 당해본 인간’이면 책 읽다가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분명 올 터. 이난아의 번역 한국말도 매우 좋다.



8. 리온 포이히트방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18세기 유럽. 중세가 말살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던 고리타분한 지역 스페인. 그곳의 궁정화가 고야. 왕가와 귀족들의 구미에 맞는 초상화를 그리다가 인정을 받고, 드디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감히 왕의 일가를 그린 대작에 심술궂고, 멍청하고, 허영 덩어리로 그들을 묘사하기에 이른다. 아쉬운 건 이 책이 1부에 그치며 2부를 쓰지 않고 갔다는 점.



9.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 재직한 진 브로디 선생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 똘똘한 학생들을 골라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심지어 졸업한 다음에도 자기 군대로 키운 여자. 그러나 학생들은 해마다 성장해가고, 자연스럽게 브로디 선생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데, 하여간 신기한 캐릭터의 여자를 구경한다. 난 묘하게도 B사감이 생각났지 뭐야.



10.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컴퓨터 단층 촬영을 하듯 세밀하게 쪼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일. 이런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드라이하기 이를 데 없어 함부로 추천했다가는 귀싸대기 한 대 얻어맞기 십상. 난 이런 책 좋아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읽은 다음의 감동이나 동감은 책임 안 짐.



11. 조인선, <시>

 

 안성에서 소 키워 팔아 생활하는 시인. 애당초 시 써서 돈 벌기 무망함을 자각하여 소 키우는 부모한테 비볐을 뿐 처음부터 시를 쓴 인간이라서, 이이의 직업에 속지 마시라. 확실한 초현실주의자. 난 초현실주의 문학을 경원한다. 그러나 시집 속에 숨은 삶의 시들이 참 정 있고 재미도 있다.



12. 홍성원, <남과 북>

 

 문학과지성사는 하루 빨리 이 책을 복간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반을 다 조망하는 기념비적 작품. 기존의 빈부, 귀천 등 사회질서를 깡그리 전복시킨 한국사 최초이자 최후의 전환기를 마련한 한국전쟁. 누가 있어 이 전쟁의 근본 성격까지 홀랑 까발린 작가가 있었는가.



13.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새엄마 찬양>

 

 베드 씬 혹은 어린 아이와 새엄마 사이의 과한 성적 표현을 들어 이 작품을 재수 없다 얘기하지마시라. 열 살 먹은 귀여운 악동이자 천사이며 천의무봉한 알폰소의 정체가 바로 사랑의 신 쿠피도 또는 아모르이기 때문. 하여튼 요사의 성적 묘사는 아예 끝장을 본다니까.



14.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참전 하사관이자 우파 사회민주당원에 의하여 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강타당하고, 역시 참전 중위의 권총으로 확인사살을 당한 후 시신까지 국경의 운하에 던져져 몇 달 후에 떠오른 여류 혁명가. 평생의 애인이자 동지였던 레오 요기헤스, 스파르타쿠스 당의 수뇌이며 같은 날 함께 처형당한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의 혁명적 일생. 이름 자체로 전설인 여성의 한 생애.



15.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한 편, 한 편이 다 절절한 단편선. 이번 가을에 읽어보시면 정말 좋을 책. 쉽게 이런 말 안 하는데, “강추!” 스물세 편을 관통하는 쓸쓸함이라니. 넘치는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이 꽉 짜인 긴밀한 구성. 그러나 구성 따위는 버리고 그냥 문장 속의 아름다운 황량함만 봐도 좋다.



16. 레몽 장, <카페 여주인> 

 재미있고 가볍다. 하룻밤 동침하면 10억 원 줄게. 이렇게 제의하는데 버티는 여자 있어? 있다. 10억 원이 아깝지 않을(그렇게 생각하는 놈팡이가 있을) 아름다운 얼굴과 외모의 소유자. 제의를 받은 아멜리가 친한 친구한테 “너만 알고 있어.”라는 단서 조항을 걸고 속삭이는데, 세상에 비밀이 있어?



17. 박서원, <아무도 없어요> 

 

 시인한테 문제가 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무능한 어머니, 성폭행, 발작, 안수기도, 정신병, 기면증, 결혼과 이혼. 정말로 아픈 시인이 쓴 아픈 시. 시를 읽는 독자도 함께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의 고통. 박서원은 다른 시인들을 몽땅 엄살쟁이로 만들어버리고 먼저 갔다.



