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브루클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저자, 민지현 역자 / 미래지향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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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맥브라이드. 1957년생 작가, 작곡가 겸 색소폰 연주자. 흑인(유색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유대인. 아빠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고, 엄마가 유대계 폴란드 이민의 따님. 맥브라이가 쓴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뉴욕 타임스가 뽑은 21세기의 1/4세기, 그러니까 2001년부터 2025년까지 대표작(책) 100권으로 뽑는 바람에 이름도 처음 들은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하늘 땅…>이 뭐 그리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서가에서 이이의 이름이 눈에 띄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른팔을 뻗었다. 웃겼어. 책이 500페이지. 이렇게 딱 떨어지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 참.

  독후감 시작하기 전에 미리 김을 좀 빼야겠다.


  매우 재미있다. 뉴욕 브루클린 유색인 지구 커즈웨이 빈민주택 단지. 파이브엔즈 교회가 있고 잡초만 넘실거리는 공휴지 건너 이탈리아 패밀리의 일원인 엘레판테 가족의 컨테이너 사무실. 그 너머 자유의 여신이 보이는 동네. 때는 1969년. 바야흐로 전통적인 이탈리아 마피아에 의한 밀수, 도박, 건축하청 같은 종목은 시대 저편으로 흘러가고 빈 자리를 급속하게 헤로인 같은 마약이 잠식하고 있던 시기. 약의 공급은 여전히 백인이 차지하고 유색인은 기껏해야 딜러밖에 하지 못하던 시절. 약이 비싸지는 않지만 그것도 살 돈이 없어 돈을 구하기 위하여 아무 한테나 폭력을 동반한 강도행위를 하기 시작했던 시기. 탁 보면 대단히 우울한 풍경이 그러지는데, 천만의 말씀, 이미 <하늘 땅…>에서 경험했다시피 작가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될 수 있는 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 작품에 유머와 말장난을 섞어야 한다는 강박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쨌느냐 하면, 소설을 읽는다기 보다 차라리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하니까 책의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제한속도를 훌쩍 넘어 팍팍 읽힌다. 쉴 새 없이 키득거리면서. 정말 웃긴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읽기 민망할 수준이다. 등장인물 역시 마약과 마약 조직에 의한 폭력에 시달리고, 커즈웨이 공동체 흑인들도 하이틴 시기만 되면 각종 범죄로 인해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는 걸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곳임에도 이들은 한결같이 서로를 보호하고, 밝고, 사소한 다툼 속에서 질투 날만큼 질긴 애정으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게 다 작가의 현란한 입심 때문에 그렇게 읽히는 건데, 내가 살아보니까 인정이란 것도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라 당장 내 배가 고픈데 과연 이 유색인들처럼 살 수 있을까, 이걸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즉, 맥브라이드가 과하게 대중 코드로 작품을 쓴 거 같다는 말이다. 그게 오히려 작품을 실감나지 않게 한다. 뭐든지 너무 과하면 안 좋은 건데, 이 작품이 딱 그렇다. 물론 내 허접한 수준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너무 김을 뺐나? 말이 그렇지 무지 재미있다. 1/4세기 동안 1백대 작품이라는 <하늘 땅…>보다 더 재미있으니 읽기를 머뭇거리지 마시라.

  오래 전, 전쟁이 끝난 후인 1940년대. 커즈웨이 주택단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하역일을 하려고 몰려든 이민자들을 위하여 지은 거였다. 이탈리아 사람들 말고도 아일랜드, 폴란드,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사람들도 빼곡하게 들어왔다가 어느새 이런 힘을 쓰는 일은 남쪽에서 소작을 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치고 올라온 유색인종들이 대신하기 시작했고, 일종의 터줏대감이라고 생각했던 이탈리아 이민자들도 커즈웨이에서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때도 커즈에 인접한 부두는 귀도 엘레판테가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근데 아뿔싸, 이 귀도는 뇌졸중 후유증에 시달렸다. 범죄에 연루된 건 맞지만 남의 범죄사실까지 덮어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짜 행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12년 형을 받고 복역중에 뇌졸중이 발병, (이런 게 있다면 하는 말씀이지만) 의병석방 되었어도 아픈 몸을 끌고 여전히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귀도 엘레판테가 이탈리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패밀리의 최상단인 시칠리아-나폴리 라인이 아니고 북서부 제노아 출신이라 항상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게 쉽게 되는 거야? 천만의 말씀. 원래 사람 생겨 먹기가 진중한 성격이고, 말을 하기 보다 듣는 쪽이었으며, 남을 신뢰하는 사람만 신뢰하고, 약속을 하면 지키는, 쉬운 얘기로 의리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40년대 말에 뉴욕 경찰이 누구로부터 제보를 받았는지 엘레판테의 컨테이너 사무실을 급습했다. 하지만 곳곳에 귀도의 정보원이 있어서 미리 경찰의 습격을 알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평소 같으면 접안을 했거나 정박한 배로부터 밀수품을 하역할 시간이었지만 이날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때 신참이었던 청렴한 아일랜드 출신 경찰 포트도 출동하였는데, 현장이 비어 철수 명령을 받고 복귀하려다 숨어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쫓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잡았을 무렵 그림자가 갑자기 뒤로 돌더니 권총을 겨누었다. 이제 포트는 죽은 목숨이지? 그런데 포트가 20여 년이 지나 중늙은이가 되면 <어메이징 브루클린>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할 예정이라서, 바로 죽음 직전에 커다란 트럭이 냅다 시속 40마일로 달려오더니 그림자를 깔아버렸던 거다. 현장에서 즉사.

  이렇게 포트 경찰을 살려준 인물이 누구냐 하면 귀도 엘레판테.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톰 엘레판테의 아버지.


  하지만 귀도 역시 경찰을 만났으니 얼른 도망가야 할 터. 앞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교도소에서 나오기 전에 벌써 뇌졸중이 발병한 상태. 한쪽 다리와 팔이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형트럭의 운전대에서 뛰어내리다 한쪽 팔이 아마도 크게 삐거나 부러진 거 같았다. 이때가 새벽 세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에 떨어진 귀도.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마침 백인 집에 하녀 비슷한 도우미로 일하던, 폴이라는 남자 이름을 쓰는 아프리카계 여성이 그날 집주인 집에서 크게 파티를 벌이는 바람에 늦게 걸어서 퇴근하던 차에 귀도를 발견했던 것. 귀도가 폴 자매, 왜 ‘자매’냐 하면 남편이 목사라서 하느님을 믿는 남자는 무조건 형제, 여자는 무조건 자매인데, 하여간 운전 면허증도 없는 폴 자매에게 자기 대신 트럭을 운전해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청을 했다. 폴 자매는 당연히 남의 험한 일에 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당시엔 정말로 거금이었던 사례금 백달러도 거절했지만, 저 밤하늘 구름 위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손바닥 안에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부축했고, 그의 옆에 앉아 기어는 귀도가 넣고 페달은 폴 자매가 밟으며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러니 의리의 사나이 귀도 엘레판테가 얼마나 폴 자매가 고마웠겠어? 사례비로 주겠다는 백달러도 끝까지 받지 않았으니 이 여성도 남을 신뢰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자신도 폴 자매를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래서, 대신, 폴의 남편이자 목사가 교회 터를 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땅을 거의 거저 수준으로 팔고, 교회 건물도 무료 비슷하게 지어주었던 거다. 그것 참, 깡패 두목이긴 하지만 정말 의리의 사나이일세.

  그런데 귀도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알게 된 낭만적 아일랜드 범죄자가 있었다. 이 아일랜드 남자 거버너도 남을 신뢰하는 자라서 귀도 역시 신뢰했다는 걸 거버너도 알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 수천년 전에 조각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관해달라고 청했다. 나중에 보관료는 따로 계산하자며. 짧게 말하자. 그리하여 귀도 엘레판테는 교회를 건설하면서 폴 자매에게 이 보물을 숨긴 곳을 알려주는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말하자면, 이후 20년이 지난 1969년 현재가치로 1,500만 달러를 받고 유럽의 수집가에게 팔 수 있는 그야말로 국가 보물급 유물이었던 것.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귀도 엘레판테는 벌써 죽고, 이제 톰 엘레판테 역시 부두 일에 싫증을 느낄 무렵, 다 늙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버너가 귀도의 아들을 찾아와, 네 아빠가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잘 생각해보라 했거든. 근데 마흔살이 넘어도 모태 솔로였던 톰 눈에는 보물과 동시에 거버너의 나이든 딸 멜리사가 눈에 팍 꽃혀버렸다는 거 아냐.


  여태 말한 것들, <어메이징 브루클린>의 주요 이야기라고 하기 힘들다. 근데 왜 헛심 빠지게 이리 길게 썼느냐 하면, 주인공인 스포츠코트, 본명 쿠피 램킨의 길고 긴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귀도의 아들 톰 엘레판테와 “내가 너를 손바닥 안에 보호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 좋은 우리가 이해하자. 제임스 맥브라이드가 목사의 아들이잖아. 그러니까 초장에 스포츠코트가 1969년 9월의 흐린 오후에 그의 야구 제자이자 현 마약딜러인 19세 먹은 딤즈 클레멘스의 얼굴을 향해 구식 38구경 콜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이야기는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건 다른 이들이 쓴 독후감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까. 재미있겠지?

  그래서 읽을래,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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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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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 앞 페이지에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걸 먼저 읽어보자.


  “이 책은 불면을 위한 책이면서 또한 여행의 책이다. 불면은 이 책을 쓴 사람의 것이고, 여행은 여행한 사람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행한 장소들을 나도 가본 적이 있기에, 이런저런 장소들을 간단하게 안내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지형 일람표 같은 것이 현실이 소유하는 힘과 합쳐져 ‘그림자’를 찾아나서는 이 ‘야상곡’에 어느 정도 빛을 비춰줄 수도 있다는 희망에서, 얼핏 그런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여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젠가 길잡이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측에서 여행지의 일람표를 만들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불면을 위한 책.” 이건 책을 쓴 안토니오 타부키의 것이다. “여행을 위한 책.” 이건 작품 속 인도에서 사라진 한 시절의 절친 사비에르 자나다 핀투를 찾아 인도 뭄바이, 옛 이름 봄베이에 도착한 화자 ‘나’ 별명 ‘호스’의 것이지만, 작가도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가본 적이 있다니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호스’는 나이팅게일의 포르투갈 말 “호시뇰”의 발음 앞 부분에서 가져온 별명이다. 서양인에게 이름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는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하자. 그리하여 타부키 자신이 호스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호스’는 인도에서 호스가 갔던 곳을 가본 적 있는 모든 세상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즉 호스는 타부키도 될 수 있고, 심지어 호스가 찾아 나선, 지금도 절친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지난 시절에 가장 친했던 친구 사비에르도 될 수 있다. 더불어, 유럽이나 아메리카 사람으로 인도의 곳곳을 다녀본 미스터 나이팅게일일 수도 있고. 문제는 화자 ‘나’ 호스가 갔던 곳을 가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로 이 “여행을 위한 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서양) 사람 가운데 이 책의 열두 장章의 무대가 되는 열두 장소 모두 가본 사람은 픽션의 등장인물을 포함해 호스와 안토니오 타부키와 사비에르 자나다 핀투를 뺀다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으로 국한시키는 이유는 호스, 호시뇰, 나이팅게일, 타부키, 사비에르라는 이름 때문이다.