18.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과 2001년 여객기에 의한 뉴욕 무역센터빌딩 폭파 테러가 알고 보면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 여기에 히로시마 원폭까지 더해 폭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애도하는 소설.



19. 메릴린 로빈슨, <홈> 

 

 

 아 씨. 어쩌자고 사람의 심금을 이리도 저며 놓는단 말인가. 사랑에 실패하고 직장까지 놓아버린 막내딸과 천생 문제아였던 셋째 오빠가 비슷한 시기에 오늘 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남매간의 어색한 관계가 다시 따뜻한 배려로 이어지고, 또다시 헤어짐으로. 돌아가 잠시 머리를 누일 수 있는 곳, 옛집.



20. 귀스타브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 

 

 세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책. 그중에 표제작 <순박한 마음>이 단연 돋보인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애에 대한 성찰이 와 닿는다. 이 작품 속에서 도무지 찾지 못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발견한 것도 재밌다. 그렇다고 <구호성자 쥘리앵의 전설>과 <헤로디아>가 재미없다는 얘기 절대 아님.



21. 리처드 프래너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행복한 사람에겐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겐 과거만 있다. 과거가 남은 인생에 가장 큰 장애로 남을 사람에게 보내는 진혼곡. 시암-버마 간 철도 가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질병과 굶주림의 실황중계. 진정한 결산을 하지 못한 태평양 전쟁의 비극. 인간 참상에 관한 리얼한 보고서. 필독서.



22.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여성과 아내로서의 위기에 몰린 초로의 재판관에 닥친 소년법 사건. 사흘 안에 수혈을 받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는 17세 9개월의 소년. 아이와 부모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지만 판사는 수혈하도록 명령을 내려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과연 생명을 구해주면 그걸로 책임이 다 끝이 날까? 필력 하나는 끝내주는 이언 매큐언의 화법을 감상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만족.



23. 레이라 슬리마니, <달콤한 노래> 

 

 그동안 사이 안 좋았던 공쿠르 상과의 관계를 다시 돈독하게 만든 책. 초장부터 어린 아이 둘의 잔혹한 죽음과, ‘어미늑대’처럼 울부짖는 엄마 등장. 망상성우울증에 시달려왔던 능력 있는 보모 겸 가사도우미. 그녀 평생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몰랐던 엄마와 아빠.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리도 가까웠던 사이에서 또다시 외로워지기 시작하는 보모.





 한 숨 돌리고 다시 읽어봤다.

이런,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푸코의 진자>와 <프라하의 묘지>도 빠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빠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도 이 리스트엔 없다. 프리모 레비, D.H.로렌스도 없다.

이이들? 실수로 뺀 거 아니고 정말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빠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아마추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초등학교 동창이 쓴 작품이라도 내가 싫다면, 싫.은.거.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나 한 명을 위해 태어나, 쓰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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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0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랜드 호텔>은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네요.

요사스러운 요사샘의 새 책은 더 이상 왜 나오지
않는지... 대선 후보로도 나섰다는데 말이죠.

한 때 분더킨트로 불렸지만, 오버레이팅된 작가라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 새 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나
보네요.

Falstaff 2018-10-08 15:08   좋아요 0 | URL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은 한 권 더 읽어보려합니다. 뭐 오버레이팅이 되건 말건 저 좋으면 좋은 거고, 안 맞으면 안 읽는 거고 그렇지요. ^^
위키피디어 검색해보면 요사가 제일 나중에 쓴 책이 2016년 <이웃>이란 작품이고, 그거 말고도 꽤 많네요. 저도 시중에 요사가 보이면 무조건 구입하고 보는 편입니다만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네요. 품절, 절판된 거라도 얼른 다시 찍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똘 2018-10-0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글입니다...😊

Falstaff 2018-10-09 18:54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까리 2021-02-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이렇게 재미있게 본 건 처음이네요, 댓글도 처음 달아봅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고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은 캡쳐해서 장바구니 넣어두려구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2-05 14:01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
 

 

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순박한 마음>을 다 읽고 책 끝의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놀라워라, 이런 문장이 있다.

 

 “플로베르의 작품은 초기 습작을 제외하면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다.”


 얼른 내가 읽은 플로베르를 세어봤다. 이 <순박한 마음>, 책의 앞날개에 쓰인 대로 원제목이 <세 가지 이야기>가 여섯 번째 플로베르였다. 초기 습작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는 말씀. 책의 발간 순으로(위키피디아 참고) 하면 이렇다.


 <보바리 부인>  1857
 <살람보>  1862
 <감정교육>  1869
 <성 앙투안느의 유혹>  1874
 <세 가지 이야기>  1877
 <부바르와 페퀴셰>  1881


 <세 가지 이야기>, 우리 제목으로 <순박한 마음>이란 책에 (사실 단편집은 『순박한 마음』, 해당 작품은 <순박한 마음>, 이렇게 써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막 쓸 테니 알아서 읽어주시면 좋겠는바) 마지막 이야기에 <헤로디아>가 나온다. 그러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살로메>를 1893년에(초연은 96년에) 냈으니 와일드보다 16년 빨리 헤로디아의 친 딸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을 만든 셈이다. 뭐 꼭 ‘일곱 베일의 춤’이 아니면 어떤가. 춤을 췄고, 의붓아버지가 의붓딸이 춤추는 모습에 미쳐서 자기 재산의 절반과 나라 땅의 절반을 뚝 떼 주겠다고 하는 거, 그렇지만 살로메는 쟁반 위에 요카난의 머리를 담아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거까지 같으면 그냥 와일드보다 16년 앞섰다고 해도 무방하지 뭐.
 이 <헤로디아>는 쥘 마스네가, 역시 이 책에 실린 <구호성자 쥘리앵의 전설>은 카미유 에르롱쥐Camille Erlanger가, <보바리 부인>은 엠마누엘 봉드빌Emmanuel Bondeville이, <살람보>는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가 미완성 오페라로 만들었고, <보바리 부인>은 무려 8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단다. 책을 겨우 여섯 권 낸 작가로는 진짜 대단한 성과라고 해야 하겠다. 지금 같으면 판권만 가지고도 한 평생 즐기면서 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플로베르의 전편을 다 읽어본 인간의 특권으로 좀 잘난 척을 하자면, 나도 알고 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바리 부인> 하나만 읽고 플로베르는 졸업한 줄 알던 족속이긴 하지만, 

 

플로베르 하면 숱한 사람들이 <보바리 부인>을 연상하고 다른 작품들도 그와 비슷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기 십상일 거 같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정말 다양한 상상력을 그의 작품들에 쏟아냈다. (난 <감정교육>은 재미없게 읽어서 그건 별도로 하자.) <보바리 부인>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성 앙투안느의 유혹>은

 

 

상상도 하지 못한 플로베르의 다른 면모를 일별할 수 있는 기회였으면서,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기점으로 눈에 띄는 플로베르란 플로베르는 모두 읽어보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공연할 수 없거나, 정말로 공연하기엔 매우 불편한 희곡의 형태를 갖춘 소설로 결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예상외의 모습에 경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는데, 나는 서슴없이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꼽았었다.

 

 다음에 큰 기대를 한 상태에서 <감정교육>을 읽고 플로베르한테 잠깐 감정이 생겼었다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살람보>를 읽게 된다. 이 작품은 난데없이 1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도 아니고 카르타고를 무대로 벌어지는 내전을 다뤘다.

 역시 새로운 플로베르의 모습으로 41세,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절정기에 달한 그가 모르긴 몰라도 프랑스의 웬만한 도서관은 다 뒤졌을 만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 소설을 썼다. 전쟁 이후 카르타고에 남은 성난 용병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카르타고의 집정관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내전. <보바리 부인>을 플로베르라고 생각한 나는 여지없이 코피 터졌던 기억이다.

 

 다섯 번째 플로베르는 <부바르와 페퀴셰>.

 