  화자 ‘나’는 처음부터 잠이 쏟아진다.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인도 봄베이. 지금은 뭄바이라고 불리는 대도시이다. ‘나’ 그러니까 호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봄베이의 수클라지 거리에 있는 카주라호 호텔과 그 인근의 어린 매춘부 ‘비말라 사르’로부터. 비말라 사르가 사비에르와 친하게 지냈는데, 사비에르가 병에 결려 이상하게 변했다고. 호스의 이름과 주소는 사비에르의 수첩에 적혀 있었고, 그가 가끔 제일 친한 친구로 호스 이야기를 해 편지를 보냈다는 거였다.

  호스의 직업은 타부키와 마찬가지로 소설가. 전작 <레퀴엠>에서도 스스로 밝혔듯이 ‘소설가, 혹은 작가’는 그냥 직업일 뿐이고 태생적으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사람 호스는 지금 살고 있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젊은 시절의 친구 사비에르를 구출하기 위하여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봄베이로 날아올 수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피사가 아니라 리스본에서 사는 이유 역시 <레퀴엠>에 나온다. 그러니 암만해도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레퀴엠>을 먼저 읽는 편이 좋을 듯싶다.


  봄베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호스.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밝힌다. “수클라지 거리 카주라호 호텔로 갑시다.” 이렇게 말했겠지. 터번을 쓰고 흰 리본으로 묶은 짧은 말총머리를 한 걸 보니 힌두교 시크교도인 걸로 보이는 운전수는 복잡한 공항 근방 도심에서 무지막지한 난폭운전을 하더니 정작 길이 말끔하게 닦인 해변도로에 접어들어서는 여유롭게 바다 구경도 해가며 이런 저런 말을 나누려 한다. 호스가 항의한다. 가지고 있는 안내책자에 의하면 해안도로가 나타날 이유가 없다. 운전수가 말한다.

  “카주라호 호텔은 아주 지저분한 동네에 있습니다. 점잖은 분께 어울리는 숙소로 모시고 있는 중입니다.”

  열 받은 호스는 자동차만 쌩쌩 달리는 해안도로에서 그냥 내려달라고 해, 정말 내려버린다. 마침 해변에서 무슨 축제를 하는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부랑자, 잡동사니를 파는 아이, 거지들이 우글우글하다. 늘어선 인력거도 마찬가지. 그래서 모터가 달린 인력거를 타고 도착한 카주라호 호텔 인근 케이지 지구地區. 호스는 이곳을 유명 작가의 사진에서 본 적 있다. 그 덕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케이지 지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다.

  사진에서 보고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고? 사진은 한 피사체를 장방형 프레임 안에 가둬둔 것이다. 딱 한 장면. 시각에 호소할 뿐. 그것도 이 장방형 프레임에서 단 1밀리미터 벗어나 “있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게다가 피사체에 들어 있다고 해도 피사체의 질감과 냄새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한다. 호스도 마찬가지였다. 인력거에서 내리기도 전에 닥쳐오는 너무도 지독한 냄새. 너무나 많은 냄새.

  냄새? 냄새를 거론하는 건 위험하다. 냄새를 나게 하는 당사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송강호가 이선균을 죽일 수도 있고, 그 장면이 타당하다고 관객이 동감하며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감상할 수 있는 거다. 맹인 알 파치노가 가브리엘 앤워와 탱고를 추는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이지 <여인의 냄새>가 아니잖아. 당신은 함부로 타인의 냄새를 거론하지 말라. 그러나 호스, 혹은 안토니오 타부키, 아니면 미스터 나이팅게일은 과감하게 냄새를 거론한다. 그것도 “너무 지독하다”고. 카주라호 호텔이 있는 케이지 지구가 어떤 곳인지 이것보다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어서.


  케이지 지구의 몇 안 되는 벽돌 건물인 호텔에 들어가니 ‘어두침침한 방’이라 쓴 카운터가 있고, 카운터 뒤에 그리 늙지 않은 여성이 서 있다. 방의 키를 주더니 호스에게 말한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는 3백루피, 열다섯 위로는 55루피예요.”

  호스는 비말라 사르를 데려다 달라고 하지만 이제 그 아이는 여기서 일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20달러 지폐 두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계단으로 향했다. 동네가 아무래도 너무 험한 거 같고, 자기가 돈 건네는 모습을 현관 근처 소파에 앉은 두 명의 나팔바지 청년이 본 것 같아 한 마디를 남긴다.

  “내 거처는 대사관에다 알려 두었습니다.”

  여덟 시간의 비행. 공항에서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세 시간. 잠이 쏟아지는 호스. 비말라 사르가 왔다. 그 아이가 전해준 말에 따르면, 자기는 누군지 모르는 고아 지방 사람들하고 봄베이에 와서 장사를 했는데 무슨 장사인지도 모르겠다. 마드라스에서 온 편지에만 조금 관심이 있어서 몇 시간 동안이나 답장을 쓰고는 했다. 아마도 연구 단체였던 거 같은데 자세히 모르긴 해도 신지학神智學협회로 보낸 것이지 싶다.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 씀씀이가 좋았지만 원래 팔자가 사나웠던 모양이다. 수많은 글을 썼으나 어느 날 이 호텔의 구리 그릇에 넣고 다 태워버렸다. 병에 걸렸거든요.

  비말리 사르가 해준 말에 이 책의 다음 행선지가 전부 나왔다. 병에 걸렸다니까 봄베이의 브리치캔디 병원에 가보아야 하고, 후진 카주라호 호텔에서 묶었으니 다음날은 최고급인 타지마할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자야겠으며, 마드라스로 가는 기차역 숙소와 마드라스의 호텔, 신지학협회, 그리고 마지막 행선지 고아.

  성姓이 ‘자나다 핀투’인 사비에르는 조상을 거슬러 오르면 먼 인도 핏줄도 하나 있는데, 이 조상이 인도의 고아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호스는 인도의 관청을 다니며 성姓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려 하지만, 이곳은 봄베이. 유럽식 분류법은 오만한 사치에 불과하니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만 듣는다. 그러면 고아에 가 보아야지.

  그런데 고아에 가면 사비에르에 관한, 아니면 적어도 사비에르의 한 조각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에 관한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까? 저 장방형 프레임 밖의 또다른 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겨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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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4-02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부키 책들은 꽤 좋더라구요. 특히 문고판 이 시리즈는 전부 컬렉션 했습니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와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를 읽고 나서 타부키 책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인문서가에 꽂힌 시리즈 중에서 <플라톤의 위염>과 같이 약간 별루인 책도 있긴 합니다만 평균적으로 매우 좋더군요. 그래서 컬렉션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작가중 한명입니다..ㅎㅎ

뽈님의 서재에서 타부키 독후감을 보니 매우 기쁘네요..^^

Falstaff 2026-04-02 15:26   좋아요 0 | URL
옙. 저도 타부키 책은 아직 한 권도 실망해본 적 없습니다.
아쉬운 건 이제 동네 도서관에 안 읽은 타부키가 없다는 거.... ㅎㅎㅎ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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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첫 독후감 <후리>를 쓴 작가 카멜 다우드. 그가 쓴 첫번째 장편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이 4월의 첫 독후감이 된다.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하나? 2015년에 공쿠르상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후리>로 2024년 공쿠르상을 받았으니 10년 전부터 싹수가 보였던 셈이라고 할까?

  사람이 참 웃긴 것이, 전에는 아무리 개가실을 돌아다녀 봐도, 바로 눈 높이에 이 책이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카뮈의 <이방인>을 다른 시각으로 본 작품이겠거니, 그냥 그렇게 치부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 딱 보니까 책을 쓴 이가 카멜 다우드, 바로 <후리>의 작가였던 거다. <후리>를 재미나게 읽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그러면서 속으로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들하고 비슷한 내용이겠거니.

  근데 문제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저 까마득한 옛 일이라서. 거의 반세기 전 고등학교 다닐 때 읽고 이후에 다시 읽어본 적 없으니 제대로 연결을 하기 어려울 것. 게다가 <이방인>과 나 사이에는 시절이 끼어 있다. 백기완 선생의 일갈. 식민국인 프랑스 청년이 아무 이유 없이 식민지 국민인 알제리 청년을 쏴 죽인 이야기에 왜 열광하느냐, 어찌 감동할 수 있느냐는 민족주의적 꾸짖음이 시절의 경종처럼 두개골 공간을 난타했다. 에세이집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에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나 역시 전혀 익지 않고 피만 끓을 때라, 그간 <이방인>과 뫼르소에 경도하던 청년으로 이게 대단히 부끄러웠다는 말이지. 그땐 그랬다. 오직 리얼리즘만 거리를 휩쓸고 모더니즘 작품을 읽으려면 집구석에 박혀 읽고는, 읽었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염병할 시절.

  핑계가 길다. 긴 핑계는 변명이다. 쉽게 얘기해, <뫼르소, 살인 사건>을 똑 부러지게 읽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다는 말이다.


  첫 문장부터 죽여준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카뮈, <이방인>의 가장 유명한 우리말 번역은 아마도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나온 김화영 번역일 듯한데, 그 책의 첫 문장이 이렇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에 진짜 열광하는 독자는 이 첫 문장이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른 지 그 이야기만 해도 밥도 안 먹고 2박 3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별로 관심 없다. 근데 카멜 다우드의 첫 문장은 확실히 죽여준다. “오늘”, 한 박자 쉬고, “엄마는 살아 있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지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걸세.”