 미완성 작품이긴 하지만 대단한 완성도를 지니지 않았는가 싶었다. 조카딸의 파산을 면해주기 위해 전 재산을 다 쏟아 붓고, 자그마한 도서관애서 나오는 미미한 돈에 의지해 가난하고 고독한 말년을 꾸리던 작가가 지난 삶을 돌아보며 썼음직한 참 쓸쓸한 희극이었다. 이 작품은 몇 년 후 은퇴해서 시간이 남아돌면 꼭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에는 표제작과 위에서 잠깐 언급한 <구호 성자 쥘리앵의 전설>과 <헤로디아>가 함께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내가 제일 좋게 읽은 건 표제작 <순박한 마음>. 단언하는데, <순박한 마음>은 21세기인 오늘, 프랑스가 아닌 우리나라의 어느 작가가 발표한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의 정서에 공감을 줄 수 있고 그들의 가슴 속에 숨어있는 따뜻한 심상을 확인하게 해줄 수 있다. 즉 보편적 인간애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는 말씀.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876년 4월에 어머니의 고향 퐁레베크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퐁레베크라는 도시에 사는 오뱅 부인과 하녀 펠리시테를 등장시킨다. 청춘과부 오뱅 부인과 처녀로 늙어 죽는 펠리시테. 이 외로운 커플들 사이에 어김없이 발생하는 삶의 비극들. 남편이 죽고, 첫사랑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돈 많은 늙은 여자한테 장가들고, 딸이 죽고, 아들도 죽고, 홀로 늙어가는 하녀의 위안이지만 친절하지 않았던 늙은 앵무새도 죽고, 기어이 오뱅 부인도 먼저 가고, 펠리시테도 평생 누었던 침상에서 숨을 거두는 이야기. 이렇게 건조하게 말하니까 그냥 그런 소설이겠거니 할 수도 있으나 정말 읽어보면 그 쓸쓸함이라니. 줄리언 반스는 이 <순박한 마음>을 영국에서 읽고, 어느 날 도버해협을 건너 플로베르가 살았던 프랑스 각지를 돌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앵무새의 박제를 찾는 노정을 기록했으니 그게 바로 <플로베르의 앵무새> 아니겠는가. (내 말은 믿지 못하더라도 줄리언 반스는 믿겠지.) 참 마음에 와 닿는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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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9-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마음>은 짧지만 참 좋죠. 저도 이 작품 참 좋아해요. 제목도 왠지 좋고. 근데 저도<감정교육>은 1권까지만 읽고 2권을 못 읽고 있어요. <성 안투안느의 유혹>이 그렇단 말이죠? 꼭 읽어보겠습니다. 참, 추석 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연휴 때 몇 병 드셨는지 나중에 계산 좀.... ㅋㅋㅋㅋㅋ

Falstaff 2018-09-21 12:39   좋아요 0 | URL
<성 앙투안느....>는 아마 극과 극일 겁니다.
제 경우에 좋았다는 얘기라서요, 언제나처럼 책임지지 않습니다. ㅋㅋㅋ
옙. 고맙습니다. 한 바탕 잘 때려먹고, 쐬주도 장하게 마시고 오겠습니다.
잠자냥님도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
 



 IL PENDOLO DI FOUCAULT
 by UMBERTO ECO

 

Copyright (C) 1988 Gruppo Editoriale Fabbri,
 Bompiani, Sonzogno, Etas S.p.A.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C) 1990 by The Open Books Co.

 

 <푸코의 진자> 첫 장을 넘기면 위와 같이 쓰여 있다. “Fabbri Editori"라는 회사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푸코의 진자>의 판권을 사 와서, 대한민국의 ”The Open Books Co." 즉 출판사 열린책들이 한국어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1,135 쪽까지 책을 다 읽으면 역자 이윤기가 쓴 “옮긴이의 말”이 나오는데 자신이 번역한 원서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책을 번역했다는 말을 역자가 왜 하지 않는지 궁금해서 내가 읽은 이윤기의 번역서를 한 번 뒤져봤다.

 

 

 

 

 