  초장부터 화끈하게 알려드린다. 이 작품은 일흔살이 넘은 알제리의 늙은 남자 하룬이 카뮈 또는 <이방인>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하룬을 찾아온 프랑스 대학생과 바에 앉아 술잔을 홀짝이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2인칭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스 대학생이 왜 하룬을 찾아왔느냐 하면, 하룬의 형이 1942년 여름에 프랑스 국적의 청년 뫼르소가 해변에서 쏴 죽인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하고 다른 점은, 뫼르소가 살인죄가 아니라, 엄마가 죽었어도 제대로 상도 치루지 않고 애인 마리와 동침을 하고, 술도 마시고,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햇볕을 너무 쫴 일사병인지 열사병인지 하여간 가볍게 어지럼증이 일어,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이 너무 심심해서, 아무 이유 없이 한 “아랍인”을 쏴 죽여 비윤리적이라는 죄목으로, 살인이 아니라 “비윤리”라는 죄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은 되지 않아 몇 년 후에 감방에서 나와 당시의 일을 소설로 썼다. 그런데 책을 읽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앞에서 살인자의 고독에 공감했다면 한껏 멋부린 언사로 위로를 보내”기에 바빴다고 주장한다. 즉 살인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무죄를 얻고 시작했으며, 세계인들조차 그의 살인이 아니라 고독에 공감을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뭐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즉 기막힌 문장이. 문장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니까? 저 어둠의 시절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백기완 선생의 문장처럼. 웃기지? 뫼르소의 문장은 살인을 지워버렸고, 백기완의 문장은 뫼르소를 지워 버렸으니. 그럼 독자는? 그저 책을 읽으며 이쪽으로 흔들, 저쪽으로 흔들, 쇠부랄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뭐 아니면 말고.


  뫼르소가 죽인 건 알제리 청년이 아니라 “아랍인”이었다. 그런 뫼르소더러 유럽인이라고 하면 듣는 프랑스 인종들은 기분 좋겠어?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이슬람의 전통인 누구의 자식인지도 말하지 못했고,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랐다. 그냥 없어졌다. 그저 아랍인 하나가 없어진 일이다.

  1942년의 일로 죽은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다.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 작품 속에서도 기껏해야 두 시간밖에 못 살고 불분명한 장례를 치루고 70년이 넘게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야 했지만, 살인자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 말고 다른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무싸와 하룬. 이 형제를 만든 아버지는 형제가 어렸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들의 이름에 부칭은 없다. 무싸빈OO. 하룬빈OO. 하이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던 무싸가 하루 아침에 죽고, 시신도 찾지 못한 어머니는 무싸를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해서 빈 관을 매장하고 알제를 떴다. 바다와 물은 꼴을 보기 싫어 내륙으로 가 프랑스 지주의 하녀로 일했다. 1962년까지. 독립전쟁에서 알제리가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하녀로 일하던 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 화자 ‘나’ 하룬은 공부를 시작했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라서 형의 흔적을 형 대신 프랑스, 적의 언어로 떠들기 위하여. 국유재산관리국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는 틈틈이 무싸가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조리. 그것을 등에 지거나 땅 속 깊숙이 품고 있는 건 무싸 형제들이지 결코 뫼르소와 그의 동조자일 수 없다는 주장. 하룬은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애도하는 것도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지기 바라는 것이라 하는데, 여기까지 읽으면 이제 다분히 반식민적 희생에 대한 소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룬의 1962년. 프랑스가 패전해 물러갈 때. 알제리의 혁명군 병사들이 임의로 프랑스인 두 명을 살해한 죄목으로 총살당한 일이 있었을 때, 하룬은 프랑스인의 집이었다가 자기 집으로 바뀐 곳에 밤중에 숨어든 프랑스인에게 권총 두 방을 쏴 죽여버린다. 그냥 그가 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자기 등 뒤에서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죽여, 죽여버려,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국에 의하여 체포당한 하룬. 그의 죄목은 당연히 살인이다. 알제리 독립투쟁 기간이었다면 살인은커녕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었으나, 독립하고 이틀 지난 후라서 살인은 그냥 살인이라는 범죄일 뿐이다. 세상은 하룬의 살인을 어떻게 판정할까? 정말 독립 전과 후의 살인은 다른 것일까?

  뫼르소의 살인과 하룬의 살인의 차이. 이것이 결론일 것 같은데, 책은 <후리>처럼 잘 읽히지 않고 쉽지도 않다. 확실한 건 민족주의적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거. 하긴 카멜 다우드가 그럴 인간이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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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4-01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이 쉽지 않군요. 저는 카뮈의 작품은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좀 쉬우면서도 의미있게 쓰는 작가는 없을까요? ㅋㅋ 매일 책을 읽으시고 독후감을 쓰시는 폴님 그저 존경할뿐입니다!

Falstaff 2026-04-01 15:41   좋아요 1 | URL
호, 아닙니다. 읽기 어렵지도 않아요. 걍 파박 읽으면 암토랑도 안혀요.
ㅎㅎㅎ 저야 이제 스스로 뒷방에 물러앉은 신선 아닙니까. 좀 기다려셔요. ㅋㅋㅋ
 
묵동기담 / 스미다 강 대산세계문학총서 140
나가이 가후 지음, 강윤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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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묵동기담.” 나는 제목이 싫어서 그동안 읽기를 미루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세계문학 시리즈인 대산문학총서 140번 작품이었지만. 전쟁 전 일본 작가들이 자주 쓰는 귀신 나오는 ㅆㄴㄹ 소설일 것 같아서. 일본 어느 지역에 묵동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곳 수풀이나 음산한 절 또는 사당 같은 곳에 사는 3백살 넘은 노파나 중 혹은 귀신들이 창궐하는 이야기일까봐 그러니까 ‘묵동’이 문제가 아니라 뒤의 두 글자 ‘기담’이 문제였다. 기담奇譚. 이상하고 야릇한 이야기. 이런 거라면 그저께 읽은 정보라의 <저주 토끼>로 너무 충분했으니 새삼스레 또 읽을 필요가 없잖아? 근데 오직 대산세계문학총서라는 것 때문에 책을 꺼내 눈에 힘을 주고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봤더니 <묵동기담濹東綺譚>이라 쓰여 있더란 것. 기담의 ‘기綺’가 기괴하다 할 때의 기가 아니라, 비단, 문채, 고울 기. 그래서 더 알아봤더니, PC에서 프린트할 때 지원이 되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묵濹 자는 네이버 사전에 뜻이 없고 발음 ‘묵’만 내주는 단어인데, 일본 도쿄를 흐르는 스미다 강변을 노래할 때 자주 쓴 한자란다. 그냥 스미다 강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그럼 됐다. 스미다 강변은 아니고 스미다 강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의 기담, 비단 이야기. 비단으로 지은 옷은 누가 입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지은 예쁜 소설 <비단>에서 치명적으로 어여쁜 일본의 아가씨가 비단옷을 입잖아? 그 젊은 아가씨가 늙은 비단 패밀리 보스의 정식 아내는 아니고. 맞다. 일본의 화류계 아가씨들이 입는다. 그러면 제목 ‘묵동기담’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1879년에 도쿄에서 내무성 엘리트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나가이 가후는 어린 시절 엄마한테 노래와 악기 연주 특히 샤미센에 재미를 붙였다. 위키피디아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데, 하이틴 시절에 병원에 입원해 몇 달을 보낸 후, 훗날 작가가 되는 친구와 함께 홍등가로 본격 진출한 모양이다. 이렇게 사는 바람에 당해년도에는 대학에 갈 수 없어서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갔다가 돌아와 도쿄 외국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작품을 쓴다. 이 정도만 알면 되리라.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청소년이 홍등가를 드나들었으니 이게 공무원 집구석에서 가당한 일일 수가 없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가이는 그 시절의 즐거움이 나이가 들어도 그리웠던지 <묵동기담>에서 쉰여덟 살이 된 주인공 ‘나’ 오에 다다스로 하여금 스미다 강둑이 멀리 보이는 좁은 골목 속의 홍등가 여인을 찾아가게 만들었다.

  작품은 주인공 ‘나’의 일인칭으로 쓰였지만 독후감은 오에 다다스, 3인칭으로 쓰겠다.

  오에는 활동사진을 좋아하지 않아 1897년경 극장 간키칸에서 샌프란시스코 시가지 광경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관동지진이 있었던)1923년 이후에는 영화 말고 극장 간판을 유심히 보면 이미 영화의 스토리를 대강 다 알 거 같아서 간판 구경하는 것에 취미를 붙였는데,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도쿄 시내를 거닐다보니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유곽 진입로였다. 지진 전만 해도 유곽의 아가씨들과 삐끼들이 지나가는 행인의 모자를 빼앗아 손님을 거의 강제로 끌어오는 거친 행동도 했지만 이젠 순사 파출소에서 엄히 단속해 그런 경우는 없다. 그래도 삐끼는 여전하다. 이 동네에 유곽과 관련없는 유일한 곳이 헌책방. 오에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그곳에 들러 오래 묵은 잡지 한 권을 둘러보고 있던 차, 예순 살은 먹어 보이는 사내가 보따리를 하나 가지고 들어오더니 무늬가 자잘하게 들어간 홑겹 옷과 소매와 몸통 부분을 서로 다른 천으로 만든 나가주반(전통 부인복에 사용하는 질기고 고운 비단)을 꺼내 보인다. 자, 기綺, 비단 나왔다. 오에는 별 생각없이 헌잡지 몇 권과 충동적으로 나가주반을 샀다. 통속소설의 표지를 싸면 좋을 것 같아서.

  헌책방에서 나와 길을 걷는데 순사가 오에를 부르더니 파출소로 연행해간다. 불심검문. 군국주의 일본에서 순사의 취조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이를 위해 오에는 지갑 속에 인감증명과 호적초본을 가지고 다닌다. 이 두 개를 확인한 순사가 몇 시간에 걸친 취조를 마치고 방면하는데, 오에가 파출소를 나서며 하는 말이 “애초 헌 옷은 재수없는 물건이야.”


  오에가 순사들한테는 밝히지 않았지만 직업이 작가다. 쉰여덟 살. 메이지 12년 기묘생. <실종>이라고 제목을 붙인 소설을 구상했다. 다 쓰면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 되리라는 약간의 자신감이 든다.

  극이라면 극중극이다. 소설이니까 작중작이라면 되겠다.