 그리스 사람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이태리 사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와 이번에 읽은 <푸코의 진자>, 서양 책을 읽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으려면 피할 수 없는 책, 로마 사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그리고 유고 사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 거참 신기하다. 고故 이 선생이 만 30세에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초빙 연구원으로 5년 세월을 보내, 이이가 영어를 잘 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번역서 가운데 영미 문화권의 작가는 한 명도 없다. 왜 그랬을까. 확실하지 않으면서 이유를 추리하지는 말자. 고인의 이름에 누가 될지도 모르니까. 일찍이 어떤 책을 번역했다고 전혀 밝히지도 않았고, 어떤 회사에 지재권 수수료를 지불하는지 알 수 없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번과 2번, <변신 이야기> 후기에서 선생은 영어 본을 기본으로 하되 일어 본을 참고로 했다고 밝힌 바 있으니,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인 1947년생인데 일본어까지 잘 했다면 언어 습득에 관해서 남다른 수재가 있었나보다. 사실 이이가 쓴 한국어 소설도 문장이 매끄럽고 이해하기 쉬워 좋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이가 <푸코의 진자>나 <장미의 이름>을 이태리어 원서를 보고 직역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역자의 말을 들어보면 <장미의 이름>은 일본보다 빨리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럼 이태리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중역한 속도가 일본의 이태리 문학자 다니구치 이사무 교수보다 더 빨랐다는 뜻. 미국, 프랑스, 독일 이렇게 삼국에서는 에코를 전담해 번역하는 에코 전문 번역자가 있으며, 이들이 고령 등의 사유로 은퇴를 하면 후임자는 반드시 오디션을 통해 뽑는 걸 원칙으로 한단다. 에코 전문가들은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은 작품들을 번역하기 위해 수시로 원작자와 의견을 교환해가며 신중하게 번역을 해왔다고 들었다. 그런 복잡하고 지루한 번역 과정을 거쳐 나온 <장미의 이름> 영어 본을 다시 한국어판으로 번역한 이윤기의 역서가, 직역을 시도한 일본의 책보다도 빨리 나왔다면,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왜 <장미의 이름> 타령이냐 하면, 내가 읽은 <푸코의 진자>가 비록 1995년 개정 번역한 것의 후속 판일지언정 둘이 비슷한 수준의 번역이 아니었겠는가 싶어서이다. 배달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살려, 빨리빨리, 후딱 번역해 시장에 내놓았을까? 아니면 역자가 이방의 문자, 즉 영어로 번역한 문학을 이해하여 한국말로 다시 번역, 전달하는 수준이 이태리 문학 전공한 일본 교수보다 한 수 위여서 순식간에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원래 언어에 수재가 있는 인물인 듯하니 하는 말이다.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일 터. 결론은 내지 않겠다. 혹시 모른다. 이태리어를 한국어로 직역했는지도(정말?).
 사실 <장미의 이름>도 그렇지만 <푸코의 진자> 역시 내용은 간단하다. 이틀 전 선배 박사 야코포 벨보의 전화를 받은 화자 나, 카소봉. 벨보는 파리의 카페 정도로 유추할 수 있는 번잡한 곳에서 전화를 했는데, 아주 급박한 상황이며 당시만 해도 첨단 기록장치인 PC를 열어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기고 만다. 벨보의 집을 찾아가 어려움 끝에 패스워드를 유추해 PC를 연 카소봉이 벨보가 사실 그동안 함께 연구해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 없는 내용인 비밀기사단, 연금술 등에 관한 정보, 벨보의 문학적 잡문 등을 다시 읽어보고 급박하게 파리의 국립 과학연구원에 방문해,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다. 제목은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원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로 19세기 중반에 레옹 푸코가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67미터짜리 진동 추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문제인가 하면, 이리 간단한 내용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진짜 직업은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기호학자라서, 벨보,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디오탈레비, 그리고 화자 카소봉, 세 명과 이들의 주위에 포진한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성배를 둘러싼 기사단의 비의를 파헤치는데 온갖 현학적인 주제와 변주를 난사하고 있다는 것. 사실 스토리 라인만 따라가기 위해서는 넉넉잡고 처음부터 50쪽과 뒤에서 200쪽, 합해 250쪽만 읽어도 눈앞이 훤하게 밝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리 쉽게 읽으려면 뭐 하러 에코를 읽겠는가. 당신이 에코를 선택한 순간, 일종의 정신적 고문, 인내심 실험, 감각의 오리무중을 견디겠다는 전제조건이 들어 있지 않았겠는가.
 <푸코의 진자>에서도 에코는 얄짤없이 독자들을 미궁으로 초대한다. 게다가 독자들은 아리아드네의 실 꾸러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냥 에코가 주장하는 것을 읽고, 기억하고, 그러다가 잊으면 다시 앞으로 넘겨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있었더라, 확인하고, 그러면서 머릿속에 쥐나고, 에잇 이따위 하나 읽으며 메모까지 한 번 해봐야 할까, 마음도 먹다가 치워버리고, 진도 안 나가는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기도 하는 득도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아니라고? 읽어보시면 안다.
 나는 지금 듣기에 따라 조금 엉뚱한 주장을 하고 싶다. 돌아간 분에겐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푸코의 진자>는 <장미의 이름>과 더불어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역자 이윤기가 “역자의 말”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 “역자는 학문으로서의 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힘에 부쳤기 때문”에 “에코 문학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기호>, <코드>, <포스트모더니즘>, <인터텍스추얼리티(相互典據性)>, <개방성> 같은 개념을 가지고 이 소설을 해설하기에 역자의 힘은 부쳐도 많이 부”치기 때문이다. 독후감의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소설가 이윤기의 문장도 좋아한다. 그리고 원서를 읽지 못하는 일반 독자로서의 나는 또한 영어를 번역한 이윤기의 한국어 문장도 나쁘지 않게 읽는다. 그러나 스스로의 독백처럼 원작자의 뜻, 특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에코 문학의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힘이 많이 부치는 역자의 결과물을, 참으로 아쉽게도 선뜻 인정하게 되지 않는다. 직접 읽어보면 (<장미의 이름>과 비슷하게) 무려 근 900쪽을 할애해 설명해놓은 각 기사단, 프리메이슨, 유대교 등과 기독교의 연관성,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 흑마법, 악마주의, 연금술, 비의 등을 설명할 때 역자도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가 마구 쏟아지기 때문에, 이윤기의 문장이 비록 쉽고 잘 읽히기는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비전문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한국말에서 좀 어렵거나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혹시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영어 본에 의한 중역이 나와 절찬리에 팔리고 있는데도, 일본에선 그때까지 번역작업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푸코의 진자>를 읽으면 그동안 경험했던 세 편의 에코가 다 생각난다. 중세 기독교 내부에서의 이단 논쟁에서 당연히 <장미의 이름>을, 저 높은 기둥 위로 올라가 수도에 전념했던 주상柱上수도사는 <바우돌리노>를, 벨보가 자란 시골집에서 찾은 자잘한 옛 시절의 기념품에서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말씀.
 재미있는 책을 나는 고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읽었으나, 내 아이들은 이태리 문학을 전공한 이의 참신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역자가 영어책을 번역한 것이라면 제일 앞에 써놓은 “Copyright (C) 1988 Gruppo Editoriale Fabbri,  Bompiani, Sonzogno, Etas S.p.A.”가 무슨 뻘짓인지 모르겠다. 영어책 번역하고도 이태리 회사 Fabbri Editori에 판매 권수에 따라 지적재산권에 의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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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의 책들은 컬렉션하면서도 절대 읽지
않는 깡다구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장미의 이름>도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항상 말로만입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의 물결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요...

언급해 주신 대로, 이태리 원서에서 다시 번역
하는 데 찬성합니다. 다만 여러 방면에 다양한
지식을 갖추신 분이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죠.

Falstaff 2018-08-23 11:46   좋아요 0 | URL
요즘엔 이태리 문학을 전공한 분들도 많잖아요.
저도 그분들이 재번역한 책들이 나오면 다시 읽어볼 용의가 있습니다.
진짜로, 그리스 문학을 전공한 유재원이란 분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직역해서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당장 보관함에 집어 넣었습니다. 올해 안에 읽을 예정입니다.
지나가는 얘긴데, 이윤기 쌤이 그랬다면서요. ^^
˝나 죽기 전엔 <그리스인 조르바> 직역하지 말아줘.˝
 

 2018년 4월 4일 부터 6월 16일까지 읽은 책 가운데 명작이나 걸작이라고 칭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공감하고, 감동하고, 재미있었고, 숙고해볼 만하고, 새삼스레 사람살이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었으며 그리하여 읽기에 즐거웠던 책들을 소개합니다. 개인의 호오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만 그게 또 사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혹시 책을 고르실 때 조금 도움이라도 된다면 제게도 참 고마운 일일 겁니다. 순서는 읽은 차례이며, 원본의 초간 발행 순서일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1.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

 

 '소설 읽기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뒤마와 위고 아니겠습니까. 이 책은 거의 누구나 소년시대에 축약본이나 만화로 본 적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한 번 읽어보시면 전체에 깔려있는 음모와 드라마의 진행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세 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금세 뚝딱 읽어치울 수 있을 겁니다. 진정한 팜 파탈의 전형을 구경하는 것도 이 책의 대단한 즐거움이고요.




 2. 알렉시 드 토크빌,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보다는 혁명 전 시기, 즉 앙시앵 레짐이 권력 안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나 문제와 해결의 방법을 체제 내에서 찾지 못한 정치가와 철학자들을 은근히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높은 압력으로 구체제 안의 제도와 프로세스를 뚫고 뿜어져나온 인민들의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불평등을 초래한 당대 전제정치의 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플로베르의 미완성 장편소설이며 희극입니다. 독후감에 저는 "희극의 힘은 대단하다. 진정한 슬픔이 없는 희극은 희극이 아니라서"라고 썼습니다. 두 필경사가 서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어, 난데없이 큰 돈이 생겨 귀향해 벌이는 촌극입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거 없는 두 중늙은이들의 인생의 석양. 그들이 씁쓸한 웃음으로 다시 필경의 업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가슴이 컥 막히는 희극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4. 헨릭 시엔키예비츠, <쿠오바디스>