  주요인물은 다네다 준페이. 쉰 살 정도. 사립중학교 영어교사. 아내 죽고 3~4년 후에 미쓰코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미쓰코는 정치인의 집에서 안주인의 몸종으로 지내다가 주인에게 속아 아이를 임신했다. 다네다의 친구이기도 한 집사 엔도가 일을 처리하기로 해서, 만일 미쓰코가 아이를 낳는다면 20년간 양육비조로 월 50엔을 줄 것이며,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면 상당한 수준의 지참금까지 주겠노라, 단, 아이는 절대 이 집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홀아비 친구 다네다한테 찾아가 아이 하나 달린 어여쁜 여자하고 결혼만 했다 하면 팔자가 핀다고 꼬드긴다.

  이렇게 혼인을 해 들어온 아들 다메토시에 이어 다네다의 딸 요시코, 아들 다메아키를 키우며 산다. 20년 후, 주인집에서 양육비를 딱 끊어버리자 이때부터 대학과 고등학교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의 학비며 생활비를 대기 위하여 다네다는 야간학교 두세 군데에 더 강의를 맡아야 할 지경이었다.

  다메야키는 운동선수가 되어 나중에 서양으로 나가 살고, 요시코는 배우 중에서 그냥 배우가 아니라 은막의 스타가 된다. 문제는 이렇게 성공하기 전에, 다네다가 피곤을 무릅쓰고 집에 들어가면, 그동안 일본 불교 특정 종파에 들어간 아내는 신도를 모아놓고 집구석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첫째 아이는 울퉁불퉁한 청년들을 모아 집이 들썩들썩하고, 요시코는 쭉쭉빵빵한 아이들을 데려와 날마다 파티를 여는지 도무지 시끄러워 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참다 못한 다네다는 쉰살이 되어 직장에서 퇴직하는 날 퇴직 보너스를 챙겨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잠적해버리고 만다. 전차에서 우연히 전에 자기집에서 하녀 일을 하던 현직 카페 접대원 스미코의 집에서. 처음부터 그런 사이가 되려는 건 아니었는데, 사정을 털어놓고 딱 하루만 신세를 짓자고 했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여기까지 구상했고, 이후 어떻게 이야기의 결말을 지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


  작가 오에는 머리 속으로 별의별 구상을 해가며 초가을 저녁 산책에 나섰다. 근데 난데없이 소낙비가 우다다닥 내리친다. 일본의 초가을은 날씨가 사납다. 태풍도 겁나게 자주 오고, 소나기는 말할 것도 없다. 오에는 그래서 우산 없이 외출하는 법이 없다. 우산을 활짝 펴고 서 있는데, 이때 우산 속으로 불쑥 들어오는 전직 우츠노미아 게이샤 출신의 유녀 오유키. 오에는 시간도 많고, 어렸을 때부터 유녀 다루는 것도 익숙해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유키를 폭포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그이의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 오유키가 사는 곳? 다다미 몇 장짜리 작은 방 두개와 부엌 등이 있는 2층집. 당연히 영업집이다. 유곽.

  오에는 소낙비에 홀딱 젖었다. 미장원에서 방금 나온 오유키를 덜 젖게 하기 위해 우산을 그쪽으로 더 쓰게 했으니 완전 물에 빠진 꼴이었겠지. 오유키가 말한다. 옷을 좀 말려야 하겠으니 벗으시고 다른 걸로 갈아 입으세요. 오에? 당연히 유곽의 예법을 안다. 이 집에 있으면 있는 시간만큼 오유키의 영업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오에는 오유키에게 돈을 건네며, 한 시간 정도로 치면 되겠지요?

  이후 오에는 처음엔 거의 매일 오후가 되면 이 집에 들러 밤이 될 때까지 쉰다. 말 그대로 쉬기만 했는지 쉰다는 핑계로 다른 것도 했는지, 전쟁 전의 소설이라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할 건 다 했다고 봐야겠다.

  나중에는 오유키가, 주인한테 빚 다 갚으면 나를 데리고 살아줘요, 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친해진다. 그러나 선수 오에는 이런 여성들이 진짜로 집안에 들어와 위협에서 벗어나면 갑자기 삶이 자유로워져서, 세상의 게으름뱅이에 나태한 주부가 되는 걸 자주 봐, 애초 그럴 마음은 없다.

  나이도 있고, 소설도 계속 써야겠고, 해서, 오에는 나중엔 3, 4일에 한 번 그러다가 한 주일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점점 멀리하기 시작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처럼.

  오유키. 그저 낡은 비단, 나가주반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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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6-03-31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담이라고 냉큼 집었다가는 낭패였겠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奇談 같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그렇겠죠. 그런데... 가끔 궁금합니다만 지바고도 그렇고 오에도 그렇고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요?