 

  한때는 연말연시만 되면 TV에서 방영해주던 영화의 원작입니다. 영화를 봤으니 굳이 책은 읽어 무엇할까, 싶은 마음에 이제서야 그냥 별 생각없이 들춰봤더니, 하, 책을 읽어보지 않고 흘려보낸 세월이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는 모습을 보는 베드로가 묻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청빈하고 순종하고 정결했던 초기 기독교를 충분히 공감하며 읽었던 한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5. 제임스 M. 케인,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이것 역시 예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현대 소설은 뭐 별로겠지, 라는 선입견에 오래 빠져있어서 여태 읽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괜찮은, 아니, 저하고 궁합이 맞는 작품이었습니다. 얼핏보면 로드 무비일 수도 있고, 케루악 류의 비트 문학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 다 놔두고 재미있는 치정 소설로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이 언제나 고상한 건 아니잖아요?




 6. 아서 밀러, <모두가 나의 아들>

 

 가족간의 기다림과, 사회적 정의가 가정에 끼치는 파편에 대한 드라마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희곡을 이리 단순하게 얘기하는 건 참으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희곡을 읽는 재미는 머리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의 무대를 만들어 연출을 해보는 일인데, 이 책은 가족간의 갈등이 다방면에 걸쳐 등장하여 다양한 드라마와, 결국에 가서는 어쩔 수 없는 회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30대 초반에 썼는데도 나보코프 특유의 말장난과 인용, 패러디 등등. 이런 성향이 너무 강해 번역서에서는 제대로 그 맛을 알고나 있기는 할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선배작가는 도스토옙스키. 특히 <죄와 벌>, <악령>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터이고요. 내용은 뭐 말도 되지 않는 범죄행위를 구상하고 실현하는 것이지만 그걸 핑계로 창작을 하는 작가의 지옥불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8. 아르카디/보리스 스트루가츠키, <노변의 피크닉>

 

  마치 중류 정도의 가족이 차를 몰고 캠핑을 가서 때려먹고 놀다가 온 장소처럼, 13년 전에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놀러와 한 판 잘 놀다 쓰레기를 남기고 떠난 것을 전제로 합니다. 미개한 지구인들은 외계 생명체가 흘리고 간 것들이 어떤 영향을 주고, 무슨 기능을 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것들을 엄정하게 관리하는 가운데 도굴을 직업으로 하는 집단도 생긴답니다. 아주 재미난 착상으로 펼치는 상상력의 개가. 역시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짓궂은 솜씨입니다.




 9. 카를로스 푸엔테스, <미국은 섹스를 한다>

  

  지금 절판이며, 원래 제목은 <다이아나>입니다. 한글 제목을 참 더럽게 지어놓아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입니다. 무대는 1969년에서 1970년으로 넘어가는 12월 31일 밤. 미국은 마틴 루터 킹, 케네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말콤 X를 잡아먹고 거친 오른쪽 파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며 베트남에선 유사이래 최초의 패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미국에서 온 달의 여신 다이아나와 연애를 벌이는 푸엔테스. 제목이 후져서 그렇지 가히 푸엔테스 최고의 작품입니다.




 10.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오늘 소개하는 작품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수작. 아니, 명작의 반열에 까지 올려놓아도 별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거의 완벽하게 건조한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3부작. 3부 전체를 한 권으로 새로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일란성 쌍둥이일 수도 있고, 분열된 자아를 보는 한 인간일 수도 있는 형제 루카스와 칼루스. 독자들은 1부 첫 장을 넘길 때 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을 멈출 수 없지만, 하도 재미 있어서 그런 건 하나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근데 재미만? 아닙니다. 명작의 반열에 올릴 정도라니까요.




 11. 에두아르도 멘도사, <구르브 연락 없다>

 

  이것도 외계 생명체 이야깁니다. 멘도사 책 가운데 처음으로 범죄소설이 아니군요. 외계인이 UFO를 타고 지구에 상륙해 모습을 지구인과 똑같이 바꾸고 이름을 구르브라고 정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도무지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화자 '나'는 키 170cm, 두개골 크기 57cm, 눈알 두개에다가 꼬리 없는 여자로 변신하여 구르브를 찾아 나서서, 온갖 난처한 사태를 만나는 얘기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멘도사 작품의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새삼스레 뭔 깊은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만들어준다는 것이지요. 항상 무거운 책만 읽으면 사람, 겉 늙습니다.




 12. 마이클 온다치, <잉글리시 페이션트>

 

 저는 이 책에서 가장 깊은 관심으로 읽은 장면이, 영국인의 사랑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 출신의 공병 폭발물 처리반으로 등장하는 시크교도 출신 공병 중위입니다. 왜 유색인종인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렸는가 하는 항의의 표현으로 탈영을 해버리는 장면입니다. 그는 단언하지요. 백인 국가에는 그런 무시무시한 폭탄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번역한 한글 문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13. 필립 로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대박입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가 횡재한 느낌입니다. 가히 로스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날 로스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화자의 청소년 시절에 멘토로 삼은 공산주의자의 일생을, 화자와 그 공산주의자의 형이며 화자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기도 했던 90세 은사와 지난 날을 회고하는 장면입니다. 1976년대 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장악했던 우파에 대한 비판과 로스의 책답게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도 가미된 수작입니다.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미국은 섹스를 한다>와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좀 더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 책이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14.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짧은 소설입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제가 지난 날을 회상합니다. 그와 그를 둘러싼 칠레 지식인들의 허위에 찬 가식을 적나라하게 들려줍니다. 볼라뇨가 하는 말이 전부 반어법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장기가 훼손당하고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고문대 바로 위의 볼룸에는 술과 여자가 넘치는 파티가 벌어지며, 대통령 궁이 군대에 의하여 폭격을 당한 다음날 아침, 세상이 참 조용하구나, 평화로워, 라고 읊는 사람들의 초상. 볼라뇨, 처음엔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읽어볼수록 점점 끌리는 매력을 지닌 작가입니다.




 15.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천국은 다른 곳에>

 

  이것 역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책입니다. 그러나 품절이라 중고책방을 뒤져야 하지만 충분히 그 정도의 노고를 바쳐 마땅합니다. 미친 네덜란드 환쟁이 고흐의 아뜰리에를 떠나 타히티에 정착한 고갱. 매독으로 종양이 퍼져 다리를 절뚝이고 나중엔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인생의 마지막으로 불태우는 예술혼, 그리고 고갱의 외할머니이자 맹렬 사회주의자이며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의 말년을 생생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데 품절이라 아깝습니다.




 16.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

 

 파리의 고급 아파트에서 한 지붕을 이고 사는 두 천재 여성의 만남. 한 명은 못생긴 쉰네 살의 수위, 또 한 명은 일찌감치 인생은 투명한 어항 속의 금붕어 이상이 아님을 알아채 오는 6월, 십삼 세가 되는 생일날 자살을 거행하기로 결심한 열두 살 소녀. 이들 속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돈 많은 은퇴한 일본 남성. 가난하고 못난 여성이 과하게 똑똑한 것은 사회생활 하는데 방해만 줄 뿐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수위의 은둔을 알아챈 소녀와 남성이 서로 맺는 따뜻한 연대가 어떻게 될지는 직접 확인을 하셔도 좋을 겁니다.




 17. 존 맥그리거, <개들조차도>

 

  읽기 거북할 수 있습니다.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된 시체를 집 밖으로 내오고, 시체 공시소에 저장하고, 꺼내 부검하고, 장례를 치루는 것까지 상세하게 묘사해놓았습니다. 친지와 가족이라고는 마약 중독자들 뿐이고, 결코 존엄하지 않은 시신만을 남긴 인물은 지독한 알콜 중독으로 자연사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루저들이 만들어내는 인생도 존중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의 삶도 전혀 의미가 없는 삶은 아니니까요.




 18. 이병률, <찬란>

 

 개인의 독백이나 과도한 물기 또는 남발하는 은유가 판을 치는 시집들 가운데 이런 시집을 하나 고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시로 말하자면 최고의 미덕은 시인이 뭘 노래하는지 독자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금씩 궁상맞고, 쓸쓸하고, 마음이 저린 이병률의 시들을 읽으며 참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완전 아마추어, 잘 봐줘도 딜레탕트에 불과한 한 독자가 두달 여에 걸쳐 읽은 책 가운데 좋은 느낌으로 읽은 것들을 추려본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자면, 혹시 이 감상문을 읽는 분들의 의견과 달리하는 것들을 발견하신다 해도 그냥 평범한 독자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해하시어 심하게 까탈을 잡지는 말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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