Falstaff 2026-03-31 15:34   좋아요 0 | URL
맞앛요, 요정 님은 기담 좋아하시지요. ㅎㅎㅎ
지바고는 길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 책이라고 읽었고요,
오에.. 오에가 오에 겐자부로라면... 작품의 구성이 벽돌 건물처럼 탄탄한 것이 놀라울 정도라서요. 게다가 사소설 적인 스토리에 일본 근대사, 반핵, 뇌 헤르니아 아들, 뭐 이것저것 다 합친 스토리가 또 괜찮아서요. 근데 제가 뭘 압니까, 그냥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
 
토볼트 이야기 쏜살 문고
로베르트 발저 지음, 최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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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발저는 1910년대에 자신의 도플갱어라고도 볼 수 있는 작중 등장인물 토볼트를 발견했다. 물론 아무나 도플갱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베르트 발저 가족 가운데 아버지는 사업을 실패한 뒤에 우울증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이고, 어머니는 정서적 문제로 장기 치료 후 사망, 남매들 가운데 첫째 카를은 화가, 둘째 에른스트는 정신병으로 갔고, 헤르만은 대학교수, 누이 리사가 학교 교사, 다른 누이 파니가 로베르트에게 권해서 로베르트도 정신병원에 장기입원하고 있다가 추운 날 산책 나갔다가 죽었다. 하필이면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

  그러니까 기질적으로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아버지 사업 실패 후에 부모와 자식들은 그나마 조금의 지원은 받을 수 있었겠지만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야 했는데 유독 로베르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음은 당연히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자기만의 방도 없는 주제에 지금이나 그때나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써 언제 고료를 받을 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료만 바라보며 배를 곯고 있을 수도 없어서 스물일곱 살 먹었을 때 베를린에 가서 정말로 하인양성소에 들어가 하인 일을 배웠고, 진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 시기에 하인으로만 일했던 건 아니다. 출판사 두 군데에서 사무직도 하고, 배우가 되려고 극단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며, 스위스로 돌아가 다른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작품을 쓰는, 당시로는 드물게 월급을 받으며 글을 쓴 작가였다. 울프가 말했듯 문학은 돈 좀 있는 자재들이나 할 수 있는 리그였다는 뜻이다.

  이런 작가들은 자기의 삶 가운데 직업이 중요한 소재가 되겠지. 발저의 경우엔 그리 길게 일 하지 않았지만 상실레지아의 담브라우 성에서 귀족의 하인으로 잠깐 일한 전력이 상당한 문학적 재산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게 독자에게도 영향을 끼쳐, 나도 여지껏 로베르트 발저, 하면 그의 장편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은 하인 말고 여러 (당시 사람으로서는)괜찮은 직장을 다니긴 했지만 견디지 못해서, 아마도 집안 내력인 정신질환의 불규칙적 발현 때문일 수도 있었겠는데 하여간,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여러 경우를 참아내지 못해 회사에 들어갔다가 곧장 때려치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너무 오버해서 읽는 지도 모르겠으나, 발저가 자신의 도플갱어 비슷한 인간 토볼트를 만들어낸 것이 이런 정신적 특이성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걸 괜히 길게 써서 좀 보기 싫게 됐다.


  하여간 《토볼트 이야기》를 보면 1912년에 토볼트를 만난다.

  <낯선 사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일 수도 있고 산문일 수도 있는 픽션 속에서 발저는 고백한다.

  자신은 심각한 태만의 죄를 짓고 있고, 태만의 죄를 짓고 있어서 스스로가 자신한테 맞지 않는 엄청난 악당이란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한테 와 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중이지만 한 사람이 고대하고 고대할수록 기다리는 그 무언가는 결코 오지 않는 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무엇인가를 찾는 듯 보이는 이상한 생면부지의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봐? 그렇다. ‘나’는 열린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남자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를 차갑게 떠나 보내고 말았다. ‘나’는 ‘나’를 올려다보던 그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토볼트’라고. 짧은 산문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이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 물음은 사라지지 않고 뒤에 다시 출현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마땅하겠다. 정말 영영 사라진다면 이런 말을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후 로베르트 발저의 분리된 의식은 ‘나’의 한 조각일 수 있는 악한, 버림받은 여인 혹은 지배자로 변용하여 토볼트와 지문 없는 희곡 형식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당연히 한 사건에 대한 사실적 논의가 아니라 다양한 관념과 관념이 이끄는 정신상 현상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으로 로베르트 발저의 책 세 권을 읽는데, 세 권 가운데 <타너 가의 남매>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고, 나머지 두 권은 어째 아직도 정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로베르트의 진가가 어떻든지 간에, 내 독서 생활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로베르트 발저는 눈에 띄는 책이 있어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작가이다. 이번에도 도서관 책 치고는 거의 새 책이고, 본문도 76페이지에서 끝나지만 무려 다섯 소품이 들어있을 뿐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고 착각해 선택한 거다.

  읽을 때는 뭔가 있는 것 같고, 부르주아의 파티 장면 같은 것도 색다르게 묘사해서 괜찮게 읽었는데, 이제 하루가 지나 독후감을 쓰려니 뭐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어제 앱 ‘북적북적’에다 왜 별점 4를 주었을까? 발저가 조금 과하게 포장되어 있는 작가 같고, 나도 포장 규모에 잠깐 현혹되었는지 모르지. 괜찮아, 괜찮아. 가끔 과대 포장된 사람도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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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3-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도 <타너 가의 남매>가 발저의 대표작이 아닐까 싶어요..
<벤야멘타...>보다도 <타너 가>에 좀 더 발저의 생각이 여러 가지로 집약된 거 같아서요.

Falstaff 2026-03-30 15:26   좋아요 0 | URL
저도 <타너 가..>가 훨씬 좋습니다. 근데 우짰든 로베르트...는 이넘이건 저넘이건 그리 정이 안 가더라고요. ㅋㅋㅋ